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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9.16 지구 온난화는 장기적으로 생물 다양성을 늘린다 1
  2. 2012.09.14 공룡의 진실 ― 항온 동물인가 변온 동물인가?
  3. 2012.09.13 고릴라 유전체 프로젝트: 인간, 침팬지 그리고 고릴라의 진화적 관계
  4. 2012.09.11 DNA, RNA, TNA 그리고 생명의 탄생
  5. 2012.09.06 보노보 원숭이, 창조적으로 도구를 제작하다 2
  6. 2012.09.04 진딧물도 광합성을 할지 모른다?
  7. 2012.09.04 고양이가 자살의 원인이라고? 논문을 왜곡하는 한겨레 과학 기사
  8. 2012.09.03 고대 인류 데니소바인의 정체가 드러나다 5
  9. 2012.08.19 진화의 기본 원리 — Douglas Futuyma의 『Evolution』에서 발췌 및 번역
  10. 2012.08.14 진화란 무엇인가? 1
  11. 2012.06.27 빌헬름 바인베르크 관련 1
  12. 2012.06.26 시조새 논란에 대한 소고(小考) 2
  13. 2012.06.21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연구 (1) —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프로젝트 이전의 상황에 대한 고찰 6
  14. 2012.06.06 네안데르탈인의 출현과 발굴에 관한 간략한 역사 6
  15. 2012.06.03 내 마음대로 정리하기 - 근대 과학과 과학철학
  16. 2012.05.29 헤겔 철학의 'Moment(계기)'에 대한 참고 자료 하나 2
  17. 2012.05.28 <자본> 번역 비교 및 비판 - 제1편 상품과 화폐. 제1장 상품. 제3절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1) 5
  18. 2012.05.24 가치형태, 계기 그리고 Moment
  19. 2012.05.17 <자본> 번역 비교 및 비판 - 제1편 상품과 화폐. 제1장 상품. 제2절 상품에 나타난 노동의 이중성 2
  20. 2012.05.14 <자본> 번역 비교 및 비판 - 제1편 상품과 화폐. 제1장 상품. 제1절 상품의 두 요소 5
  21. 2012.05.10 짓밟힌 연구 윤리: 네이쳐 표지 논문의 사례에서 드러난 어두운 이면(裏面) 45
  22. 2012.05.09 [논문 번역 #1] 인간 프리온 병에 대한 연구 동향 (Update on human prion disease) (4)
  23. 2012.05.08 [논문 번역 #1] 인간 프리온 병에 대한 연구 동향 (Update on human prion disease) (3)
  24. 2012.05.07 [논문 번역 #1] 인간 프리온 병에 대한 연구 동향 (Update on human prion disease) (2)
  25. 2012.05.02 [논문 번역 #1] 인간 프리온 병에 대한 연구 동향 (Update on human prion disease) (1) 1
  26. 2012.04.26 노동절의 기원 그리고 한국의 노동절 역사 2
  27. 2012.04.24 세계적인 석학 그리고 안철수, 그 공허한 판타지에 대하여 4
  28. 2012.01.15 다시 쓰는 창세기?
  29. 2011.12.28 <자본> 번역 비교 및 비판 - '독일어 제4판 서문'에 대한 부분 2
  30. 2011.12.26 <자본> 번역 비교 및 비판 - '영어판 서문'에 대한 부분



적도(赤道)를 기준으로 지구 온도는 극지방으로 올라갈수록 낮아진다. 마찬가지로, 생물 다양성(biodiversity, 生物多樣性)도 이와 비슷하게 위도(latitude, 緯度)가 높아질수록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온도와 생물 다양성 사이에 강한 연관성이 있음을 뜻한다. 즉, 온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일수록 종의 다양성은 증가하고 낮을수록 감소함을 말한다 [1]. 그렇다면 지구 역사를 통틀어 온도와 생물 다양성의 변화는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까?



그림 1. 시간에 따른 지구 온도의 상대적 변화. 그래프 위쪽의 약어(略語)는 각각의 지질학적 시간대를 나타낸다. [고생대] Cm(캄브리아기), O(오르도비스기), S(실루리안기), D(데본기), C(석탄기), P(페름기); [중생대] Tr(트라이아스기), J(쥐라기), K(백악기); [신생대] Pal(팔레오세), Eo(시신세), Ol(점신세), Pliocene(선신세), Pleistocene(홍적세), Holocene(완선세). 고생대 캄브리아기부터 신생대 홍적세 초기까지의 시간은 백만 년 단위로 표시했으며, 신생대 홍적세 중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시간은 천 년 단위로 나타냈다. 고생대와 중생대 사이에 있었던 빙하기(glacial period, 氷河期)는 파란색 박스로 표시되어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지구 온도는 약 5억 4천2백만 년 전 고생대(Paleozoic, 古生代) 캄브리아기(Cambrian)부터 (사실은 그 지구가 형성되고 난 뒤부터 계속) 전체적으로 낮아지다가 약 1만 년 전 신생대(Cenozoic, 新生代) 완신세(Holocene, 完新世)에 접어들면서 일정하게 유지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림 1]. 더불어, 고생대 오르도비스기(Ordovician)와 실루라인기(Silurian) 사이, 고생대 석탄기(Carboniferous)와 페름기(Permian) 사이 그리고 신생대(Cenozoic, 新生代) 점신세(Oligocene, 漸新世) 사이에 매우 광범위한 빙하기(glacial period, 氷河期)가 적어도 크게 세 차례 있었고, 중생대(Mesozoic, 中生代) 쥐라기(Jurassic)와 백악기(Cretaceous) 사이에 빙하기는 아니어도 빙하기에 버금갈 정도로 전반적인 온도의 저하가 있었으며, 신생대 선신세(Pliocene, 鮮新世)와 홍적세(Pleistocene, 洪積世) 사이에도 빙하기와 간빙기 (interglacial period, 間氷期)가 주기적으로 번갈아 나타나는 기후의 격변(激變)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오랜 시간에 걸친 지구 온도의 급격한 저하는 생물 종의 전체적인 감소를 뜻하는 대멸종(mass extinction, 大滅種)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림 2. 지질학적 시간과 위도에 따른 해양 무척추동물의 다양성 추이(推移). 검은색 선은 열대 지역 해양 무척추동물의 생물 다양성(tropics로 표기) 변화를 뜻하며, 회색 선(summed로 표기)은 전(全) 지구적인 생물 다양성의 변화를 나타낸다 [4] [출처: Paleobiology].



하지만 이러한 대멸종의 시기가 있었음에도 생물 다양성, 특히 해양 무척추동물(marine invertebrate, 海洋無脊椎動物)의 생물 다양성은 과거 고생대 캄브리아기부터 신생대 완신세 (Holocene, 完新世)인 현재까지 전체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로 나타나고 있다 [2, 3, 4] [그림 2]. 이것은 생명체 멸종이 거의 배제된 상태에서 새로운 종의 지속적 출현으로 나타난 양상(樣相)이라기보다는, 급격한 환경적 변화로 기존에 존재하던 생물 종의 멸종 비율(extinction rate, 滅種比率)이 높아짐과 동시에 새로운 종의 출현 비율(origination rate, 出現比率)도 동반 상승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3]. 특히, 화석 자료 등에서도 대멸종 이후에 (실제로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어쨌든) 새로운 종의 출현 빈도가 급격히 늘어났음을 뜻하는 증거가 잘 드러난다 [3].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은 해양 무척추동물의 전체적인 생물 다양성은 전반에 걸쳐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열대에서 서식하는 해양 무척추동물의 다양성은 큰 변화가 없다고 나타난다 [그림 2, 검은색 선과 회색 선 비교]. 특히 2008년도에 보고된 지구 온도 변화와 해양 무척추동물의 종 다양성 사이의 연관성을 조사한 논문에서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5].



그림 3. 지질학적 시간대와 온도 변화에 따른 해양 무척추동물의 생물 다양성의 변화. 검은색 원과 점선은 온도의 변화를 뜻하며, 흰색 원과 실선은 종 다양성을 의미하고, 이중 원은 대멸종이 있었던 시기를 나타낸다. 시간 단위는 백만 년이다 [5] [출처: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2008년에 「화석 기록에 나타난 전 세계적인 온도와 생물 다양성 그리고 종 출현과 멸종 사이의 장기적 연관성(A long-term association between global temperature and biodiversity, origination and extinction in the fossil record)」이란 제목으로 피터 메이휴(Peter J. Mayhew) 박사 연구팀이 『왕립 학회 회보(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온도 변화와 생물 다양성의 크기에 역(逆)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 즉, 온도(특히 바닷물 온도)가 높았던 시기에는 종의 수가 상대적으로 낮게 유지되는 반면에 온도가 낮아지면 종의 수가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5] [그림 3]. 더불어, 온도가 높은 시기에는 종의 출현 비율과 멸종 비율이 동시에 높게 나타나는데 [5], 이러한 현상은 빙하기처럼 온도가 급감(急減)하는 지질학적 시기에 많은 멸종이 있었다는 지구 진화 역사의 전반적 경향성과 생물 다양성은 온도가 높은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난다는 일반적인 현상모순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온도 변화가 생물 다양성에 영향을 주는 유일한 요소라고 할 수 있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온도 변화가 생물 다양성에 중요하지만, 그러한 결론을 과학적으로 이끌어내는 과정에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생물 다양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로 생물학적 그리고 비생물학적 변수를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해양 무척추동물의 생물 다양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생물학적 변수로는 종 사이의 생존 경쟁(competition, 競爭)과 포식자-피포식자 사이의 상대적인 개체 수 변화를 들 수 있으며, 비생물학적 변수로는 기후 변화와 더불어 해수면 높이(sea level, 海水面)의 변화, 해수로 유입되는 영양분의 양과 이로 인한 외부 화학 조성의 변화, 지각 변동, 화산 활동, 그리고 운석의 충돌 등을 들 수 있다 [1]. 따라서 이런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채로 단순히 지질학적 시간에 따른 온도 변화만으로 생물 다양성의 변화 추이를 파악하려는 것은 실제 온도 변화가 줄 수 있는 어떤 어떤 영향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


온도와 생물 다양성 사이에 음의 상관관계(negative correlation, 陰-相關關係)가 있음을 주장한 2008년도 메이휴 박사 연구팀의 결과는 “전 지역에 걸쳐 발견된 해양 무척추동물이 시간에 따른 생물 다양성 변동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도출되었다 [1, 5]. 하지만 화석은 기본적으로 퇴적층(堆積層)에서 형성되므로, 퇴적암(堆積岩)이 많이 분포하는 지역일수록 화석 발견 가능성은 타 지역보다 매우 높으며, 결과적으로 지역에 따른 화석 분포에 과도한 편향이 나타날 수 있다 [1]. 다시 말해, 어떤 지역의 생물 다양성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화석 형성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면, 화석을 중심으로 한 생물 다양성 평가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적도를 중심으로 위도가 커질수록 온도가 높아짐을 상기(想起)한다면 각 지역에서 발굴된 화석에서 드러나는 동물상(fauna, 動物相)은 곧 온도에 다른 생물 다양성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특정 지역에 과도하게 많은 화석이 발굴된다면 실제와는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가 있다.


2012년에 「생물 다양성은 오랜 시간 동안 온도를 뒤쫓는다(Biodiversity tracks temperature over time)」이란 제목으로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발표한 메이휴 박사 연구팀의 분석 결과는 자신들이 2008년도에 내놓았던 결론을 뒤집고 있다 [1]. 특히, 이번 연구는 과거의 불완전한 분석법과 편향적인 자료 대신에 좀 더 개선된 분석법과 자료를 이용해 온도 변화의 해양 무척추동물 생물 다양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파악했는데, 결론은 매우 흥미로웠다.



그림 4. 온도 변화와 해양 무척추동물 다양성 사이의 상관관계. 검은색 원과 실선은 온도 변화를 뜻하고, 흰색 원과 점선은 생물 다양성을 나타내며, 회색 원은 다섯 번의 대멸종 사건이 있었던 시기를 가리킨다 [1] [출처: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2008년도 분석 결과인 그림 3과 2012년도 분석 결과인 그림 3의 “온도 변화에 따른 생물 다양성의 변화 추이”를 비교해보자. 2008년도 분석 결과가 이들 사이에 음의 상관관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면 [5] [그림 3], 2012년도 분석 결과에서는 온도와 해양 무척추동물 생물 다양성 사이에 확실한 양의 상관관계(positive correlation, 陽-相關關係)가 나타난다 [1] [그림 4]. 이것은 온도가 높은 지역에서 생물 다양성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다는 통설(通說)과 분명히 일치한다. 더불어 이들 연구팀은 온도가 낮아지면 곧바로 종의 멸종 비율이 높아지고 뒤이어 새로운 종의 출현 비율이 높아지는 양상을 확인했다 [1].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기온(氣溫)과 수온(水溫) 상승으로 대표되는 전 세계적인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 地球溫暖化) 현상과 같은 지구 온도의 점차적인 상승은 단기적으로 생물 다양성을 현저히 낮출 수 있다. 적어도, 해양 무척추동물의 생물 다양성은 그런 식의 경향성을 보이며, 이를 확대 해석하면 대부분의 생명체에서도 마찬가지 경향성이 드러난다고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도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더불어) 인간에 의해 가속화되는 지구 온난화 현상은 해마다 많은 수의 생물 종을 멸종의 길로 이끌고 있으며, 그 결과 지구에 존재하는 다세포 생물 종은 과거와 비교했을 때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요약하면, 지구 온도의 상승은 현존하는 종의 멸종 비율을 가속한다.


그러나 장기적인 측면에서 지구 온도의 상승은 종의 멸종 비율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의 출현 빈도 또한 높일 수 있다. 적어도 메이휴 박사 연구팀의 2012년도 연구 결과에서 해양 무척추동물의 생물 다양성 변화는 그런 식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은 다른 종류의 생물 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지구 역사에서도 잘 드러나 있듯이 지구 온도의 상승은 궁극적으로 생물 종의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고, 결국 이러한 과정이 대진화(macroevolution, 大進化)라고 일컫는 장시간에 걸친 생물학적 도약을 딛게 하는 원동력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지금까지 온도 변화와 생물 종 다양성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 논문에 대해 간략히 살펴봤다.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전 지구적 온난화 현상은 분명히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연구를 통해 주목해야 할 점은 지구 온난화가 지구 역사의 한 축인 생명 진화의 과정에서 생명의 역사에 종지부(終止符)를 찍을 정도로 파괴적이지는 않으며 오늘날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생물 종 다양성의 감소도 지구 역사에서 늘 있었던 과정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연구에서 제시하고 있는 주장과는 별개로 우리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 파괴는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지구 상에 살고 있는 다른 생명체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행위가 과거 수많은 생명체가 겪어야만 했던 절멸(絶滅)의 길로 우리 자신을 인도할 수 있음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참고 문헌
[1] Mayhew PJ, et al. 2012. Biodiversity tracks temperature over time. Proc Natl Acad Sci USA. 10.1073/pnas.1200844109. [링크] : 현재 이 논문은 정식으로 출판되기 전에 온라인으로 먼저 공개되었다.
[2] Alroy J, et al. 2008. Phanerozoic trends in the global diversity of marine invertebrates. Science. 321:97–100. [링크]
[3] Alroy J. 2008. Dynamics of origination and extinction in the marine fossil record. Proc Natl Acad Sci USA. 105: 11536–11542. [링크]
[4] Alroy J. 2010. Geographical, environmental and intrinsic biotic controls on Phanerozoic marine diversification. Palaeontology. 53: 1211–1235. [링크]
[5] Mayhew PJ, et al. 2008. A long-term association between global temperature and biodiversity, origination and extinction in the fossil record. Proc Biol Sci. 275:47–53. [링크]


이 연구를 소개한 다른 글
[1] Mole BH. September 5, 2012. Warming Drives Biodiversity? : Global climate change may have long-term benefits for the world’s marine flora and fauna. The Scientist. [링크]
[2] Science News. September 3, 2012. Research reveals contrasting consequences of a warmer Earth. ScienceDaily.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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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공룡을 냉혈 동물(cold-blooded animal, 冷血動物) 또는 변온 동물(ectotherm, 變溫動物)로 알고 있다 [그림 1]. 그런데 꼭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연구 결과가 「계절에 따른 뼈 성장과 항온 동물의 생리 기능이 공룡의 생리 기능을 밝히다(Seasonal bone growth and physiology in endotherms shed light on dinosaur physiology)」라는 제목으로 『네이쳐(Nature)』에 발표되었다(앞으로 이 논문을 「Köhler, et al.」이라 부르겠다) [1].



그림 1. 다양한 조각류(ornithopod, 鳥脚類) 공룡과 헤테로돈토사우루스류(heterodontosaurid). 맨 왼쪽이 캄프토사우르스(Camptosaurus), 왼쪽이 이구아노돈(Iguanodon), 가운데 뒤쪽이 샨퉁고사우르스(Shantungosaurus), 가운데 앞쪽이 드라이오사우루스(Dryosaurus), 오른쪽이 코리토사우루스(Corythosaurus), 맨 오른쪽 작은 개체가 헤테로돈토사우루스(Heterodontosaurus), 맨 오른쪽 큰 개체가 테논토사우루스(Tenontosaurus) [출처: 위키피디아].



공룡 뼈에는 근모 조직(fibromellar tissue, 根毛組織)이 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근모 조직은 빨리 성장하는 포유동물의 뼈에서 흔히 발견된다. 따라서 고생물학자를 포함한 많은 과학자는 공룡이 오늘날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체내 신진대사 활동이 계절과 관계없이 활발히 일어나는 항온 동물(endotherm, 恒溫動物) 또는 온혈 동물(warm-blooded animal, 溫血動物)이었으리라 생각했다 [2]. 하지만 1980년대에 공룡 뼈에서 성장지연선(line of arrested growth 또는 LAG, 成長遲延線)이라는 해부학적 특징이 발견되었다 [1] [그림 2].



  

그림 2. (왼쪽, 가운데) 공룡 화석 뼈에서 나타나는 지연성장선 [출처: Nano Patents and Innovations, Monash University]. (오른쪽) 도마뱀의 한 종류인 Chalcides chalcides의 대퇴부 뼈 단면 [4] [출처: Zoologischer Anzeiger]. 화살표는 전부 성장지연선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성장지연선 또는 LAG이란 무엇인가? 재미있게도 이것은 변온 동물로 잘 알려진 현존하는 파충류(raptile, 爬蟲類)와 양서류(amphibia, 兩棲類)의 뼈 단면에서 자주 나타나는 해부학적 특징으로, 주변에서 에너지를 흡수해 체온을 유지하는 변온 동물이 온도의 변화에 따라 일시적으로 성장을 멈췄다가 다시 성장할 때 생성되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나이테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성장 속도가 계절의 영향을 받지 않는 포유류와 같은 항온 동물 대부분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이러한 성장지연선이 뼈에 생성되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그런 해부학적 특징이 멸종한 공룡 뼈에도 있음이 밝혀졌다. 그 결과, 공룡이 항온 동물이냐 냉온 동물이냐는 진실 게임은 지난 30년 동안 논쟁의 한 가운데 서게 되었다 [2].


그런데 「Köhler, et al.」에서는 성장지연선이 변온 동물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기후와 환경에서 서식하는 포유동물인 40종 115마리에 해당하는 반추 동물(ruminant animal, 反芻動物)의 대퇴골(femur, 大腿骨)에도 존재함을 발견했다 [그림 3] [1]. 즉, 성장지연선이 변온 동물만의 독특한 해부학적 특징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가 빈약해졌다. 덧붙여, 성장을 빨리 하느냐 늦게 하느냐는 성장지연선의 형성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3, 왼쪽 그림과 오른쪽 그림의 화살표 비교]. 결과적으로, 공룡 뼈에 존재하는 성장지연선을 근거로 “공룡은 변온 동물이다”라는 주장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림 3. (왼쪽) 지연된 성장을 보이는 반추 동물의 뼈 단면. (오른쪽) 빠르게 성장하는 반추 동물의 뼈 단면. 화살표는 성장지연선을 가리킨다 [1] [출처: Nature].



그렇다고 「Köhler, et al.」의 연구가 “공룡은 온혈 동물이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연구에서 강조하는 바는 성장지연선이 “더이상 변온 동물의 특징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더불어 연구팀은 멸종한 공룡이 정말 변온 동물인지는 앞으로 다양한 접근법을 통해 밝혀져야 할 일이며, “성장지연선”과 같은 단편적인 근거만으로 쉽게 단정 짓는 오류는 가급적 피해야 함을 주장한다. 어쨌든, 「Köhler, et al.」의 연구 결과는 기존에 거의 상식처럼 받아들여졌던 성장지연선에 대한 과도한 믿음과 이 때문에 야기된 “공룡은 진실로 변온 동물이다”라는 오해를 일소(一掃)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 본다.


참고 문헌
[1] Köhler M, et al. 2012. Seasonal bone growth and physiology in endotherms shed light on dinosaur physiology. Nature. 487: 358-361. [링크]
[2] Dunning H. June 27, 2012. Dinos Not Necessarily Cold-Blooded: The leading argument for dinosaurs being cold-blooded is overturned as a nearly identical bone structure is found in mammals. The Scientist. [링크]
[3] 「공룡은 온혈동물이었을지도」. 2012년 06월 29일(금). 『사이언스 타임스』. [링크] : 본문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연합뉴스』를 참조한 이 기사는 기본적인 수치부터 잘못되어 있다. 예를 들어, 기사 본문 가운데 “…연구진은 양이나 소처럼 온혈 포유류에 속하는 야생 반추동물 100여 종의 다리 뼈…”란 구절이 있는데, 연구진이 사용한 반추 동물 종의 수는 필자가 언급했듯이 40종이고, 사용한 동물 수가 약 100여 마리(정확히는 115마리)다.
[4] Guarino FM. 2010. Structure of the femora and autotomous (postpygal) caudal vertebrae in the three-toed skink Chalcides chalcides (Reptilia: Squamata: Scincidae) and its applicability for age and growth rate determination. Zoologischer Anzeiger. 248: 273-283.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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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고릴라(학명: Gorilla gorilla) 유전체(genome, 遺傳體) 연구 결과가 「고릴라 유전체 서열을 통한 인류 진화에 대한 통찰(Insight into hominid evolution from the gorilla genome sequence)」이라는 제목으로 『네이쳐(Nature)』에 게재되었다(앞으로 이 논문을 「Scally, et al.」이라 부르겠다) [5]. 따라서 2001년에 발표된 현생 인류(학명: Homo sapiens)의 유전체 [1, 2], 2005년에 발표된 침팬지(학명: Pan troglodytes) 유전체 [3], 2011년에 보고된 수마트라 오랑우탄(학명: Pongo abelii)의 유전체 [4], 그리고 최근에 분석된 보노보 원숭이(학명: Pan paniscus)의 유전체를 포함해 [6] 웬만한 유인원의 유전체는 거의 분석이 이루어진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1, 그림 2]. 능력이 된다면 이 모든 유전체 연구 결과를 전반에 걸쳐 살피고 싶어도 필자의 능력이 이 모든 것을 여유롭게 소화해내기에는 매우 미약하므로, 이 글에서는 고릴라 유전체 연구 결과에서 밝혀진 유인원 진화의 신비로움(?)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 글에 나와 있는 내용 대부분은 필자의 창의적인 생각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 필자보다도 훨씬 능력이 뛰어난 연구자들이 밝힌 사실과 가설의 기계적 종합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림 1. 현존하는 유인원(great ape, 類人猿)의 분류 체계. 사람 과 또는 유인원 과(family Hominidae)는 크게 사람 속(genus Homo), 판 속(genus Pan), 고릴라 속(genus Gorilla), 그리고 퐁고 속(genus Pongo)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각 속에 속하는 종은 그림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다 [5] [출처: Nature].



    

그림 2. 왼쪽부터 순서대로 아프리카 서부 저지대 고릴라(학명: Gorilla gorilla gorilla) [출처: Wikipedia], 동부 저지대 고릴라(학명: Gorilla beringei graueri) [출처: Wikipedia], 침팬지(학명: Pan troglodytes) [출처: Wikipedia], 보노보 원숭이(학명: Pan paniscus) [출처: Wikipedia], 보르네오에서 사는 오랑우탄(학명: Pongo pygmaeus)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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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해부학적∙생리학적으로 유인원과 유사하다. 물론 외양(外樣)만 놓고 본다면 “인간과 유인원의 유사성”에 당연히 이의(異議)를 제기하겠지만, 오직 생물학적 특징만을 고려한다면 이 말은 과학적으로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과학자에겐 그렇다. 안 그렇다면 뭐 할 말은 없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유사점이 있는 만큼 차이도 크다. 어떤 면에서 그런 차이점(들)은 인간과 유인원을 구분 짓는 결정적 요인(要因)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DNA가 있다.


오늘날에야 유전자의 구성적 본질(本質)인 DNA의 염기 서열을 아주 손쉽게(?) 분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진짜 쉽지는 않으며 유전체를 분석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돈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DNA 서열 분석이 가능하지도 않았다.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충분한 양의 DNA가 확보된 상태에서 화학적 방법으로 몇십에서 몇백 개의 염기 서열을 겨우 화학적 방법으로 겨우 확인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분자생물학의 발전은 유전체 연구에게 확실한 기폭제(起爆劑)였다. 따지고 보면 분자생물학이 있었기 때문에 유전체학(genomics, 遺傳體學)의 태동도 가능했다. 따라서 분자생물학 연구법이 미약했던 과거에는 염기 서열의 분석∙비교로 생명체 사이의 진화적 관계를 파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그림 3. 아프리카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진화적 관계를 규명하려 한 접근법(왼쪽)과 그 결론(오른쪽). 2008년 당시만 해도 고릴라 유전체 분석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10] [출처: Journal of Anatomy].



초기 현대 생물학에서 주요 연구 대상은 단백질이었다. 특히, 진화적 관계를 유추하는 데 있어 항원-항체 면역 반응과 전기영동(electrophoresis, 電氣泳動) 같은 생화학적∙면역학적 접근법은 그 자체로 많은 한계가 있었음에도 당시에는 매우 유용한 연구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화학적∙면역학적 접근법으로 인간과 침팬지의 알부민(albumin) 그리고 미오글로빈(myoglobin) 단백질이 고릴라, 오랑우탄, 긴팔원숭이 등과 확연(擴延)한 차이가 있음이 밝혀졌다 [7]. 더불어 단백질과 DNA의 서열도 (일부이기는 하지만) 비교했다. 오늘날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생어 시퀀싱법(Sanger sequencing method)으로 DNA 서열을 분석하거나 에드만 분석법(Edman degradation method) 등으로 단백질 서열을 밝힘으로써 생화학적∙면역학적 방법으로 확인한 진화적 관계가 유전자 수준에서도 반영됨을 확인했다 [7, 8, 9]. 하지만 결론이 명확하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분석 방법에 따라 결론 사이에 모순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 침팬지, 고릴라 등의 유인원 진화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0] [그림 3].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Scally, et al.」는 과거 여러 연구에서 드러난 불완전함과 모호함을 좀 더 분명하게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4. 고릴라 유전체 프로젝트(Gorilla genome project)의 유전체 분석 대상인 카밀라(Kamilah)[출처: Nature].



「Scally, et al.」에서 연구팀은 아프리카 서부 저지대에서 사는 카밀라(Kamilah)란 이름의 암컷 고릴라(western lowland gorilla, 학명: Gorilla gorilla gorilla)의 유전체를 주로 분석했다 [그림 4] [5]. 더불어 이들 연구팀은 카밀라의 동족(同族)인 수컷 고릴라 콴자(Kwanza)의 유전체를 Y 염색체 염기 서열 확보를 위해 분석했으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릴라의 성염색체도 수컷은 XY 그리고 암컷은 XX 형태를 보이고 있다), 같은 서부 저지대에서 사는 암컷 고릴라인 EB(JC)와 동부 저지대의 수컷 고릴라인 무키시(Mukisi)의 유전체도 고릴라 집단 사이의 유전적 다양성(genetic diversity, 遺傳的多樣性) 및 차이를 조사하기 위해―카밀라의 유전체만큼 본격적이지는 않았지만―마찬가지로 분석했다 [그림 2, 왼쪽 첫 번째 그림과 두 번째 그림].


유인원의 종 분화 시기


「Scally, et al.」에서는 서부 저지대의 암컷 고릴라인 카밀라의 유전체 서열을 CoalHMM이라는 융합 추정(coalescent inference, 融合推定) 방법으로 [11] 이미 공개된 인간, 침팬지, 오랑우탄 그리고 짧은꼬리원숭이(macaque, 학명: Macaca mulatta)의 유전체와 비교했는데, 이때 오랑우탄 유전체를 외군(outgroup, 外群)으로 둬서 유인원의 종 분화 시기를 추정했다 [5]. 이들 연구팀은 CoalHMM 분석으로 얻은 결과를 해석하는 데 두 가지 사안(issue, 事案)을 고려했다. (1) 융합 추정으로 얻은 결과 자체는 시간이 아닌 상대적인 염기 분기(sequence divergence, 塩基分岐) 정도를 나타내므로 시간 단위로 환산해야 한다. (2) 고릴라 집단의 실제적인 지리적 분포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인간-짧은꼬리원숭이 염기 분기(sequence divergence, 塩基分岐)를 화석 증거로 보정해 얻은 돌연변이 비율1 × 10-9/bp∙year로 상대적 염기 분기 정도를 시간으로 환산했을 때, 인간-침팬지 그리고 인간-침팬지-고릴라의 종 분화 시기는 각각 3백7십만 년 전5백9십5만 년 전으로 나타났다 [5]. 이 결과는 염기 서열의 돌연변이 빈도를 비교∙분석해 종 분화 시기를 파악하는 분자 추정법(molecular estimate)을 이용한 최근 논문의 주장과 일치하지만 [10, 12], 한편으로는 화석 증거 등으로 추정한 전통적인 주장과 모순된다. 그런데 질병 유발 돌연변이(disease-causing mutation)의 발생 빈도 또는 부모-자식 간 염기 서열 차이를 분석한 최근 연구를 바탕으로 (한 세대를 20~25년이라고 가정했을 때) 현대 인류 집단에서의 세대당 돌연변이 비율 0.5~0.6 × 10-9/bp∙year라고 가정하면 [13, 14, 15], 인간-침팬지 그리고 인간-침팬지-고릴라 종 분화가 각각 6백만 년 전과 1천만 년 전에 발생했다고 나타나며, 이것은 화석의 연도 측정을 바탕으로 기존 주장과 일치한다 [5]. 다시 말하면, 염기 서열의 돌연변이 비율을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느냐에 따라 이들 유인원의 종 분화 시기에 상당한 차이가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연구팀은 이 문제를 시기에 따라 돌연변이 비율이 달라진다고 가정함으로써 해결했다. 예를 들어, “모든 유인원의 공통 조상에서는 1 × 10-9/bp∙year이라는 돌연변이 비율이 나타나지만, 현존하는 모든 유인원에서는 돌연변이 비율이 이것보다 더 낮다”란 식으로 다르게 적용하는 것이다 [5]. 실제로 같은 종에 속하는 각 개체의 유전체에서도 돌연변이 정도가 세대에 따라 달리 나타나기 때문에 이러한 가정이 근거 없는 것도 아니다.


더불어 연구팀은 조상인 집단의 인구 변동이 유인원의 종 분화 시기 결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고려했다. 즉, 조상 집단의 크기가 일정한 상태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유전적으로 차이가 있는 어떤 집단으로부터 조상 집단으로 개체(들)가 유입되거나 조상 집단에서 일부 또는 많은 개체가 외부로 빠져나갈 때, 이러한 변화는 조상 집단의 돌연변이 비율과 전체적인 진화의 방향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소위 유전자 확산(gene flow, 遺傳子擴散)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5]. 마찬가지로 집단의 세대 간 시간 간격도 종 분화 시기 결정에 중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인간-침팬지와 인간-침팬지-고릴라 종 분화 시기를 추정하면 각각 5백5십만~7백만 년 전8백5십만~1천2백만 년 전이란 결론이 나온다 [5]. 모든 진화 연구가 그렇듯, 「Scally, et al.」에서 나타난 종 분화 시기도 어떤 모델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편차가 꽤 큰 편이지만, 전반적으로 이 결과는 화석으로 보정한 기존의 종 분화 시기와 상당히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인간, 침팬지 그리고 고릴라 사이의 진화적 관계


앞에서 언급한 종 분화 시기는 인간, 침팬지 그리고 고릴라가 과거 어느 시기에 서로 다른 종으로 나뉘기 시작했는지를 말할 뿐이며, 이들 종 사이에 어떤 유전적 흐름이 있었는지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 종 사이에 완전한 유전적 격리가 있었는지 아니면 종 분화가 시작된 후 일정 기간 유전적 교환이 있었는지 파악하는 것은 인간, 침팬지 그리고 고릴라 사이의 진화적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진화적 관계를 파악하는 방법인 분자 계통 발생(molecular phylogenetics, 分子系統發生) 분석에서는 종 사이의 진화적 관계를 밝히기 위해 주로 DNA 서열을 비교 분석(comparative analysis)한다. 그런데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면 (사람은 2001년 이후로 많은 개체를 대상으로 유전체 분석이 이루어졌다) 각각의 종을 대표하는 단일 개체에서 DNA를 추출하고 서열을 확인함으로써 종 사이의 유전체 서열을 비교∙분석한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단일 개체에서 얻은 DNA 서열이 각각의 종의 유전체를 대표한다고 가정하면 분석 과정에서 종 내 개체 사이의 유전적 다양성(genetic diversity, 遺傳的多樣性)이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과소평가(過小評價)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 분화가 이루어지는 시간 간격이 상대적으로 길다고 했을 때, 서로 다른 두 종이 공통 조상에서 분지된 이후 축적되는 종 사이의 유전적 차이(between-species genetic difference)는 종 내의 유전적 변이(within-species genetic variation)보다 더욱 두드러질 개연성(蓋然性)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둘 또는 그 이상의 진화적 분기가 매우 근접한 시기에 발생한다면 (즉, 하나의 단일 계통에서 첫 분지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분리된 계통 가운데 적어도 하나에서 또 진화적 분지가 발생한다면), 유전자에 대한 자연 선택이 거의 일어나지 않은 채 마지막 공통 조상이 갖고 있던 유전적 변이가 자손 계통에 무작위로 유전될 가능성이 있다. 결과적으로 어떤 유전체의 서로 다른 부분은 서로 다른 계통적 유연관계(類緣關係)를 나타낼 수 있는데, 서로 다른 유전자에 대한 서로 상충하는 진화적 계통 관계를 이끄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불완전 계통 정렬(incomplete lineage sorting 또는 ILS)이라고 부른다 [16].



그림 5. (왼쪽) 불완전 계통 정렬의 예. (오른쪽) 유전자 확산의 예 [16] [출처: Nature].



예를 들어보자. 과거 어느 시기에 AB 유전자형을 가진 가장 먼 조상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림 5, 왼쪽 그림의 검은 선]. 자기 서식지에서 평화롭게 잘살고 있던 이 조상은 어떤 (지리적 또는 환경적) 변화 때문에 AA 유전자형과 AB 유전자형을 갖는 두 자손 계통으로 갈라졌다 [그림 5, 왼쪽 그림의 녹색 선과 붉은색 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AB 유전자형을 가진 자손 계통이 AA 유전자형과 BB 유전자형을 가진 가장 최근 계통으로 각각 분리되어 서로 다른 진화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림 5, 왼쪽 그림의 주황색 선과 붉은색 선]. 그리고 현재 이 지역에는 녹색 선으로 대표되는 AA 유전자형을 가진 종, 주황색 선으로 대표되는 BB 유전자형을 가진 종, 붉은색 선의 AA 유전자형을 가진 종 이렇게 세 가지 종이 분포하고 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녹색 선으로 대표되는 AA 유전자형을 가진 종은 주황색 선의 BB 유전자형을 가진 종과 붉은색 선의 AA 유전자형을 가진 종의 공통 조상과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진화적으로 서로 분기했는데,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전자형만 놓고 따져본다면 오히려 녹색 선으로 대표되는 종과 붉은색 선으로 대표되는 종이 AA 유전자형을 갖기 때문에, 주황색 선으로 대표되는 종보다 진화적으로 더 가깝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유전자 공유 현상이 바로 불완전 계통 정렬이다 [16].


「Scally, et al.」의 분석에서는 실제로 이런 양상이 나타난다. 인간, 침팬지 그리고 고릴라의 유전체 가운데 70%는 고릴라보다도 인간과 침팬지가 상대적으로 더욱 비슷한데, 이것은 인간과 침팬지가 고릴라보다 더 최근에 진화적으로 갈라졌다는 일반적인 시각과 일치한다 [5].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의 유전체 가운데 나머지 30%에서는 인간-고릴라 또는 침팬지-고릴라의 DNA 서열 유사성(similarity, 類似性)이 오히려 인간-침팬지 유사성보다 높다는 점이다 [5]. 즉, 우리 유전자 가운데 침팬지와 유사하지 않은 부분에 오히려 고릴라와 더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첫 번째 가능성으로 앞 단락에서 언급한 불완전 계통 정렬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침팬지-고릴라의 분지가 시기적으로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졌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유전자 확산으로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그림 5, 오른쪽 그림]. 실제로도 유전자 확산으로 서로 다른 두 종 사이에 유전적 유사성이 나타날 수 있다. 대표적으로 현생 인류, 네안데르탈인(Neandertal) 그리고 데니소바인(Denisovan) 사이에서 유전자 확산으로 나타난 염기 서열의 유사성을 들 수 있다 [17, 18] [여기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고대 인류 데니소바인의 정체가 드러나다」를 참조하라].


하지만 유전자 확산보다는 불완전 계통 정렬 때문에 인간과 고릴라 사이의 DNA 서열 유사성이 높게 나타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왜냐하면, 이 정도로 높은 비율의 서열 유사성이 유전자 확산 때문에 나타나려면 꽤 가까운 시기에 인간의 조상과 고릴라의 조상 사이에 유전적 혼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 유전체 가운데 1~4% 정도를 네안데르탈인에게서 받았다고 알려진 오늘날 유럽인에서 유전적 혼합이 이루어진 시점이 약 8만 6천~3만 7천 년 전 사이임을 감안(勘案)한다면 [17, 18], 인간과 고릴라 사이의 DNA 유사성이 거의 15%에 가깝게 나타나는 이유가 단지 유전자 확산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다. 물론, 인간 계통의 조상과 고릴라 계통의 조상 사이에 유전자 확산이 전혀 없었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유전자 확산이 인간과 고릴라 사이의 유전적 유사성에 크게 이바지를 했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있다. 어쨌든, 「Scally, et al.」의 결과는 인간-침팬지-고릴라의 종 분화와 진화적 차이와 유전적 유사성에 대해 많은 시사하는 바가 큰데, 특히 이들 연구팀의 결과는 “영장류 종의 다양성은 한 종이 재빨리 그리고 비가역적으로 유전적으로 고립된 두 종의 분지로 증가한다”는 전통적인 학설에 반(反)하는 실체적 근거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5, 16]. 비록 필자의 개인적 견해가 인간과 고릴라 사이의 유전자 확산 가능성에 회의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과 고릴라의 차이


유인원 진화 연구의 주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이들이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독특한 형태적∙행동적 특징을 갖추게 되었느냐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종이 가진 상동 유전자(homologous gene, 相同遺傳子) 사이의 직접적 비교가 필요하다. 「Scally, et al.」은 이를 위해 인간, 침팬지, 고릴라 사이에 유전자의 변화, 소실(消失) 또는 획득(獲得)이 진화 과정 중에 발생했는지 분석했다. 그 결과, 인간의 유전자 가운데 663개, 침팬지 유전자 중 562개 그리고 고릴라 전체 유전자 가운데 535개가 어떤 진화적 변화를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5].


진화적 변화를 겪은 유전자 가운데 듣기 및 뇌 발달 등 감각 인지(sensory perception) 기능과 관련된 것이 포함되어 있다 [5]. 특히, 침팬지보다는 고릴라에서 뇌 기능과 관련된 유전자의 변이가 인간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5], 이는 뇌에서 발현되거나 뇌 발달에 관련된 유전자가 영장류에서는 양성 선택(positive selection, 陽性選擇) 대상이 아니라는 통상적 인식과 비교해서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몇몇 경우에 인간의 유전 질환과 관련된 변이가 고릴라에서는 정상으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치매(dementia, 癡呆)와 관련된 성장 호르몬 PGRN 유전자와 비후형 심장근육병증(hypertrophic cardiomyopathy, 肥厚形心筋病症) 관련 유전자인 TCAP에서 자주 보이는 유전 질환 관련 변이가 고릴라에서는 정상으로 확인되었다 [5]. 사실, 이런 변이는 침팬지와 짧은꼬리원숭이에서도 정상으로 확인된 유전형인데, 이 변이가 왜 인간에서는 문제가 되고 인간이 아닌 유인원에서는 문제가 없는지 확인할 방법은 현재로서 전무(全無)하지만, 여기에는 아마도 다른 유전자와의 상호 작용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환경적인 어떤 요인도 작용하는 게 아니냐는 매우 모호한 추측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고릴라의 유전적 다양성


고릴라 속(genus Gorilla)은 크게 서부 고릴라(Gorilla gorilla)와 동부 고릴라(Gorilla beringei) 두 종으로 나뉘며, 각각은 두 아종(subspecies, 亞種)으로 분류된다 [그림 1; 그림 6, 왼쪽 그림]. 그림에서 나타나듯이 이런 식의 분류는 지리적 분포에 따라 편의상 이루어졌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이런 식으로 분류된 고릴라 사이에는 무시 못할 정도의 유전적 차이가 있다. 하지만 서로 별개의 종으로 나눌 정도로 지나치게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며, 어떤 연구자는 오히려 서부 고릴라와 동부 고릴라 사이에 유전자 확산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9].



그림 6. (왼쪽) 아프리카 내 고릴라 분포 지도. 기니(Guinea), 나이지리아(Nigeria), 가봉(Gabon), 콩고(Congo) 지역에 분포하는 서쪽 고릴라 집단은 크게 서부 저지대 고릴라(western lowland gorilla, 학명: Gorilla gorilla gorilla)와 크로스 리버 고릴라(Cross River gorilla, 학명: Gorilla gorilla diehli)라는 두 가지 아종(subspecies, 亞種)로 나뉠 수 있으며, 콩고 민주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Congo) 동부 지역에 서식하는 동쪽 고릴라 집단은 동부 저지대 고릴라(eastern lowland gorilla, 학명: Gorilla beringei graueri)와 마운틴 고릴라(mountain gorilla, 학명: Gorilla beringei graueri)의 두 가지 아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오른쪽) 서부-동부 고릴라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고립-이주 모델(isolation-migration model). NA, NW 그리고 NE는 각각 선조, 서부, 동부 고릴라의 유효 집단 크기(effective population size, )를 뜻하며, m은 이주 비율을 나타낸다 [5] [출처: Nature].



「Scally, et al.」에서는 이들 고릴라 사이의 유전적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암컷 서부 고릴라인 카밀라와 EB(JC) 그리고 수컷 동부 고릴라인 무키시의 유전체 서열을 비교해 염기 서열의 다양성을 조사했다 [5]. 결과적으로 카밀라와 EB(JC)는 유전적으로 서부 고릴라 집단에 속하며 무키시는 서부 고릴라 집단과 확연히 구분되는 동부 고릴라 집단임이 확인되었다. 여기까지는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무시키의 이형접합성(heterozygosity, 異型接合性)이 다른 두 고릴라와 비교해서 상당히 낮았는데, 이것은 동부 고릴라 집단의 크기가 유전적 다양성을 폭넓게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상대적으로 작음을 뜻한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현재 서부 고릴라 개체 수는 약 20만 정도지만 동부 고릴라 개체 수는 서부 고릴라의 10분의 1도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 [5].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유전자 다양성 분석에서 확인된 동부 고릴라 집단 크기의 축소 경향이 단순히 인간 활동 때문에 나타난 현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에 동부 고릴라 집단이 오래전부터 서부 고릴라 집단에 비견할 수 있는 정도로 규모가 유지되는 상태에서 인간의 무분별(無分別)한 개입 때문에 최근에 개체 수가 감소했다면, 유전체에서 드러나는 동부 고릴라의 다양성은 확실히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집단의 규모가 과거 어느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속해서 줄어들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고 동부 고릴라 개체 수 감소에 인간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 때문에 나타난 동부 고릴라 개체 수 감소와는 별개로 이 유전적 집단이 전체적으로 쇠락(衰落)의 과정에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이 연구팀의 결과를 근거로 했을 때) 분명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연구팀은 두 고릴라 집단이 유전적으로 분지한 시점을 약 1백7십5만 년 전으로 추정했다 [5].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두 고릴라 집단의 이형성이 (분명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렇게 큰 차이가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에, 초창기 염기 서열의 분기가 일어난 후에 발생할 수 있는 유전자 교환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종 자체가 나뉘는 시기는 대략 50만 년 전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고 연구팀은 결론을 내렸다 [5] [그림 6, 오른쪽 그림].


후기 ― 더 많은 유전체 연구 결과가 필요하다


사람도 아닌 고릴라, 침팬지, 보노보 원숭이, 오랑우탄 등과 같은 유인원의 유전체를 왜 분석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솔직히 이런 연구가 인류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백 퍼센트 거짓말이며 거의 사기 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이들 유인원의 유전체 분석이 중요한 이유는 “인류를 포함한 유인원의 진화”를 전반에 걸쳐 이해하는 데 매우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 같은 D급 과학 잉여에게는 이런 연구가 암 정복이나 생명 연장 따위보다도 더욱 중요하다. 그렇다고 실용적인 연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관심을 안 둘 뿐이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고릴라 유전체 분석으로 유인원의 진화를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를 확보했지만,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특히 각각의 종마다 거의 한 개체만 이루어진 완전한 유전체 분석을 같은 종의 다른 개체(들)로 확대하는 것이 필요한데, 언젠가는 오늘날 다양한 사람의 유전체를 분석하는 것처럼 다른 종류의 유인원도 개체마다 일일이 유전체를 분석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참고 문헌
[1] International Human Genome Sequencing Consortium. 2001. Initial sequencing and analysis of the human genome. Nature. 409: 860-921. [링크] : 유전체 연구에 관한 기념비적 논문이다. 국제적 협력으로 진행된 이 연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보노보 등과 유인원의 유전체 분석뿐만 아니라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같은 고대 인류의 유전체 분석 사업은 애당초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2] Venter JC, et al. 2001. The sequence of the human genome. Science. 291: 1304-1351. [링크] : 과학적 지식을 공공이 아니라 사적 이익을 위해 특허를 걸으려 한 크레이크 벤터의 논문이다. 크레이크 벤터는 자신의 전매특허(專賣特許)인 샷건(shot-gun) 분석만으로 인간 유전체를 분석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발표한 인간 유전체 결과가 실제로는 많은 부분에서 국제 인간 유전체 분석 컨소시엄(International Human Genome Sequencing Consortium)의 분석 결과를 참조했다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어쨌든, 크레이크 벤터가 똑똑한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한 개인이 사적 이익을 위해 유전자 정보를 독점하려 했을 때 어떤 결과가 있을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반면교사(反面敎師)라고 할 수 있다.
[3] Chimpanzee Sequencing and Analysis Consortium. 2005. Initial sequence of the chimpanzee genome and comparison with the human genome. Nature. 437: 69-97. [링크] : 침팬지 유전체를 분석한 연구 결과로 유인원 유전체 가운데 인간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DNA 서열이 분석된 종이다.
[4] Locke DP, et al. 2011. Comparative and demographic analysis of orang-utan genomes. Nature. 469: 529-533. [링크] : 오랑우탄 유전체 분석 연구다. 분석 대상은 주로 수마트라 오랑우탄(학명: Pongo abelii)이며, 보르네오 오랑우탄(학명: Pongo pygmaeus)의 유전체도 일부 분석했다.
[5] Scally A, et al. 2012. Insights into hominid evolution from the gorilla genome sequence. Nature. 483: 169-175. [링크] : 이 글에서 주로 인용하며 분석하는 핵심 논문이다.
[6] Prüfer K, et al. 2012. The bonobo genome compared with the chimpanzee and human genomes. Nature. 486: 527-531. [링크] : 고릴라 유전체 분석 결과가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보노보 원숭이의 유전체 분석 결과가 곧바로 발표되었다. 고릴라 유전체 분석과 관련해서 읽어보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필자도 조금밖에 읽지 않았다).
[7] King MC, and Wilson AC. 1975. Evolution at two levels in humans and chimpanzees. Science. 188: 107-116. [링크]
[8] DNA sequencing. Wikipedia. [링크] : DNA 서열 분석법을 소개한 위키피디아 글이다. 이 글은 생어 시퀀싱법(Sanger sequence analysis)도 설명하고 있다. 영어가 된다면 한 번 읽어보는 게 좋다.
[9] Edman degradation. Wikipedia. [링크] : 단백질 서열 분석법 가운데 하나인 에드만 분석법을 설명하는 위키피디아 글이다.
[10] Bradley BJ. 2008. Reconstructing phylogenies and phenotypes: a molecular view of human evolution. J Anal. 212: 337-353. [링크] : 2008년도에 발표된 유인원 진화에 관한 소개 글이다. 유인원 진화에 관한 전반적인 흐름을 정리하는 측면에서 읽어보길 추천하지만, 이 글에서 내리는 결론은 필자가 소개하는 논문의 주장과 다소 차이가 있다.
[11] Coalescent theory. Wikipedia. [링크] : 이 글에서 언급하는 통계 분석법인 CoalHMM이라는 융합 추정의 기본 이론을 소개하는 위키피디아 글이다.
[12] Burgess R, and Yang Z. 2008. Estimation of hominoid ancestral population sizes under bayesian coalescent models incorporating mutation rate variation and sequencing errors. Mol Biol Evol. 25: 1979-1974. [링크]
[13] 1000 Genomes Project Consortium. 2010. A map of human genome variation from population-scale sequencing. Nature. 467: 1061-1073. [링크] : 부모-자손 사이의 유전적 차이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재미있는 논문이다. 필자도 아직 다 안 읽어봤지만, 꽤 중요한 생물학적 현상을 담고 있다. 어쨌거나 이 논문의 결론은 “부모의 유전자 절반이 각각 자손에게 전해진다 하더라도, 부모와 자손의 염기 서열은 다소 차이가 있다”이다.
[14] Roach JC, et al. 2010. Analysis of genetic inheritance in a family quartet by whole-genome sequencing. Science. 328: 636-639. [링크] : 참고 문헌 [13]과 거의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15] Lynch M. 2010. Rate, molecular spectrum, and consequences of human mutation. Proc Natl Acad Sci USA. 107: 961-968. [링크]
[16] Gibbs RA, and Rogers J. 2012. Genomics: Gorilla Gorilla Gorilla. Nature. 483: 164-165. [링크] : 고릴라 유전체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글이다. 필자도 이 글을 많이 참조했다. 논문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 글을 읽어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
[17] Green RE, et al. 2010. A draft sequence of the Neandertal genome. Science. 328: 710-722. [링크] : 이미 필자의 블로그에서 많이 소개한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연구 논문이다.
[18] Meyer M, et al. 2012. A High-Coverage Genome Sequence from an Archaic Denisovan Individual. Science. Published online 30 August 2012 [DOI:10.1126/science.1224344] [링크] : 얼마전에 필자가 다룬 데니소바인 유전체 연구 논문이다.

[19] Thalmann O, et al. 2007. The complex evolutionary history of gorillas: insights from genomic data. Mol Biol Evol. 24: 146-158.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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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는 예외 없이 DNA(deoxyribonucleic acid)와 RNA(ribonucleic acid)를 유전 물질(genetic material, 遺傳物質)로 사용한다. 특히, 바이러스를 제외한 대부분 생명체는 DNA를 유전 정보 저장에 사용되며, 그 안에 담긴 유전 정보를 RNA 형태—특히 전령 RNA(messenger RNA 또는 mRNA, 傳令-)—로 복사해 단백질 형태로 전환하는 과정에 사용한다. 그런데 이것이 RNA 안에 내재된 기능 전부는 아니다. 유전 정보 물질인 RNA는 상황에 따라 라이보자임(ribozyme)이라는 일종의 효소(enzyme, 酵素) 역할을 한다. 대표적으로 세포 내 거대 단백질 합성 공장인 리보좀(ribosome) 복합체(complex, 複合體)의 핵심 구성 분자인 rRNA(ribosomal RNA 또는 rRNA)를 들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RNA는 그 자체로 유전 물질이며 효소 역할도 수행할 수 있는 (좀 과장해서 말하면)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림 1. RNA 세상 상상도. 구글링(googling)을 하다가 발견했다. 원시 지구 지표면에서는 끊임없이 화산 폭발이 일어나고, 원시 바다에서는 초기 생명체가 RNA 형태로 물리화학 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효소 반응과 자기 복제를 반복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지속적으로 거치면서, 초기 생명체에는 미세한 변화가 끊임없이 누적되었고, 결국 오늘날과 같은 생명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출처: NASA].



앞에서 언급한 RNA의 특징을 바탕으로 “초기 생명체는 RNA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진화가 거듭되면서 생물학적 기능에 일종의 분업화가 발생해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는 “RNA 세상 가설(RNA world hypothesis)”이 제안되었고 오늘날에도 이 가설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림 1] [1]. 그렇다면 생물학자는 왜 RNA를 초기 생명체의 형태로 주목했을까?


생명 현상은 유전자의 연속적 흐름으로 부모의 형질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손에게 어떤 식으로든 전해짐을 뜻한다. 물론 부모 형질(또는 유전 정보)이 자손에게 그대로 또는 변형되어 전달되거나 완전히 단절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수준에서 유전 정보의 흐름에는 방향이 있으며, 오늘날 생명체는 그 수단으로 DNA와 RNA를 사용한다. 더불어 모든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외부에서 영양분을 흡수 또는 섭취하며 체내에서 다양한 유기 물질을 합성한다. 특히, 이러한 유기 물질 합성에 관여하는 물질을 우리는 효소라고 부르며, 효소 대부분은 사실상 단백질이다. 효소를 통해서만,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물질을 분해하거나 합성할 수 있다. 게다가 오늘날 생명체는 “RNA 세상”의 존재 가능성을 방증(傍證)할만한 증거 또는 흔적—생명체가 사용하는 주요 에너지 형태인 ATP(adenosine triphosphate), 단백질 효소의 다양한 조효소(coenzyme, 助酵素),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효소로 기능할 수 있는 다양한 라이보자임—을 갖고 있다.




그림 2. TNA 구조 [출처: Nature Chemistry].



최근에 RNA 세상 가설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연구가 「Darwinian evolution of an alternative genetic system provides support for TNA as an RNA progenitor」이란 제목으로 『네이쳐 케미스트리(Nature Chemistry)』란 학술지에 발표되었다 [2]. 이 연구에서는 RNA와 DNA보다 구조적으로 단순하면서도 생물•화학적으로 RNA와 유사한 (3’,2’)-α-L-throse nucleic acid 또는 TNA라 부르는 물질에 초점을 맞췄다 [그림 2]. 특히, 연구팀이 (실제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관심을 둔 것은 "TNA라는 물질이 진화적으로 RNA를 대체할 수 있는가?" 또는 "TNA가 RNA가 출현하기 이전의 유전 물질일 가능성이 있는가?"이다.


TNA는 구조적으로 RNA와 유사하면서도 상당히 다른데, 일반적으로 RNA는 리보스 당(ribose sugar, -糖)을 뼈대(backbone)로 갖지만, TNA는 트레오스(threose)란 물질을 뼈대로 삼는다 [그림 2]. 이 때문에 TNA가 RNA보다 전체적으로 크기가 작은 편이며 상대적으로 더 안정하다. 게다가 TNA는 RNA를 대신해 유전 물질로 사용될 수도 있으며 (실제로 생명체가 TNA를 유전 물질로 사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라이보자임처럼 작용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이 논문의 핵심인데, 연구팀은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TNA와 같은 물질이 RNA 이전에 초기 생명체가 주로 사용했던 유전 물질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만일, RNA보다 구조적으로 단순하며 RNA 같은 양면성(兩面性) 물질이 자연 상태에 존재한다면 생명의 기원을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증거로 이것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없으리라.


그런데 이 가설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TNA가 유전 물질로 사용되면서 동시에 라이보자임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해서 TNA가 초기 생명체의 유전 물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2, 3]. 왜냐하면, 원시 지구는 오늘날보다도 더 (어떻게 보면 꽤 난잡한 상태로) 다양한 물질이 혼재(婚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많은 과학자가 그렇게 생각한다), TNA가 유전 물질로서 독보적인 위상(位相)을 구축했다고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TNA와 구조적 또는 기능적으로 유사한 다른 물질이 TNA와 비슷하거나 높은 빈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로, 오늘날 알려진 어떤 생명체도 TNA 또는 이와 유사한 물질을 생명 현상에 사용하지 않는다 [3]. 만약 초기 생명체가 TNA를 유전 물질 등으로 사용했었다면, 어떤 형태로든 오늘날 생명체에 그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따라서 과거 초기 생명체가 TNA를 유전 물질로 사용했다고 주장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셋째로, 원시 지구에 TNA가 실제로 존재했냐는 것이다 [2, 3]. 현재까지 TNA가 자연 상태에서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없다. 오히려 TNA는 실험실에서만 합성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자연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물질이 원시 지구에서는 유전 물질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기 어렵다. 사족이지만, 국내 일급 과학 전문 언론(솔직히 비꼬는 거다)인 『사이언스 타임즈(The Science Times)』는 TNA가 과거에 실제로 존재한 물질인 것처럼 기술해놨다 [4]. 관련 기사를 쓴 객원 기자라는 사람이 이 논문을 제대로 읽었는지 상당히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지금까지 초기 생명체 진화에 관한 최신 연구를 아주 간략하게 살펴봤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TNA는 구조적으로 단순한 유사(類似) RNA 물질이며 유전 물질과 효소 기능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RNA가 생명 현상의 주류가 되기 전에 사용되었을지 모른다는 주장은 진화적으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증명하기도 어려울뿐더러 현실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상황적 증거도 없으므로, 이 주장이 (비록 좋은 논문에 게재되었다 하더라도) 받아들여지기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연구가 생명의 기원을 “RNA 세상” 이전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측면에서는 진정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1] RNA world hypothesis. Wikipedia. [링크]
[2] Yu H, et al. 2012. Darwinian evolution of an alternative genetic system provides support for TNA as an RNA progenitor. Nat Chem. 4: 183-187. [링크]
[3] Marshall. 08 January 2012. Before DNA, before RNA: Life in the hodge-podge world. New Scientist. [링크]
[4] 김형근. 2012년 3월 13일. 「“RNA 형성 전에 TNA가 있었다” 생명체 기원, 생각보다 단순할 수도」. 사이언스타임즈.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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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stone tool, 石器)와 같은 정교한 도구 제작과 그것을 사용하는 능력은 초기 호미니드(Hominid) 진화와 고유한 문화 발전에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 속(genus, 屬)과 같은 멸종한 호미니드와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호모 아파렌시스(Homo aparensis),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하이델베르크인(Homo heidelbergensis), 네안데르탈인(Neandertal 또는 Homo neanderthalensis), 데니소바인(Denisovan) 그리고 고대 호모 사피엔스(archaic Homo sapiens) 등과 같은 고대 인류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으며, 오늘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라 불리는 현생 인류의 탄생에서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진화사(進化史)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호미니드 역사에 있어서 도구의 발전이 비약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직립 보행(bipedalism, 直立步行)으로 해방된 두 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불어 점점 커지는 뇌 용적량도 역시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동반 상승효과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림 1. (왼쪽) 이집트 독수리(Neophron vulture 또는 Egyptian Vulture) [출처: 위키피디아], (가운데) 느시아 제비류 가운데 Cariama cristata라는 학명의 동물 [출처: 위키피디아], (오른쪽) 흰목꼬리감기원숭이(capuchin monkey) [출처: 위키피디아].



도구 사용이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중요했음은 분명하지만, 도구 사용이 꼭 호미니드에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 독수리(Neophron vulture 또는 Egyptian Vulture)는 타조 알 같은 크기가 매우 큰 알(egg)을 깨기 위해 (보통 둥근 모양의) 조약돌을 부리에 물고 알에 톡톡 내리치는 과정을 알이 깨질 때까지 반복한다 [5] [그림 1, 왼쪽].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에서 서식하는 검은 다리 세리에마(Red-legged Seriama, 학명: Chunga burmeistrei) 새 같은 느시아 제비(Cariama)류는 먹이인 뱀, 도마뱀, 개구리, 새, 곤충 등을 잡아다 통째로 삼키기 쉽게 하려고 바위에다가 계속 내리친다 [6] [그림 1, 가운데].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전역에 분포하는 흰목꼬리감기원숭이와 같은 세부스 속 (genus Cebus) 원숭이는 먹이인 견과류(堅果類)나 게(crabs) 그리고 조개류 등의 단단한 껍질을 깰 때 돌을 사용한다 [7] [그림 1, 오른쪽]. 이러한 사례 외에도 많은 생명체가 먹이를 잡아먹거나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주변에 있는 물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2]. 그러므로 단순히 도구만 사용하는 것이라면 호미니드와 다른 생명체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고 무방하다. 그러나 도구의 다양성과 복잡성 그리고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도구를 제작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창조성 등을 고려한다면 지구 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생명체도 호미니드를 따라올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림 2. (왼쪽) 침팬지(chimpanzee, 학명: Pan troglodytes) [출처: 위키피디아], (오른쪽) 보노보 원숭이(bonobo, 학명: Pan paniscus) [출처: 위키피디아].



그렇다면 현생 인류와 진화적으로 가장 가까운 유연관계에 있는 자매군(sister group, 姉妹群)이며 판 속(genus Pan)에 속하는 유인원(類人猿)인 침팬지(chimpanzee, 학명: Pan troglodytes)와 보노보 원숭이(bonobo, 학명: Pan paniscus)는 어떨까? [그림 2] 약 6백50만 년 전에 현생 인류와의 공통 조상(common ancestor, 共通祖上)에서 분지(divergence, 分枝)한 침팬지의 사례를 한번 살펴보자. 먼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Côte d´Ivoire)에 위치한 고대 침팬지의 유적에서 4천3백 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도구가 발견되는데,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침팬지가 도구를 사용했음을 뜻한다 [8, 9]. 실제로 침팬지는 흰개미를 잡아먹을 때 커다란 막대기를 사용해 땅을 판 다음 작은 막대기로 흰개미를 사냥한다고 알려졌으며, 최근에 아프리카 세네갈(Senegal)에서 서식하는 침팬지가 이빨로 날카롭게 다듬은 창으로 부시베이비(bushbaby)라는 작은 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9]. 약 2백만 년 전에 침팬지와의 공통 조상에서 분지한 보노보 원숭이도 감자나 고구마 동과 같은 영양 줄기 식물을 파먹을 때 나뭇가지를 사용하며, 견과류 같은 단단한 먹이를 부술 때도 돌 위에 견과류를 올려놓고 다른 돌로 내리치기도 한다 [1]. 도구 사용의 다양성과 복잡성 측면에서 이들 두 영장류(靈長類)가 앞에서 언급한 다른 동물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 두 영장류가 고대 호미니드의 다른 점은 바로 창조적으로 도구를 제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적어도 그런 모습은 지금까지 관찰된 적이 없다.



 

그림 3. (왼쪽) 보노보 원숭이 칸지(Kanzi)가 석기를 제작하는 모습. (오른쪽) 고대 인류가 사용한 구석기 유물. 올도완 시대의 것이다 [4] [출처: Annual Reviews of Anthropology].



구석기 시대를 연구하는 고고학자(palaeolithic archaeologist)와 인지 심리학자(cognitive psychologist)로 구성된 협동 연구팀은 칸지(Kanzi)란 이름의 12살 된 수컷 보노보 원숭이에게 석기 제작법과 사용법을 1997년부터 1999년까지 2년간 가르쳤다 [3]. 이 연구의 주요 목적은 칸지가 돌을 깨는 방법과 칸지가 만든 석기의 형태를 조사 및 연구하는 것이었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칸지의 석기 제작 능력은 점점 나아졌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칸지가 만든 석기에 고대 호미니드의 석기 유물과 같은 양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3]. 하지만 이후에도 연구는 계속되었고 보노보 원숭이 칸지는 계속해서 석기 제작을 연마(硏磨)했다. 이 당시 판-바니샤(Pan-Banisha)라는 암컷 침팬지도 같이 교육받았고 칸지와 함께 이번 실험에 참여했으며 그 결과도 같은 논문에 언급되었지만, 필자의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2012년 현재, 30살이 된 칸지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이 사이에 석기 제작법만 배운 게 아니라 언어 교육도 같이 받았다 (인지 심리학자가 참여한 연구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과거로 다시 돌아가 보자. 1999년 당시 칸지는 밧줄에 매달리거나, 상자에 또는 가죽 안에 담긴 먹이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이 배운 석기 제작법으로 도구를 제작했다 [1, 3]. 그런데 칸지가 해결한 문제와 같은 상황은 칸지가 포획되기 전에 살았던 자연 상태에서는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연구팀은 될 수 있으면 칸지가 과거 살았던 서식지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연구팀은 통나무 상자 안에 먹이를 넣어 쉽게 열지 못하도록 닫아놓거나 다양한 상태의 흙더미 아래에 먹이를 숨겼다. 물론, 연구팀은 먹이를 숨기기 전에 그곳에 먹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 안에서 먹이를 빼내라든지 하는 그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다만 칸지가 하는 행동을 관찰할 뿐이었다 [1].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칸지는 연구팀이 숨겨 놓은 먹이를 빼내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다. 결과는 꽤 흥미로웠다. 통나무 안에 숨겨진 먹이를 빼내려는 과정에서 칸지는 다음과 같은 전략을 취했다. (1) 통나무를 커다란 돌멩이로 내리쳤다. (2) 통나무를 시멘트 바닥 또는 바위 위에다 내리쳤다. (3) 막대기를 통나무 상자 틈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4) 석기를 제작해 그것으로 드릴처럼 구멍을 뚫거나(drilling), 송곳처럼 찍어 내리거나(wedging), 깎아 내리거나(chopping), 긁거나(scraping), 자르는(cutting) 모습을 보였다. 최후에는 (5) 온 힘을 다해 헐거워진 통나무 상자를 열어 먹이를 꺼냈다 [1]. 통나무 상자 안에서 먹이 꺼내기 실험을 24번 반복하면서 칸지의 문제 해결 능력은 점점 나아졌다. 그 과정 중에 칸지는 무려 156개에 달하는 여러 가지 석기 도구를 제작했는데, 그 가운데 60여 개에 해당하는 것이 어떤 특정 목적(예를 들면, 구멍 뚫기, 긁기, 틈 사이로 집어넣기, 자르기 등)에 사용한 석기 도구였다 [1].



그림 4. 보노보 원숭이 칸지가 통나무 상자를 열기 위해 제작한 다양한 형태의 석기 도구. 1~4는 통나무에 구멍을 낼 때 칸지가 제작하고 사용한 석기 도구이며 5는 통나무 상자를 긁을 때 사용한 석기 도구이다 [1] [출처: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of the USA].



땅을 파서 먹이를 찾는 실험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이 나타났다. 칸지는 토양 상태에 따라 사용하는 도구를 달리했다. 부드러운 모래에 먹이가 숨겨져 있을 때에는 그냥 손으로 먹이를 파냈지만, 진흙 안에 숨겨져 있을 때에는 나뭇가지로 흙을 파냈으며, 딱딱한 토양 안에 있을 때에는 (실험이 반복되면서) 상황에 맞는 석기를 제작해 땅을 파 먹이를 찾아냈다 [1].


이 연구 결과가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필자는 앞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창조적으로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할 수 있는 생명체는 지금까지 호미니드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침팬지와 보노보 원숭이 같은 영장류가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창조적으로 제작하는 모습이 지금까지 관찰된 적이 없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이 실험은 (비록 훈련받긴 하지만) 보노보 원숭이 칸지도 어떤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총동원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며, 인간을 제외한 영장류에도 문제 해결을 위해 지금까지 자신이 겪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석기 도구를 제작하는 능력이 있음을 분명히 보였다. 진실로 칸지가 제작한 석기 도구는 지금까지 영장류 사회에서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창조 과정이었다 [1].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바로 칸지가 통나무 상자를 열기 위해 석기로 나무에 낸 생채기 양상이 지금까지 보고된 고대 인간 속이 만들어낸 그것과 매우 유사하단 사실이다 [1]. 고대 호미니드가 자신의 석기 도구로 낸 흔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록은 에티오피아(Ethiopia) 보우리(Bouri)에서 발굴된 약 2백50만 년 된 소뼈에 새겨진 흔적으로, 고대 호미니드가 뼈 안에 든 골수(marrow, 骨髓) 성분을 먹거나 뼈에서 살을 발라내기 위해 도구를 사용했음을 뜻하며 [1, 10], 이런 상황은 어찌 보면 칸지가 도구를 사용해 통나무 상자 안에 있는 먹이를 빼낼 때랑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다 [1] [그림 5]. 그리고 칸지가 제작한 석기 도구들은 전반적으로 2백60만~1백70만 년 전 사이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구석기 시대 올도완(Oldowan) 문화에 속하는 석기 양상과 유사하다 [1, 11] [그림 3, 오른쪽; 그림 4]. 칸지가 제작한 석기와 올도완 문화의 것으로 고대 호미니드가 사용한 석기 유물의 모양을 비교해보자. 정말 비슷하지 않은가? 연구팀은 이런 결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판 속 영장류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호모 하빌리스와 비슷한 구부러진 손가락을 갖고 있고 올도완 석기를 제작한 존재라고 알려진 호모 플로렌시엔시스(Homo floresiensis)와 유사한 손목뼈와 두개골 용적을 나타낸다고 했을 때, 칸지가 통나무 상자에 낸 생채기 흔적과 2백50만 년 전 고대 인류가 석기로 낸 흔적 사이의 유사성은 의미 있다. 따라서 우리 연구팀은 판 속 영장류가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낸 흔적이 뼛조각 유물에 나타난 초기 생채기 흔적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제안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은 연구 결과는 판 속 영장류와 인간 속 영장류의 최근 공통 조상에도 우리 실험에서 관찰된 것과 같은 도구 사용의 발달 과정이 있었으리라 제안한다.” [1, 12]



 

그림 5. (왼쪽) 보노보 원숭이 칸지가 자신이 제작한 석기 도구로 통나무 상자에 낸 생채기 패턴 [1] [출처: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of the USA]. (오른쪽) 에티오피아 올두완에서 발굴한 소뼈 유물 사진. 그림 아래의 확대한 사진에서 석기 등으로 자국 낸 흔적이 선명히 드러난다 [10] [출처: Science].



물론 연구팀이 내린 “판 속 영장류와 인간 속 영장류의 최근 공통 조상에도 … 도구 사용 발달 과정이 있으리라”는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생명체 진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수렴진화(convergent evolution, 收斂進化)의 예처럼 판 속 영장류의 도구 사용과 인간 속 호미니드의 도구 사용은 두 속의 최근 공통 조상에는 없었지만, 두 속에서 독립적으로 나타난 현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연구를 진행한 협동 연구팀의 결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심장하며 몇 가지 새로운 화두(話頭)를 던진다. 첫째, 보노보 원숭이 칸지는 자신이 창조적으로 습득한 석기 제작법을 자기 동료—그것이 같은 연구소에서 어느 정도 교육받은 보노보 원숭이든 전혀 교육받지 않은 동족이든 상관없이—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가? 둘째, 칸지가 자손을 낳는다면 자손에게 자신의 기술을 전수해줄 수 있는가? 이 두 가지는 문화 전수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한 번쯤 품을 수 있는 생각으로, 몇백만 년이라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고대 호미니드가 자신의 문화를 발전시켜 온 실재적 과정이며, (어찌 보면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습성은 오늘날 현생 인류에서도 명백히 (그리고 더욱 정교하게) 드러난다. 어쨌든,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는 매우 흥미롭고 어떻게 보면 의미 있는 일이지만, 불행히도 우리가 그런 모습을 바로 목격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몇 년에서 몇십 년 또는 몇백 몇천 년 이상을 요구하는 오랜 과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 인간도 바로 그런 식으로 진화해 오늘에 이르렀으니까 말이다.


참고 문헌
[1] Roffman I, et al. 2012. Stone tool production and utilization by bonobo-chimpanzees (Pan paniscus). Proc Natl Acad Sci USA. 109: 14500-14503. [링크] : 필자가 이 글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논문이다. 조만간 공공에 무료로 공개되니 관심 있는 사람은 꼭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2] Tool use by animals. Wikipedia. [링크]
[3] Schick K, et al. 1999. Continuing investigations into the stone tool-making and tool-using capabilities of a bonobo (Pan paniscus). J Archaeol Sci. 26:821–832. [링크]
[4] Toth N, et al. 2009. The Oldowan: The tool making of early hominins and chimpanzees compared. Annu Rev Anthropol. 38:289–305. [링크] : 초기 호미니드와 침팬지 사이의 도구 제작에 관한 소개 글로 읽어보면 좋다.
[5] Egyptian Vulture. Wikipedia. [링크]
[6] Seriemas. Birds and Beyond. [링크]
[7] Capuchin monkey. Wikipedia. [링크]
[8] Mercader J, et al. 2007. 4,300-Year-old chimpanzee sites and the origins of percussive stone technology. Proc Natl Acad Sci USA. 104: 3043-3048. [링크]
[9] Chimpanzee. Wikipedia. [링크]
[10] de Heinzelin J, et al. 1999. Environment and behavior of 2.5-million-year-old Bouri hominids. Science. 284:625–629. [링크]
[11] Oldowan. Wikipedia. [링크]
[12] “Given that Pan has curved finger phalanges similar to those of australopithecines/Homo habilis and wrist bones and cranial capacity similar to those of Homo floresiensis, makers of Oldowan stone tools, the similarity between the wear patterns observed on KZ’s logs and those seen in early Homo artifacts from 2.5 mya is significant. Our experiments thus suggest that the wear patterns resulting from the various tool uses by Pan can be used to help decipher the earliest wear patterns preserved on bones. Therefore, our results reinforce the evidence for early Homo traits in Pan, and suggest that the potential for the development of the observed tool use existed in the last common ancestor of Pan and Homo.” [1]에서 참조한 논문에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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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평화롭게 수액을 빨아 먹고 있는 진딧물 [출처: 위키피디아].



몇몇 생명체는 광합성(photosynthesis, 光合成)을 할 수 있는 미생물 또는 식물과 공생 관계(symbiosis, 共生關係)로 묶여 있다. 어떻게 보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에너지의 원천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영양분을 스스로 합성할 수 있는 식물과 같은 독립 영양 생물(autotroph, 獨立營養生物)과 다른 생명체를 통해 영양분을 획득해 생체 에너지를 합성할 수 있는 종속 영양 생물(heterotroph, 合成從屬營養體)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모든 생명체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생명체와 일종의 공생 관계를 형성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그러한 철학적 사유를 배제한 채 과학적 엄밀성을 바탕으로 우리의 시야를 매우 좁게 한정한다면 공생 관계에 놓여 있는 생명체는 일부로 국한할 수 있다.


여느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겠지만, 이들 공생 생명체가 광합성 작용을 할 수 있는 독립 영양 생명체와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사는 이유는 정말 단순하다. 바로 생 화합물 또는 에너지의 원천을 확보하기 위해선데, 종속 영양 생명체인 이들 더부살이도 스스로 영양분을 합성해 낼 그 어떤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식물도 조류(algae, 藻類)도 미생물도 아닌 임의의 다세포 생명체가 빛 에너지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바로 사용 가능한 생체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다면 믿을 텐가? 상식적으로 판단했을 때 그런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지만, 자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리 상식적(?)이지 않으며 때로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매직쇼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놀라운 깜짝쇼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진딧물(aphid, 학명: Acyrthosiphon pisum)이다 [그림 참조].


일반적으로 카로티노이드(carotenoid)라는 색소는 물속에서 사는 조류(algae, 藻類)와 몇몇 미생물 그리고 곰팡이류에 흔히 존재하는 물질로 보통 노란색에서 주황색을 띠는데, 특정 단백질이 이 물질에 결합하면 녹색 또는 갈색으로 색깔이 변한다. 특히 카로티노이드는 광합성 과정에서 엽록소와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유입되는 빛 에너지를 포획하는 역할을 하는데, 바로 그 카로티노이드가 진딧물 몸 안에 꽤 많이 존재한다. 그것도 외부에서 무엇인가를 섭취했기 때문에 카로티노이드가 몸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진딧물 몸 안에 카로티노이드를 생합성할 수 있는 유전자가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진딧물은 현재까지 알려진 곤충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카로티노이드를 합성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니스 대학(the University of the Nice)의 마리아 카포빌라(Maria Capovilla) 박사 연구팀은 카로티노이드를 합성할 수 있는 진딧물에 빛을 쪼였을 때 주요 생체 에너지인 ATP (adenosine triphosphate) 합성이 증가하지만, 카로티노이드가 없는 돌연변이 진딧물은 빛을 아무리 쪼여도 ATP 합성이 증가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카포빌라 박사 연구팀은 진딧물에 광합성 작용과 비슷한 어떤 메커니즘이 있으리라 추론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진딧물에 유사 광합성 과정이 있는 게 아니라, 대신 빛의 유입으로 생체 내 ATP 합성이 활성화되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메커니즘이 있는 게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유사 광합성 과정이든 아니든 흥미로운 것은 빛 에너지가 동물(여기서는 진딧물이라는 곤충이지만)의 생체 에너지 합성에 직접 관여한다는 사실인데, 이들 진딧물은 어떻게 해서 카로티노이드를 합성하는 유전자를 획득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어떤 자연 선택과 진화의 흐름을 거쳐서 마치 광합성 과정과 유사한 생체 메커니즘을 구축하게 되었을까? 자연은 정말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온갖 파노라마를 생생하게 보여주는데, 아직 이 논문을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런 분야도 연구해보면 꽤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자연은 언제나 연구할 가치가 크다.


참고 문헌


[1] Valmalette JC, et al. 2012. Light-induced electron transfer and ATP synthesis in a carotene synthesizing insect. Sci Rep. 2: 579. [링크]
[2] Aphids may be first photosynthesising animal. New Scientist.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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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8월 27일 『한겨레』 온라인판에 「고양이판 ‘연가시’…감염 여성 자살기도 1.8배 높아」란 제목으로 정말 황당한 과학 기사가 하나 올라왔다 [1]. 솔직히 이 기사를 보고 실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기사에서 인용한 논문의 연구 목적과 결론이 저 멍청한 한겨레 과학 기사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당연히 기사에서 인용한 논문 가운데 하나를 읽었기 때문이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한겨레 과학 기사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다른 것은 군더더기에 불과하니 핵심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미국 메릴랜드약대의 테어도어 포스톨라치 교수는 최근 의학전문 학술지 <일반정신의학회보>에 고양이를 키우는 여성의 자살 위험이 일반인에 비해 1.5배 높다고 밝혔다. ......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자살을 기도한 경우가 1.8배 높았고, 자살을 생각한 경우도 2배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적인 자살 위험도는 1.54배 높았다. 미국 미시간대 약대의 레나 브룬딘 교수도 <임상정신의학> 8월호에서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사람들이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7배 이상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보고했다. [1] [굵은 글씨체는 필자가 임의로 표시했다]


위에서 인용한 단락 다음에 톡소포자충(toxoplasma, toxo胞子蟲; 학명은 Toxoplasma gondii 또는 T. gondii)의 다양한 감염 경로와 전 세계적으로 증가 추세인 톡소포자충 감염자 수를 설명하면서, 갑자기 숙주를 조종하는 바이러스 이야기를 늘어놓는 의도를 (또는 그런 전개 방식을 취한 이유를) 도무지 알 길이 없지만 [1], 그건 그것대로 넘어간다고 치자. 어차피 내가 문제 삼는 것은 글의 전개 방식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고양이판 ‘연가시’”라는 제목 일부와 “고양이를 키우는 여성의 자살 위험이 일반인에 비해 1.5배 높다”란 문장이다. 왜 이게 문제냐 하면, “고양이를 자살의 원인 제공원”으로 몰고 가면서 객관적 근거라고 인용한 두 논문, 즉 미국 메릴랜드 약대(University of Maryland, School of Medicine)의 테어도어 포스톨라치(Teodor T. Postolache) 교수 연구팀과 미국 미시간 주립대 약대(Michigan State University, College of Human Medicine)의 레나 브룬딘(Lena Brundin) 교수 연구팀이 독립적으로 진행한 두 연구 결과가 사실 “고양이와 자살”의 연관성을 살핀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연구한 것은 단지 “톡소포자충 감염과 자살의 연관성”일 뿐이다 [2, 3, 4, 5].


우선 포스톨라치 교수 연구팀이 밝힌 연구 목적부터 살펴보자. 연구 목적은 논문 초록에 명시되어 있다 [2].


To examine whether T gondii–infected mothers have an increased risk of self-directed violence, violent suicide attempts, and suicide and whether the risk depends on the level of T gondii IgG antibodies.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엄마에게서 자기를 향한 폭력(self-directed violence), 폭력적인 자살 시도(violent suicide attempts) 그리고 자살 위험이 증가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위험이 톡소포자충에 대한 IgG 항체 양(量)에 의존적인지를 조사하는 것임.


브룬딘 교수 연구팀의 연구 목적도 살펴보자. 마찬가지로 논문 초록에 명시되어 있다 [3].


The primary aim was to relate Toxoplasma gondii seropositivity and serointensity to scores on the self-rated Suicide Assessment Scale (SUAS-S). Another aim was to reevaluate the previously reported positive association between T gondii serointensity and a history of nonfatal suicidal self-directed violence.
일차적인 목표는 톡소포자충의 혈청 반응 양성(seropositivity)과 혈청 내부 존재량(serointensity)을 자가 자살 평가 척도(self-rated Suicide Assessment Scale, SUAS-S) 작성과 연계하는 것이다. 또 다른 목적은 톡소포자충의 혈청 내부 존재량과 비치명적 자살 충동성 자기 폭력(nonfatal suicidal self-directed violence)에 대한 전력(history, 前歷) 사이의 이전에 보고된 결정적인 연관성을 재평가하는 것이다.


두 논문의 연구 목적 어디에도 “고양이”에 관한 언급은 없다. 단지 본문에서 톡소포자충을 설명할 때 “잘 알려진 숙주”로 잠깐 나올 뿐이다. 다시 포스톨라치 교수 연구팀의 논문을 살펴보자 [2].


Felids have been identified as definitive hosts of T gondii, with the parasite multiplying sexually in the cats’ gut and spreading oocysts. Humans are infected by ingestion of oocysts spread from feces of infected cats (eg, contaminated sandbox and ingestion of unwashed vegetables), eating undercooked meat infested with T gondii cysts, using knives used to cut infested meat to further cut vegetables, and, occasionally, drinking water from a contaminated water source.
고양이과 동물(Felids)은 톡소포자충의 확실한 숙주(definitive host)로 확인되었으며, 고양이의 장(gut, 臟)에서 유성 생식으로 증식하고 접합자낭(oocyst, 接合子囊)으로 퍼진다. 인간은 감염된 고양이의 접합자낭을 삼키거나 (예를 들어, 오염된 모래 상자에서 놀거나 씻지 않은 채소를 삼키는 것) 섭취하거나, 톡소포자충 접합자낭에 감염된 덜 익힌 고기를 먹거나, 감염된 고기를 자를 때 사용한 칼로 채소를 잘랐거나, 때때로는 오염된 물을 마심으로써 감염된다.


포스톨라치 교수 연구팀 논문의 후반부에는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2].


A study among pregnant women in Norway found an increased risk of recent maternal T gondii infection associated with consumption of raw or undercooked meat, incompletely washed fruits and vegetables, cleaning the cat litter box, and washing the kitchen knives infrequently after preparation of raw meat, prior to handling another food item.
노르웨이 임산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날고기나 덜 익힌 고기 섭취, 완전히 씻지 않은 과일과 채소의 섭취, 고양이 용변통 청소, 날고기를 손질한 뒤에 잘 씻지 않은 부엌 칼로 다른 음식을 손질하기 등과 관련된 어머니를 통한 태아의 톡소포자충 감염 위험이 증가했음을 확인했다.


브룬딘 교수 연구팀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기사 두 편에서도 마찬가지로 톡소포자충 감염 경로에 대한 간단한 언급만 있을 뿐, 그 어디에도 고양이 때문에 톡소포자충 감염이 증가해 자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하진 않는다 [4, 5]. 다시 말하면, 위 두 논문이 다루는 내용은 고양이와는 전혀 상관없다.


그렇다면 두 연구팀이 표본을 선정하고 분석할 때, 고양이와의 접촉 여부를 고려했는가 하면 그것은 절대 아니다. 이들 연구팀은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적이 있는 여성을 대상으로만 조사했을 뿐, 이들이 실제로 고양이를 키우는지(또는 키운 적이 있는지), 고양이와 어느 정도 접촉했는지 등과 같은 사항은 고려하지도 않았다 [2, 3]. 그러니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연구는 고양이와 전혀 상관없단 소리가 되겠다. 사실이 이런데도 이근영 선임 기자는 두 연구팀의 결론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톡소포자충 감염으로 인한 자살 증가 가능성”을 애꿎은 고양이한테 뒤집어씌우고 있다.


더 웃긴 게 뭔 줄 아는가? 지난 5월 21일 한겨레 신문 온라인에 올라온 「고양이가 태아 유산 유발? 애호가들 ‘부글부글‘」이란 기사에서는 “톡소포자충 감염과 고양이 사이의 과도한 연관 짓기”에 대해 비판을 가한 적이 있으면서도 [6], 8월 27일 기사에서는 마치 일이 없었던 것처럼 “고양이를 자살 증가 원인” 가운데 하나로 규정짓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독립적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하더라도, 이처럼 “고양이”를 바라보는 과학적 시선에 일관성이 없다는 건 한겨레 신문 데스크에 어떤 문제가 있거나, 기자들 사이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든지, 아니면 소속 기자가 자기 신문에 올라오는 기사를 확인 안 한다는 뜻이 되겠다. 이것도 아니라면 기자가 고양이에 대해 “개인적 원한”을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도 해볼 수 있겠지만, 이건 또 지나친 비약일께다.


매번 느끼지만, 과학 기자들은 기사 쓸 때 제대로 된 전문가를 찾아가 제대로 된 조언을 받길 바란다. 조언만 제대로 받아도 기사가 뻘소리 탑재할 빈도수는 많이 줄어든다. 그리고 어떤 논문을 근거로 기사 쓸 때도 논문을 제대로 읽고 글쓰길 바란다. 솔직히 기사를 읽다 보면 글의 내용과 수준에 의구심이 들 때가 많은데, 대부분이 기자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글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논문을 읽다가 모르면 포기하지 말고 전문가한테 문의하는 성의라도 보였으면 한다. 그게 기사를 읽는 독자에 대한 예의 아닐까? 앞으로 불쌍한 “고양이”와 같은 선의의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길 바랄 뿐이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지 요원(遙遠)하기만 하다.



참고 문헌

[1] 이근영. 2012년 8월 27일. 「고양이판 ‘연가시’…감염 여성 자살기도 1.8배 높아」. 한겨레 신문 온라인. [링크]
[2] Petersen MG, et al. 2012. Toxoplasma gondii Infection and Self-directed Violence in Mothers Toxoplasma Gondii and Self-directed Violence. Arch Gen Psychiatry. 10.1001/archgenpsychiatry.2012.668. [Epub ahead of print] [링크] : 한겨레 기사에서 언급하고 인용한 “미국 메릴랜드약대의 테어도어 포스톨라치 교수” 연구팀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이 논문은 공공에 무료로 공개되지 않으므로, 허가를 받지 않으면 이 논문은 읽을 수 없다. 대신 논문 초록만 열람 가능하다. 하지만 필자는 어떤 경로로 이 논문을 직접 입수해서 논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Zhang Y, et al. 2012. Toxoplasma gondii Immunoglobulin G Antibodies and Nonfatal Suicidal Self-Directed Violence. J Clin Psychiatry. 73: 1069-1076. [링크] : 한겨레 기사에서 언급하고 인용한 “미국 미시간대 약대의 레나 브룬딘 교수” 연구팀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이 논문도 공공에 무료로 공개되지 않으므로, 오직 논문 초록만 열람 가능하다. 애석하게도 이 논문의 본문은 확인할 수 없었다.
[4] Paddock C. 2012. Common Parasite Linked To Suicide Risk. Medical News Today. [링크] : 레나 브룬딘 교수 연구팀의 연구를 소개한 온라인 기사다.
[5] Cody J. 2012. Common parasite may trigger suicide attempts. Michigan State University News. [링크] 위의 것과 마찬가지로 레나 브룬딘 교수 연구팀의 연구를 소개한 미시간 주립 대학의 소식지다.
[6] 김양중. 2012년 5월 21일. 「고양이가 태아 유산 유발? 애호가들 ‘부글부글‘」. 한겨레 신문 온라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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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여행할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이보다 흥분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장 가고 싶은 때가 언제야?” 누가 이런 질문을 내게 던진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겠다. “인류의 조상이 처음 출현했던 그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고 싶어.”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를 속박(束縛)하는 물리 법칙 때문에 정방향(正方向)의 시간 여행은 그럭저럭 할 수 있어도, 역방향(逆方向)의 시간 여행은 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 불행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물러설 수밖에 없나? 포기하긴 아직 이르다. 물리 법칙을 거스르면서까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수단은 없어도, 과거가 어땠는지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는 최소한의 힌트 정도는 다행히도 우리 주변 어딘가에 존재한다. 다만 너무 적을뿐더러 우리 대부분은 그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과거의 흔적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조상과 관련한 것이라면 (적어도 내게는) 경이로움과 흥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인류의 흔적은 때때로 신화와 미신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일단의 과학자 집단—예를 들면, 고인류학자 그리고 고유전학자—에게는 베일에 싸인 인류 진화의 미스터리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과학자 또는 인류학자가 인류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쓸 수 있는 수단이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기껏해야 고대 인류의 화석과 그들이 남긴 도구 또는 유적이 전부였다. 그것도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전체의 극히 일부밖에 안 되는 파편이라면 상황은 매우 힘들어진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 分子生物學)이 있다. 특히, 임의의 DNA 조각을 다른 DNA 조각에 집어넣을 수 있는 클로닝(cloning) 기법의 개발, DNA 염기 서열의 특정 부분을 인식해 그 부분만 자를 수 있는 제한효소(restriction enzyme, 制限酵素)의 발견, 특정 DNA 염기 서열을 증폭(增幅)해 배가(倍加)할 수 있는 중합 효소 연쇄 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 또는 PCR, 重合酵素連鎖反應)의 발견 등 생물학사에 기록된 놀라운 혁신 덕분에 과거에는 다가가기조차 어려웠던 고대 인류의 수수께끼 같은 서사시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컴퓨터와 같은 첨단 하드웨어의 발달은 과거의 수수께끼를 푸는데 강력한 도구가 되고 있다.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바로 강력한 주술과 지팡이를 가진 시간 여행을 하는 과학자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1.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들 — 고대 인류의 유전체를 연구하는 과학자 집단



 

그림 1. (왼쪽) 스반테 파보(Svante Pääbo) 박사 [출처: 위키피디아]. (오른쪽) 막스 플랑크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산하 진화 인류학(Evolutionary anthropology) 연구실 건물 전경(全景) [출처: 위키피디아].



독일 라이프치히(Leibzig)에 위치한 막스 플랑크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에는 스반테 파보(Svante Pääbo) 박사가 이끄는 진화 인류학(evolutionary anthropology, 進化人類學) 연구팀이 있다 [1]. 이곳에서는 인간,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의 DNA 염기 서열을 고대 인류의 유전자 정보와 비교함으로써 인류의 기원과 이동의 궤적 등을 밝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과정의 하나로 이 연구팀은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프로젝트(Neandertal Genome Project)라는 이름의 연구를 국제적 협업 형태로 진행하고 있다 [2] [그림 1].


2012년 8월 이 연구팀은 「고대 데니소바인 개체에서 얻은 광범위한 유전체 염기 서열(A High-Coverage Genome Sequence from an Archaic Denisovan Individual)」이란 제목으로 멸종한 고대 인류 가운데 하나인 데니소바인(Denisovan, -人) 유전체 정보 연구 결과를 『Science』에 발표했다 [3, 4, 5]. 사실, 파보 박사 연구팀이 고대 인류의 유전체 정보에 관한 연구를 보고한 때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전에도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 -人) 유전체 분석 결과를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한 적이 있으며 [6, 7],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데니소바인 유전체 분석 결과도 2010년에 한 차례 발표한 적이 있다 [8]. 따라서 단순히 고대 인류의 유전체를 분석했다는 측면에서 이 연구는 과거 연구와 비교했을 때 그리 새롭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번 연구는 기술적 측면과 그 분석 내용에서 고대 DNA(ancient DNA, 古代-) 연구에 획기적인 지평(地平)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2. 고대 DNA 연구의 어려움 (1) — 존재하는 것은 사라진다


분자생물학의 발전이 고대 인류 연구 발전에 도움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늘 그렇듯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 앞에는 새로운 (간혹 이전보다 더 골치 아픈) 문제가 도사린다 [9].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면 죽는다. (포식자한테 잡아 먹인 게 아니라면) 수명이 다한 생명체는 어떤 경로로든 썩기 마련이다. 여기서 “썩는다는 것”, 즉 부패(腐敗)는 유기 물질이 분해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부패를 흔히 단백질이 분해되는 과정으로 생각하지만, DNA와 RNA 등의 핵산(nucleic acids, 核酸)도 알고 보면 유기 물질이다. 따라서 부패 과정이 진행할 때에는 단백질뿐만 아니라 DNA와 RNA 같은 핵산도 같이 분해된다. 이때, DNA 분해 과정을 담당하는 것은 핵산 가수 분해 효소(nuclease, 核酸加水分解酵素)라고 불리는 단백질 고분자다.


그런데 사체(死體) 또는 그 주변 환경이 급격히 건조해지거나, 온도가 낮아진다든지, 또는 염분 농도가 매우 짙어지는 상황이 때때로 발생한다. 이 때문에 핵산 가수 분해 효소가 파괴되거나 이 효소의 핵산 분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 있다 [9]. 결과적으로 DNA가 분해되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고대 DNA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운빨(?)은 없다. 하지만 고대 DNA를 연구하는 사람에겐 이것보다도 더 큰 행운이 필요하다. (사실 모든 연구자에겐 엄청난 행운이 필요하다. 오죽하면 운빨도 실력이라는 소리가 있을까?) 바로 물리화학적 반응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DNA의 자발적 분해와 복원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염기 서열의 치환(substitution, 置換) 때문이다 [9] [그림 2].



그림 2. 이중 나선 형태의 DNA 가운데 한 가닥을 모식화한 그림. DNA 구성 요소인 아데닌(adenine 또는 A), 티민(thymine 또는 T), 시토신(cytosine 또는 C) 그리고 구아닌(guanine 또는 G)을 DNA 한 가닥에 묘사했다. 효소가 관여하지 않는(non-enzymatic) 자연적 손상(damage, 損傷)이 발생할 수 있는 부분을 화살표로 표시했다. 초록색 화살표는 가수 분해(hydrolysis, 加水分解)가 일어나는 부분이며, 빨간색 화살표는 탈 퓨린화(depurination, 脫-化)가 발생하는 지점이고, 파란색 화살표는 산화(oxidation, 酸化)가 일어나는 곳이다 [9] [출처: Nature Review Genetics].



예를 들면, DNA를 구성하는 질산 염기(nitrous base)와 당-인산 뼈대(sugar-phosphate backbone)가 자연 방사선(background radiation, 自然放射線)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거나 이곳에서 산화(oxidation, 酸化)가 발생하면 DNA 자체에 어떤 변화—예를 들면, 원래의 염기가 다른 염기로 변하거나 DNA가 잘리는 것—를 수반(首班)할 수 있다 [그림 2]. 탈 아미노화(deamination, 脫-化), 탈 퓨린화(depurination, 脫-化), 그리고 가수 분해(hydrolysis, 加水分解) 등과 같은 작용도 DNA 분자 자체의 안정성을 낮추므로, 외부로 노출된 DNA가 분해될 수도 있다 [그림 2]. 지금부터 아주 잠깐만 (사실은 좀 길다) 이런 현상이 고대 DNA 연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3. 고대 DNA 연구의 어려움 (2) — 시간 여행을 가로 막는 것


고대 DNA 염기 서열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바로 DNA 라이브러리(DNA library) 제작이다. DNA 라이브러리란 어떤 생명체의 유전체 정보를 클로닝 기법 등으로 DNA 절편(fragment, 切片) 형태로 조각내어 모아 놓은 일종의 거대 유전자 묶음이다 [10]. 유전체 염기 서열 분석 전에 DNA 라이브러리를 제작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왜냐하면, 유전체 크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길기 때문이며 (만약 상상할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분석할 때마다 생명체 안에서 DNA를 매번 추출하는 일도 매우 번거롭다. 따라서 유전체 정보를 라이브러리로 구축해 놓으면 보관과 합성이 매우 용이(容易)하다. 물론,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분석하고자 하는 DNA 양이 충분하면 라이브러리를 만들지 않고도 곧바로 유전체를 분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고대 DNA 연구에서 라이브러리를 구축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화석 또는 사체에서 일차적으로 추출한 DNA 양이 바로 분석하기에는 너무 적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 DNA 염기 서열 분석의 성공과 정확도를 위해 고품질의 DNA 라이브러리를 제작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림 3. 중합 효소 연쇄 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 또는 PCR, 重合酵素連鎖反應)에 관한 모식도. (A) 증폭하고자 하는 주형(template, 鑄型) DNA를 약 95°C로 가열해 상보적(complementary, 相補的)으로 결합한 이중 가닥 DNA(double-stranded DNA)를 단일 가닥 DNA(single-stranded DNA)로 분리한다. (B) 분리된 단일 가닥 DNA를 55°C로 냉각해 특정 염기 서열과 상보적 결합할 수 있는 프라이머(primer)와 결합시킨다. (C) 표본을 75°C로 가열해 DNA 중합 효소(DNA polymerase, -重合酵素)가 프라이머와 상보적으로 결합한 단일 가닥 DNA에 붙어 상보적인 긴 가닥을 합성할 수 있도록 한다. (A)~(C)까지 일련의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 원하는 DNA를 대량으로 얻을 수 있다 [출처: Ocean Explorer].



염기 서열 분석을 위한 DNA 라이브러리를 (특히 고대 DNA) 구축할 때 PCR 기법을 주로 이용한다. 이때 주형(template, 鑄型) DNA로 상보적으로 결합한 두 가닥 형태의 DNA를 주로 사용한다 [그림 3]. 원하는 DNA만 선택적으로 증폭할 수 있는 PCR 반응에서 DNA 중합 효소(DNA polymerase, -重合酵素)는 이론적으로 주형 DNA와 똑같은 염기 서열을 가진 복제 DNA를 합성한다. 따라서 그림 3에 묘사된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 특정 염기 서열을 가진 DNA를 대량으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라이브러리를 제작할 때 사용하는 주형 DNA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다면, DNA를 증폭할 수 없거나 잘못된 염기 서열을 가진 복제 DNA만 잔뜩 늘어날 수 있다. 특히, 고대 DNA로 라이브러리를 제작할 때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 예를 들어, 화석에서 추출한 고대 DNA의 시토신과 티민 상당수는 외부에 노출되었을 때 산화되는 경향이 크다. 그러므로 이런 DNA를 주형으로 사용해서 PCR 반응을 할 때 원하는 DNA를 합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9]. 그리고 DNA가 외부에 오래 노출되었을 때 흔히 나타나는 시토신 염기의 탈 아미노화로 (원래 생명체의 염기 서열이 아닌) 잘못된 서열을 가진 DNA가 과도하게 증폭될 수도 있다 [9].


외부 DNA 오염으로 잘못된 DNA 라이브러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9]. 외부로 노출된 DNA는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분해된다. 따라서 오래된 화석일수록 그 안에 존재하는 DNA 양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체가 부패하는 과정에서 유입된 미생물의 DNA 또한 상대적으로도 화석에 많이 잔존한다. (실제로 라이브러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얻은 DNA의 90% 이상은 미생물의 DNA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화석 발굴자 또는 연구자의 상피세포나 머리카락 등을 통해 유입된 외부 DNA로 화석이 오염된다면 고대 인류의 유전체 연구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런 것들을 철저히 배제하지 못하면, 신뢰할만한 고대 DNA 라이브러리를 얻지 못할뿐더러 말 그대로 돈 날리고 시간 날리는 불쌍한 꼴이 되고 만다. 실제로 파보 박사 연구팀이 2006년에 발표한 첫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연구는 외부 DNA(특히 현생 인류의 DNA)로 오염된 DNA 라이브러리를 사용한 덕분에 시쳇말로 “폭풍 까임”을 당하기도 했다 [6, 11]. 물론 4년 뒤인 2010년에 문제의 소지를 거의 배제한 상태에서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초안”을 발표했지만 [7], 결과적으로 고대 DNA는 앞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이 따른다.


4. 기술의 혁신 — 장애물을 뛰어 넘기 시작하다


파보 박사 연구팀이 2012년도에 발표한 논문(앞으로 이 논문을 “「Meyer, et al.」”이라고 부르겠다)의 중요성 가운데 하나는 앞에서 설명한 고대 DNA 연구의 문제점, 특히 라이브러리 제작의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3, 4, 5]. 필자는 앞에서 DNA 라이브러리를 제작할 때 이중 가닥 DNA를 주로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고대 DNA를 주형으로 사용해 통상적인 방법으로 라이브러리를 제작할 때에 어려움이 있음을 곧바로 설명했다. 「Meyer, et al.」이 발표되기 전 파보 박사 연구팀에서 발표한 고대 인류 유전체 연구는 모두 통상적인 방법으로 제작한 라이브러리를 사용했다 [6, 7, 8] [그림 4, A와 B를 참고할 것]. 그런데 「Meyer, et al.」에서는 이중 가닥 DNA를 단일 가닥 DNA로 전환해 DNA 라이브러리를 제작하는 방법을 사용해 고대 인류 유전체를 분석했다 [3] [그림 4, C를 참조할 것].



그림 4. 고대 DNA 라이브러리 제작 과정에 관한 모식도. (A) 454 라이프 사이언스(454 Life Science)에서 고안한 제작법. 고대 DNA 조각(회색으로 표시됨)에서 단일 가닥으로 존재하는 부분을 복구 효소(repair enzyme, 復舊酵素)를 이용해 이중 가닥으로 만들고, 두 개의 서로 다른 어댑터 DNA(adaptor DNA, 파란색과 빨간색)를 DNA 양쪽 끝에 연결한다. PCR 반응에서 오직 서로 다른 두 개의 어댑터 DNA를 가진 고대 DNA만 증폭될 수 있다. (B) 일루미나(Illumina) 고안한 제작법. 결손 부분을 보충하는 방식은 454 라이프 사이언스의 것과 같다. 그러나 다음 단계에서 DNA의 3’ 양 끝에 아데닌을 붙여 오버행(overhang)을 만들고, 여기에 3’ 끝에 티민이 오버행 형태로 연결된 어댑터 DNA가 상보적으로 결합해 그림과 같은 형태가 만들어진다. (C) 「Meyer, et al.」에서 사용한 제작법. 주형 DNA에 열을 가해 이중 가닥을 단일 가닥으로 분리한 다음에 바이오틴(biotin)이 결합한 어댑터 DNA를 단일 가닥 DNA 끝에 연결한다. 이 DNA 복합체를 바이오틴과 강하게 결합하는 스트렙타비딘(Streptavidin) 단백질이 붙어 있는 젤(gel)에 연결해 PCR 반응으로 증폭해 DNA를 증폭한다 [3] [출처: Science].



「Meyer, et al.」에서 사용한 라이브러리 제작법의 최대 강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 발생하는 고대 DNA 염기 서열 변화 때문에 나타나는 오류 가능성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중 가닥 DNA를 주형으로 사용하는 기존 라이브러리 제작법은 어느 한 가닥에 돌연변이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배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증폭 과정에서 그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단일 가닥 DNA를 주형으로 사용하는 라이브러리 제작은 (돌연변이가 발생한 단일 가닥 DNA도 증폭하지만) 돌연변이가 발생하지 않은 다른 가닥도 분석 가능한 정도의 양으로 증폭해 기존 방법보다 더 많은 풀(pool)을 확보할 수 있었다 [3].


그뿐만이 아니다. 전반적인 수율(yield, 收率)에서도 기존 방법과 비교했을 때 괄목(刮目)할만한 향상이 보였다 [3]. 유전체 염기 서열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도(accuracy, 正確度)다. 정확도가 어느 수준 이상 확보되어야만 신뢰도 또한 높아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유전체 A에 해당하는 표본을 단지 한 개 갖고 있을 때보다 두 개 또는 그 이상 갖고 있을 때 라이브러리 제작과 염기 서열 분석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실험적 오차를 현저히 줄일 수 있다. 실제로 2010년도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연구와 같은 해 발표된 데니소바인 유전체 연구에서 사용한 라이브러리 안에는 복제 DNA가 각각 평균 1.3개와 1.9개였지만, 「Meyer, et al.」에서 사용한 단일 가닥 라이브러리는 이전보다 양적으로 6~22배 증가한 복제자를 확보했다 [3, 5]. 따라서 파보 박사 연구팀은 「Meyer, et al.」에서 예상되는 데니소바인 유전체 가운데 99.99%에 해당하는 염기 서열을 높은 정확도와 신뢰도로 분석할 수 있었다 [3].


5. 데니소바인은 누구인가? — 현생 인류도 아닌 네안데르탈인도 아닌 존재


샛길로 많이 빠진 것 같다. 글 쓰는 나도 정말 힘들다. 뻘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Meyer, et al.」의 내용을 살피기로 하자. 그런데 중요한 것을 하나 빼먹었다. 바로 데니소바인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일이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데니소바인은 일반인에게 매우 생소하다. 심지어 나 같은 D급 아마추어 고인류학도에게도 데니소바인은 정말 생소하다. 물론 나는 아마추어에 심지어 D급이니 몰라도 죄가 되진 않는다. 하하하.



 

그림 5. (왼쪽) 데니소바 동굴(Denisova Cave)에서 발굴된 데니소바인의 어금니 뼈 [8] [출처: Fox News]. (오른쪽) 데니소바 동굴의 위치 [출처: BBC News].



데니소바인은 인간 속(genus, 屬)에 속하는 구석기 시대의 멸종한 고대 인류로 러시아 고고학 연구팀이 2008년에 시베리아 남쪽 알타이 산맥(Altai Mountains)에 위치한 데니소바 동굴(Denisova Cave)에서 처음 발굴했다 [12]. 당시 발굴된 잔해는 어린 소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손가락 뼛조각과 어금니 두 개 그리고 팔찌 형태의 유물이 전부였는데, 탄소 동위원소 연도 측정 결과 약 3~5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분자생물학이 없었다면 이 소녀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어떤 연구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 화석 주인의 나이는 (비록 전체 몸 가운데 일부일지라도) 화석 형태로 어림잡아 가늠할 수 있지만, 성별 파악은 순전히 염기 서열을 분석해서 알아낸 것으로 알고 있다. — 하지만 운 좋게도 유골 일부가 발견된 시기는 고대 DNA 연구가 활발한 때였다.


행운이 여기에서 멈출 리가 없다. 이런 것을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인지 몰라도, 데니소바 동굴의 자연환경은 DNA가 보존되기 좋은 최적 조건—이곳의 연간 평균 온도는 약 0°C이다—이었다 [12]. 주저할 것도 없었다. 파보 박사 연구팀은 어린 소녀의 손가락 뼛조각에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추출해 분석했으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1)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그리고 현생 인류는 약 1백만 년 전에 공통 조상에서 분지(divergence, 分枝)했으며 (참고로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은 약 46만 6천 년 전에 분지했다), (2) 데니소바인은 네안데르탈인과는 별개의 종(species, 種)으로 아프리카 바깥 지역으로 처음 퍼져 나간 고대 인류가 독자적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지만, (3) 그렇다고 네안데르탈인과 고대 현생 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와는 유전적으로 다른 고대 인류에서 진화했다고 추측된다 [13] [그림 6]. [미토콘드리아 DNA를 이용한 계통 분석은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연구 (1) —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프로젝트 이전의 상황에 대한 고찰」을 참조하라.]



그림 6. (왼쪽) 다양한 인종을 대표하는 오늘날 현생 인류 54명과 신생대 홍적세에 살았던 고대 현생 인류,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데니소바인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이용한 계통 분석 결과. 계통 분석에서 침팬지와 보노보 원숭이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외군(out-group, 外群)으로 사용했다. (오른쪽) 계통 분석에 사용한 미토콘드리아 DNA의 출신 지역을 나타내는 지도. 왼쪽 그림의 계통 분석도에 나와 있는 숫자가 오른쪽 지도에 그대로 표시되어 있다 [13] [출처: Nature].



그리고 같은 해에 발표된 파보 박사 연구팀의 논문에서는 소녀의 손가락 뼛조각에서 추출한 DNA로 데니소바인 유전체를 분석했는데, 흥미로우면서도 어떻게 보면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와 상충(相衝)하는 결과가 나왔다 [8]. (1) 미토콘드리아 DNA를 사용한 계통 분석 결과와 달리 유전체 비교•분석에서는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현생 인류보다 더 가까운 공통 조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는 약 80만 4천 년 전에 분지했지만,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약 64만 년 전에 분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2) 그렇지만 미토콘드리아 분석 결과와 마찬가지로 데니소바 소녀는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다. (3) 네안데르탈인이 유럽인, 서아시아인 그리고 중앙아시아인 전체 유전체 가운데 1~4%에 해당하는 유전적 기여(genetic contribution)를 한 것과 달리, 데니소바인은 오세아니아와 동남아시아에 거주하는 멜라네시아인(Melanesian) 계통 현생 인류의 유전체 가운데 4~6%에 해당하는 유전적 기여를 했다. (4)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굴한 손가락 뼛조각과 어금니 뼈에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추출해 분석했을 때, 화석의 주인은 동일 인물이 아니라 같은 개체군에 속하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며, 둘 사이의 생존 시기는 약 7천5백 년 정도 차이가 난다 [8].


뭔가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지는가? 잘 안 그려져도 상관없다. 내가 설명할 테니 말이다. 명확한 것부터 짚어 보자. 우선 데니소바인은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와 별개의 종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들 사이의 진화적 관계가 명확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에서는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가 진화적으로 가깝다고 말하지만, 유전체 분석에서는 오히려 네안데르탈인이 데니소바인과 진화적으로 가깝다고 속삭인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이에 대해 파보 박사 연구팀은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다. (1) 데니소바인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아주 오래전(1백만 년 전)에 네안데르탈인과 고대 현생 인류에서 분지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 안에 존재하던 고대 조상의 흔적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2) 이들 고대 인류가 서로 배타적이지만 않다면,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고대 인류가 데니소바인 집단에 흘러들어 자신의 유전자를 집단 안에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런 과정이 자주 일어나다 보면 데니소바인 집단과 네안데르탈인 집단 사이에 (적어도 유전체에서는) 차이가 줄어들 수 있으므로 유전체를 비교했을 때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진화적으로 더 가깝게 나타날 수 있다. (3) 우연히도 데니소바인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고대 조상 형태로 회귀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8].


이와 대조적으로 좀 더 분명해진 것도 있다.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분석에서도 나타났듯이 데니소바인 유전체 분석에서도 고대 현생 인류가 과거 어느 시점에 (적지만 어느 정도는)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과 같은 고대 인류와 이종 교배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지리적 분포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오늘날 현생 인류의 유전체 안에 나타나는 고대 인류의 흔적으로 확실히 뒷받침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적 추론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이 데니소바 동굴에서 손가락 뼛조각의 주인과 비슷한 연대에 살았으리라 추정되는 고대 인류의 발가락뼈도 발견되었는데,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으로 이 발가락뼈 주인은 (아마도) 네안데르탈인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13]. 자세한 사항은 「Meyer, et al.」처럼 유전체를 분석해야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과거의 진실 앞에 한 걸음 더 전진했다.


6. 데니소바인,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다


기술적 진보는 불확실한 어떤 존재에서 “불확실함”을 덜어낼 좋은 수단을 제공한다. 「Meyer, et al.」의 연구는 데니소바인이란 존재에 도사리고 있는 “불확실함”을 덜어낸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010년에 발표된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유전체 연구는 고대 DNA 연구라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둠을 걷어낼 차례다. 「Meyer, et al.」은 2010년도 연구에서 드러난 자료의 불완전함과 해석의 모호함, 그리고 이 때문에 제기된 몇 가지 반론을 일소(一掃)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림 7. 데니소바인 유전체와 다양한 인종을 대표하는 오늘날 현생 인류의 유전체를 비교한 계통 분석도. 아프리카 계통인 산인(San), 므부티인(Mbuti), 요루바인(Yoruba), 마뎅카인(Mandenka) 그리고 딩카인(Dinka)은 파란색 글자; 유럽 계통인 사르데냐인(Sardinian)과 프랑스인(French)은 주황색 글자; 초록색은 아시아 계통인 한인(Han) 그리고 다이인(Dai)과 남아메리카 계통인 카리티아나인(Karitiana)은 초록색 글자; 멜라네시아 계통인 파푸아인(Papua)은 붉은색 글자로 표기했다. 데니소바인은 맨 아래쪽에 검은색 글자로 표시했다. 노란색 선은 데니소바인에서 파푸아인으로 유전자 확산(gene flow)이 있었음을 뜻하며, 선 위 숫자는 유전자 기여 정도를 나타낸다. 각 인종의 지리적 분포는 그림 8을 참조하라 [3] [출처: Science].



「Meyer, et al.」은 새롭게 분석한 데니소바인 유전체를 각 인종을 대표하는 11명의 현생 인류—아프리카 계통인 산인(San), 므부티인(Mbuti), 만뎅카인(Mandenka), 요루바인(Yoruba), 딩카인(Dinka); 유럽 계통인 사르데냐인(Sardinian)과 프랑스인(French); 아시아 계통인 한인(Han), 다이인(Dai); 멜라네시아 계통인 파푸아인(Papua); 남아메리카 계통인 카리티아나인(Karitiana)—의 유전체와 염기서열을 비교했다 [그림 7, 그림 8]. 이때 인간-침팬지의 DNA 염기 서열 분지 시점을 약 6백5십만 년 전이라고 가정했을 때, 데니소바인과 현생 인류가 분지한 시점은 약 80만 년 전으로 파보 박사 연구팀의 2010년도 연구 결과와 일치하는 편이다 [3, 8]. 그런데 여기서 산출해 낸 결과는 각 개체의 DNA 염기 서열이 처음으로 분지한 시점으로, 각 개체가 속하는 집단이 최초로 분지한 시점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Meyer, et al.」은 네안데르탈인 등과 같은 고대 인류와 그 어떤 유전적 혼합이 없었으리라 생각되는 오늘날 서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유전체를 데니소바인 유전체와 비교해 데니소바 개체군과 고대 현생 인류 개체군이 분지한 시점을 조사했다. 그 결과, 데니소바인 집단과 고대 현생 인류 집단은 대략 17만~70만 년 전 사이에 처음 분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3]. 그런데 오차 범위가 너무 넓다. 무려 50만 년이라니 너무 심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까지 인간의 염기 서열 돌연변이율이 정확히 측정되지 않았고 (사실 측정하기도 매우 어렵다고 한다) 지금도 논쟁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 정도로 그냥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Meyer, et al.」은 데니소바인, 침팬지 그리고 현생 인류 사이의 염기 서열 차이도 조사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데니소바인-침팬지의 염기 서열 차이가 현생 인류-침팬지 사이 염기 서열 차이보다도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Meyer, et al.」은 이것을 근거로 데니소바 소녀가 살았던 시기를 유전자 연도 측정법(genetic dating, 遺傳子年度測定法)으로 확인한 결과, 소녀가 생존했던 시기는 7만 4천~8만 2천 년 전 사이로 밝혀졌다 [3].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탄소 동위원소 측정법에서는 이 소녀의 생존 시기가 약 3만~5만 년 전 사이였던 것으로 나왔는데 [12], 유전자 연도 측정법은 무려 약 2만 년 정도 앞선 시기에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나도 전문가가 아니라서 나는 D급 과학도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대신 이런 식으로는 대충 설명할 수 있어 보인다. 동위원소 연도 측정법으로 화석 주인이 살았던 시기는 일반적으로 화석이 출토된 지층의 퇴적층(정말 오래된 화석은 변성암) 안에 들어 있는 특정 동위원소의 비율을 계산해 반감기(half-life, 半減期)를 역으로 환산해서 도출(導出)한다. 데니소바인 소녀가 살았던 시기를 탄소 동위원소 측정법으로 확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때 연도 측정 조사 대상은 같은 지층에서 출토된 유물이었다 [12]. 이와는 달리, 「Meyer, et al.」은 침팬지, 데니소바인, 현생 인류 사이에서 염기 서열 치환(substitution, 置換)이 일어난 횟수를 계산한 다음, 침팬지-현생 인류 사이의 분지 시점이 약 6백50만 년일 때를 기준으로 염기 한 개가 치환될 때 평균적으로 소요되는 시간을 계산해서, 이것을 바탕으로 데니소바인 소녀의 생존 시기를 결정했다 [3]. 무엇이 더 정확하고 신뢰할만한지 나로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Meyer, et al.」은 자신들이 연도 측정할 때 사용한 방법이 (할 수만 있다면) 좋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이 방법을 사용하면서) 출처가 다양한 오차가 이러한 (연도) 측정에 영향 줄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현생 인류에게 발생했을 것으로 추론되는 치환된 염기의 수가 데니소바인 뼈에서 측정된 것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양까지 다양하다”란 변명(?)으로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갔을 뿐이다 [3, 18].


7. 고대 인류의 흔적이 우리 안에 있다


파보 박사 연구팀은 두 편에 걸친 2010년도 논문에서 오늘날 현생 인류의 유전자 안에 고대 인류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7, 8]. 그러나 당시 분석법에는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2010년도 논문에서 사용한 분석 모델에서는 현생 인류의 유전체 안에 있는 네안데르탈인(또는 데니소바인) 흔적이 고대 현생 인류와의 유전적 혼합으로 나타난 게 아니라, 오래전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었던 다른 유전적 집단의 고대 현생 인류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5]. 실제로 일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고대 인류가 아프리카 외부로 퍼져 나가기 전에 크게 두 부류의 유전적 다양성을 나타내는 고대 인류 집단이 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에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두 집단 가운데 하나는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 등에서 흔히 나타나는) 고대 DNA의 특성을 그대로 지닌 채 동아프리카를 떠나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먼 훗날 네안데르탈인 또는 오늘날 현생 인류로 진화했고, 또 다른 집단은 조상은 아프리카 지역 등에서 더 오래 머물면서 조상이 과거 갖고 있던 고대 DNA의 특징을 소실한 채 오늘날 사하라 사막 아래쪽에서 살고 있는 아프리카인의 기원이 되었다 [5]. 뭔가 그럴싸해 보인다. 이런 식의 시나리오는 왜 유럽인, 중앙아시아인, 서아시아인의 유전자 안에 네안데르탈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왜 멜라네시아 인 등의 유전자 안에는 데니소바인의 유전자 흔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오늘날 아프리카인 유전자 안에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유전자 흔적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개연성 있게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Meyer, et al.」에서는 그런 시나리오 자체가 현실적으로 희박하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고대 현생 인류가 적어도 두 번 정도 고대 인류와 유전적 혼합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3, 5].


게다가, 파보 박사 연구팀에서는 오늘날 유럽인의 조상이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고대 DNA라는 과거 유물을 받은 시점이 약 8만 6천~3만 7천 년 사이임을 산출해 냈다 [5]. 그런데 고대 현생 인류가 자신이 살던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다른 대륙으로 진출한 시기가 약 12만 5천~6만 년 전 사이이고,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아프리카 바깥으로 퍼져 나간 시기가 약 1백8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직계 조상이라고 알려진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Homo Heidelbergensis, 보통 하이델베르크인이라 불린다)가 유럽으로 진출한 시기가 약 60만 년 전임을 감안(勘案)하면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 사이에 발생한 유전자 혼합이 최근에 일어났음을 뜻한다 [19]. 더불어, 앞의 반박 시나리오는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특히, 유럽인과 멜라네시아인)가 공통으로 갖는 고대 유전자의 흔적이 공통 조상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데, 이들이 진화한 시기가 다르고 오늘날 현생 인류의 공통 조상이 아프리카 중부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해서 나타났음을 고려한다면 마찬가지로 그러한 시나리오는 애당초 불가능해 보인다.



그림 8. 동남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에 거주하는 오늘날 현생 인류의 유전체 안에 존재하는 데니소바인 유전자 흔적 정도. 그림에 알파벳 대문자로 표기된 약자는 인종(race, 人種)을 뜻한다. 각각의 원에서 검은색이 차지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데니소바인과 유전적 혼합이 많음을 뜻한다 [14] [출처: American Journal of Human Genetics].



파보 박사 연구팀의 2010년도 데니소바 유전체 연구에서는 멜라네시아 계통 현생 인류 유전체의 약 4~6%가 데니소바인 유전체에서 유래했다고 나타났는데, 「Meyer, et al.」에서는 그 주장을 다시 한 번 재확인했다. 실제로 「Meyer, et al.」의 분석에 따르면 멜라네시아인 계통인 파푸아인의 유전자 가운데 약 6% 정도가 데니소바인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3] [그림 7, 노란색 선].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이전에 주장했던 대로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현생 인류 가운데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로 이주한 사람이 과거 어느 시점에 데니소바인과 유전적 혼합을 거쳤음을 강하게 방증(傍證)하고 있다 [8, 14] [그림 8]. 그리고 과거 일부 연구자가 주장한 한인(Han, 그림 8에서는 HA로 표기)과 다이인(Dai, 그림 8에서는 DA로 표기)의 데니소바인과의 유전적 혼합 가능성에 대해서도, 「Meyer, et al.」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있지만, 매우 희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3, 15]. 어쨌거나 그림 8을 보면 데니소바인의 유전자 흔적이 일부 지역에 국한해 나타남을 확실히 알 수 있다.


「Meyer, et al.」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유럽인보다는 동남아시아 계통 현생 인류가 네안데르탈인 DNA의 특징을 더 많이 공유한다는 사실이다 [3, 5]. 이것이 사실이라면 네안데르탈인이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진출해 그곳에 유입한 고대 현생 인류와 서로 이종교배를 했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사실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네안데르탈인 화석은 지금까지 유럽과 서아시아 인근에서만 발굴되었고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타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네안데르탈인에서 현생 인류도 독립적으로 두 번 유전자 유입이 있었을 가능성과 (2) 유럽에서 살고 있는 고대 현생 인류의 유전자 안에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유입된 후에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흔적이 희석되어 결과적으로 동남아시아인이 유럽인보다 네안데르탈인 유전자 흔적을 더 많이 갖게 되었을 수도 있다 [3]. 하지만 어느 것도 확실치는 않다.


「Meyer, et al.」에서 또 한 가지 눈여겨 볼만한 만한 결과가 있다. 파푸아인을 대상으로 한 비교 유전체 연구 결과에서 데니소바인 유전자 흔적이 성염색체(특히, X 염색체)보다는 상염색체(autosomal chromosome, 常染色體)에서 더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3]. 이러한 패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크게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다. (1) 데니소바인 남성이 고대 현생 인류 여성과 이종교배를 했거나 (2) 데니소바인의 X 염색체와 현생인류의 X 염색체 사이 조합이 유전적으로 부적합해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으로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3, 5]. 특히 (2) 번 가설은 XX라는 성염색체 조합을 갖는 여성 잡종이 XY라는 성염색체 조합을 갖는 남성 잡종보다는 결과적으로 생존에 부적합했을 것이란 추측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어쨌든, 성염색체보다 상염색체에 데니소바인의 유전자 흔적이 더 많이 남아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네안데르탈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데니소바인과 현생 인류 사이의 조합도 전반적으로는 (어떤 환경적/사회적 조건이 원인인지는 알 수 없어도) 생존에 불리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8. 데니소바인의 유전적 다양성


품질(?)이 좋으면 이전에 할 수 없던 것도 간혹가다가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Meyer, et al.」에서 분석한 데니소바인 유전체는 예상되는 유전체 크기의 99.99%에 해당하는 양이다 [3].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냐 말한다면 나도 할 말 없다. 내가 한 연구도 아니니. 이처럼 고품질의 DNA 정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데니소바인의 여러 측면을 (비록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유의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유전적 다양성(genetic diversity, 遺傳的多樣性)도 마찬가지다. 원래 이런 연구를 하려면 다양한 개체를 대상으로 포괄적으로 수행해야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정체를 드러낸 데니소바인은 겨우 둘(손가락 뼛조각의 주인과 어금니 뼈의 주인)일뿐더러 유전체 분석에 사용한 표본은 오직 손가락 뼛조각뿐이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명의 데니소바인에 관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유전적 다양성을 분석하는 일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염색체는 항상 쌍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염색체는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쌍으로 묶을 수 있는 염색체를 상동 염색체(homologous chromosome, 相同染色體)라 부른다. 상동 염색체 가운데 하나는 아버지한테서 받은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어머니한테서 받는 게 일반적인 법칙이다. 그런 예외를 벗어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사람도 아니다 (농담이다). 따라서 상동 염색체 사이의 염기 서열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면, 비록 하나의 개체에서 뽑은 유전체라 하더라도 유전적 다양성이 어떻게 되는지를 대략 파악할 수 있다. 그 결과 데니소바인의 이형 접합체 빈도(heterozygocity, 異型接合體頻度)는 약 0.022%로 나타났다 [3]. 이것을 오늘날 현생 인류의 이형 접합체 빈도와 비교해보자. 아프리카인은 약 20%, 유럽인/아시아인은 약 26~33%, 남아메리카의 카리티아나인은 약 36%다. 결과로만 놓고 본다면 데니소바인의 유전적 다양성이 오늘날 현생 인류보다도 확연히 낮다. 파보 박사 연구팀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데니소바인 소녀가 단순히 근친 교배(近親交配)로 태어난 개체이기 때문에 유전적 다양성이 낮게 나타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신, 그들은 (이 소녀가 속한) 데니소바인 집단의 크기가 이 시기에 상당히 작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났으리라 추정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생 인류는 이 시기, 즉 12만 5천~25만 년 사이에 집단 크기가 두 배로 커졌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데니소바인의 유전적 다양성을 확인하기 위해 끌어들인 데니소바인은 단 한 명뿐이다. 앞으로 더 많은 데니소바인 화석을 발굴해 같은 방식으로 연구한다면 이들의 유전적 다양성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9. 데니소바인의 유전적 특징


완전한 데니소바인 화석이 없으므로(있어도 손가락 뼛조각 일부와 어금니 뼈 두 개가 전부다) [12], 현실적으로 데니소바인의 외형적 특징을 알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이 어느 때인가? 인간이 할 수 없는 게 아직 많다고는 하더라도 과거와 비교했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데니소바인에 관한 그 어떤 해부학적 근거(예를 들어, 어느 정도 완전한 모습을 갖춘 두개골 화석 등)가 거의 없더라 하더라도, 유전학적 정보 분석을 통해 적어도 데니소바인의 모습 정도는, 백 퍼센트 확신은 못해도,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연구도 있다 [16]. 2012년 「유전체 자료를 통해 인간 피부색 표현형을 예측하기: 네안데르탈인에서 제임스 왓슨까지(Predicting Homo Pigmentation Phenotype Through Genomic Data: From Neanderthal to James Watson)」란 제목으로 『미국 인간 생물학 저널(American Journal of Human Biology)』에 발표된 논문에서는 인간의 피부색을 포함한 표현형(phenotype, 表現型) 다수가 몇 가지 유전자가 복합적으로 관여해 나타난 결과라는 사실에 착안해, 인종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 표현형(특히 피부색과 관련된 것)과 유전체와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그 결과, 이 연구팀은 주근깨 존재 여부, 피부 색, 머리카락 색, 그리고 눈동자 색을 각각 91%, 64%, 44% 그리고 36%의 확률로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평균 59% 정도에 해당하는 예측률이다) [16].



 

그림 9. (왼쪽) 데니소바인의 모습을 복원한 결과. 「Meyer, et al.」 결과가 발표되기 전 누군가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 설명한 모습과 비슷해 보이는가? (오른쪽) 오늘날 멜라네시아인의 모습. 왼쪽 사진의 데니소바인과 비슷해 보이는가? [출처: Ancient & Lost Civilizations]



그렇다면 우리의 데니소바인 소녀는 어떤 모습일까? 「Meyer, et al.」은 앞에서 소개한 색소 분포 예측에 관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데니소바인의 모습을 추측해봤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데니소바인 소녀는 피부가 검은 편이고, 은은한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렸으며, 갈색 눈으로 사물을 응시(凝視)했지만, 피부에 주근깨는 없었다 [3] [그림 9]. 물론 「Meyer, et al.」은 (아무리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를 뒀다 하더라도)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바로 데니소바인 얼굴에 주근깨는 없다는 것 말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유전체를 기반으로 한 색소 분포 예측 방법은 무려 91%라는 놀라운 확률로 주근깨 유무를 판단할 수 있다!! 어쨌든 이것도 좀 더 완전한 데니소바인 화석이 발굴되면 확실히 밝혀질 일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데니소바인의 핵형(karyotype, 核型)이다. 인간과 침팬지가 진화적으로 매우 가깝다고는 하지만,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인간은 23쌍의 염색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침팬지는 24쌍의 염색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가 발생한 진화사적 이유는 바로 침팬지와 현생 인류의 공통 조상이 가지고 있던 말단 동원체형 염색체(acrocentric chromosome, 末端動原體型 染色體) 두 개가 하나로 연결되어 중부 동원체형 염색체(metacentric chromosome, 末端動原體型)인 (인간으로 치면) 2번 염색체(chromosome 2)가 되었기 때문이다 [17]. 핵형이 완전히 다르면 사실상 이종 교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그리고 고대 현생 인류 사이에 잡종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이들의 핵형이 동일하지 않았겠느냐라는 의문을 들게 한다. 그런데 실제로 데니소바인의 핵형은 오늘날 현생 인류와 같은 23쌍이다 [3]. 네안데르탈인은 이제 대한 세부적인 정보가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데니소바인 유전체 결과를 근거로 했을 때 마찬가지로 23쌍의 염색체를 가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앞으로 나가보자. 우리 인간 속의 핵형은 언제부터 23쌍이 되었을까? 침팬지와 분지된 후일까? 아니면 인간 속이 처음 출현했을 때일까? 아니면 호모 에렉투스가 출현했던 시점일까? 답은 여러분이 찾길 바란다.


10. 현생 인류와 고대 인류의 결정적 차이


좋은 자료가 있으면 좋다. 이런 당연한 말을 나는 계속 반복하고 있다. 거의 완전한 형태의 데니소바인 유전체는 오늘날 현생 인류와 고대 인류 사이의 차이점, 특히 유전적 차이로 나타날 수 있는 외형적 차이와 생리학적 차이를 엿볼 수 있게 한다. 「Meyer, et al.」에서는 오늘날 현생 인류를 과거 조상보다 더욱 파생된 형태로 놓고 데니소바인을 과거 공통 조상 형태와 비슷한 형태로 놓고 둘 사이에 염기 서열 치환(substitution, 置換)이 어느 정도 일어났는지 분석했다. 그 결과, 두 인간 종 사이의 염기 서열 치환은 전부 118,812개 발생했으며, 9,444개의 유전자 삽입(gene insertion, 遺傳子揷入)과 유전자 삭제(gene deletion, 遺傳子削除)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3]. 일반적으로 한 두 개 정도의 미약한 염기 서열 변화는 거의 영향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정말로 치명적인 사례도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변화가 계속 누적된다고 하자. 초기 한두 개 정도의 염기 서열 변화는 당장에 아무 영향도 없다 할지라도, 그런 변화가 열 개, 백 개, 천 개, 그리고 수십만 개 누적된다고 가정하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게다가 유전자 일부분이 완전히 삭제되거나 새로 유입된다고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가 그런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가정해보자.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수천수만 년 동안 누적된 변화는 궁극적으로 생물학적 기능을 담당하는 주요 인자(因子)인 단백질의 기능에도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심지어 이들이 생명체 안에서 발현되는 과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렇다면 데니소바인 등의 고대 인류에서 현대 인류로 인간이 진화를 거듭했을 때, 우리 유전자 안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파보 박사 연구팀은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변화 가운데 뇌의 기능과 신경계 발달에 관련된 여덟 가지 유전자인 NOVA1, SLITRK1, KATNA1, LUZP1, ARHGAP32, ADSL, HTR2B, CBTNAP2의 염기 서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3]. 그 가운데 SLITRK1KATNA1은 신경 세포의 축삭돌기(axon, 軸索突起)와 수상돌기(dendrite, 樹狀突起) 성장에 관여하는 유전자며, ARHGAP32HTR2B는 시냅스 전달(synaptic transmission, -傳達)에 관여하는 유전자로 알려졌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은 자폐증(autism, 自閉症)과 관련된 유전자인 ADSLCBTNAP2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는 점인데, 특히 CNTNAP2 유전자는 언어 장애와 관련해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유전자로 언어와 대화 기능의 발달 및 시냅스 가소성(synaptic plasticity, ~可塑性)의 중요한 발달 조절 인자로 알려진 FOXP2 유전자의 조절을 받는다고 연구 및 보고된 적이 있다 [3].


더불어 「Meyer, et al.」에서는 오늘날 인간의 질병과 명확히 연관된 34개의 유전자에서도 데니소바인 유전체와 비교했을 때 어떤 유의미한 유전적 변화가 있었음을 관찰했다. 파보 박사 연구팀이 관심을 둔 34개 유전자 가운데 HPS5, GGCX, ERCC5, ZMPSTE24라는 네 가지 유전자는 피부 관련 질환과 관련된 유전자로 알려졌으며, RP1L1, GGCX, FRMD7, ABCA4, VCAN, CRYBB3란 여섯 가지 유전자는 눈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3].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언제나 그렇듯이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데니소바인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전적 차이가 생리학적으로 어떤 차이를 나타내는지 완전히 이해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 정도는 유추할 수 있으리라 본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데니소바인과 같은 고대 인류가 현생 인류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누적된 유전자의 변화는 오늘날 현생 인류에게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생리학적 특성을 부여한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변화된 특성은 자연 선택으로 더 공고히 되는 쪽으로 진화가 확고해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이루게 된 것이 아닐까? 너무 뻔한 말이겠지만, 이 정도가 최선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 「Meyer, et al.」에서는 EVC2라는 유전자의 변이에 대해서도 관심을 뒀다. 왜냐하면, EVC2 유전자에 문제가 생기면 엘리스-반 크레벨트 증후군(Ellis-van Creveld syndrome)이라는 유전 질환이 발병하기 때문이다. 이 병은 발달 과정에서 치아가 우상치(taurodontism)라고 하는 황소의 것과 같은 형태를 띠면서 구강 내부가 전반에 걸쳐 확장되고 치근(dental root, 歯根)이 하나로 합쳐지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3, 20]. 물론 이 유전자에 이상이 발생하면 구강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발달 과정에 이상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파보 박사 연구팀이 이 유전자의 염기 서열 차이에 관심을 둔 이유는 엘리스-반 크레펠트 증후군에 걸린 환자의 구강 형태가 네안데르탈인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하기 나타내기 때문이다 [3]. (내가 보기엔 별로 비슷해 보이지 않는데, 잘 모르겠다.) 물론 데니소바인의 어금니는 전체적으로 네안데르탈인과 비슷하지만, 치근이 두 개이므로 앞의 유전 질환에서 나타나는 병리학적 증상과는 차이가 있다 [그림 5, 왼쪽]. 하지만 엘리스-반 크레벨트 증후군의 증상 일부와 네안데르탈인 및 데니소바인의 어금니 뼈 구조를 바탕으로 종합적인 판단을 내린다면 고대 인류가 오늘날 현생 인류로 진화했을 때, EVC2 유전자를 포함한 다양한 유전자의 변이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오늘날 인간의 치아 구조와 같은 형태를 띠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데니소바인과 현생 인류 사이의 유전적 차이에 대해 살펴봤다. 이러한 사실은 데니소바인과 같은 고대 인류 부류가 오늘날 현생 인류로 진화하면서 형태학적 기능적 변화를 줄 수 있는 많은 유전적 변이를 겪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언어 기능 및 지적 능력과 관련도 부분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물론 그렇다고 과거 데니소바인과 네안데르탈인이 고대 현생 인류보다 지적인 면에서 떨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어떤 측면에서 그들은 오늘날 인류의 가까운 조상보다 더 뛰어난 점도 있었을 것이며,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11. 맺음말 — 아프리카 기원설 vs. 다지역 기원설


지금까지 매우 길고 지루한 험난한 여정을 걸어왔다. 여기까지 온 여러분께 박수를 보낸다. 재미없는 내용을 더럽게 재미없게 써서 정말 죄송하다 ㅠㅠ. 현생 인류의 기원에 관한 두 이론인 아프리카 기원설과 다지역 기원설 가운데 대세는 솔직히 말해서 “아프리카 기원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생 인류의 기원에 관한 글은 내 글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연구 (1) —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프로젝트 이전의 상황에 대한 고찰」을 참조하라]. 하지만 과거와 다른 점은 “아프리카 단일 기원설”에서 “단일”이란 말을 빼야 할 시점이 되었단 사실이다. 최근 보고되고 있는 고대 인류 유전체 분석과 이를 바탕으로 한 비교 유전체학 연구는 현생 인류의 직접적인 기원이 지금으로부터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출현한 고대 호모 사피엔스인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함께 강조하는데, 바로 이들 고대 현생 인류가 이미 각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하고 있었던 다른 인간 종과 유전적 혼합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이후로도 아프리카 출신의 고대 현생 인류를 중심으로 한 오늘날 인간의 진화의 흐름이라는 큰 줄기 자체가 변하지는 않으리라 본다. 다만 다른 인간 종의 유전자가 이러한 진화 과정에 유입했는지는 차후 연구 결과에 따라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바야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고대 인류의 흔적이며, 그들의 유전자라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1] Department of Evolutionary Genetics. Max Planck Institute for Evolutionary Anthropology. [링크] : 독일 라이프치히에 위치한 막스 플랑크 연구소 진화 인류학 실험실 홈페이지다.
[2] Neandertal Genome Project [링크] :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연구 사업을 소개한 웹사이트다. EMBL 사이트와 연계해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염기 서열을 공공에 공개하고 있다.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써도 좋다.
[3] Meyer M, et al. 2012. A High-Coverage Genome Sequence from an Archaic Denisovan Individual. Science. Published online 30 August 2012 [DOI:10.1126/science.1224344] : 현재 이 논문은 공식적으로 출판된 상태는 아니며, 현재 Sciencexpres라는 곳에 초안 형태로 올라와 있다. 링크와 논문 참조에 관련된 정보는 해당 논문이 정식으로 출판될 때 수정하도록 하겠다. [링크]
[4] Ancient genome reveals its secrets. Biology News Net. August 30, 2012. [링크]
[5] Gibbons A. 2012. A Crystal-Clear View of an Extinct Girl's Genome. Science. 337: 1028-1029. [링크]
[6] Green RE, et al. 2006. Analysis of one million base pairs of Neanderthal DNA. Nature. 444: 330-336. [링크] :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염기를 분석한 첫 논문이지만, 본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폭품 까임"을 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과학이란 원래 이런 식으로 자주 까이면서 발전한다. 까이다보면 언젠가 문제점을 해결하기 마련이니까.
[7] Green RE, et al. 2010. A draft sequence of the Neandertal genome. Science. 328: 710-722. [링크] : "폭풍 까임"을 당하고 난 다음 발표안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초안이다.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다. 현재 네안데르탈인 유전체는 단일 가닥 DNA 라이브러리를 제작해 새롭게 분석할 계획이란 소식이 있다.
[8] Reich D, et al. 2010. Genetic history of an archaic hominin group from Denisova Cave in Siberia. Nature. 468: 1053-1060. [링크] : 처음 발표된 데니소바인 유전체 관련 연구다.
[9] Hofreiter M, et al. 2001. Ancient DNA. Nat Rev Genet. 2: 353-359. [링크] : 고대 DNA 연구 관련 소개 글이다. 추가적으로 이것을 읽으면 더 좋다. Pääbo S, et al. 2004. Genetic analyses from ancient DNA. Annu Rev Genet. 38: 645-679. [링크]
[10] Library in biology. Wikipedia. [링크]
[11] Hofreiter M. Drafting human ancestry: what does the Neanderthal genome tell us about hominid evolution? Commentary on Green et al. (2010). Hum Biol. 83: 1-11. [링크] :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연구 전반을 알고 싶다면 이 논문을 추천한다.
[12] Denisova hominin. Wikipedia. [링크]
[13] Krause J, et al. 2010. The complete mitochondrial DNA genome of an unknown hominin from southern Siberia. Nature. 464: 894-897. [링크] : 데니소바인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연구한 논문이다. 여러 모로 데니소바인 유전체 연구와 상충되는 점이 있다.
[14] Reich D, et al. 2011. Denisova admixture and the first modern human dispersals into Southeast Asia and Oceania. Am J Hum Genet. 89: 516-528. [링크]
[15] Skoglund P, and Jakobsson M. 2011. Archaic human ancestry in Eash Asia. Proc Natl Acad Sci USA. 108: 18301-18306. [링크]
[16] Cerqueria CC, et al. 2012. Predicting homo pigmentation phenotype through genomic data: From neanderthal to James Watson. Am J Hum Biol. 24: 705-709. [링크] : 본문과 상관없이 이 글 자체는 꽤 흥미롭다. 유전자만 가지고도 생면부지(生面不知)인 사람을 그 외모까지 알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17] IJdo JW, et al. 1991. Origin of human chromosome 2: an ancestral telomere-telomere fusion. Proc Natl Acad Sci USA. 88: 9051-9055. [링크]
[18] 「Meyer, et al.」에 기술된 원 문장은 다음과 같다. “However, we caution that multiple sources of error may affect this estimate. For example, the numbers of substitutions inferred to have occurred to the present-day human sequences vary by up to one-fifth of the reduction estimated for the Denisovan bone.”

[19] Early human migrations. Wikipedia. [링크]
[20] Ellis–van Creveld syndrome. Wikipedia. [링크] : 원래 본문에 이 병의 증상에 관한 그림을 넣으려 했지만 관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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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푸투이마(Douglas Futuyma)의 『Evolution』에 나와 있는 진화의 기본 원리(Fundamental principles of evolution)을 번역했다. 그리고 일부 문장에는 시덥지 않은 주석도 붙여 봤다. 보면 알겠지만, 정말 시덥지 않고 알맹이도 없다. 사실 이 부분은 현대 진화 종합(Modern evolutionary synthesis)와 관련된 내용인데, 자세한 사항은 우리의 친구 위키피디아를 참조하거나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의 『진화란 무엇인가?(What Evolution Is)』 등을 읽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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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phenotype (observed characteristics) is different from the genotype (the set of genes in an individual’s DNA); phenotypic differences among individual organisms may be due partly due to genetic differences and partly to direct effects of the environment.

표현형(phenotype, 表現型)(관찰되는 특징)은 유전형(genotype, 遺傳型)(개체 DNA에 있는 유전자 세트)과 다르다. 왜냐하면, 개체(individual 또는 individual organism, 個體) 사이의 표현형 차이는 부분적으로 유전형 차이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환경의 직접적 효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생명체의 유전 정보는 DNA라 불리는 물질로 암호화되어 있다. 암호화된 유전 정보는 매우 복잡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통해 단백질로 최종 변환되어 물질대사 과정 등의 생명 현상에 작용한다. (어떤 경우에는 RNA라는 물질이 효소 또는 조절 인자로서 생명 현상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라고 뭉뚱그려 표현했지만, 최근 들어 RNA 자체를 기반으로 한 생명 조절 현상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쏟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복잡한 유전자 발현의 다양한 조합이 개체 사이의 표현형 차이를 나타내는 일차적인 원인이 된다. 그런데 원칙만 그렇다. 똑같은 유전자형을 보유한 독립적인 두 개체라 할지라도 자라온 환경이 다르면 표현형도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사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겠다. 분명한 사실은, 일차적으로 유전자의 중요성은 명확하지만, 여기에 생명체 주변 환경의 영향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Environmental effects on an individual’s phenotype do not affect the genes passed on to its offspring. In other words, acquired characteristics are not inherited.

개체의 표현형에 대한 환경의 영향이 그 자손(子孫)으로 전해지는 유전자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획득 형질(acquired characteristics 또는 acquired traits, 獲得形質)은 유전되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소위 라마르크 유전(Larmarkian inheritance)라 부르며 알게 모르게 폄하(貶下)하는 “후천적으로 획득한 조상 형질의 후대로의 유전”은 (많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꼬마선충(nematode 또는 학명으로 Caenorhabditis elegans)은 후천적으로 획득한 RNAi 형질을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 더불어, 후성 유전(epigenetics, 後生遺傳)도 라마르크 유전이 적용될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아마도 열렬한 다윈주의자의 농간[弄奸]이 상당히 작용했다고 추측하지만) 저평가(低評價)를 받고 있는 라마르크에 대한 재평가가 (역사적 측면과 아울러 학술적 측면에서도) 심심치 않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다. 물론, 한국에서 어떤지는 나도 잘 모른다.


3. Hereditary variations are based on particles—genes—that retain their identity as they pass through the generations; they do not blend with other genes. This is true of both discretely varying traits (e.g., brown vs. blue eyes) and continuously varying traits (e.g., body size, intensity of pigmentation). Genetic variation in continuously varying traits is based on several or many discrete, particulate genes, each of which affects the trait slightly (“polygenic inheritance”).

유전적 변이(hereditary variation, 遺傳的變異)는 세대를 거치면서 전달되는 그들의 독자성(獨自性)을 존속(存續)시키는 입자(粒子), 즉 유전자를 기반으로 한다. 왜냐하면,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와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 형질(예를 들면, 갈색 눈과 파란색 눈),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형질(예를 들면, 몸 크기, 피부색) 모두에 대해서 사실이다. 연속적으로 변하는 형질에서 나타나는 유전자 변이(genetic variation, 遺傳子變異)는 몇몇 또는 많은 불연속적인 입자 유전자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들 각각은 그러한 형질에 조금씩 영향을 미친다 (다원 유전[多源遺傳]).


4. Genes mutate, usually at a fairly low rate, to equally stable alternative forms, known as alleles. The phenotypic effect of such mutations can range from undetectable to very great. The variation that arises by mutation is amplified by recombination among alleles at different loci.

유전자는 대개 매우 낮은 비율로 대립 유전자(allele, 對立遺傳子)로 알려진 동일하게 안정한 대체 형태로 돌연변이를 한다. 그러한 돌연변이의 표현형적 영향은 미미할 수도 있고 매우 클 수도 있다. 돌연변이로 발생한 변이는 다른 유전자 좌(locus 또는 loci, 遺傳子座)에 위치한 대립유전자 사이의 재조합(再組合)으로 증폭된다.


5. Evolutionary change is a populational process: it entails, in its most basic form, a change in the relative abundances (proportions or frequencies) of individual organisms with different genotypes (hence, often, with different phenotypes) within a population. One genotype may gradually replace other genotypes over the course of generations. Replacement may occur within only certain populations, or in all the populations that make up a species.

진화적 변화는 집단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개체군(個體群) 내에서 다른 유전자형(이 때문에 종종 다른 표현형을 가지는)을 가지는 개체의 상대적 양(비율[proportion, 比率] 또는 빈도[frequency, 頻度])의 변화를 수반(隨伴)한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하나의 유전자형은 점점 다른 유전자형을 대체(代替)할 것이다. 대체는 오직 어떤 개체군 내 또는 임의의 종을 구성하는 모든 개체군에서 일어날 수 있다.


오직 한 개체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하고 그것이 표현형으로 극명히 드러났다 해서 진화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의 진화에서 “변화”의 주체(主體)는 개체가 아니라, 개체군이다.


6. The rate of mutation is too low for mutation by itself to shift a population from one genotype to another. Instead, the change in genotype proportions within a population can occur by either of two principal processes: random fluctuations in proportions (genetic drift), or nonrandom changes due to the superior survival and/or reproduction of some genotypes compared with others (i.e. natural selection).

돌연변이율(突然變異率)은 돌연변이 그 자체가 어떤 개체군을 한 유전자형에서 다른 유전자형으로 바꾸기에는 매우 낮다. 대신, 임의의 개체군 내 유전자형 비율 변화는 두 가지 중요한 과정 가운데 하나로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은 유전자형 비율의 무작위(無作爲)적 변동(유전적 부동[genetic drift, 遺傳的浮動]), 또는 다른 유전자형과 비교했을 때 몇몇 유전자의 우세한 생존(生存) 그리고/또는 생식(生殖)에 기인(基因)하는 작위(作爲)적인 변화(즉,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 自然選擇])이다.


7. Even a slight intensity of natural selection can (under certain circumstances) bring about substantial evolutionary change in a realistic amount of time. Natural selection can account for both slight and great differences among species, as well as for the earliest stages of evolution of new traits. Adaptations are traits that have been shaped by natural selection.

경미(輕微)한 강도(强度)의 자연 선택이라 할지라도 (어떤 상황에서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상당한 진화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자연 선택은 새로운 형질이 진화하는 초기 단계뿐만 아니라 종 사이의 작고 큰 차이 모두를 설명할 수 있다. 적응(adaptation, 適應)은 자연 선택이 빚어낸 형질이다.


진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시간”이다. 어떤 이는 우리 자신만의 시간 관념이라는 편협한 잣대로 진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거나 또는 부정하는데, 인간의 시간은 기껏해야 100년이지만 우주의 시간은 약 140억 년 지구의 시간은 약 46억 년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한 장구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과 같은 종의 다양성을 만끽할 수 있다.


8. Natural selection can alter populations beyond the original range of variation by increasing the frequency of alleles that, by recombination with other genes that affect the same trait, give rise to new phenotypes.

자연 선택은, 동일한 형질에 영향을 주는 다른 유전자와의 재조합으로, 새로운 표현형을 낳는 유전자 좌의 빈도를 증가시킴으로써 변이의 원래 범위 이상으로 개체군을 변화시킬 수 있다.


9. Natural populations are genetically variable, and so can often evolve rapidly when environmental conditions change.

자연 개체군은 유전적으로 다양해서, 환경 조건이 변할 때 종종 빠르게 진화할 수 있다.


10. Populations of a species in different geographic regions differ in characteristics that have a genetic basis.

다른 지리적 위치에 서식(棲息)하는 어떤 종의 개체군은 임의의 유전적 기반을 나타내는 특징에서 차이가 난다.


11. The differences between different species, and between different populations of the same species, are often based on differences at several or many genes, many of which have a small phenotypic effect. This pattern supports the hypothesis that the differences between species evolve by rather small steps.

다른 종 사이의 차이와 동일 종인 개체군 사이의 차이는 종종 몇 가지 또는 많은 유전자에 있는 차이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작은 표현형적 영향을 나타낸다. 이러한 양상(樣相)은 종 간 차이는 다소 작은 (변화) 단계를 거쳐 진화한다는 가설을 지지한다.


12. Differences among geographic populations of a species are often adaptive, and thus are the consequence of natural selection.

어떤 종의 지리학적 개체군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때때로 적응적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 선택의 결과이다.


13. Phenotypically different genotypes are often found in a single interbreeding population. Species are not defined simply by phenotypic differences. Rather, different species represent distinct “gene pools”; that is, species are groups of interbreeding or potentially interbreeding individuals that do not exchange genes with other such groups.

표현형이 다른 유전자형은 때때로 단일 이종교배(interbreeding, 異種交配) 개체군에서 발견된다. 종은 단순히 표현형 차이로 정의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종은 뚜렷이 다른 “유전자 풀(gene pool)”을 대표한다; 즉, 종은 이종교배를 하거나, 또는 다른 집단과 유전자를 교환하지 않는 잠재적으로 이종교배할 수 있는 개체의 집단이다.


“종”은 매우 임의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생명체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종”의 개념도 천차만별이며, 심지어는 “진화생물학” 또는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라 할지라도 세부적으로 받아들이는 종의 개념 또는 기준에 있어서도 (극명한 또는 매우 지엽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즉, 우리가 진화생물학에서 사용하는 분류의 기준은 학문적 편의를 위해 인위적으로 정립한 가변적인 개념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개념을 적재적소에 명확히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4. Speciation is the origin of two or more species from a single common ancestor. Speciation usually occurs by the genetic differentiation of geographically segregated populations. Because of the geographic segregation, interbreeding does not prevent incipient genetic differences from developing.

종 분화(speciation, 種分化)는 어떤 단일 공통 조상(common ancestor, 共通祖上)으로부터 둘 또는 그 이상의 종이 기원하는 것이다. 종 분화는 보통 지리적으로 격리된 개체군의 유전적 분화(differentiation, 分化)로 발생한다. 지리적 격리 때문에, 이종교배는 막 시작된 유전적 차이가 진행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15. Among living organisms, there are many gradations in phenotypic characteristics among species assigned to the same genus, to different genera, and to different families or other higher taxa. Such observations provide evidence that higher taxa arise by the prolonged, sequential accumulation of small differences, rather than by the sudden mutational origin of drastically new “types.”

생명체 사이에는 같은 속(genus, 屬), 다른 속 그리고 다른 과(family, 科), 또는 다른 상위 분류군(taxon 또는 taxa, 分類群)으로 배정된 종(species, 種) 사이의 표현형적 특징에는 많은 단계적 차이가 있다. 그러한 관찰은 상위 분류군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갑작스러운 돌연변이가 기원이 된 것이 아니라 작은 차이가 지속적이며 연속적으로 축적(蓄積)해 생겨났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16. The fossil record includes many gaps among quite different kinds of organisms. Such gaps may be explained by the incompleteness of the fossil records. But the fossil record also includes examples of gradations from apparently ancestral organisms to quite different descendants. These data support the hypothesis that the evolution of large differences proceeds incrementally. Hence the principles that explain the evolution of populations and species may be extrapolated to the evolution of higher taxa.

화석 기록에는 매우 다른 종류의 생명체 사이의 불연속이 존재한다. 그러한 불연속은 화석 기록의 불완전함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화석 기록에는 명백히 조상 생명체부터 매우 다른 자손까지의 점진적인 변화에 대한 사례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는 큰 차이의 진화는 (그 자체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는 가설을 지지한다. 그러므로 개체군과 종의 진화를 설명하는 원리(原理)로 상위 분류군의 진화를 추정(推定)할 수 있다.


발췌 및 정리를 위한 참고 서적


『Evolution』. Douglas J. Futuyma. Sinauer Associates Inc. 2005. pp.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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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란 무엇인가?  (1) 2012.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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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란 무엇인가?

2012. 8. 14. 16:42 from 공부 관련


진화(evolution, 進化)란 용어는 17세기 무렵 “말려 있는 것을 펼치다(an opening of what was rolled up)”란 뜻의 라틴어 명사 'evolutionem' 또는 '책 등을 펼치다(unrolling [of a book])'란 뜻의 라틴어 동사 'evolvere'에서 유래했다. 오늘날 진화라는 용어는 사전적으로 “일이나 사물 따위가 점점 발달하여 감”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어떤 대상이 ‘변화’, ‘발달’, ‘향상’ 등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말은 매우 장황하게 늘어놨지만 실제로 ‘진화’가 의미하는 바는 매우 단순하다. 바로 ‘변화’다. 우리는 진화를 다루는 데 있어서 오직 이 한 가지 사실만은 머릿속에 반드시 담아두어야 한다. 진화란 용어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천체물리학에서는 별과 같은 개별적 대상의 변화를 묘사하는 데 진화란 말을 사용하며, 뭔가 잘못된 길로 빠진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에서 비롯한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 社會進化論)에서 진화는 어떤 사회의 변화와 모습을 해석하기 위해 진화란 용어를 사용했다.


생명과학이라고 해서 진화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어떤 특별함이 있지는 않다. 다만, 용어가 가리키는 구체성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생명과학에서는 진화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까? 생물학적 진화(biological evolution) 또는 유기적 진화(organic evolution)란 여러 세대(generation, 世代)를 경과하는 동안에 생물집단(biological population, 生物集團)의 특성에서 발생하는 변화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진화의 주체가 개체(individual, 個體)가 아닌 집단 또는 개체군(population, 個體群)이란 사실이다. 생명과학에서 개별 생명체의 발달(development, 發達) 또는 개체발생(ontogeny, 個體發生)은 진화로 간주하지 않는다. 더불어 단순히 한 개체에 어떤 유전적 또는 형질 변화가 단기적으로 나타났다고 해서 진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자면, 생물학적 진화에서 개체는 진화하지 않으며 오직 개체군이라 불리는 특정 집단만이 진화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다윈의 말을 빌리자면, 개체군이라 불리는 생명체 집단만이 "변형이 수반된 혈통" 또는 "변형의 대물림"(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과정을 겪는다. 사실, 진화의 오랜 과정을 겪는 동안 개체군은 몇 개로 나뉠 수도 있으며, 몇몇 개체군은 공통조상 개체군(common ancestral population, 共通祖上個體群)에서 파생(派生)한다. 만일 그 몇몇 개체군에서 어떤 다른 변화가 발생한다면, 그 개체군은 분기(divergence, 分岐)한다. 이런 식으로 생명체는 (적어도 오늘날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하나의 균일한 또는 균일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개체군에서 현재와 같은 셀 수 없이 다양한 종의 풍요로움을 갖추게 되었다.


진화로 간주할 수 있는 개체군 내 변화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전물질(genetic material, 遺傳物質)을 통해 전달된다. 오늘날 생명체에서는 DNA라 불리는 물질이 이러한 유전물질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는 때로는 사소할 수도 있고 본질적일 수도 있다. 이것은 어떤 개체군 내에서 유전자 형태 차이와 같은 표면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매우 작은 변화에서부터 최초의 생명체에서 공룡, 꿀벌, 참나무 그리고 인간에 이르게 되는 다양한 변화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명의 진화를 단기간에 관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은 어떤 변이(variation, 變異)가 누적해 하나의 공통조상에서 새로운 종(species, 種)으로 분기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실제로 진화생물학(evolutionary biology, 進化生物學)은 그런 장구한 시간의 역사를 주로 다루고 있다. 비록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진화의 점진적 과정을 실험실에서 구현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진화를 관찰할 방법이 완전히 금지된 것은 아니다. 박테리아의 항생제 내성(耐性), 가끔 보고되는 새로운 종의 갑작스러운 발견(또는 출현), 인간의 시간관념으로도 측정할 수 있고 이해 가능한 (그래도 어느 정도 긴 시간이 흘러야 하는) 진화의 단편적 결과물, 그리고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화석 등등. 어떤 면에서 자연은 인간이 자신의 역사를 알지 못하도록 세월의 풍화작용(風化作用) 속에 자신의 일대기를 엄격하게 봉인하기도 했지만, 다른 측면에서 시간의 역사는 인간 또는 인간과 비슷한 지적 능력을 갖춘 생명체가 한시라도 빨리 자신을 발견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과학 아닐까?


발췌 및 정리를 위한 참고문헌


[1] 『진화학』. 더글라스 푸투이마(Douglas J. Futuyma) 저 / 김상태 외 8인 옮김. 라이프사이언스. 2008년. 1~2쪽.
[2] 『Evolution』. Douglas J. Futuyma. Sinauer Associates Inc. 2005. p.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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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서 아시아노트 님( @noteasia )과 대화하던 중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기록으로 남긴다. 대화의 시작은 트위터 하늘타리 님( @skytary )이 작성한 아래 트윗을 누군가 리트윗(retweet)하면서 부터이다.



하늘타리 님의 멘션을 읽다보니, 맥락과는 전혀 관련없는 개드립(?) 수준의 단문이 하나 떠올라 바로 트윗에 끄적거렸고 곧바로 아시아노트 님께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몇 차례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멘델과 바인베르크가 언급되었다.



바인베르크는 누구인가? 우리에게는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잠깐 (정말 잠깐이다 -_-) 언급되는 그 유명한 하디-바인베르크 법칙(Hardy-Weinberg principle)을 독립적으로 발견한 독일 출신 의사이자 유전학자인 빌헬름 바인베르크의 일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구글링을 한 결과 온통 하디-바인베르크 법칙만 나올 뿐 그의 일생을 연구한 결과물은 하나도 걸려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나의 검색 능력이 정말 후져서 못 찾았을 수도 있다 -_-;) 그런데 Wikipedia에 아래와 같은 의미심장한 문구가 떡하니 있었다. 잠시 인용해보자 [Wilhelm Weinberg]. 참고로 굵은 글씨체는 내가 임의로 처리한 것이다.


Dr. Wilhelm Weinberg (Stuttgart, December 25, 1862 – Tübingen, November 27, 1937) was a German half-Jewish physician and obstetrician-gynecologist, practicing in Stuttgart, who in a 1908 paper (Jahresheft des Vereins für vaterländische Naturkunde in Württemberg (Annals of the Society of the National Natural History in Württemberg) published in German, expressed the concept that would later come to be known as the Hardy-Weinberg principle. 

Weinberg is also credited as the first to explain the effect of ascertainment bias on observations in genetics.
Weinberg developed the principle of genetic equilibrium independently of British mathematician G.H. Hardy. He delivered an exposition of his ideas in a lecture on January 13, 1908, before the Verein für vaterländische Naturkunde in Württemberg (Society for the Natural History of the Fatherland in Württemberg), about six months before Hardy's paper was published in English. His lecture was printed later that year in the society's yearbook.
Weinberg's contributions were unrecognized in the English speaking world for more than 35 years. Curt Stern, a German scientist who im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before World War II, pointed out in a brief paper in Science that Weinberg's exposition was both earlier and more comprehensive than Hardy's. [1] Before 1943, the concepts in genetic equilibrium that are known today as the Hardy-Weinberg principle had been known as "Hardy's law" or "Hardy's formula" in English language texts.
James F. Crow writes: “Why was Weinberg’s paper, published the same year as Hardy’s, neglected for 35 years? The reason, I am sure, is that he wrote in German. At the time, genetics was largely dominated by English speakers and, sadly, work in other languages was often ignored.” [2]


이 글을 읽으면서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나 연구라도 당대 주류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절대로 인정받을 수 없다”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결론은 .... 영어공부 열심히 합시다! ㅆ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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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옹호단체로 알려진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일명 교진추)는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종이 아니다”, “말의 진화계열은 상상의 산물이다” 등의 주장을 내세우며 과학 교과서에 기재된 시조새와 말의 진화 관련 부분을 삭제해달라는 청원서를 2011년 12월과 2012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교육과학기술부에 제출했다. 이 단체는 이 전에 사전 물밑 작업의 일환으로 “교과서진화론개정연구소”라는 교진추 산하 단체를 통해 『교과서 속 진화론 바로잡기』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는데, 교육과학기술부에게 "검토해 보겠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냄으로써 한국형 개신교 근본주의 집단, 즉 교진추에게 오랜 숙원이었던 “진화론을 격파하고 창조론을 가르침으로써 과학을 통해 주 여호와의 영광을 증거하기”는 마침내 그 첫 단추 끼우기에 성공하는 듯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주 여호와의 은혜로우심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적인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름 아니라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네이쳐(Nature)란 저 위대하신 과학 잡지께서 「한국이 창조론자의 요구에 굴복하다(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란 매우 자극적인 제목으로 한국을 공개적으로 디스했기 때문이다 [1, 2]. 하지만 교진추의 이러한 시도는 한국 과학기술인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다 [3]. 그 결과, 지난 2012년 6월 24일 교육과학기술부는 전문성을 갖춘 과학자 단체를 통해 과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을 수렴해 시조새 및 말의 진화 등과 관련한 내용의 과학 교과서 삭제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면서,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와 “과학기술한림원”을 전문협의기구로 지정해 관련 논의를 진행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4].


이런 웃기지도 않은 일이 벌어지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이다 못해 현실감 제로인 게으른 정부 관련 부처(특히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 사회에서 과학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별 관심을 드러내지 않는 한국 주요 과학단체(의 회원이라기보다는 이 단체에서 힘 좀 쓰신다는 지체 높은 어르신들)의 멍청함, 그리고 창조신화라는 허황된 판타지를 멀쩡한 과학 안에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흔히 창조론 또는 지적설계론이라 불리는 의사과학(pseudoscience, 擬似科學) 또는 사이비과학(似而非科學)의 한 종류와 이들의 몸통인 한국형 개신교 근본주의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나타난 오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5].


상황이 이쯤 되면 한국 개신교의 전반적인 파워 또는 세력이 꽤 강한 듯한 인상을 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 때문에 한국에서 시조새 논란이 유달리 더 불거진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한국 종교 가운데 개신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낮다. 2005년 기준으로 한국 종교 인구 통계를 조사한 결과, 개신교 18.3%, 천주교 10.9%, 불교 22.8% 그리고 무교는 46.5%로 나타났는데,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쳐도 한국 기독교 인구는 29.2%로 낮은 편이다 [6]. 따라서 합계 30%도 안 되는 기독교인이―그것도 그들 전부가 진화론에 대해 같은 견해를 보이지 않으며 이들 가운데 진화론을 지지하는 사람도 많다고 알고 있는데―하나님을 중심으로 대동단결하여 지금과 같은 논란을 일으켰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더불어, 개신교 근본주의자의 정부에 대한 입김이 이례적으로 강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고도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전부터도 개신교 근본주의는 끈질기게 교과서 문제를 물고 늘어졌으며 언제나 정부의 고집불통 때문에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일이 이례적으로 일어난 이유는 MB정부 일부 고위 관료의 종교 편향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상황파악을 잘 못 하는 담당 관료의 안일함이라 할 수 있겠다. 더불어 한국은 헌법상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어느 한 종교의 편만 드는 것은 헌법에 어긋난다. 그뿐만 아니라, 정부가 개신교 편향성을 아주 일부라도 드러낸다고 생각해보자. 전체 종교인 가운데 22.8%를 차지하는 불교계가 과연 가만히 있을까?


그렇다면 이번 촌극이 있게 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한국인의 진화론에 대한 이해 정도에 있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진화론에 대한 시각은 어느 정도일까? 여기에 대한 거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설문조사 결과가 하나 있다. 2008년 EBS에서 찰스 다윈(Charles Darwin) 탄생 200주년 그리고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출판 150주년을 기념해 「<다큐프라임> 신과 다윈의 시대」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는데, 이때 제작진은 코리아리서치라는 설문조사기관을 통해 한국의 19세 이상 성인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진화론의 신뢰 정도>를 조사했으며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7]. 우선 전체 응답자 중 62.2%가 “진화론을 믿는다” 그리고 30.6%가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으며, 이 가운데 8.9%는 “진화론을 확실히 믿는다” 그리고 11%는 “전혀 믿지 않는다”고 답해 진화론을 믿고 있어도 확실하게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매우 적은 비율인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는 응답자를 대상으로 그 이유에 대해 알아봤을 때 “과학적으로 불충분하다”가 41.3%, “종교적 신념과 맞지 않다”가 39.2%로 비슷한 수준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진화론과 관련된 용어 다섯 가지 용어(종의 기원, 돌연변이, 이기적 유전자, 성선택, 자연선택)에 대한 인지도를 확인했을 때, ‘돌연변이’에 대한 인지도는 90.6%로 가장 높았으며, 다윈의 유명한 저작 이름인 ‘종의 기원’은 58.3%로 두 번째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 ‘성선택’, ‘자연선택’ 등에 대한 인지도는 50%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이 설문 조사가 매우 지엽적이고 표본크기가 작으며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결과라서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 유의미한지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결과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가정한다면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즉, 진화론을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진화론에 대한 이해도는 상당히 낮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조사 대상 중 약 90%가 안다고 대답한 ‘돌연변이’는 진화론만의 용어도 아니다. 더불어 ‘종의 기원’이란 책의 이름은 이미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내용은 잘 모르더라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성선택’과 특히 다윈 진화론의 핵심 개념인 ‘자연선택’에 대한 인지도가 진화론 찬성자와 반대자를 포함해 50%도 채 안 된다는 사실은 한국 과학 교육 시스템에서 진화론 교육이 얼마나 부실하게 이루어졌는지를 가늠케 한다. (방송을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생명의 기원과 관련한 학교의 교육 방향>이라는 설문 조사도 있었던 모양인데, “현행대로 진화론만 가르쳐야 한다”가 겨우 24.7%, “진화론과 창조론을 모두 가르쳐야 한다”가 62.7%라는 매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는 얘기가 모 블로그에 적혀 있기도 하다 [8, 9]).


어쨌든 앞에서 언급한 대로 진화론 반대든 찬성이든 진화론을 잘 모른다는 측면에서는 서로 비등해 보인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과학교육 시스템의 문제다. 실제로 "과학"을 과학 그 자체가 아닌 대학 입학시험에서 고득점을 취득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한국의 전역적인 교육 시스템에서 위 현상, 즉 엄연히 고등 교육과정에서 진화론을 가르침에도 진화론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도 않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진화론 및 진화 관련 개념이나 지식은 점수를 따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학생과 이들을 가르치는 교수 다수가 진화론 전반 또는 진화론 개념이나 가설 등이 입시에 중요치 않다고 인식하면, 그것이 정규 교과 과정에 실려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다루지 않은 채 넘어갈 것은 분명하다. 더불어 현장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특히 생물 교사)가 진화 이론 전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상황은 더욱 안 좋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비단 진화론, 더 나아가 생물 교과 과정의 문제만은 아니다. 과학교육 전반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처한 상황은 비슷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기괴한 과학교육 시스템 전반을 수정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앞으로도 반복됨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공교육 시스템 전반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따위 괴물 같은 입시체계는 다 사라져 버려야 해!"가 아마도 정답일 것이다. 더불어 이렇게 주장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이게 될 리는 절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회 시스템과 맞물려 있는 매우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 본인도 교육 시스템 전반에 대한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도 않다. 만약 나 정도 수준에서 그게 가능했다면, 문제는 벌써 해결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내 수준에 걸맞게 내놓을 수 있는 해결책은 지극히 상식적이며 남들도 한 번쯤은 생각했을 법한 평범함 그 자체다. 그리고 매우 지엽적이다.  따라서 순전히 교과서 제작 문제로 한정해 몇 가지 사항을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전부는 아니더라도 과학자 다수가 교과서 집필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어떤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번 시조새 논란이라는 촌극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문제의 발단은 과학 교과서가 과학이론의 흐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함에 있다. 따라서 시시각각 변하는 과학 동향을 교과서에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 연구자 (전부는 아니더라도) 다수의 공통된 의견을 묻고 반영할 수 있는 어떤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필요하다. 지금처럼 가이드라인 하나 제시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교과서 제작의 핵심적인 주체인 정부도 과학계의 의견과 최신 연구 동향을 공교육 교과 과정에 제대로 반영할 수 있도록 적극 나서야 하며 게으름 피우지 않고 끊임없이 관련 학계와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더불어 이러한 논의는 한 개인이 아니라 공인된 과학 관련 단체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시조새 논란에서 보듯이 교진추는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 단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과학 연구자 다수가 인정하는 과학이 아닌, 말 그대로 사이비과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과서 개정이나 오류를 수정하는 등의 과학교육과 관련한 중차대한 문제는 오로지 공신력 있는 과학 단체의 논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장 과학교사에 대한 정기적인 교육이 필요한데, 학생과 직접 대면해 과학을 가르치는 이들 교사가 교과서에 실려 있는 과학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과학 교과서 내용이 아무리 좋아봤자 그 내용이 학생에게 제대로 전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시조새 논란과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 그리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해 매우 지엽적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으로 그리 신선하지도 않은 해석과 방안을 뻔뻔스럽게 내놓았다. 비록 바로 위에서 언급한 방안이라고 해봤자 고작 교과서 문제에 한정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 공교육에서 과학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교과서 문제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문제, 즉 시스템의 문제로 귀결해야 할 것이며, 오로지 과학교육을 대학 입시시험에서 고득점을 취득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식하는 근시안적인 인식을 버리고 말 그대로 과학을 과학 그 자체로 바라보게 하는 본질적인 인식 자체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1] Park SM. 2012. South 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 Nature 486: doi:10.1038/486014a [링크]
[2] 오철우. 2012년 6월. [수첩] 시조새 논란, ‘과학 대 종교’ 구도로 무얼 얻을까? 한겨례 [링크]
[3]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과학 교과서 시조새 관련 논란 설문조사 결과. [링크]
[4] 김규태. 2012년 6월. 시조새-말 진화과정, 교과서 삭제 요청 반영되지 안될 듯. 동아 사이언스. [링크]
[5] 내가 “한국형 개신교 근본주의”라고 한정 지어 언급한 이유는 이들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기독교의 독특한 유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그것이 종교든 종교가 아니든 근본주의자는 정말 쓸데없는 일 가지고 죽어라 덤벼든다. 따라서 종교 또는 이데올로기의 근본주의자는 인간 역사의 양아치라 할 수 있다.

[6] 2005년 기준 대한민국 종교인구 통계 [링크]
[7] EBS <다큐프라임>. 2009년 2월. "한국인 30%, 진화론 안 믿는다" - 다큐프라임 설문조사 [링크]
[8] 진화론에 대한 국가별 신뢰도 (2006). [링크]
[9] Unfinished business. Charles Darwin’s ideas have spread widely, but his revolution is not yet complete. 2009. The Economist [링크] : 한국과 비슷하게 개신교 근본주의가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미국은 (걍 미국형 개신교 근본주의라고 하자) 우리보다도 더 낮은 비율로 진화론 찬성을, 우리보다도 더 높은 진화론 반대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에서는 “창조론”은 절대로 과학이 아니라며 공교육 과정에서 가르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미국형 개신교 근본주의 단체가 진화론 이외의 것—그렇다면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교”도 여기에 포함되는 것인가?—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며 소송을 걸었기 때문에 그 결과에 따라서 진화론의 운명은 달라질 수도 있다. 달라진다고 해서 “진화론”을 못 가르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중 일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으니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 이것에 대한 최근 진행 상황은 필자가 게으른 관계로 아직 확인을 안 했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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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안데르탈인(Nedanderthal)은 지금으로부터 약 30만~3만 년 전 유럽과 서아시아 일대에 살았던 멸종된 호미니드(hominid)다 [1]. 고인류학 기록으로 추정했을 때 약 20만 년 전에 현생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아프리카에서 처음 출현했고 약 4만 3천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크로마뇽인(Cro-Magnon)인이라 불리는 고대인류 화석이 유럽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을 참작한다면, 지구 역사 어느 시점에 아프리카 바깥으로 이주한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의 후예, 특히 네안데르탈인이 어떤 식으로든 현생인류와 접촉했을 것이란 사실을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2, 3].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혹시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의 직계조상(direct ancestor, 直系祖上)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 사이의 진화적 관계, 특히 네안데르탈인이 오늘날 인류의 직계조상인지는 인류학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흥미로운 관심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이에 대한 많은 (격렬한) 논의가 오고 갔다. 그런 가운데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 사이 형태학적 비교(morphological comparison, 形態學的比較) 연구를 근거로 몇 가지 가설이 제시되었다 [4]. (1) 네안데르탈인은 현대 유럽인의 직계조상이다. (2)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의 직계조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대 현생인류와의 유전적 혼합, 즉 교미(交尾)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오늘날 인류에게 전해줬을 것이다. (3)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 완전히 다른 종으로 오늘날 인류에 그 어떤 유전적인 기여(genetic contribution)도 하지 않았다. 어느 것이 과학적으로 타당할까? 이 물음에 답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왜냐하면, 아주 먼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모든 사람이 납득할만한 수준으로 명확히 재구성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몇십 년 전 일도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한데, 하물며 몇 만 년 전 지구에서 일어난 일은 오죽할까? 그러나 제한적이며 단편적인 증거라 할지라도 차곡차곡 모아 객관적으로 분석한 다음 공정하고 신뢰할만한 수준의 분석 방법으로 당시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추리해 낼 수 있다면,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수준까지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과학적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연구 사업(Neanderthal genome project)에 대한 최근 동향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유전자를 직접 들여다보는 것만큼 생명 진화의 흐름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은 상대적으로 드물다. 물론 화석 및 유적 발굴 등을 통한 문화사적 또는 비교해부학적 연구도 무시할 수 없으며, 지금까지 인류 진화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이러한 연구 성과 덕분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고대인류 유전자 분석을 통한 과거로의 여행은—만일 우리가 그것을 확보했다고 가정할 때—전통적인 연구법으로는 쉽사리 결론 내리기 어려운 여러 가지 논쟁을 해결하는데 상당한 일조를 할 수 있다.


필자의 글은 영국 요크 대학(University of York) 마이클 호프라이터(Michael Hofreiter) 박사가 2011년도 『인간 생물학(Human Biology)』에 게재한 「인간 혈통의 초안 작성하기: 네안데르탈인 유전체는 우리에게 인류 진화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2010년도 그린의 논문에 대한 논평(Drafting Human Ancestry: What Does the Neanderthal Genome Tell Us about Hominid Evolution? Commentary on Green et al. 2010)」이라는 소개 논문(review article)을 기반으로 구성되었지만 [5], 필요하다 판단되는 경우에는 호프라이터의 논문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도 본문 안에서나 또는 참조 형식을 빌어 될 수 있으면 자세히 소개하려고 노력했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 이 글을 쓸 예정이다. 언제 이 여정이 끝날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연구에 관한 흐름을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여러분은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가설, 즉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의 유전적 흐름에 대한 가설 중 어느 것이 과학적으로 가장 그럴싸한지에 대해 스스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1. 네안데르탈인 vs. 현생인류 — 아종인가? 별종인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 사이의 진화적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세 가지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네안데르탈인의 분류학적 위치를 어디다 두느냐는 문제와도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한다. 즉, 이 논쟁은 네안데르탈인을 현생인류의 별종(distinct species, 別種)인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로 분류해야 한다는 주장과 아종(subspecies, 亞種)인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sapiens neanderthalensis)로 봐야 한다는 주장 사이의 학문적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전자의 시각이 전체적으로 우세한 편이라 할 수 있다 [1]. 예를 하나 들어보자.


1999년 포르투갈(Portugal) 아브리고 도 라가 벨로(Abrigo do Lagar Velho)에서 4살 된 아이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연도 측정 결과 지금으로부터 약 2만 4천 5백 년 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인류 아이의 화석이었다. 두아르떼(Cidália Duarte)의 발굴팀은 두개골(cranium, 頭蓋骨), 하악골(mandible, 下顎骨), 치열(dentition, 齒列) 등과 같은 아이의 유골을 비교해부학적 분석법을 동원해 자세히 분석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포르투갈 라가 벨로에서 발굴한 2만 4천5백 년 전에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4살 된 아이는 현대 유럽인과 네안데르탈인의 해부학적 특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아이는 고대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의 유전적 혼합(admixture, 混合)으로 태어난 혼혈이다” [6]. 이 주장은 당시 일반적인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시각, 즉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 다른 종이다” 또는 “과거 어느 시점에 현생인류는 유전적 혼합 없이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했다”는 보편적인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파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같은 연도 동일 학술지에 미국 자연사 박물관(the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관장(curator, 館長)인 고인류학자 이언 태터설(Ian Tattersall)이 (어떻게 보면 매우 냉소적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논평(Commentary, 論評)을 기고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7]. 두아르떼의 분석은 “상당히 용감하고 상상으로 가득한 해석”이지만, 고인류학자 다수가 보기에 입증 가능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아 보인다 [the analysis by Duarte et al. of the Lagar Velho child’s skeleton is a brave and imaginative interpretation, of which it is unlikely that a majority of paleoanthropologists will consider proven]. 좋게 말해서 이런 식이지 태터설의 논평 전반은 두아르떼의 분석과 해석에 상당히 부정적이며 시니컬한 논조로 일관했다. 실제로 여기에는 중대한 오류가 하나 있다. 바로 고대인류 아이의 연령이 4세라는 사실인데, 성체가 아닌 성장 과정 중에 있는 아이를 현생인류 일반의 해부학적 특징과 비교해 어떤 결론—아이의 유골은 네안데르탈인과 고대 현생인류 사이에 잡종(hybrid, 雜種)이 있었음을 시사한다—을 이끌어 내는 데에는 제법 무리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것 이외에도 네안데르탈인/현생인류의 잡종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비교해부학적 견해 몇몇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재조사 결과 전형적인 네안데르탈인 또는 현생인류의 유골을 잘못 분석해 내린 결론이거나 또는 연도 측정이 잘못 이루어져 일어난 해프닝임이 훗날 밝혀졌다 [7]. 어쨌든,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 다른 종이며 잡종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대부분 우세한 가운데 이를 더욱 뒷받침하는 유전학적 증거가 1980년대 이후 현대인류를 대상으로 한 유전자 계통분석 연구에서 다수 발표되었다. 사실 이 연구는 단순히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 사이의 진화적 유연관계 또는 직계조상 여부를 파악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대인류의 기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른바, 아프리카 기원설(African origin hypothesis 또는 Out-of-Africa hypothesis)과 다지역 기원설(Multiregional origin hypothesis)로 대변되는 현생인류의 기원에 대한 가설 중 어느 것이 과학적으로 타당한지를 판단하는데 그 의도가 할 수 있다고 하겠다 [8]. 하지만 현대인류를 대상으로 한 비교유전학 연구는 결과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 다른 별개의 종이며 현생인류에게 그 어떤 유전적 기여(genetic contribution)도 하지 않은 채 멸종했다”라는 아프리카 기원설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2. 현생인류 기원에 대한 비교유전학적 고찰


서두(序頭)에서 언급했듯이 이 글은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 사이의 진화적 관계에 대해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현생인류의 기원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어찌 보면 삼천포로 빠지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 유전체를 논의하기 전에 현생인류 기원을 살펴보는 것도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의 관계에 대한 어떤 객관적 판단을 내리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 전에 몇 가지 사전 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다루는 내용 상당 부분은 유전학적 지식이 있어야만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전문적이거나 어려운 내용을 다루지는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길 바란다. 어차피 이쪽은 내 전문 분야도 아니니 나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앞으로 잠시 설명할 예정인 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예비 학습은 아주 최소한의 개념만 주로 다뤘다. 혹시라도 더 많이 알고 싶은 독자는 참고 문헌에 딸린 내용을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올바른 판단을 내리려면 건전한(?) 지식이 필요한 법이니 명심하도록 하자.


1) 유전학이 쉬웠어요 —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유전학적 배경 지식


소제목이 이상한가? 모 광고에서 회자되는 카피라이트라 한 번 써봤다. 더불어 못하는 게 없으신 전능하신 지도자 각하도 불현듯 생각나서 “유전학이 쉬웠어요”란 표현을 한 번 써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유전학을 해봐서 아는데”란 표현이 적절해 보이기도 하지만, 존경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이래 봬도 난 그분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 왜 있잖은가? 사랑이 너무 지나치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한다고. 농담이다. 어쨌든, 유전학이 쉬울 리는 절대로 없다. 그래도 쉽다고 자기최면을 걸면 쉽지 않을까? 이것도 농담이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농담이 너무 길어지는데, 아무래도 이 글은 인류진화를 유전학적 측면에서 바라보는지라 글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물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진정 “유전학이 쉬웠어요”라고 생각하는 독자는 그냥 넘어가도 좋다.


멸종한 생명체를 포함해 지구 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대부분은 DNA(deoxyribonucleic acid)를 유전물질(genetic material, 遺傳物質), 즉 유전정보 매개체(媒介體)로 사용한다 [9]. 동물의 DNA는 세포핵(nucleus, 核) 안에 존재하는 핵 DNA(nuclear DNA)와 세포의 직접적 에너지원인 ATP(adenosine triphosphate) 대부분을 합성하는 세포 소기관(organelle, 細胞小器官)인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 안에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 DNA(mitochondrial DNA 또는 줄여서 mtDNA라고 한다) 등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0]. 핵 DNA는 또한 상염색체(autosomal chromosome, 常染色體)와 성염색체(sex chromosome, 性染色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상염색체는 성별 결정에 관여하지 않는 염색체를 통상 일컬으며 인간은 모두 22쌍(전체 44개)을 가지고 있다. 성염색체는 개체(individual, 個體)의 성별을 결정하는 인자(factor, 因子)로 인간은 X와 Y 두 가지 성염색체를 가지고 있으며, XY와 XX라는 성염색체 조합으로 남성과 여성의 성별이 각각 결정된다.


그렇다면 이들 DNA는 어떤 식으로 부모세대에서 자손세대로 전달될까? 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유전(maternal inheritance, 母系遺傳)으로 성별과 관계없이 자손에게 전달된다 [11, 12]. 즉, 모든 자손은 부계 혈통이 아니라 모계 혈통을 통해 미토콘드리아 DNA를 물려받는다. 따라서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 고조할머니의 어머니 등등 몇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미토콘드리아 DNA의 조상은 오직 한 단일 계통만 존재한다. 이것은 사람이든 침팬지든 개든 식물이든 동일한 유전 현상으로 미토콘드리아라는 소기관을 가진 생명체라면 예외 없이 적용되는 불변의 법칙이다. 이와는 달리 Y 염색체는 부계유전(paternal inheritance, 父系遺傳)으로 자손세대에 전달된다. 자손세대라고 해서 모든 자손에게 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아버지의 Y 염색체는 오직 아들에게만 전달된다 [13]. 따라서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의 아버지 등등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Y 염색체의 조상은 미토콘드리아와 마찬가지로 단일 계통에 도달하게 된다. 예외가 있다면 이것은 남자만 적용된다는 사실 정도다. 덧붙여 자손의 성별은 아버지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것은 정자와 난자 등의 생식세포(reproductive cell, 生殖細胞)를 형성하는 감수분열(meiosis, 減數分裂) 과정 전반을 살펴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5]. 예를 들어, 체세포분열(mitosis, 體細胞分裂)과 달리 감수분열에서는 전체 염색체 수가 반으로 나뉘어 정자와 난자 같은 딸세포(daughter cell)에 전해진다. 마찬가지로 성염색체도 감수분열 과정에서 반으로 나뉘는데, XX 성염색체 쌍을 가진 여성은 오직 X 염색체만을 가진 난자를 만드는 반면, XY 성염색체 쌍을 가진 남성은 X 또는 Y 염색체를 가진 두 가지 종류의 정자를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미토콘드리아 DNA와 Y 염색체 그리고 남성의 성염색체 가운데 어머니로부터 유전 받는 X 염색체를 제외하면, 여성의 두 X 염색체와 상염색체 전부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같은 확률로 자손에게 전달된다.


2) 현생인류 기원에 대한 두 가설 — 다지역 기원설과 아프리카 기원설


분자생물학 실험 기법이 발전하기 전에 진화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기원을 파악하는 데도 이용할 수 있는 방법론은 고고학적 증거와 비교해부학적 분석 등으로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의미 있는 가설과 객관적으로 유효한 해석이 많이 제안되었지만, 그만큼 가타부타를 결정하기 어려운 격렬한 논쟁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과 분자생물학·유전학 지식의 혁신적인 축적은 오랫동안 끌어왔던 논쟁을 종식하는데 상당한 일조를 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과학 기술적 혁신은 인류 기원에 대한 논쟁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물론 과거의 논쟁이 고대 그리스 희극처럼 대승적으로 마무리되면 더 큰 쓰나미가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지만 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생인류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가설로 다지역 기원설아프리카 기원설이라 불리는 두 가지 주장이 존재한다 [8]. 다지역 기원설의 핵심은 꽤 오래전부터 논의됐지만, 용어 자체는 1988년 인류학자 밀포드 월포프(Milford Wolpoff)가 아프리카 기원설을 반박하는 「현대인류의 기원(Modern Human Origins)」이란 제목의 논문을 『사이언스(Science)』에 기고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6, 17]. 이 가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최초의 인간종인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약 2백5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해 전 세계로 퍼졌으며 각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한 고대 호모 사피엔스가 현대인류의 직접적 조상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8]. 따라서 이 가설은 아프리카에서 이주해온 호모 에렉투스 집단이 각 지역에 정착에 독자적인 진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고대 호모 사피엔스 종이 나중에 독자적으로 진화한 호모 에렉투스 종과 유전적 혼합을 거쳤을 수도 있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지역에 따라 인종적 다양성이 달리 나타났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네안데르탈인의 출현은 다지역 진화설에서 주장하는 인류 진화의 한 경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 이 가설을 확장한다면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고대인류가 오늘날 인류의 직계조상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 정확히 말하자면 월포프가 다지역 기원설을 『사이언스』에 발표하기 바로 얼마 전에 크리스 스트린져(Chris Stringer)와 피터 앤드류스(Peter Andrews)가 같은 학술지에 「현대인류 기원에 대한 유전학적 그리고 화석 증거(Genetic and Fossil Evidence for the Origin of Modern Humans)」이란 제목으로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을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19]. 이 가설에 따르면 오늘날 현생인류, 즉 고대 호모 사피엔스 종의 직접적 조상은 약 20만 년 전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에 처음으로 나타났고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며 계속 진화해오다가, 7만~5만 년 전 사이에 아프리카 이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해 결국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던 다른 종류의 호미니드(예를 들면 네안데르탈인이나 각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진화를 거듭해온 호모 에렉투스의 진화적 후손 등)를 (어떤 식으로든) 대체하게 되었다는 식이다.


일단 두 가설은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에서 다른 지역으로 진출한 최초의 인간 종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없다. 그러나 다지역 기원설이 오늘날 현대인류가 있게 한 인류의 아프리카 대륙 외부로의 진출이 단 한 번—최초 인간 종인 호모 에렉투스의 엑소더스(Exodus)—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아프리카 기원설은 첫 번째 엑소더스가 아니라 가장 최근의 엑소더스—즉 20만 년 전 아프리카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 종의 아프리카 외부로의 진출—가 오늘날의 현대인류를 존재하게 한 궁극적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느 가설이 자연사적 진실에 가장 가까울까? 현재까지 축적된 비교해부학적·유전학적 연구 결과 대부분은 애석하게도(?) 아프리카 기원설을 지지하고 있으며, 특히 현생인류를 대상으로 한 비교유전학 연구는 오늘날 지구 상에 존재하는 인간 대부분이 단일 조상 개체군에서 비롯되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지지하는 초기 비교유전학 연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3) 미토콘드리아 이브설(Mitochondrial Eve hypothesis) ― 고인류학과 유전학과의 첫 만남


일반적으로 인류유전학(human genetics, 人類遺傳學)에서 미토콘드리아 이브(Mitochondria Eve)는 현생인류의 모계 쪽 가장 최근 공통조상(most recent common ancestor 또는 MRCA)을 가리킨다 [20]. 즉, 모든 현대인류는 아주 오래전에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한 명의 여성에게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물려받았음을 가리키는 상징적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명의 여성”이라는 표현을 오해하면 안 된다. 이브(그리고 뒤에서 다룰 아담이라는 용어)는 어느 특정 개인을 지칭하는 게 아닌 대상이 바뀔 수 있는 상징적 표현으로 현대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어떤 개체군(population, 個體群)에 속한 여성(들)을 뜻함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미토콘드리아 이브는 한 명이 아니라 동일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가진 개체군(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 쪽 직계조상인 미토콘드리아 이브의 존재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아니, 미래에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물리학자들이여 어떻게 좀 안 되겠니? 따라서 우리는 ‘그’의 존재를 오직 엄밀한 과학적 추론을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으며, 이때 사용 가능한 가장 유용한 수단은 (이미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바로 미토콘드리아 DNA다.


일반적으로 어떤 종의 진화적인 계통사(genealogical history, 系統史) 또는 계통수(genealogical tree, 系統樹)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대상으로 한 분석에는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다 [11, 21, 22]. 첫째, 미토콘드리아 DNA는 핵 DNA보다 돌연변이가 몇 배는 더 빨리 축적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유전자 풀(gene pool)의 다양성(diversity, 多樣性)을 파악하는데 적절하다 [23]. 두 번째, 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유전으로 자손에게 전달되며 핵 DNA에서 흔히 일어나는 재조합(recombination, 再組合)이 관찰되지 않기 때문에 개체군 및 종의 종류와 상관없이 서로 다른 개체(군)를 비교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24]. 셋째, 우리 몸 안에는 대략 1016개에 달하는 미토콘드리아 DNA가 존재하며, 바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핵 DNA처럼 세포 또는 조직(tissue, 組織)의 분화(differentiation, 分化) 과정에 염기서열이 뒤바뀌거나 소실될 일이 없으므로 한 개체의 모든 미토콘드리아 DNA는 원칙적으로 동일하다. 마지막으로 미토콘드리아 DNA는 매우 낮은 유효집단 크기(effective population size)를 보이며 이배체(diploid, 二倍體)로 기능하는 핵 DNA와는 달리 마치 반수체(haploid, 半數體)인 것처럼 행동한다 [25]. 요약하자면 미토콘드리아 DNA는 세대를 거듭하더라도 자체에서 발생하는 돌연변이를 제외하고는 다른 유전자와 섞일 가능성이 없으며 오직 모계유전을 통해서만 자손세대에 전달되기 때문에, 어떤 종 또는 개체군 사이의 진화적 유연관계 (genetic relationship, 類緣關係)—특히 모계 혈통을 중심으로 한 관계—를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25].


인류학에 유전학을 접목한 최초의 유의미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미토콘드리아 이브설”은 1987년과 1991년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된 연구를 통해 하나의 정론으로 자리 잡았으며, 더불어 스트린져와 앤드류스가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주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21, 22].


먼저, 「미토콘드리아 DNA와 인류의 진화(Mitochondrial DNA and human evolution)」란 제목으로 레베카 칸(Rebecca Cann), 마크 스톤킹(Mark Stoneking), 앨런 윌슨(Allan Wilson)이 1987년 『네이쳐(Nature)』에 발표한 논문은 다섯 지역의 지리적 개체군(geographic population)을 대표하는 145개의 태반(placenta, 胎盤) 표본과 두 가지 세포주(cell line, 細胞株)에서 추출한 미토콘드리아 DNA를 이용해 지리적 분포에 따른 인간의 진화적 유연관계를 파악하고자 했다 [21, 26]. 이를 위해 그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미토콘드리아 DNA의 돌연변이 누적(accumulation of mutation) 정도를 측정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시퀀싱 분석법(sequencing analysis)을 통한 염기서열의 직접 조사가 힘들었기 때문에 다른 수단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특정 염기서열의 DNA를 인식해 자를 수 있는 제한효소(restriction enzyme, 制限酵素) 단백질을 이용한 지도작성법(restriction mapping)을 도입해 각 표본에서 추출한 미토콘드리아 DNA의 돌연변이 정도를 동정(同定)했고, 그 결과를 분석해 개체 사이의 돌연변이 정도와 이에 따른 진화적 유연관계를 간접적으로 분석·비교했다 [27]. 결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매우 복잡하고 어려우므로 생략하도록 하자. 더불어 나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쉬운 말로 풀어쓰기엔 내 능력이 너무 많이 모자란다. 미안하다. 어쨌든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현생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약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어떤 여성, 즉 현생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개체군에 속한 어떤 여성(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에 대해 적지 않은 논란—주로 다지역 기원설을 지지하는 쪽에서 제기된 논란—이 있었다 [22]. (1) 제한효소를 이용한 간접적인 분석은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전체 염기서열 변화 또는 돌연변이 정도를 반영하지 못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기술 수준에서 시퀀싱 분석법으로 DNA 염기서열을 직접 분석하기란 쉽지 않았으며, 가능했다 하더라도 엄청난 비용 문제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2)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주장하면서도 아프리카인 미토콘드리아 DNA라며 사용한 표본 대부분은 아프리카 원주민이 아니라 실제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에서 얻은 것이며 표본 크기[20개]도 너무 작다 [26]. (3) 현생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 공통조상을 인간 미토콘드리아 DNA 계보에 위치시킬 때 사용한 중앙점 방식(midpoint method, 中央點方式)이 분석 방식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으므로 평가를 할 수 없지만, “inferior method”라고 표현한 것을 보니 아마도 이 분석법이 별로 적절치 않은 모양이었다. (4) 현생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 기원이 아프리카임을 추론할 때 통계적 타당성(statistical justification, 統計的妥當性)을 검증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들은 현생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에 대한 MRCA의 생존 시기를 단순히 약 20만 년 전으로만 기술했지 오차범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5) 인간 미토콘드리아 DNA의 진화율(evolution rate, 進化率)을 산출할 때 적절한 보정(calibration, 補正)을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침팬지와 인간 사이의 진화율 등과 같은 적절한 레퍼런스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1년 『사이언스』에 「아프리카 개체군과 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진화(African Populations and the Evolution of Human Mitochondrial DNA)」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같은 그룹의 논문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문제점을 보완해 좀 더 엄밀하고 정확한 결론을 내놓았다 [22]. 우선 1991년도 연구는 제한효소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분석한 1987년 연구와는 달리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서열 중 돌연변이율(mutation rate, 突然變異率)이 가장 높다고 알려진 초가변영역(hypervariable region, 超可變領域) 두 군데의 돌연변이 여부를 시퀀싱 분석법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선행 연구가 오직 20개의 (그것도 대부분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서 얻은) 아프리카 표본만을 다룬 것과는 달리, 전체 표본 189개 중 121개가 사하라 사막 이남에 거주하는 아프리카 원주민의 것이었다 [28]. 또한, 인간의 미토콘드리아 DNA 계보도를 작성할 때 중앙점 방식이 아닌 외군 비교법(outgroup comparison method, 外群比較法)을 사용했으며 (저자들은 이 방식을 “superior method”라고 불렀다), 이 과정에서 침팬지의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서열을 레퍼런스로 삼았다. 더불어 미토콘드리아 DNA의 지리적 기원(geographical origin)을 특정(特定)할 때에도 이전보다 엄밀한 통계 처리를 적용했다.


어쨌거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좀 더 확실해졌을 뿐이다. 1987년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다듬어졌다. 현생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아프리카에서 살던 고대인류 개체군의 어떤 여성(들)에게서 비롯된 게 확실하며 생존 시기는 24만 9천~16만 6천 년 전 사이로 추정된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1987년 연구에서는 아프리카 표본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관찰할 수 없었지만, 1991년 연구는 121개라는 아프리카 표본 덕분에 과거에는 찾을 수 없었던 어떤 경향성을 아프리카 표본 내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프리카 바깥에서보다 아프리카 안에서 미토콘드리아 DNA의 염기서열 다양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게 관찰되었다는 사실이다.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필자는 고인류학 전공이 아니므로 확실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지만, 더불어 진화생물학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어떤 유의미한 가설을 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현대인류에게 나타나는 인종적 다양성은 고대 현생인류가 아프리카 바깥으로 진출하기 전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어느 정도 확립되었으며, 이들 유전적 다양성(특히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의 다양성)을 가진 여러 호모 사피엔스 개체군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 나타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누군가가 이런 가설을 벌써 내놓았겠지 내 주제에 무슨. 아무튼, 아프리카 대륙 이외의 지역보다 아프리카 내에서 미토콘드리아 DNA의 다양성이 더 크다는 사실은 오늘날 상황과 견주었을 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4) Y 염색체 아담설(Y-chromosome Adam hypothesis) —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에 대한 또 다른 증거


앞의 두 사례는 현생인류의 기원을 밝혀내기 위해 미토콘드리아 DNA를 중심으로 추론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유전으로 자손세대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우리가 미토콘드리아 DNA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부모세대 중 오직 모계혈통에 대한 유전자 흐름뿐이다.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다음과 같은 상황을 한 번 가정해보자. 임의의 개체군 A가 있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개체군 A와는 (미토콘드리아 DNA를 포함한) 유전자 풀이 다른 개체군 B가 있다. 이때 개체군 B에 속한 남성(들)이 개체군 A에 유입해 개체군 A의 여성과 만나 자손을 낳았다. 이 자손을 C라고 하자. 자손 C는 개체군 A 여성의 유전자 반과 개체군 B 남성의 유전자 반을 유전 법칙에 따라 전달받았다. 그런데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개체군 A와 B 사이의 인적 접촉이 완전히 끊겼으며 이후로 개체군 A에는 개체군 B의 유전자가 더이상 유입하지 않았다. 개체군 A의 여성과 개체군 B의 남성의 자손으로 태어난 C(또는 C와 동일한 처지에 놓인 혼혈 자손들)는 오직 개체군 A 안에서 배우자를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 개체군 A의 가계도를 구축하기 위해 미토콘드리아 DNA를 대상으로 유연관계를 분석했다.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 과거의 사건, 즉 개체군 A 여성과 개체군 B 남성이 만나 혼혈인 자손 C가 태어났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모두 개체군 A에 대한 미토콘드리아 DNA만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미토콘드리아 DNA의 계보를 구축하는 것만으로는 현생인류의 기원을 추적하는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가설에 신빙성을 더하려면 미토콘드리아 유전자가 아닌 다른 증거도 필요하다. 이쯤에서 아담을 소환을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는 태초에 아담이 먼저 존재했고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가 탄생했지만, 고인류학의 세계에서는 이브가 먼저 태어났다.


성경에 아담과 이브가 있듯이 아프리카 기원설에도 아담과 이브가 있다. 하나는 앞에서 “미토콘드리아 이브”란 이름으로 이미 소개했다. 남은 것은 아담, 바로 “Y 염색체 아담”이다 [29]. Y 염색체 아담(또는 Y-MRCA)은 현생인류 남자의 가장 최근 공통조상을 가리키는 용어다.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할 점! 아담과 이브라 해서 꼭 같은 시기에 존재할 이유는 없다. 성경이 상징과 은유의 복합체인 것처럼 우리의 유전적 조상인 미토콘드리아 이브와 Y 염색체 아담도 아주 먼 과거에 살았음 직한 유전적 직계조상일 뿐이다. 더불어 미토콘드리아 이브가 한 명이 아닌 것처럼 Y 염색체 아담도 단 한 명만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1995년 『네이쳐』에 마이클 해머(Michael Hammer)는 「인간 Y 염색체에 대한 최근 공통 계보(A recent common ancestry for human Y chromosome)」라는 제목으로 인간 Y 염색체의 MRCA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30].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처럼 몇백 개에 달하는 많은 표본을 대상으로 연구하지는 않았다. 오직 아프리카인 8명, 오스트레일리아인 2명, 일본인 3명, 유럽인 2명과 침팬지 4마리라는 합계 19개체에서 추출한 Y 염색체 표본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연구가 많은 관심을 받은 이유는 부계유전을 통해서 바라본 현생인류의 기원이 전반적으로 미토콘드리아 DNA라는 모계유전과 매우 유사한 경향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Y 염색체를 대상으로 한 비교유전학 연구에서 마이클 해머는 주로 다음과 같은 특징에 초점을 맞췄다. 핵 DNA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전이할 수 있는 DNA 조각을 일반적으로 트랜스포존(transposon)이라 부른다 [31]. 인간 염색체에는 다양한 종류의 트랜스포존이 존재하는데, 해머는 그 중 300개의 염기쌍으로 구성된 알루(Alu) 요소를 일차적인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더불어 해머는 알루 요소의 끝 부분에 특이적으로 나타나는 아데닌 핵산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지점의 길이도 관측했는데, 일반적으로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Y 염색체의 특정 염기 서열 위치에서 자주 나타나는 단일 염기 변이 다형성(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으로 줄여서 SNP라고 한다, 單一鹽基變異多形性)의 변이 정도를 관찰함으로써 개체 혹은 개체군에 따른 진화적 유연관계를 파악하고자 했다 [32].


그 결과 재미있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현존하는 생명체 중에서 침팬지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진화적 유연관계를 보인다. 즉, 침팬지와 인간은 지금으로부터 약 6백만 년 전에 하나의 공통조상에서 갈라져 나왔고, 두 분지 중 하나는 다양한 진화 경로를 거치며 오늘날 인류가 있게 한 진화의 흐름을 있게 했으며 다른 하나는 약 2백만 년 전에 진화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된 침팬지와 보노보라는 두 영장류의 기원이 되었다. 그런데 침팬지의 Y 염색체와 아프리카 원주민 일부에서는 알루 요소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바로 침팬지와 현생인류의 Y-MRCA, 즉 Y 염색체에 대한 공통조상이 알루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 따라서 어떤 남성의 Y 염색체에서 알루 요소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진화적으로 최근—그럼에도 최소 몇백 몇천 년이라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진화의 역사에서는 매우 짧은 축에 속한다—에 일어난 일이라 추측할 수 있다. 더불어 인간과 침팬지 유전체의 유사성이 대략 90% 정도고 이들 두 종 사이의 Y 염색체 유사성은 대략 70%라는 점을 상기하자 [13]. 이것은 인간과 침팬지가 공통조상에서 분지한 이후 Y 염색체에서 유달리 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분석에 사용한 인간 Y 염색체 표본 사이에서는 돌연변이 폭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Y 염색체가 어떤 이유 때문에 현재까지 매우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시사하며, 결과적으로 오늘날 인류가 최근에 하나의 단일 개체군에서 주로 기원했음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증거가 된다. 또 하나 유심히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바로 미토콘드리아 DNA와 마찬가지로 Y 염색체의 염기서열 다양성이 아프리카 바깥쪽 개체군(즉, 오스트레일리아인 2명, 일본인 3명, 유럽인 2명)보다 아프리카 내 개체군(아프리카인 8명)에서 상대적으로 더 높게 관찰되었다는 사실로, 현생인류의 전반적인 진화 정도가 아프리카 외부로 확산하기 이전에 매우 빨리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의 Y 염색체 아담이 생존했던 시기로 대략 18만 8천 년 전(오차범위9만4천년)으로 측정되었는데, 이것은 미토콘드리아 이브의 생존시기와 상당히 일치한다. (훗날 독립적으로 시행된 다른 연구에서는 다른 생존시기를 제안했다 [29].)


자!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환호성을 내지를 수 있다. “우리의 유전적 직계조상인 미토콘드리아 이브와 Y 염색체 아담께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우리가 전 세계로 퍼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열심히 진화의 과정을 몸소 체험하고 계셨다.” 멋지지 아니한가?


5) 상염색체에 존재하는 현생인류 기원의 증거


아프리카 기원설을 지지하는 증거가 미토콘드리아 DNA와 Y 염색체에만 있지는 않다. 상염색체를 대상으로 한 비교유전학 연구에서도 아프리카 기원설을 지지하는 증거가 다수 제시되었다. 일례로 1996년 『네이쳐 지네틱스(Nature Genetics)』에 「미소부수체의 다양성은 현생인류의 최근 아프리카 기원을 지지한다(Minisatellite diversity supports a recent African origin for modern humans)」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연구는 매우 높은 빈도의 유전적 변이(變異)를 보이는 인간 유전자좌(locus, 遺傳子座)의 다양성을 측정함으로써 현생인류의 기원과 이동을 조사했다 [33]. 그 결과 비아프리카계 현대인류가 아프리카계 인류보다 상염색체 부분에서 훨씬 더 큰 다양성이 나타남을 확인했는데, 앞의 두 사례에서 고대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했음을 상기한다면 이 결과는 아프리카에서 비롯된 현생인류 개체군이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으로 점점 확산하면서 상염색체 DNA에 유전적 변이가 발생했음을 뜻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 아프리카 내부로 인류가 대규모 이동을 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또한 1996년 『사이언스』에 「CD4 유전자좌의 연관불균형에 대한 전 지구적 패턴과 현생인류의 기원(Global Patterns of Linkage Disequilibrium at the CD4 Locus and Modern Human Origins)」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논문도 앞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지지하는 또 다른 증거를 내놓았다 [34].


이렇게 1987년 칸과 윌슨의 비교유전학적 기법을 이용한 인류학 연구와 1988년 스트린져와 앤드류스가 제시한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에서 비롯된 현대인류의 진화적 흐름을 추적하는 연구는 오늘날에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아프리카 기원설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제안된 월포프의 다지역 기원설은 전체적으로 현생인류의 기원을 설명하기에는 근거도 빈약할뿐더러 이론적 취약점도 많아서 현재로서는 가설의 신빙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거라면 대략 ‘망’이다 OTL.


3. 아프리카 출신의 현생인류 그리고 네안데르탈인


지금까지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 사이의 진화적 유연관계에 대해 논하기 위한 사전 떡밥(?)으로 현생인류의 기원에 대한 가설, 특히 아프리카 기원설에 대해 대략 살펴봤다. 앞에서도 반복적으로 언급했지만, 아프리카 기원설과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비교해부학적·비교유전학적 연구 및 가설은 공통적으로 다음 내용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대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던 어느 개체군에 직접적인 유전적 뿌리를 두고 있다. 더불어 이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숨은 뜻도 있다. 현대인류의 유전자는 전적으로 약 20년 전 아프리카에서 살던 호모 사피엔스 개체군에서 비롯된 것이며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 호모 에렉투스에서 독립적으로 진화한 (오늘날에는 멸종한) 다른 종의 인간은 이 유전자 흐름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으로 충분할 것일까? 다시 말하자면 아프리카 기원설에서 주장하는 대로 현대인의 유전자에는 그 어떤 고대인류의 유전자 흔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또는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종, 즉 현대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 아니라고 100% 주장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앞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증거를 꼼꼼히 살펴보자. 우선 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혈통으로부터 자손세대로 전달되므로 부계혈통에서 전달되는 유전자 흐름을 관찰할 수 없다는 한계를 앞에서 언급했다.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 아버지와 고대 현생인류 어머니 사이에 (성적 접촉으로 인한) 어떤 유전적 결합이 발생했고 이 때문에 네안데르탈인/현생인류 잡종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가정했을 때,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대상으로 한 접근법으로는 이 부분에 관해 확인할 길이 없다. Y 염색체를 대상으로 한 유전학 연구도 마찬가지다. 현생인류 아버지와 네안데르탈인 어머니 사이에 현생인류/네안데르탈인 잡종이 태어났다면 Y 염색체를 대상으로 한 접근법은 오직 현생인류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Y 염색체만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상염색체를 대상으로 한 비교유전학 연구는 어떨까? 미토콘드리아 DNA나 Y 염색체 연구보다는 좀 더 자세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데 상대적으로 나을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현생인류와 직접 비교할 수 있는 고대인류의 유전자, 즉 고대인의 DNA 염기서열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아무리 현대인류를 대상으로 비교유전학 연구를 백날 해봤자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을 조사하지 않는 이상 정확한 인과관계를 파악하기란 매우 어렵다. 더불어 60억 이상에 달하는 전 지구 인류를 대상으로 한 유전자 분석 작업에 성공에 어떤 결론을 도출해 냈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진화 또는 기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레퍼런스, 즉 고대인류의 신뢰할만한 유전자 정보가 없다면 어떤 결론을 추론해도 여전히 부족한 점투성이다. 따라서 현생인류가 다른 멸종한 인간 종과의 아무런 유전적 혼합 없이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전 지역으로 퍼졌다는 아프리카 기원설을 주장하든, 혹은 어느 정도의 유전적 혼합은 있었다는 절충론을 제안하든, 아니면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의 직계조상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계속 밀고 나가든 상관없이 이 모든 것을 단번에 꿰뚫어 버릴만한 필요조건은 바로 그러한 가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검증하며 기각할 수 있는 증거, 곧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오늘날 멸종한 고대인류의 유전자 정보를 확보하는 일이다.



참고문헌


[1] Neanderthal. Wikipedia [링크]
[2] Homo sapiens. Wikipedia [링크]
[3] Cgo-Magnon. Wikipedia [링크]
[4] Krings M, et al. 1997. Neandertal DNA Sequences and the Origin of Modern Humans. Cell 90: 19-30. [링크]
[5] Hofreiter M. 2011. Drafting Human Ancestry: What Does the Neanderthal Genome Tell Us about Hominid Evolution? Commentary on Green et al. (2010). Hum Biol 83: 1-11. [링크]
[6] Duarte C, et al. 1999. The early Upper Paleolithic human skeleton from the Abrigo do Lagar Velho (Portugal) and modern human emergence in Iberia. Proc Natl Acad Sci USA 96: 7604-7609. [링크]
[7] Tattersall I, and Schwartz JH, et al. 1999. Hominids and hybrids: The place of Neanderthals in human evolution. Proc Natl Acad Sci USA 96. 7117-7119. [링크]
[8] Human evolution. Wikipedia [링크]
[9] 여기서 “대부분”으로 표현한 이유는 RNA(ribonucleic acid)를 유전물질로 사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꼬마선충(nematode 또는 학명으로 Caenorhabditis elegans)에는 부모 세대에서 후천적으로 획득한 형질(trait, 形質)을 자손에게 전달할 수 있는 일종의 라마르크 유전(Lamarckian genetics) 메커니즘이 존재하는데, 이때 유전 정보 매개체가 바로 RNA다. 그럼에도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 생명체—바이러스는 논외로 하자—는 예외 없이 DNA를 유전물질로 사용하기 때문에 인류의 진화를 유전학적 측면에서 고찰하는 데 있어서 RNA를 배제한 채 DNA만 고려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10] 식물에는 동물과 달리 광합성 반응이 일어나는 세포 소기관인 엽록체(chloroplast, 葉綠體)가 있다. 이 소기관에도 엽록체 DNA(chloroplast DNA)가 존재한다.
[11] Mitochondrial DNA. Wikipedia [링크]
[12] 미토콘드리아. 위키피디아 [링크] : 미토콘드리아(단수: mitochondrion, 복수: mitochondria)는 진핵생물(eukaryote, 眞核生物) 세포 안에 있는 중요한 세포 소기관으로 여러 유기물질에 저장된 에너지를 산화적 인산화 과정(oxidative phosphorylation process)을 통해 생명 활동에 필요한 주요 에너지원인 ATP(adenosine triphosphate)를 합성하는 세포의 발전소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질의 25%를 차지하지만, 세포 기능 및 역할과 주변 환경에 따라 그 크기와 수가 다양하게 변한다. 미토콘드리아는 자체적으로 DNA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세포 소기관과 달리 이중막 구조(double-membraned organization)로 되어 있어 공생진화설(Endosymbiosis, 細胞內共生說)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로 인식되고 있다. [더 읽을거리를 찾는다면 여기(#1) 또는 여기(#2)를 클릭!]
[13] Y chromosome. Wikipedia [링크] : Y 염색체는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 포유류에서 성별을 결정하는 성염색체 두 가지 중 하나다. 인간의 Y 염색체는 약 5천만 개 염기쌍(base pair)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직 아버지에서 아들로만 유전된다. 인간과 침팬지의 Y 염색체 염기서열을 비교했을 때 대략 30% 정도의 차이(difference, 差異)를 보인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인간과 침팬지 유전체가 전반적으로 94%가량 유사성(similarity, 類似性)이 있음을 고려한다면 [14], 인간 유전체(genome, 遺傳體) 가운데 Y 염색체가 상대적으로 진화가 빨리 일어난 부분 가운데 하나임을 뜻한다. 더불어 Y 염색체는 다른 염색체와 비교했을 때 4.8배라는 매우 높은 돌연변이율(mutation rate, 突然變異率)을 나타내고 있다.
[14] Chimpanzee. Wikipedia [링크]
[15] Meiosis. Wikipedia [링크] : 감수분열(meiosis, 減數分裂)은 생식세포를 만들기 위한 진핵생물의 세포 분열 형태 중 하나이다. 어떤 생명체의 전체 염색체 수를 2n이라 한다면 감수분열로 형성된 난자와 정자는 각각 n개의 염색체 수를 가지게 된다. 이들 생식세포가 수정(fertilization, 受精) 과정을 통해 하나로 합치게 되면, 2n개의 염색체 수를 가진 자손이 형성된다. 이와는 달리 일반적인 세포분열을 뜻하는 체세포분열은 몇 번을 분열해도 전체 염색체 수는 2n개로 동일하다.
[16] Wolpoff MH, et al. 1988. Modern human origins. Science 241: 772-774. [링크]
[17] Wolpoff MH, et al. 2000. Multiregional, not multiple origins. Am J Phys Anthropol 112: 129-136. [링크]
[18] 여기서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은 제외하도록 하자. 이 대륙에 인류가 유입한 시기는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 Stringer CB and Andrews P. 1988. Genetic and fossil evidence for the origin of modern humans. Science 239: 1263-1268. [링크]
[20] Mitochondrial Eve. Wikipedia [링크]
[21] Cann RL, et al. 1987. Mitochondrial DNA and human evolution. Nature 325: 31-36. [링크]
[22] Vigilant L, et al. 1991. African populations and the evolution of human mitochondrial DNA. Science 253: 1503-1507. [링크]
[23] 유전자 풀(gene pool)은 주어진 유성생식 집단의 유전자 전체를 의미한다.
[24] Genetic recombination. Wikipedia [링크] : 유전자 재조합(genetic recombination, 遺傳子再調合)은 DNA와 같은 유전물질이 복제 과정에서 원래 서열과는 다르게 뒤바뀌는 일련의 과정이다. 여러 가지 원인과 메커니즘이 있지만, 유전 현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수분열 과정에서 발생하는 재조합 현상인데, 이러한 메커니즘은 자손세대가 부모세대와는 다른 유전자 조합을 갖도록 해 대립형질(allelomorphic character, 對立形質)의 발현빈도(expression frequency, 發現頻度)를 다르게 함으로써 다양성을 높이는 경향이 있다.
[25] 유연관계(genetic relationship, 類緣關係)는 생물학에서 개체(군)의 표현형, 유전형 등의 특성이 어느 정도 가까운가를 나타내는 관계를 뜻한다.
[26] 1987년 『Nature』에 발표된 연구에 사용된 표본은 다음과 같다. 태반 조직 145개 중 98개는 미국, 나머지는 오스트레일리아와 파푸아 뉴기니에서 얻었다. 분석에 사용한 세포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에서 유래한 HeLa와 남아프리카 쿵족(!Kung, 사하라 사막 이남 보츠와나[Botswana]와 나미비아[Namibia] 지역에 거주하는 원주민)의 조직에서 배양한 것으로 알려진 GM3043이다. 인종 분포는 다음과 같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계통(20개), 중국·베트남·라오스·필리핀·인도네시아·통가 등의 아시아 계통(34개), 유럽·북아프리카·중동 등 코카시안 계통(Caucasian)(46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21개), 파푸아 뉴기니 원주민(26개). 아프리카 표본 20개 중 단지 2개만이 실제로 사하라 사막 이남에서 태어난 사람의 것이고, 나머지 18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에서 얻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핵 유전자(nuclear gene)를 제한효소 지도작성법으로 분석했을 때 코카시언의 특징을 보이기는 했지만, 18개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표본 중 12개에서 아프리카 원주민의 미토콘드리아 DNA와 같은 제한효소 위치표지(restriction site marker, 制限酵素位置標識)를 나타냈기 때문에 연구팀은 자신들이 사용한 아프리카 미토콘드리아 DNA가 아프리카 원주민을 사실상 대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7] 제한효소와 제한효소를 이용한 유전자 지도 작성법은 다음을 참조하라. [링크 #1, 링크 #2]
[28] 189개 표본 중 121개는 사하라 사막 이남에 거주하는 개체군에서 얻은 것으로 쿵족 25개, 헤레로족(Herero, 보츠와나) 27개, 나론족(Naron, 보츠와나) 1개, 하드자족(Hadza, 탄자니아[Tanzania]) 17개, 요루반족(Yoruban, 나이지리아[Nigeria]) 14개, 아프리카 동부의 피그미족(East Pygmics, 자이레[Zaire]) 20개, 아프리카 서부 피그미족(Western Pygmics, 중앙아프리카공화국[Central African Republic]) 17개를 포함한다. 나머지 68개 가운데 파푸아 뉴기니인은 20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1개, 유럽인은 15개, 아시아인은 24개,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8개를 포함한다.
[29] Y-chromosomal Adam. Wikipedia. [링크]
[30] Hammer MF. 1995. A recent common ancestor human Y chromosomes. Nature 378: 376-378. [링크]
[31] Transposon. Wikipedia [링크]
[32] 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 Wikipedia [링크]
[33] Armour JA, et al. 1996. Minisatellite diversity supports a recent African origin for modern humans. Nat Genet 13: 154-160. [링크]
[34] Tishkoff E, et al. 1996. Global patterns of linkage disequilibrium at the CD4 locus and modern human origins. Science 271: 1380-1387.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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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 전공—참고로 내 전공은 생물학이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류학(anthropology, 人類學)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 인류학이 생물학을 위시해 여러 가지 학문 분야를 두루 섭렵하는 상당히 포괄적인 학문이며, 특히 인간 진화과정을 연구하는 분야는 진화생물학(evolutionary biology, 進化生物學) 또는 고생물학(palaeontology, 古生物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나의 관심이 인류학 쪽으로 가는 것도 그리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인류학에 대해 관심을 두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류학이라는 학문이 인간 그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과거 인류의 조상 혹은 공통조상을 가지는 인류의 다른 가지(branch)는 어떻게 해서 멸망했을까? 수많은 물음이 인류학과 관련된 책과 논문을 읽으면서 지속해서 떠오르는 가운데, 내가 공부한 부분을 한 편의 글로 정리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이다. 이 글에 나와 있는 내용이 전부 내가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사실 문장 또는 문단 자체를 인용해서 짜깁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글귀와 문장 하나하나가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많은 논문과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왠지 이것 덕질인 듯 한 기분이 들지만, 이미 시작했으니 그냥 올리기로 하겠다. 에잇! 조교한테 너 전부 베껴 쓴 게 아니냐는 욕만 안 먹으면 돼!!! (-_-;)


1. 네안데르탈인: 간략한 소개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 man)은 약 60만~2만 5천 년 전 신생대(the Cenozoic era, 新生代) 홍적세(the Pleistocene epoch, 홍적세) 중기~후기 무렵에 살았던 인간 속(genus Homo, 人間屬)의 멸종된 호미니드(hominid)로 현생인류(modern human, 現生人類) 바로 전 단계에 살았던 종(species, 種)으로, 인류 진화 과정 중 가장 늦은 단계에 살았던 원시 호미니드(primitive hominid)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 2, 3, 4] 네안데르탈인을 계통분류학상 어디에 놓을지는 연구자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는 학명을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네안데르탈인을 현생인류(Homo sapiens)의 아종(subspecies, 亞種)이라 주장하는 쪽은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sapiens neanderthalensis)라 부르며, 별개의 호미니드 종이라 판단하는 진영에서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라고 명명한다. [1] 특히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와 별개의 종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유전자 비교분석을 통한 계통분류 분석(phylogenetic analysis) 연구에서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 DNA(mitochondrial DNA 또는 mtDNA)가 현생인류와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는 것과 두 종 사이의 조직학적/형태학적 차이를 들어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의 아종임을 부정하고 있다. [5, 6, 7, 8] 그러나 최근 진행하고 있는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프로젝트(Neanderthal Genome Project) 연구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 사이의 종간교배(interbreeding, 種間交配)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어 시선을 끌고 있는데, 이는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가 생식적으로 완전히 격리되어 있지 않았을 개연성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9, 10]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향후 논의 과정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림 1. 네안데르탈인 모습을 복원해 그린 첫 번째 그림 (헤르만 샤프하우젠) (왼쪽) [출처: Wikipedia]. 네안데르탈인의 삶을 재현한 모습 (오른쪽). [출처: Daily Mail]. Mathilda’s Anthropology Blog에 가면 네안데르탈인의 모습을 복원한 다양한 사진을 볼 수 있다. [링크]



고고학적인 기록으로 볼 때 그들의 기본적인 행위와 능력은 현생인류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아마도 네안데르탈인 두뇌가 현생인류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네안데르탈인 두뇌가 현생인류보다 작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출토된 유골을 재구성한 비교해부학적 연구 결과, 네안데르탈인 두뇌는 현생인류와 비슷하거나 좀 더 크다는 것이 밝혀졌다. [1, 11] 더불어 네안데르탈인은 인류 진화과정 중 한 구성원에 속하지만, 해부학적 특징이나 그 출현시기에서 초기 현생인류와는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 네안데르탈인은 초기 현생인류와 더불어 비교적 최근까지 존재했으며, 멸종한 다른 고(古)인류와 비교했을 때 그 특징 또한 아주 잘 알려졌다. 실제로 네안데르탈인은 생김새와 행동 등에 있어서 그 어떤 종류의 고인류보다 현생인류를 많이 닮았으며, 어떤 면—주로 골격 등의 신체적인 특징—에서는 초기 현생인류보다 더 발달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12, 13] [그림 1, 그림 2]



그림 2.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 간 두개골 비교. Shainder 1과 La Ferrassie 1은 네안데르탈인 두개골이며, Qafzeh 9과 Předmostí 3는 현생인류, 즉 크로마뇽인의 두개골이다. [출처: Mathilda’s Anthropology Blog] 크로마뇽인에 대한 설명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라. [Cro-magnon, Wikipedia] Shainder 1은 해부학 상 차이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La Ferrassie 1은 두 종류의 크로마뇽인 두개골과 비교했을 때 확연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네안데르탈인의 진화적 조상은 오늘날 유럽 지역에 분포했던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Homo heidelbergensis)의 후손으로 유럽과 서아시아 일대에 국한되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2] 실제로 네안데르탈인의 초기 특징(traits)을 보이는 60만~35만 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하이델베르크인 유골이 스페인 부르고스(Burgos) 근처 시에라 데 아따뿌에르까(Sierra de Atapuerca) 동굴에 있는 시마 드 로스 우에소스(Sima de los Huesos, 죽음의 동굴)라 불리는 지하 14m 깊이의 수갱(竪坑)에서 발굴되었는데, 나중에 이들 고인류는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공통조상(common ancestor, 共通祖上)인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즉 하이델베르크 원인의 한 부류이며 진화적으로도 네안데르탈인의 조상인 것으로 밝혀졌다. [14, 15] 참고로 하이델베르겐시스, 즉 하이델베르크인은 약 60만 년 전부터 약 25만 년 전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보이며, 약 30만 년 전에 분기한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32]


2. 최초의 네안데르탈인 발굴


네안데르탈인의 발견은 고인류학(paleoanthropology, 古人類學)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 왜냐하면, 네안데르탈인은 최초로 발견된 인류의 조상이며, 네안데르탈인의 발견으로 고인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대중 일반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호미니드이기 때문이다. [1, 12] 물론 네안데르탈인은 우리와 진화적 관계가 어떻든 상관없이 문화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는데, 대표적으로 네안데르탈인(또는 네안데르탈인을 닮은 원시인이라는 상징적 표현)이라는 이름은 어느 순간 모욕적인 관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16] 그러나 그러한 문화적 선입견과는 달리 네안데르탈인의 뇌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충분히 컸고 지능도 높았으며, 상당한 사고력과 직관력이 있어야 가능한 정교한 석기(石器)를 만들어 사용하는 등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뛰어났다. [그림 3] 어쨌든, 네안데르탈인이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고인류라는 것과는 별개로 차지하는 중요한 의미는, 이들이 인류진화에 관한 최초의 과학적 증거이며, 이들 화석이 발견된 시기가 진화론이 학계와 사회 일반에서 뜨겁게 논의될 때라는 점이다. [12]



그림 3. 현생인류와 고대인류 그리고 영장류 사이의 뇌용적량을 비교한 그림. 1부터 5까지 순서대로, 침팬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크로마뇽인이다. [출처: Softpedia]



 

그림 4. 엥기스 동굴에서 발견한 고인류 화석을 조사한 슈멜링과 (왼쪽) 엥기스 동굴 전경 (오른쪽). [출처: Wikipedia]



1829년 벨기에(Belgium) 리에 주(Liège) 근처 엥기스(Engis) 동굴에서 슈멜링(Philippe-Charles Schmerling)이 최초의 네안데르탈인 화석 발굴로 평가받는 어린아이의 머리뼈 조각을 발굴했다. 그리고 1948년 북부 아프리카 맞은 편에 있는 스페인(Spain) 지브롤터(Gibraltar) 포르비 광산(Forbes' Quarry)의 어느 동굴에서도 네안데르탈인의 어른 머리뼈로 추정되는 화석이 발견되었다. [17, 18] [그림 4] 그러나 이 발견은 당시 과학적인 흥미를 크게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다윈의 『종의 기원』이 세상에 선보인 이후에도 이때 발견된 고대인의 흔적은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으며, 1936년에 이르러서야 그 진가가 드러났다. [33, 34]



  

그림 5. 그들이 발견한 화석에 대해 제대로 된 해석을 내리진 못했지만, 어쨌든 네안데르탈인을 발견하고 이름 붙인 카를 풀로트와 (왼쪽) [출처: Wikipedia] 헤르만 샤프하우젠 오른쪽). [출처: Wikipedia]



네안데르탈인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 계기는 바로 1856년에 발견된 화석으로, 1859년 『종의 기원』이 출판된 지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독일 뒤셀도르프(Dusseldorf) 근처 에르크라트(Erkrath)에 있는 네안더 계곡(Neander Valley) 펠트호퍼 동굴(Feldhofer Cave)에서 두개관(skull cap 혹은 calvarium, 頭蓋管 혹은 머리덮개뼈)과 대퇴골(femur, 大腿骨 혹은 넓적다리뼈) 두 개, 우측 팔의 뼈 세 조각, 좌측 팔 두 조각, 장골(ilium, 腸骨 혹은 엉덩뼈) 일부분, 견갑골(scapula, 肩胛骨 혹은 어깨뼈) 조각, 그리고 늑골(rib, 肋骨 혹은 갈비뼈) 등으로 구성된 사체가 발견되었다. [1, 18, 19] 당시 이 유골을 발견한 광부 다수는 이것을 곰의 잔해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광산 소유주는 이 뼈를 지역 학교 교사이자 아마추어 박물학자(naturalist, 博物學者)인 카를 풀로트(Johann Carl Fuhlrott)에게 넘겼다. [그림 5] 풀로트는 이 뼈가 일반 사람의 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는데, 두개관에는 커다란 눈두덩과 낮은 앞머리라는 특징이 있었고, 두개관 양옆이 불룩했으며, 대퇴골을 포함한 사지뼈는 두텁고 굳세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풀로트는 해부학, 특히 뼈에 관한 전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유명한 해부학자 헤르만 샤프하우젠(Hermann Schaaffhausen)에 이 뼈를 보여줬다. [그림 5] 하지만 샤프하우젠은, 그가 당시 유럽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다윈과 월러스의 진화론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음에도, 인간의 진화에 대해 무지했거나 또는 그것을 염두에 두었더라도 큰 의미는 두지 않았었는지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이 뼈를 게르만 족과 켈트 족 이전 북부 유럽에 살았던 한 종족에 속하는 사람의 것으로 결론내렸고, 그 결과를 풀로트와 공동으로 1857년에 공식 발표했다. [1]


3. 끊이지 않는 논란



  

그림 6. 찰스 라이엘과 (왼쪽) [출처: 위키피디아] 토마스 헨리 헉슬리 (오른쪽) [출처: Wikipedia]. 현대 지질학의 이버지와 다윈의 불독도 네안데르탈인을 조사하고 연구했다. 다만 다른 결론을 내렸을 뿐이다. 이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이지만, “XX의 아버지”라 불리며 칭송받는 사람들도 헛발질을 정말 자주 하는 모양이다.



1859년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 출판될 무렵 다윈은 이미 네안데르탈인 화석에 관해 알고 있었음에도, 인류 진화라는 민감한 문제를 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될 수 있으면 이 화석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고 한다. [20] 그 후 1863년 『고대 인류에 관한 지질학적 증거(The Geological Evidence of the Antiquity of Man)』에서 현대 지질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라이엘(Charles Lyell)은 슈멜링이 찾은 엥기스 화석을 포함한 네안데르탈인 화석을 진화상 별 중요성 없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네안데르탈인이 인간 진화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다윈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던 헉슬리(Thomas Henry Huxley)였다. 그는 1862년 네안데르탈인 두개골(1857년에 발견된)을 직접 조사 및 연구했고 그 결과를 1863년 『자연에서 인간의 위치에 관한 증거(Evidence as to Man’s Place in Nature)』에서 밝혔는데, 네안데르탈인이 비록 그 모습에서 원시성을 띠고 있지만, 유인원이나 인류진화에서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는 아니라고 서술했다. [17, 21] [그림 6]



  

그림 7.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학명을 처음 명명한 윌리엄 킹과 (왼쪽) [출처: Wikipedia]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내린 현대 병리학의 아버지 루돌프 비르코프 (오른쪽) [출처, Wikipedia].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아버지도 헛발질을 좀 하셨다. 더불어 킹 본인은 비르코프를 아버지라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웃음), 당대의 권위에 눌려 자기 의견을 한 수 접은 사람의 좋은 예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까, 아빠 말은 들으면 안 된다. (응?)



아일랜드(Ireland) 출신 해부학자 윌리엄 킹(William King)은 네안데르탈인을 절멸한 인류, 즉 현생인류와 다른 종으로 생각해 이것을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daderthalensis)라고 처음 명명했고, 1863년 영국 왕립학회(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주최 학회에서 발표한 뒤 1864년에 공식적으로 논문을 발표했지만, 킹 자신은 나중에 프러시아 출신 병리학자 루돌프 비르코프(Rudolf Virchow)의 견해—즉 네안데르탈인은 질병(예를 들면, 어린 시절에 걸린 구루병과 성인 시기에 발병한 관절염 등)에 걸린 현대인으로 추정했으며 머리에 난 상처는 죽은 후에 타격을 받아 생긴 것으로 단정했다—를 따랐다. [17, 22, 23] [그림 7] 비르코프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당시 학자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 첫째, 비르코프가 신뢰할만한 전문가—실제로 비르코프는 현대 병리학의 아버지라 불린다—였고, 둘째, 인류 진화의 개념으로 네안데르탈인의 정체를 설명하기보다는 의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당대 과학자에게는 더욱 설득력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당시에는 네안데르탈인의 뼈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확실한 과학기술적 방법—예를 들면 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 측정법 등—이 없었기 때문에 비르코프의 주장을 반박할만한 증거를 내놓을 수 없었다. [24] 비록 비르코프가 네안데르탈인 화석에 대해 잘못된 해석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가 막무가내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신중한 과학자였으며, 다윈의 진화론에 비판적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반대한 사람도 아니었다. 더불어 그의 전공이 병리학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내린 판단—네안데르탈인 화석은 병에 걸린 현생인류의 유골이다—은 꽤나 상식적인 결론이었다. [26] 그럼에도 그의 권위에 찬 발언이 한동안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이 나오기까지 장애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으며, 그의 헛발질은 아래와 같은 사례에서도 계속되었다.


1866년에 프랑스 출신 인류학자 에두아드 듀퐁(Edouard Dupont)은 굳세 보이는 아래턱과 위팔뼈, 그리고 손등뼈 등을 벨기에 투르드 라나울레테(Trou de la Naulette) 동굴에서 발굴해 보고했는데, 이 유적에서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매머드(mammoth)와 개, 털코끼리, 털코뿔소와 순록 등 다양한 동물의 뼈가 함께 출토되었다. [25] 현생인류의 턱과는 달리 라나울레테 동굴에서 출토된 아래턱은 턱이 휘어 들어가지 않은 모습인데, 당시에는 이 화석과 비교할만한 다른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비르코프는 이 전에 발견된 다른 네안데르탈인 화석과 마찬가지로 이를 병리학적인 증상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 잘못 판단했으며, 1880년에 인류학자 마스카(K. Maska)가 체코 모라비아(Moravia) 시프카(Sipka) 동굴에서 출토된 화석에 대해서도 같은 설명을 적용했다. [24]


4. 네안데르탈인 유적 위상의 재정립


그러나 1885년 벨기에 스피(Spy) 근처 한 동굴에서 마르셀 드 푸이트(Marcel de Puydt)와 막스 로헤스트(Max Lohest)가 발굴한 두 개체의 어른 뼈 화석으로 비르코프의 주장에 이의가 제기되었다. [24, 26] 스피에서 출토된 머리뼈에는 네안더 계곡에서 발견된 화석 뼈와 매우 유사한 해부학적 특징이 보이는데, 비르코프의 해석을 그대로 따른다면 프랑스, 체코, 독일 등의 여러 지역에서 출토된 동일한 해부학적 소견을 보이는 화석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똑같은 병력을 가진 사람이 존재했단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똑같은 병력을 지닌 사람의 유골이 동시다발적으로 서로 관련이 없는 지역에서 발견되는 일이 가능할까? 물론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누적된 화석 결과는 이들 화석 뼈가 비교해부학적으로 놀라운 유사성을 보였기 때문에 비르코프의 견해는 점차 설자리를 잃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비르코프의 주장은 오늘날 기각되었으며 다른 네안데르탈인 유적과 함께 스피 동굴에서 발견된 유적은 이전에 발견된 다른 유적과 함께 오늘날 관점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증거로 함께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림 8. 피테칸트로푸스(또는 자바 원인)를 발견한 뒤부아 (왼쪽) [출처: Wikipedia]와 그가 스케치한 자바 원인의 유골 화석 (가운데) [출처: Wikipedia], 그리고 발굴된 뼈를 토대로 재구성한 자바 원인의 모습 (오른쪽) [출처: Wikipedia]. 뒤부아 아저씨는 다윈의 진화론에 감명받아 인도네시아에 가서 열심히 화석을 발굴했지만, 그가 발견한 화석은 "소두증에 걸린 기형아의 뼈"라며 학회에서 맹비난을 받았다. 불쌍한 아저씨.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인류 진화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전환은 1891년 네덜란드 출신 해부학자이자 군의관이었던 뒤부아(Marie Eugène François Thomas Dubois)가 인도네시아 자바(Java)에서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의 일종인 흔히 자바 원인(Java man)이라 불리는 피테칸트로푸스(Pithecanthropus)을 발견한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1908~1921년에 걸쳐 남서 프랑스에서 발견된 일련의 화석 증거—샤펠오생(La Chapell-Aux Saint), 무스티에(Le Moustier), 페라시(Le Ferrassie), 그리고 퀴나(La Quina) 등지에서 출토된 네안데르탈인 화석—는 그간 사람들이 지녔던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의심, 즉 네안데르탈인은 병에 걸린 현생인류라는 비르코프의 강력한 견해를 떨쳐버리기에 충분했다. [27, 28] [그림 8]


프랑스, 벨기에 등지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유적의 고고학적 당위성은 1899~1905년 사이에 옛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Zagreb) 근처 크라피나(Krapina)에서 크로아티아 출신 고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드라구틴 고리야노비치-크람베르거(Dragutin Gorjanović Kramberger)가 발굴한 화석으로 더욱 확실해졌다. 이곳에서는 약 800여 개 이상의 네안데르탈인 뼛조각이 수습되었는데, 이것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14개체에 해당하는 양이었으며 스피를 포함한 프랑스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형태의 석기가 함께 출토되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다른 유적과 마찬가지도 오래전에 살았던 동물 화석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이곳에서 식인행위(cannibalism) 또는 장례 과정에서 죽은 자의 살을 발라낸 것으로 추측되는 흔적도 발견되었다. [29] 크라피나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화석은 기존에 네덜란드,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에서 발견된 유적과 더불어 네안데르탈인이 유럽 전역에 퍼져 살았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증거로 자리매김했다.


5. 이어지는 발견




그림 9. 네안데르탈인 유적 위치와 고고학적 시기를 같이 나타낸 지도 (위). [출처: Neanderthal Locations].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유적 위치를 나타낸 지도 (아래) [출처: List of Neanderthal sites]. 그런데 저기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군요. 정확한 위치를 알고 싶으신 분은 여러분의 친한 친구 구글과 위키피디아에게 상담하세요. 단, 위키피디아는 양덕이 좋습니다.



1930년대 이르면 네안데르탈인 유적 발굴은 서아시아 지역까지 확대된다. 이스라엘 지역 타분(Tabun) 동굴과 우즈베키스탄 테시크 타시(Teshik Tash) 동굴을 시작으로 1953~1960년까지 이루어진 이라크 샤니다르(Shanidar) 동굴, 그리고 이스라엘 지역 아무드(Amud)와 케바라(Kebara) 동굴 등에서도 네안데르탈인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는 흑해 연안 크리미아 반도 키크-코바(Kiik-Koba) 동굴과 헝가리 수발류크(Subalyuk) 동굴, 독일 에링스도르프 샘(Ehringsdorf Spring), 이탈리아 사코파스토레(Saccopastore), 구아타리(Guattari) 동굴, 그리고 프랑스 르구르두(Regourdou), 오르튀(Hortus), 생 세제르(Saint Cesaire) 등지에서 새로운 유적이 다량 발굴되었다. [30] 2007년 현재 70여 군데 이상 유적지에서 400개 이상의 네안데르탈인 화석이 발견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조각난 뼈이지만 몇몇 개체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기도 하다. [31] [그림 9] 향후 네안데르탈인 또는 네안데르탈인과 공통조상을 공유하는 새로운 화석이 유럽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등지에서도 계속 발견되고 있으므로 그 수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6. 맺음말


지금까지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과 발굴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봤다. 이 글이 현재까지 밝혀진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루고 있지도 않고 내 전공도 아니므로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없지만, 더불어 여러 가지 기술적이며 현실적인 문제—고고학적 발견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로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히겠다는 시도 자체도 매우 어렵지만, 향후 과학 기술 발전(예를 들면, 극소량의 DNA만 가지고도 유전자를 증폭해 분석할 수 있는 기술 등의 발전)으로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지식이 앞으로도 더욱 확장될 것이라 기대한다. 차후에 시간이 충분히 있다면 더욱 공부에 매진해서(이게 정말 중요한데,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네안데르탈인의 해부학적 특징과 유전체 연구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올리도록 하겠다.



참고 문헌


[1] Neanderthal. Wikipedia. [링크]
[2] 『고인류학』. 박선주. 아르케. 1999. 464쪽.
[3] 호미니드(hominid)란 명칭은 전통적으로 아프리카 원숭이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진화선상의 과거 종과 현재 인간을 규정하는 표현으로, “두 발로 걷는 존재”를 뜻한다. 특히 호미니드는 사람과(Hominidae)에 속하는 사람,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등의 대형 유인원을 포함하는 영장류의 한 과로 대표될 수 있는데, 현재 여기에는 모두 4속 7종이 포함된다. [출처: 『유전자 인류학(Reflection of Our Past)』. 존 릴리스포드(John. H. Relethford)/이경식 옮김. 휴먼앤북스. 2003. 75쪽] [출처: 사람과. 위키피디아. 링크]
[4] 인류진화에서 최종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인류 진화단계를 원인(猿人), 원인(原人), 구인(舊人), 신인(新人)으로 분류했을 때 가장 새로운 단계에 해당된다.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는 모두 신인으로, 그 출현은 4만 년 이상은 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한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5] Schmitz RW et al. 2002. The Neandertal type site revisited: Interdisciplinary investigations of skeletal remains from the Neander Valley, Germany. Proc Natl Acad Sci USA 99: 13342-13347. [링크]
[6] Briggs AW et al. 2009. Targeted Retrieval and Analysis of Five Neandertal mtDNA Genomes. Science 325: 318-321. [링크]
[7] Serre D et al. 2004. No evidence of Neanderthal mtDNA contribution to early modern humans. PLoS Biol 2: e57. [링크]
[8] Currat M, and Excoffier L. 2004. Modern humans did not admix with Neanderthals during their range expansion into Europe. PLoS Biol 2: e241. [링크]
[9] Green RE et al. 2010. A Draft Seqeunce of the Neanderthal Genome. Science 328: 710-722. [링크] : 이 논문은 가장 최근에 나온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분석 결과로 어렵기는 하지만, 읽어볼 가치가 있다.
[10] Hofreiter M. 2011. Drafting Human Ancestry: What Does the Nealderthal Genome Tell Us about Hominid Evolution? Commentary on Green et al. (2010). Hum Biol 83: 1-11. [링크] : 참조 [9]와 관련되어 현재(2011년)까지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연구에 대해 어떤 의견이 나왔는지 종합적으로 소개하며 비평하는 소개 논문이다. 마찬가지로 읽어볼 가치가 있는 논문이다.
[11] Neandertals. Behavioral Sciences Department, Palomar College. : 이 웹사이트에는 호미니드 사이 두개골 용적 크기를 비교한 도표가 있는데, 현생인류는 평균 1345 cm3이고, 네안데르탈인은 1450 cm3이며, 호모 에렉투스는 930 cm3, 그리고 침팬치 두개골 용적은 300-500 cm3이다. [링크]
[12] 『고인류학』. 465쪽.
[13] Neanderthal anatomy. Wikipedia. : “Neanderthal anatomy was more robust than modern humans.” [링크]
[14] 재난에 의해 사라진 원생인류. 해외과학기술동향. 624호. [링크]
[15] Bischoff JL and Shamp DD. 2003. The Sima de los Huesos Hominids Date to Beyond U/Th Equilibrium (>350 kyr) and Perhaps to 400–500 kyr: New Radiometric Dates. J Archaeol Sci 30: 275-280. [링크]
[16] 『유전자 인류학(Reflection of Our Past)』. 존 릴리스포드(john. H. Relethford)/이경식 옮김. 휴먼앤북스. 2003. 134-135쪽.
[17] 『고인류학』. 466~471쪽.
[18] 이 당시 발견된 지브롤터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화석은 현재 지브롤터 1(Gibraltar 1)이라 불린다.
[19] 독일어로 ‘tal’은 ‘골짜기(계곡)’을 뜻하며 영어로 ‘thal’이라 쓴다. 그러므로 이 화석은 발견된 곳의 이름을 따서 처음에는 ‘Neanderthaler’라고 불렸으며 간단히 ‘Neanderthal’ 또는 ‘Neandertal’이라고도 표기한다. 당시 발견된 화석은 현재 ‘네안데르탈 1’(Neanderthal 1)이라 명명되었다.
[20] 『고인류학』. 467쪽. : 이 문장의 출처가 어디인지 찾아봤지만,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혹시 『다윈 평전』에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수중에 책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다.
[21] Thomas Henry Huxley. Wikipedia. [링크] : "In 1862 he examined the Neanderthal skull-cap, which had been discovered in 1857. It was the first pre-sapiens discovery of a fossil man, and it was immediately clear to him that the brain case was surprisingly large."
[22] William King. Wikipedia. [링크] : "the first (in 1864) to propose that the bones found in Neanderthal, Germany in 1856 were not of human origin, but of a distinct species: Homo neanderthalensis. He proposed the name of this new species at a meeting of the British Association in 1863, with the written version published in 1864. He is commonly thought to have been a professor of anatomy, but never taught the subject. He was part of a 2012 EOS project."
[23] Schultz, MG. 2008. Rudolf Vircow. Emerg Infect Dis 14. 9. 1480-1481. [링크] : “Virchow believed that the Neanderthal man was a modern Homo sapiens, whose deformations were caused by rickets in childhood and arthritis later in life, with the flattened skull due to powerful blows to the head.”
[24] 『고인류학』. 468쪽.
[25] Germonpré, M., et al. 2009. Fossil dogs and wolves from Palaeolithic sites in Belgium, the Ukraine and Russia: osteometry, ancient DNA and stable isotopes. J Archaeol Sci 36: 473-490. [링크]
[26] Drell, J.R.R. 2000. Neanderthals: A history of interpretation. Oxford J Archaeol. 19: 1-24. [링크]
[27] 『고인류학』. 469쪽.
[28] 자바 원인. 위키피디아. [링크]
[29] Krapina. Wikipedia. [링크]
[30] 『고인류학』. 469-470쪽.
[31] New Evidence On The Role Of Climate In Neanderthal Extinction. Science Daily. 2007. [링크]
[32] Homo heidelbergensis. Wikipedia. [링크]
[33] Philippe-Charles Schmerling. Wikipedia. [링크] : “In 1829 he discovered the first Neanderthal fossil in a cave in Engis, the partial cranium of a small child, although it was not recognized as such until 1936, and is now thought to be between 30,000-70,000 years old.”
[34] 네안데르탈인은 아니지만, 1823년 다니엘 데이비스(Daniel Davies), 존 데이비스(John Davies), 그리고 옥스포드 대학의 지질학 교수인 윌리엄 벅클랜드(William Buckland)가 영국 웨일즈 남부 가우어 반도(Gower Peninsula) 아이논 항(Port Eynon) 로실리(Rhossili) 사이에 위치한 석회 동굴에서 발견한 파빌랜드의 붉은 여인(Red Lady of Paviland)이라 불리는 현생인류의 화석이 역사적으로 기록된 최초 고인류 화석이라고 할 수 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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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과학철학에 부쩍 관심이 생겨 책 하나 붙들고 열공(이라 쓰고 건성으로 읽는)하고 있다. 박영태 외 18인이 지은 『과학철학—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창비)이라는 책인데, 나 같은 초심자한테는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물론 나를 완전 초심자라고는 부를 수 없지만, 과학철학과 관련된 대부분 이론은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니 근본이 없다는 측면에서는 초심자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다. 근본도 없는 내가 공부한답시고 발췌한 것이다. (타이핑은 내가 했으니 100% 내가 안 썼다고 할 수도 없군.) 다만 책의 내용에 근본도 없는 내 생각을 100% 내 마음대로 덧붙여 썼으니 혹시라도 이 글에서 도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포기하시라. (그렇다면 글은 도대체 왜 쓴 거냐.)


철학자가 이르기를 과학철학은 과학의 메타이론이라고 한다. 여기서 메타이론은 “어떤 이론의 구조나 그 이론 속의 용어 및 개념 따위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이론”을 가리킨다. 내가 알고 쓴 것은 아니고, 위대하고 똑똑하신 네이버 백과사전께서 그리 말씀하셨다. 그러니 그렇다고 하자. 어쨌든, 메타이론인 과학철학은, 철학 일반이 이성의 토대와 원리를 분석하는 것처럼 또는 사회과학이 사회 전반을 분석하고 그 원리를 연구하는 것처럼, 과학의 토대와 원리를 분석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철학은 과학에 대한 반성(反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과학에 규범과 방향을 제시하고 과학을 선도하기도 한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호서대 디지털문화예술학부 교수인 김국태가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과학철학이 과학에 “규범과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할 만한데, “과학을 선도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떤 측면에서 과학을 선도한다는 것인가? 혹시 베이컨, 데카르트 등의 과학적 이데올로기나 방법론을 말하는 것인가? 책을 읽다 보면 언젠가 나오겠지. 안 나오면 이 책을 불태워 버리겠다. 어쨌든 과학철학자 가라사대, “근대 과학철학은 고대 및 중세 과학과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근대 과학에 대한 반성 작업으로 출발했다”.


근대 과학은 16-18세기 무렵에 과학혁명이라 불리는 광범위한 지적 전환기 시기에서 시작했다. 사실 과학혁명이란 용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근대사 교수인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가 그의 저서 『근대 과학의 탄생(The Origins of Modern Science)』(1946)에서 처음 사용했는데, 비 서양권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대 과학의 보편성에 주목해 사용했다고 알려졌다. 과학혁명은 산업혁명을 본떠서 만든 신조어(?)지만, 학문적 용어로 사용될 만큼 엄밀한 내용과 정의는 없다. (그런 측면에서는 산업혁명도 마찬가지라 보지만) 과학혁명이란 용어에 학문적 의미가 있으려면 근대 과학 성립에 대한 요소 분석이 필요한데, 이런 측면에서 과학혁명에 넓은 의미의 일반명사로서 학문적 보편성을 부여한 사람은 단연 토마스 쿤(Thomas Kuh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1962)에서 과학혁명은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패러다임의 전환 시기에 발생할 수 있는 일반적 현상이라고 규정하는데, 하도 오래전에 읽은 거라 기억도 안 난다. 조만간 이 책을 읽다 보면 기억나겠지?


다시 본 내용으로 돌아와서! 과학혁명이라고 해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이나 1차 세계대전 후 발생한 독일 혁명처럼 (설령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급격한 시대적 대전환 또는 대격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이 혁명인 줄도 몰랐을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세상 좋아졌구나” 정도? 산업혁명이야 그 자체로 생산력 향상과 시장 확대라는 실체적 현상이 수반되어 “세상 좋아졌다”란 인식도 들게 하지만, 과학혁명(혹은 과학 발전)은 기껏해야 당대 지식인 사이에서나 의미 있는 것이었다. 굳이 역사학자가 이 시기를 혁명이라 부르는 이유는 마치 석기시대 농업혁명과 근대 산업혁명의 의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원래 혁명은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을 뜻하지만, 솔직히 이 시기에 어떤 급격한 단절이 있었냐 하고 반문한다면 그런 것도 아니다. 뭐 이런 쓸데 없이 물고 늘어지기는 그만 하고 과학사에서 그렇다고 하니 그냥 넘어가자. 나도 밑천이 자꾸 떨어져 간다.


아무튼, 소위 과학혁명이라 불리는 이 시기에 몇 가지 엄청난(?) 지적 대전환이 일어났는데,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 뉴턴 등이 자연철학자가 그 찬란한 무대 위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써놓고 보니 전부 우주론/천체이론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다. 어쨌든 이들로부터 시작되고 체계화된 근대 과학은 고대 및 중세 과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설명 및 설득력으로 새로운 지식을 만인에게 제공했으며, 과학(혹은 자연철학)이 과거 풀지 못했던 많은 문제를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 해결했다. 물론 인간의 영원한 숙제인 자기 인생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으니, 세상만사 온갖 흑역사의 아픔이라. 비꼬자고 이런 말 하는 것은 아니다. 후다닥.


프랑스 과학사가 꼬이레(A. Koyré, 1892-1964)란 인간은 근대 과학의 발생과 부흥의 역사성공한 수학적 법칙의 누적으로 본 반면, 자연에 대한 철학적 논쟁은 과학 발전에 무용지물이었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잠시 꼬이레가 주장하는 과학혁명의 시기가 언제인지 살펴보자. 꼬이레는 종교 전쟁 기간이었던 1541-1648년 사이에 일어난 과학계의 급격한 변화를 과학혁명이라고 부른다. 이 당시 종교 전쟁은 영국-스페인 전쟁(1588), 독일 30년 전쟁(1618-1648), 프랑스 위그노 전쟁(1562-1598), 네덜란드 독립 전쟁 등을 들 수 있는데, 광범위한 종교 전쟁이 끝난 1964년은 갈릴레오가 죽은 지 6년이 되었고, 데카르트가 사망하기 2년 전이었으며, 당시 뉴턴은 6살이었다. 꼬이레는 그가 과학혁명이라고 설정한 시기 중에서 1543년과 1687년을 가장 중요한 역사적 시기라 평했는데, 왜냐하면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와 베실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가 출판되었고, 1687년에는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꼬아레는 지식의 누적(특히 수학적 지식의 누적)이 근대 과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근대 과학이 과거에 비해 지식의 양적 증가가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식의 누적이라는 양적 기준만으로 근대 과학을 평가하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 지식은 필연적으로 누적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공한 지식이 누적된다고 해서 그것이 과학(혹은 학문) 발전의 실체적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근대 과학 진정한 의미는 지식의 양이나 우수한 설명 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과학을 가능케 한 새로운 사고방식에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과학(또는 학문)은 자연과 진리에 대한 일정한 관념과 방법적 규범을 토대로 하며, 나아가 사회규범, 정치상황 그리고 종교적 신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요인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과학의 토대와 배경을 이루는 조건을 쿤은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불렀는데, 그의 이론에 의하면 새로운 과학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토대로 성립하며 새로운 과학이 발생하는 시기에는 패러다임의 의미가 더욱 두드러진다. 실제로 서로 다른 시기에 관측한 여러 가지 현상도 해석 방식이나 관점, 즉 패러다임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데, 코페르니쿠스 이전과 이후의 천체 이론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근대 과학은 자연과 진리 그리고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에 대한 패러다임의 혁신이라는 과정을 통해 생성 및 발전해왔다.


그렇다면 무엇을 고대 및 중세 과학과 차별되는 근대 과학만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계적 자연관, 철저한 경험적 방법, 수학적 서술 등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새롭고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는 패러다임은 자연을 마치 다양한 부품으로 구성된 시계처럼 일정한 원리에 따라 규칙적으로 작동되는 자동 기계로 보는 “기계적 자연관”이다. 이런 해석 방식은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주의자와 원자론자에 의해 먼저 전승되었다. 그러다가 16-17세기 중세를 지배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에 토대를 둔 중세 과학이 그 신뢰를 상실해가면서 과학자 사이에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았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받아들인 자연철학자는 세계를 기계적 세계(Machina Mundi)로 봤으며, 아직 신을 버리지 못한 그들은 (솔직히 고백하자면 신이 창조한 완벽한 세상을 기계에 빗대어 설명하려 한) 기계적 세계를 창조한 절대자를 수학자, 기하학자 또는 건축가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과학자가 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해진다. 바로 자연에 담긴 어떤 수학적 원리(그것이 기하학이든 대수든 상관없이)를 찾아내고 체계화하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자연을 어떤 실체적 원리에 따라 운행되거나 특정한 정신적 가치나 목적을 지향하는 유기체적 존재로 여겼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정해놓은 방법적 지침에 따라 자연 현상을 실체적 원리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을 과학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유일신 하나님이 지배하는 중세에서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프톨레마이오스 우주관의 권위가 위협받기 시작한 이후, 자연 탐구 기준과 대상은 바뀌었다. (물론 코페르니쿠스 이론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천체가 하루아침에 기각된 것은 아니었는데,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발상의 전환이란 측면에서는 참신했지만, 오히려 천체 현상 자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수백 년간 보완되고 지속한 권위 있는 이론보다 나은 점은 별로 없었다.) 자연철학자가 탐구해야 할 대상은 어떤 정신적 가치나 신이 정해놓은 목적이 아니라 바로 자연에 산재하는 어떤 물리적 대상(즉 정량 가능한 시간, 공간, 속도, 질량 등) 바로 그 자체였다.


데카르트에 와서 기계론적 자연관은 절정에 달한다. 특히 그의 우주론은 새로운 기계론적 사고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우주에서 물질세계의 모든 현상은 무한동질적으로 펼쳐지는 시공간에서 오직 충돌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물질 입자와 그것의 이합집산 결과로만 설명되며 이것은 생명체에도 그대도 적용된다. 그의 우주(또는 자연)에서 세상 만물은 오로지 수학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그 메커니즘에 대해 아직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부품 또는 기계와 같다. 결과적으로 그의 우주에서는 중세 과학자가 생각했던 (혹은 믿었던) 어떤 관념적 원리나 가치 또는 특권적 지위도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데익스테르하위스(E. J. Dijksterhuis)는 근대 과학의 여정을 ‘세계상의 기계화’(Die Mechanisierung des Weltbildes)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세계상의 기계화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연 현상에 대한 수학적 응용, 즉 단순히 현상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행위를 넘어서는 어떤 의미를 함축하며, 기존 연구 지침이나 방법적 관습, 즉 기존 패러다임을 폐기하는 지적 전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당대 자연철학자의 새로운 과학적 연구 방법은 자연에 관한 어떤 실체적 특성이나 원리를 전제로 하지 않으며, 경험과 실험에 의한 사실을 수학적으로 기술하고 철저히 검증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뉴턴은 이러한 새로운 방법론을 그의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통해 소개하는데, 자연과학이 더는 실체적 특성이나 본질 같은 ‘형이상학적 원리’에 의존하지 않고, 경험적 사실과 그것을 서술하는 수학적 원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을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판단했을 때 근대 과학혁명은 결과적으로 성공 그 자체였으며, 새로운 과학 방식과 이론적 결과는 이루 다른 모든 과학분야의 혁신모델로 인식되었다(라고 과학철학자가 주장한다). 더불어 새로운 과학의 사고방식은 자연과학 일반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합리적 사고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 과학철학은 새로운 과학에 대한 이해와 정당화 작업에서 시작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신화적 사고로부터 논리적 사고로 변화한 인간의 사유 방식과 세계관에 대한 응답이었다면,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로크, 흄, 버클리, 칸트 등의 근대 철학은 바로 변화된 지적 환경에서 그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정당성을 확인하는 메타과학으로 등장했다. 여기에 갈릴레이, 케플러, 뉴턴 등을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사고 방법과 성과는 철학적 탐구의 핵심 대상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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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마르크스 『Das Kapital Band I』을 읽던 중,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Moment"란 단어를 발견해,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이 "계기"가 아니라 고전역학의 "모멘트"가 아닐까라는 을 한 번 풀었다 [링크]. 그런데 EM님께서 이 부분이 헤겔 철학의 "계기(Moment)"와 관련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조언을 해주셔서 한 번 찾아보았다. 본문의 굵은 글씨와 따옴표는 내가 임의로 표시한 것이다.


계기(契機)[Moment]

어떤 것이 그것의 대립자와 통일되어 이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때 그것은 이 통일 내지 관계의 "계기"라고 말해진다. 이와 같은 관계 안에 있는 것은 대립자로 이행하고 그로부터 자기로 귀환하는 반성의 구조를 지니는 것이자 반성된 것(ein Reflektierts)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의해 그것은 또한 지양된 것으로 된다. 그것은 그 직접성을 폐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면적으로 부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레에서는 무게라는 실재적인 면과 중심으로부터의 거리 내지 선분이라는 관념적인 면이 결합되어 일정한 작용이 생겨나지만, 각자의 크기는 달라도 양자의 곱과 같다면 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양자는 상보적인 동시에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바, 지레를 성립시키는 계기라 불리는 것이다[『논리의 학』 5. 114].

― 야마구치 마사히로(山口祐弘)

『헤겔 사전』 도서출판 b. 20쪽.


직업병이라서일까? 지레에 비유해 '계기'란 헤겔 철학 용어를 설명하는 마지막 문단이 유달리 내 눈에 들어오는데, 이것은 "힘의 모멘트"(the moment of force) 아니던가! 결국 내가 이해한 방향은 헤겔 철학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으니, 어떤 것으로 번역해도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럴수가!! 역시 사람은 공부해야 한다 (먼산).


그런데 생각보다 "moment" 혹은 "momentum"의 개념 형성은 고대 그리스를 시작으로 해서 꽤 오랫동안 여러 논쟁을 거치면서 이루어져왔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지성사(history of thoughts)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흔히 과학혁명의 시기라 불리우는 17세기 무렵―16세기 무렵 코페르니쿠스에 의한 우주론의 대전환을 제1차 혁명이라고 한다면 뉴턴에 의해 고전역학의 기틀이 완성된 이 시기, 즉 17세기를 제2차 과학혁명이 일어난 때라고 할 수 있다―이지만 [링크], 이 말의 어원은 대략 14세기 중엽부터이다 [링크]. 이런 과학사적 언어학적 흐름도 있거니와, 헤겔 본인도 뉴튼의 고전 역학을 꽤나 비판적으로 수용(?)했으니까 헤겔이 그의 철학에서 "Moment"란 용어를 쓰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당대 과학과 철학에 관련된 흑역사를 들춰보면 더 재미난 것들이 나오기도 한다. 흑역사가 원래 재미있지. 암. 뉴턴의 흑역사, 누턴의 흑역사 ... 헤겔의 흑역사 ... 헤겔의 흑역사 ....


헤겔 사전에 나와 있는 뉴턴편을 한 번 살펴보자.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굵은 글씨체는 내가 임의로 한 것이다.


뉴턴 시대의 영국에서는 실험과학이 '뉴턴 역학'이라고도 불렸다. 특히 헤겔은 영국 경험론의 실험주의에서 기계론적인 사상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프란시스 베이컨과 로크 그리고 뉴턴 등의 '실험과학' 학풍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이었다.
헤겔 자연철학은 절대관념론의 형이상학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뉴턴이 그의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에 대한 '일반적 주해'에 덧붙인 "나는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 ..."는 주장과 형이상학적인 것은 물리학 안에서 어떠한 장소도 지니지 않는다는 선언은 헤겔 철학체계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헤겔은 확실히 물리학에서의 지각과 경험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적 물리학이 자연의 범주들과 법칙에 따라서 사유한다는 정당한 권리까지는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의 일이다. 왜냐하면 물리학은 "그 범주들과 법칙들을 다만 사유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반성개념의 이의성(die Amphibolie der Reflexionsbegriffe)을 논하고, 그러한 개념의 맞짝들로서 동일과 차이 및 일치와 반대 등의 대립을 들었다. 헤겔은 더 나아가 본지의 개념들을 모두 반성개념으로 간주하고 두 개념이 서로 다른 규정을 반조(반성)하는 관계에 있을 때 그 개념들을 반성규정들(Reflexionsbestimmungen) 또는 반성개념들(Reflexionsbegriffe)이라고 불렀다. 헤겔은 물리학(역학)이 그 개념들을 단초의 근거로 드러내기 전에 그 개념들을 드러내기에 이르는 반성과 추론이야말로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뉴턴 물리학의 공적을 반성개념으로서의 힘들(인력·척력·구심력·원심력 등)에서 인정한다. "뉴턴은 현상들의 법칙 대신에 힘들의 법칙을 세운 점에서 과학을 반성의 입장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점에서 찬양되는 것이다(파올루치[Henry Paulucci]).

― 혼다 슈로(本多修郞)

『헤겔 사전』 도서출판 b. 76쪽.



뉴턴 본인의 성격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이론에 대해서는 꽤나 신중하고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간혹 과학사를 읽다보면 뉴턴은 꽤나 음흉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물론 그의 편집증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면도 요즘 들어서 많은(?) 조명을 받고 있다. 그는 이래나 저래나 반대자와 추종자가 극단적으로 많았다그렇게나 음흉(?!)하면서 말을 아끼는 뉴턴도 자신의 이론에 대해서는 한치 오차―정확히 말하자면 그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는데, 그런 측면에서 경험적으로 얻게 되는 모든 현상의 아름다운 결론(혹은 방정식)에 "관념"이 끼어드는 것이 뉴튼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또 다른 글로 쓰기로 하고, 오늘 공부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이래나 저래나 EM님의 매우 유익한 코멘트 덕분에 공부할 꺼리가 또 생겼다. EM님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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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형태, 계기 그리고 Moment  (0) 2012.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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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Das Kapital』독일어판(이제부터 'DK'라 부른다)을 한국어로 번역한 강신준 교수의 『자본』(도서출판 길)(이제부터 '길판'이라 부른다)과 두 가지 영어 번역판인 Sonnenschein판(이제부터 'SS'라 부른다)과 Penguin Classics의 Ben Fowkes 번역판(자본론 1에 해당하며 이제부터 'BF'라 부른다), 그리고 David Fernbach 번역판(자본론 2 및 3에 해당하며 이제부터 'DF2'와 'DF3'로 각각 부른다)을 참조했다. 『Das Kapital』독일어판은 MIA(Marxists Internet Archive)에 있는 독일어 원본을 참조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자본론』(비봉출판사)(이제부터 '비봉판'이라 부른다)과 마토바 아키히로(的場昭弘) 외 4인이 엮고 오석철과 이신철이 번역한 맑스사전(도서출판 b)(이제부터 'MD'라 부른다)를 참조했다. 그 외에 앞에서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책에 나와 있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내용의 출처를 주석으로 처리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내용은 『자본I-1』 103~112쪽에 해당한다.



제1편 상품과 화폐

제1장 상품

제3절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상품은 철·아마포·밀 등과 같은 사용가치[또는 상품체]의 형태로 세상에 나타난다. [1.1] 이는 상품의 있는 그대로의 현물형태(現物形態, Naturalform)이다. [1.2] 그러나 이런 상품체가 상품이 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사용대상이면서 동시에 가치의 담지자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한에서만이다. [1.3] 그러므로 그것은 현물형태와 가치형태(價値形態, Wertform)라는 이중형태를 갖는 한에서만 상품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상품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1.4]

1.1
(SS) Commodities come into the world in the shape of use values, articles, or goods, such as iron, linen, corn, &c.
(BF) Commodities come into the world in the form of use-values or material goods, such as iron, linen, corn, etc.
(DK) Waren kommen zur Welt in der Form von Gebrauchswerten oder Warenkörpern, als Eisen, Leinwand, Weizen usw.
이전에도 문제를 제기했지만, 원저자의 문장을 일부 떼어내어 괄호([]) 안에 멋대로 표시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
[수정 번역] 상품은 철·아마포·밀 등과 같은 사용가치 또는 상품체의 형태로 세상에 나타난다.
1.2
(SS) This is their plain, homely, bodily form.
(BF) This is their plain, material goods, such as iron, linen, corn, etc.
(DK) Es ist dies ihre hausbackene Naturalform.
독일어 'hausbacken'은 영어로 'unadventagenous', 'homely' 또는 'dull'을 뜻하며, 한국어로 풀어쓰면 '대담하지 않은', '통속적인' 또는 '(책·일 등이) 단조로운'의 뜻이 있다. 길판의 "있는 그대로의"와 비봉판의 "평범한"도 나쁘지는 않지만, "단조로운"이 좀 더 나아 보인다.
[수정 번역] 그것은 상품의 단조로운 현물형태이다.
1.3
(SS) They are, however, commodities, only because they are something twofold, both objects of utility, and, at the same time, depositories of value.
(BF) However, they are only commodities because they have a dual nature, because they are at the same time objects of utility and bearers of value.
(DK) Sie sind jedoch nur Waren, weil Doppeltes, Gebrauchsgegenstände und zugleich Wertträger.
"nur"는 "Waren"을 수식하고 있으며 "sind"는 "되다"보다는 "이다"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길판은 "... 한에서만이다"라고 번역했는데, 'weil'은 'because'를 뜻하므로 "... 때문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수정 번역] 그러나 이런 상품체가 단지 상품인 것은 그것이 사용대상이면서 동시에 가치의 담지자라는 이중성(二重性) 때문이다.
1.4
(SS) They manifest themselves therefore as commodities, or have the form of commodities, only in so far as they have two forms, a physical or natural form, and a value form.
(BF) Therefore they only appear as commodities, or have the form of commodities, in so far as they possess a double form, i.e. natural form and value form.
(DK) Sie erscheinen daher nur als Waren oder besitzen nur die Form von Waren, sofern sie Doppelform besitzen, Naturalform und Wertform.
(비봉판) 그러므로 그것들은 오직 이중적 형태[현물형태와 가치형태]를 가지는 경우에만 상품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상품이라는 형태를 가지게 된다.
길판 번역은 이상하다. "erscheinen daher nur als Waren"과 "besitzen nur die Form"은 "oder"(영어로 'or'를 뜻한다)라는 접속사로 대등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위와 같은 번역은 나올 수 없다. 비봉판도 마찬가지로 이상하게 번역했으며, 심지어 번역 모체인 BF와도 다르다.
[수정 번역] 그러므로 그것은 현물형태와 가치형태라는 이중형태를 갖는 한에서 단지 상품으로 나타나거나 상품의 형태를 취한다.

상품의 가치대상성(價値對象性, Wertgegenständlichkeit), 즉 가치로서의 상품은 어디에서나 그것을 포착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퀴클리 부인과는 다르다. [2.1] [2.2] 상품체의 대상성[즉 상품체로서의 상품]은 감각적으로 분명하게 포착되는 데 반해 가치로서의 상품에는 단 한 조각의 자연소재도 들어 있지 않다. [2.3] 그래서 하나하나의 상품을 아무리 돌리고 뒤집어보아도 그것을 가치물(價値物, Wertding)로서 포착해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상품은 그것이 인간노동이라는 동일한 사회적 단위의 표현일 때에만 가치가 되며, 따라서 그 가치로서의 성격이 순전히 사회적인 것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가치로서의 상품(가치대상성)은 오직 상품과 상품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자명해진다. [2.4] 사실 우리도 상품 속에 숨어 있는 가치를 추적하기 위해 상품의 교환가치 또는 교환관계에서 시작하였다. [2.5] 이제 우리는 다시 이러한 가치의 현상형태로 되돌아가야만 하겠다. [2.6]

2.1
(SS) The reality of the value of commodities differs in this respect from Dame Quickly, that we don’t know "where to have it."
(BF) The objectivity of commodities as values differs from Dame Quickly in the sense that 'a man knows not where to have it'.
(DK) Die Wertgegenständlichkeit der Waren unterscheidet sich dadurch von der Wittib Hurtig, daß man nicht weiß, wo sie zu haben ist.
비봉판에서는 "상품의 가치대상성"을 "상품의 가치로서의 객관적 실재"라고 번역했는데, 길판의 번역이 상대적으로 깔끔해 보인다. DK에는 길판의 "즉 가치로서의 상품"에 대응하는 구절이 없는데, 이는 길판에서 문장에 임의로 삽입한 구절로 보인다. 이런 부분은 길판 <일러두기>(『자본I-1』, 40-41쪽)에서 언급한 것처럼 <번역자 주>"()"로 처리했어야 했다. 길판은 "Wittib"를 "부인"으로 번역했는데 'Wittib'는 'Witwe'와 동의어로 '과부'란 뜻이다. 비봉판에서는 BF의 "Dame"을 "과부"로 번역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 제1부, 3막, 3장의 내용을 읽어보면 퀴클리는 과부가 아니며 버젓이 남편이 있는 여인숙 주인이다 [링크]. 그러므로 비록 "Wittib"가 "과부"란 뜻이라 할지라도 "마담" 내지 "부인"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 밖에도 SS, BF 그리고 비봉판은 DK의 "wo sie zu haben ist"에 해당하는 부분을 인용구("")로 처리했다.
[재번역] 상품의 가치대상성은 어디에서 그것을 포착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퀵클리 부인(독일어로는 후어티히 부인)과 다르다.
2.2
(SS) The value of commodities is the very opposite of the coarse materiality of their substance, not an atom of matter enters into its composition.
(BF) Not an atom of matter enters into the objectivity of commodities as values; in this it is the direct opposite of the coarsely sensuous objectivity of commodities as physical objects.
(DK) Im graden Gegenteil zur sinnlich groben Gegenständlichkeit der Warenkörper geht kein Atom Naturstoff in ihre Wertgegenständlichkeit ein.
길판의 이 문장을 지나치게 의역하거나 혹은 오역했다. 우선 "im Gegenteil zur(zu der) ..."는 영어로 "in the opposite to ..."와 같은 뜻이며, "der sinnlich groben Gegenständlichkeit der Warenkörper"는 "상품체의 감각적이고 거친 대상성"으로 번역할 수 있다. "grob"는 영어로 "coarse"를 뜻하는데, 한국어로 "거친"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길판은 "Wertgegenständlichkeit"를 "가치대상성"이라고 번역했음에도 이 문장에서는 "가치로서의 상품"으로 번역했다. 즉 번역 과정에 일관성이 없다. 또한 "[]"에 기술한 "[즉 상품체로서의 상품]"은 원문에는 없는 표현으로, 길판에서 임의로 첨부한 <번역자 주>에 해당한다. 따라서 『자본I-1』의 <일러두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로 처리했어야 했다. 참고로 'grade'는 'gerade'와 같은 단어로 영어로는 'straight'를 뜻한다.
[수정 번역] 상품체의 감각적이고 거친 대상성과는 정반대로 상품의 가치대상성에서는 그 어떤 원소도 자연소재를 구성하지 않는다.
2.3
(SS) If, however, we bear in mind that the value of commodities has a purely social reality, and that they acquire this reality only in so far as they are expressions or embodiments of one identical social substance, viz., human labour, it follows as a matter of course, that value can only manifest itself in the social relation of commodity to commodity.
(BF) However, let us remember that comodities possess an objective character as values only in so far as they are all expressions of an identical social substance, human labour, that their objective character as values is therefore purely social.
(DK) Erinnern wir uns jedoch, daß die Waren nur Wertgegenständlichkeit besitzen, sofern sie Ausdrücke derselben gesellschaftlichen Einheit, menschlicher Arbeit, sind, daß ihre Wertgegenständlichkeit also rein gesellschaftlich ist, so versteht sich auch von selbst, daß sie nur im gesellschaftlichen Verhältnis von Ware zu Ware erscheinen kann.
"jedoch"는 "however"를 뜻하므로 "그러나"로 번역한다. 길판은 "die Waren nur Wertgegenständlichkeit besitzen"을 "그것이 ... 가치가 되며"라고 번역했는데, 길판 번역의 "가치"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Wertgegenständlichkeit"으로 "가치대상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관성 있다. "그 가치로서의 성격"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sie"로 앞에서 언급한 "Wertgegenständlichkeit"을 뜻한다.
[수정 번역] 그러나 상품은 인간노동이라는 동일한 사회적 단위의 표현일 때에만 단지 가치대상성을 가지며 가치대상성 역시 순수하게 사회적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것(가치대상성)은 단지 상품과 상품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자명하다.
2.4
(SS) In fact we started from exchange value, or the exchange relation of commodities, in order to get at the value that lies hidden behind it.
(BF) In fact we started from exchange-value, or the exchange relation of commodities, in order to track down the value that lay hidden within it.
(DK) Wir gingen in der Tat vom Tauschwert oder Austauschverhältnis der Waren aus, um ihrem darin versteckten Wert auf die Spur zu kommen.
(비봉판) 사실 우리는 상품들의 교환가치 또는 교환관계로부터 출발해 상품 속에 숨어 잇는 가치를 찾아냈다.
굳이 "우리도"라는 번역을 할 필요는 없다. 그냥 "우리는"이라고 해도 된다. 덧붙여 비봉판 번역 모체인 BF와 매우 다르다.
2.5
(SS) We must now return to this form under which value first appeared to us.
(BF) We must now return to this form of appearance of value.
(DK) Wir müssen jetzt zu dieser Erscheinungsform des Wertes zurückkehren.
[수정 번역] 이제 우리는 다시 가치의 이러한 현상형태로 되돌아가야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상품이 그 사용가치의 다양한 현물형태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그들 공통의 가치형태—화폐형태(貨幣形態, Geldform)—를 지니고 있음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3.1] 그러나 여기에서 수행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은 부르주아 경제학에서는 한 번도 시도된 바가 없는 것으로, 바로 이 화폐형태의 발생과정을 논증하는 것인데, 이는 곧 눈에 띄지 않는 가장 단순한 형태부터 극도로 현란한 화폐형태에 이르기까지 상품의 가치관계에 함축되어 있는 가치표현의 발전과정을 추적하는 일이다. [3.2] 이 작업을 해냄으로써 우리는 동시에 화폐의 수수께끼도 풀게 될 것이다.

3.1
(SS) Every one knows, if he knows nothing else, that commodities have a value form common to them all, and presenting a marked contrast with the varied bodily forms of their use values. I mean their money form.
(BF) Everyone knows, if nothing else, that commodities have a common value-form which contrasts in the most striking manner with the motley natural forms of their use-values. I refer to the money-form.
(DK) Jedermann weiß, wenn er auch sonst nichts weiß, daß die Waren eine mit den bunten Naturalformen ihrer Gebrauchswerte höchst frappant kontrastierende, gemeinsame Wertform besitzen - die Geldform.
[수정 번역] 다른 것은 몰라도 상품이 그 사용가치의 다채로운 현물형태와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하나의 공통된 가치형태—화폐형태(貨幣形態, Geldform)—를 지니고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3.2
(SS) Here, however, a task is set us, the performance of which has never yet even been attempted by bourgeois economy, the task of tracing the genesis of this money form, of developing the expression of value implied in the value relation of commodities, from its simplest, almost imperceptible outline, to the dazzling money-form.
(BF) Now, however, we have to perform a task never even attempted by bourgeois economics. That is, we have to show the origin of this money-form, we have to trace the development of the expression of value contained in the value-relation of commodities from its simplest, almost imperceptible outline to the dazzling money-form.
(DK) Hier gilt es jedoch zu leisten, was von der bürgerlichen Ökonomie nicht einmal versucht ward, nämlich die Genesis dieser Geldform nachzuweisen, also die Entwicklung des im Wertverhältnis der Waren enthaltenen Wertausdrucks von seiner einfachsten unscheinbarsten Gestalt bis zur blendenden Geldform zu verfolgen.
(비봉판)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부르주아 경제학이 일찍이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수행해야 한다. 즉, 이 화폐형태의 발생기원을 밝혀야 한다. 다시 말해, 상품들의 가치관계에 포함되어 있는 가치표현의 발전을 그 가장 단순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부터 휘황찬란한 화폐형태에 이르기까지 추적해야 한다.
길판과 BF는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고, 비봉판은 세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길판은 "Genesis"를 "발생과정"으로 번역했는데, "발생기원", "발생" 혹은 "기원"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길판은 "blendenden"을 "극도로 현란한"이라고 번역했는데, 굳이 "극도로"라는 말을 붙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Entwicklung"을 "발전과정"이라고 번역했는데, 그냥 "발전"이라고 번역해도 된다.
[수정 번역] 그러나 여기에서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것, 즉 화폐형태의 발생기원을 논증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의 가장 단순하며 눈에 띄지 않는 형태부터 현란한 화폐형태에 이르기까지 상품의 가치관계에 담긴 가치표현의 발전을 추적하는 일이다.

가장 단순한 가치관계는 명백히 한 상품이 다른 종류의 한 상품—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과 맺는 가치관계이다. [4.1] 그러므로 두 상품의 가치관계는 한 상품의 가장 단순한 가치표현을 나타내준다. [4.2]

4.1
(SS) The simplest value-relation is evidently that of one commodity to some one other commodity of a different kind.
(BF) The simplest value-relation is evidently that of one commodity to another commodity of a different kind (it does not matter which one).
(DK) Das einfachste Wertverhältnis ist offenbar das Wertverhältnis einer Ware zu einzigen verschiedenartigen Ware, gleichgültig welcher.
길판은 "gleichgültig welcher"에 해당하는 번역을 할 때 하이픈(—)을 "한 상품" 그리고 "과 맺는" 사이에 끼워 넣었는데, 딱히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수정 번역] 가장 단순한 가치관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명백히 한 상품이 다른 종류의 한 상품과 맺는 가치관계이다.
4.2
(DK) Das Wertverhältnis zweier Waren liefert daher den einfachsten Wertausdruck für eine Ware.
[수정 번역] 그러므로 두 상품의 가치관계는 한 상품의 가장 단순한 가치표현을 나타낸다.

1. 단순한, 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


x량의 상품 A=y량의 상품 B 또는

x량의 상품 A는 y량의 상품 B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20엘레의 아마포=1벌의 웃옷 또는

20엘레의 아마포는 1벌의 웃옷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1) 가치표현의 양극—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


모든 가치형태의 비밀은 이 단순한 가치형태 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 가치형태의 분석은 처음부터 어려움이 따른다. [6.1]

6.1
(SS) Its analysis, therefore, is our real difficulty.
(BF) Our real difficulty, therefore, is to analyse it.
(DK) Ihre Analyse bietet daher die eigentliche Schwierigkeit.
"eigentlich"는 영어로 "real" 또는 "actual"을 뜻한다.
[수정 번역] 그러므로 이 가치형태의 분석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른다.

여기서 우리가 예를 든 두 종류의 상품인 아마포와 웃옷은 명백히 서로 다른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7.1] 아마포는 웃옷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웃옷은 이 가치표현의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전자는 능동적인 역할을 하고 후자는 수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포의 가치는 상대적 가치로 표시되고 있다. 즉 그것은 상대적 가치형태(relative Werform)로 존재한다. [7.2] 웃옷은 등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따라서 등가형태(等價形態, Äquivalentform)로 존재한다. [7.3]

7.1
(SS) Here two different kinds of commodities (in our example the linen and the coat), evidently play two different parts.
(BF) Here two different kinds of commodities (in our example the linen and the coat) evidently play two different parts.
(DK) Es spielen hier zwei verschiedenartige Waren A und B, in unsrem Beispiel Leinwand und Rock, offenbar zwei verschiedene Rollen.
길판은 "Waren A und B"를 번역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상품 A와 상품 B를 설정하고, 여기에 아마포와 웃옷을 대입하여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를 설명하고 있다. "Waren A und B"를 번역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해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저자가 기술한 모든 것을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수정 번역] 여기에 명백히 서로 다른 두 역할을 하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상품 A와 B, 즉 우리 예에서는 아마포와 웃옷이 있다.
7.2
(SS) The value of the linen is represented as relative value, or appears in relative form.
(BF) The value of the first commodity is represented as relative value, in other words the commodity is in the relative form of value.
(DK) Der Wert der ersten Ware ist als relativer Wert dargestellt, oder sie befindet sich in relativer Wertform.
(비봉판) 제1상품은 자기의 가치를 상대적 가치로 표현한다. 바꾸어 말해, 그 상품은 상대적 가치형태로 있다.
길판은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oder"는 영어로 "or"를 뜻한다. "befinden sich in ..."은 영어로 "to be found in ..." 또는 "to be in ..."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마포의 가치는 상대적 가치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가치형태라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
[수정 번역] 전자[아마포]의 가치는 상대적 가치로 표현되거나 혹은 상대적 가치형태에 존재한다.
7.3
(SS) The coat officiates as equivalent, or appears in equivalent form.
(BF) The second commodity fulfils the function of equivalent, in other word it is in the equivalent form.
(DK) Die zweite Ware funktioniert als Äquivalent oder befindet sich in Äquivalentform.
(비봉판) 제2상품은 등가(물)로서 기능한다. 다시 말해, 그 상품은 등가형태로 있다.
비봉판에서는 "Äquivalentform"을 "등가물"로 번역했다. 그리고 바로 전의 번역비판과 마찬가지로 웃옷의 가치가 등가형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웃옷의 가치는 등가물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가치관계식에서 등가형태에 놓여야 한다.
[수정 번역] 후자[웃옷]의 가치는 등가물로 작용하거나 혹은 등가형태에 존재한다.
[추가 부분 #1: 2012년 6월 11일. 구멍 님께서 지적해주신 부분] 7.3에 대한 번역이 나의 번역이 잘못되었다. 구멍 님께서 지적하신대로 번역문에서 '가치'는 빠져야 한다.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구멍 님께서 지적하신 세부 사항은 아래 댓글을 참조하시오.
[수정 번역 #2] "후자[웃옷]은 등가물로 작용[기능]하거나 혹은 등가형태에 존재한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서로 의존해 있으면서 서로를 제약하는 불가분의 두 계기(Momente)이지만 동시에 동일한 가치표현의 상호배타적이고 대립적인 극단, 즉 가치표현의 양극이다. 이 양극은 가치표현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맺는 두 개의 다른 상품으로 늘 나누어진다. [8.1] 예를 들면 아마포의 가치는 아마포로 표현될 수 없다. [8.2] 20엘레의 아마포=20엘레의 아마포라는 것은 가치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이 등식은 20엘레의 아마포가 다름 아닌 20엘레의 아마포, 즉 사용대상으로서의 아마포의 일정량이라는 것만을 말해줄 뿐이다. 따라서 아마포의 가치는 오직 상대적으로만, 즉 다른 종류의 상품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아마포의 상대적 가치형태는 다른 어떤 상품이 그것에 대해 등가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8.3] 반면 이때 등가물로 등장하는 이 다른 상품은 상대적 가치형태로 함께 존재할 수 없다. [8.4] 그 상품은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다른 상품의 가치표현에 재료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8.5]

8.1
(SS) The relative form and the equivalent form are two intimately connected, mutually dependent and inseparable elements of the expression of value; but, at the same time, are mutually exclusive, antagonistic extremes – i.e., poles of the same expression. They are allotted respectively to the two different commodities brought into relation by that expression.
(BF) The relative form of value and the equivalent form are two inseparable moments, which belong to and mutually condition each other; but the same time, they are mutually exclusive or opposed extremes, i.e. poles of the expression of value. They are always divided up between the different commodities brought into relation with each other by that expression.
(DK) Relative Wertform und Äquivalentform sind zueinander gehörige, sich wechselseitig bedingende, unzertrennliche Momente, aber zugleich einander ausschließende oder entgegengesetzte Extreme, d.h. Pole desselben Wertausdrucks; sie verteilen sich stets auf die verschiedenen Waren, die der Wertausdruck aufeinander bezieht.
(비봉판)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상호 의존하고 상호 제약하는 불가분의 계기들이지만, 그와 동시에 상호 배제하는 또는 상호 대립하는 극단들[즉, 가치표현의 두 극]이다. 이 두 극은 가치표현에 의해 상호관련맺는 상이한 상품들이 맡는다.
길판, 비봉판, SS, BF할 것 없이 모두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그리고 DK의 "Momente"를 SS는 "elements of the expression of value", BF는 "moments", 비봉판과 길판은 "계기"로 번역했다. 문맥상 그리고 의미상 "계기"보다는 고전역학의 "모멘트"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더불어 길판의 "서로 제약하는"은 오역인데, 과거분사형 'bedingende'의 원형인 'bedingen'은 영어로 'to necessiate', 'to cause', 또는 'to presuppose'를 뜻하기 때문이다.
[수정 번역]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서로 필요로 하며 상호 의존적이고 불가분인 모멘트지만, 또한 상호 배타적이며 또는 배제하는 극단, 즉 동일한 가치표현의 극으로, 그것은 항상 가치표현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다른 상품으로 퍼져나간다.
8.2
(DK) Ich kann z.B. den Wert der Leinwand nicht in Leinwand ausdrücken.
[수정 번역] 예를 들면 아마포의 가치는 아마포로 표현되지 않는다.
8.3
(SS) The relative form of the value of the linen presupposes, therefore, the presence of some other commodity – here the coat – under the form of an equivalent.
(BF) The relative form of the value of the linen therefore presupposes that some other commodity confronts it in the equivalent form.
(DK) Die relative Wertform der Leinwand unterstellt daher, daß irgendeine andre Ware sich ihr gegenüber in der Äquivalentform befindet.
[수정 번역] 그러므로 아마포의 상대적 가치형태는 어떤 다른 상품이 그것에 대해 등가형태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8.4
(DK) Andrerseits, diese andre Ware, die als Äquivalent figuriert, kann sich nicht gleichzeitig in relativer Wertform befinden.
[수정 번역] 반면 이때 등가물로 등장하는 이 다른 상품은 상대적 가치형태에 함께 존재할 수 없다.
8.5
(DK) Sie liefert nur dem Wertausdruck andrer Ware das Material.
길판은 'provide'란 뜻을 가진 독일어 동사 'lieferen'을 잘못 번역했다. 물론 그렇다고 의미가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수정 번역] 그것은 단지 다른 상품의 가치표현에 재료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20엘레의 아마포=1벌의 웃옷, 즉 20엘레의 아마포가 1벌의 웃옷과 같은 가치라는 표현은 역시 1벌의 웃옷=20엘레의 아마포, 즉 1벌의 웃옷이 20엘레의 아마포와 같은 가치라는 역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웃옷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표현하려면 등식을 뒤바꿔야만 한다. 또한, 그렇게 하면 이제 아마포가 웃옷 대신에 등가물이 된다. [9.1] 그러므로 동일한 상품이 동일한 가치표현에서 두 가지 형태를 동시에 취할 수는 없다. [9.2] 이 두 형태는 오히려 양극으로 서로를 배제한다.

9.1
(SS) But, in that case, I must reverse the equation, in order to express the value of the coat relatively; and. so soon as I do that the linen becomes the equivalent instead of the coat.
(BF) But in this case I must reverse the equation, in order to express the value of the coat relatively; and, and if I do that, the linen becomes the equivalent instead of the coat.
(DK) Aber so muß ich doch die Gleichung umkehren, um den Wert des Rocks relativ ausdrücken, und sobald ich das tue, wird die Leinwand Äquivalent statt des Rockes.
길판은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으며, "anyway"를 뜻하는 "doch"를 번역하지 않았다.
[수정 번역]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든 웃옷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등식을 뒤바꿔야만 하고, 그렇게 했을 때 아마포는 웃옷 대신에 등가물이 된다.
9.2
(SS) A single commodity cannot, therefore, simultaneously assume, in the same expression of value, both forms.
(BF) The same commodity cannot, therefore, simultaneously appear in both forms in the sample expression of value.
(DK) Dieselbe Ware kann also in demselben Wertausdruck nicht gleichzeitig in beiden Formen auftreten.
길판은 의역 과정 중에 오역했다. "auftreten"은 영어로 "appear"를 뜻하는 동사로 "나타나다"로 번역해야 한다.
[수정 번역] 그러므로 동일한 상품이 동일한 가치표현에서 두 가지 형태로 동시에 나타날 수 없다.

이제 어떤 한 상품이 상대적 가치형태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이에 대립되는 등가형태로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가치표현에서 차지하는 그때그때의 우연적인 위치에 달려 있다. 즉 그것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상품인지 아니면 남의 가치를 표현해주는 상품인지에 달려 있다. [10.1]

10.1
(SS) Whether, then, a commodity assumes the relative form, or the opposite equivalent form, depends entirely upon its accidental position in the expression of value – that is, upon whether it is the commodity whose value is being expressed or the commodity in which value is being expressed.
(BF) Whether a community is in the relative form or in its opposite, the equivalent form, entirely depends on its actual position in the expression value. That is, it depends on whether it is the commodity whose value is being expressed, or the commodity in which value is being expressed.
(DK) Ob eine Ware sich nun in relativer Wertform befindet oder in der entgegengesetzten Äquivalentform, hängt ausschließlich ab von ihrer jedesmaligen Stelle im Wertausdruck, d.h. davon, ob sie die Ware ist, deren Wert, oder aber die Ware, worin Wert ausgedrückt wird.
길판과 BF는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jedesmaligen"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이 부분은 영어 번역을 따르겠다.
[수정 번역] 어떤 상품이 상대적 가치형태에 존재하느냐 혹은 대립하는 등가형태에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가치표현에 있는 우연한 위치에 달려 있는데, 즉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상품인지 또는 남의 가치를 표현해 주는 상품인지에 달려 있다.

2) 상대적 가치형태


가. 상대적 가치형태의 내용


한 상품의 단순한 가치표현이 두 상품의 가치관계 속에 어떻게 숨어 있는지를 밝혀내려면 먼저 양적인 측면을 완전히 배제한 채로 가치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11.1] 사람들은 대부분 이와 반대의 길을 택하여 가치관계 속에서 두 상품의 일정량이 서로 등치되는 비율만 바라본다. [11.2] 종류가 다른 두 사물의 크기를 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이들을 모두 동일한 단위로 환산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을 사람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단위로 표현했을 때에만 두 사물의 크기는 같은 이름의 크기, 즉 서로 비교될 수 있는 크기가 된다. 17) [11.3]

11.1
(DK) Um herauszufinden, wie der einfache Wertausdruck einer Ware im Wertverhältnis zweier Waren steckt, muß man letzteres zunächst ganz unabhängig von seiner quantitativen Seite betrachten.
"the latter"를 뜻하는 "letzteres"에 대한 번역이 빠져 있다.
[수정 번역] 한 상품의 단순한 가치표현이 두 상품의 가치관계 속에 어떻게 숨어 있는지를 밝혀내려면 먼저 상품의 양적인 측면을 완전히 배제한 채로 가치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11.2
(DK) Man verfährt meist grade umgekehrt und sieht im Wertverhältnis nur die Proportion, worin bestimmte Quanta zweier Warensorten einander gleichgelten. "bestimmte Quanta zweiner Warensorten"는 "two sorts of comodities"를 뜻하는 것으로, "Warensort"는 "Waren + Sorte"의 합성어, 즉 "sorts of commodities"를 뜻한다. 따라서 길판 번역처럼 "두 상품의 일정량"이라고 번역해도 문제 없지만, 실제로는 "두 상품 종류의 일정량"으로 번역해야 한다.
11.3
SS) It is only as expressions of such a unit that they are of the same denomination, and therefore commensurable.
(BF) Only as expressions of the same unit do they have a common denominator, and are therefore commensurable magnitudes.
(DK) Nur als Ausdrücke derselben Einheit sind sie gleichnamige, daher kommensurable Größen.
여기서 마르크스는 수학적 서술법으로 이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gleichnamige"는 "to have a common denominator" 즉, "공통분모를 가지는"으로 번역해야 한다. "kommensurable"도 영어로는 "commensurable", 한국어로는 "같은 수로 나누어 떨어지는"을 뜻한다. 그러므로 "daher kommensurable Größen"는 "같은 수로 나누어 떨어지는[약분되는] 크기"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수정 번역] 동일한 단위로 표현했을 때에만 사물의 크기는 공통분모, 즉 약분되는 크기를 가진다.

20엘레의 아마포=1벌의 웃옷, 또는 20벌의 웃옷, 아니면 x벌의 웃옷, 그 어느 것이든 간에, 즉 일정량의 아마포가 얼마만큼의 웃옷과 같은 가치를 갖든 간에, 그런 비율은 언제나 그 속에 아마포와 웃옷이 동일한 단위를 통해서 가치를 표현한다는 사실과 이들이 동일한 성질을 가진 물건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12.1] 다시 말해서 아마포=웃옷이 바로 이들 등식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12.2]

12.1
(SS) Whether 20 yards of linen = 1 coat or = 20 coats or = x coats – that is, whether a given quantity of linen is worth few or many coats, every such statement implies that the linen and coats, as magnitudes of value, are expressions of the same unit, things of the same kind.
(BF) Whether 20 yards of linen = 1 coat or = 20 coats or = x coats, i.e. whether a given quantity of linen is worth few or many coats, it is always implied, whatever the proportion, that the linen and the coat, as magnitudes of value, are expressions of the same unit, things of the same nature.
(DK) Ob 20 Ellen Leinwand = 1 Rock oder = 20 oder = x Röcke, d.h., ob ein gegebenes Quantum Leinwand viele oder wenige Röcke wert ist, jede solche Proportion schließt stets ein, daß Leinwand und Röcke als Wertgrößen Ausdrücke derselben Einheit, Dinge von derselben Natur sind.
길판은 "그 어느 것이든 간에"를 중복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daß Leinwand und Röcke als Wertgrößen Ausdrücke derselben Einheit, Dinge von derselben Natur sind" 부분에 명백한 오역이 있는데, "아마포와 웃옷"(einwand und Röcke)이 "가치크기로서"(als Wertgrößen) "동일한 단위의 표현, 즉 "동일한 성질의 사물"(Ausdrücke derselben Einheit)과 같은 방식으로 번역해야 한다. 덧붙여 길판은 "Ding"을 어떤 때는 "사물", 어떤 때는 "물건" 그리고 어떤 때는 "존재"라고 번역하는데, 일관성이 필요한 듯 하다.
[수정 번역] 20엘레의 아마포=1벌의 웃옷, 또는 20벌의 웃옷, 아니면 x벌의 웃옷, 즉 일정량의 아마포가 얼마만큼의 웃옷과 같은 가치를 갖든 간에, 그런 비율은 모두 아마포와 웃옷이 가치크기로서 동일한 단위의 표현, 즉 동일한 성질의 사물이라는 사실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12.2
(DK) Leinwand = Rock ist die Grundlage der Gleichung.
이 문장에 "다시 말해서"를 뜻하는 구절은 없다. 길판에서 임의로 삽입한 구문이다.

그러나 질적으로 등치된 이들 두 상품이 똑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단지 아마포의 가치만이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그것은 아마포가 웃옷과의 관계를 자신의 ‘등가물’로, 즉 자신과 ‘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표현되고 있다. [13.1] 이 관계에서 웃옷은 가치의 존재형태, 즉 가치물(價値物, Wertding)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웃옷은 이러한 가치물로서만 아마포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13.2] 한편, 아마포는 여기에서 자신의 가치존재(價値存在, Wertsein)를 전면에 드러내고 독자적인 가치표현을 갖게 되는데, 이는 아마포가 오로지 가치라는 측면에서만 웃옷과의 관계를 등가의 것으로, 즉 자신과 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삼기 때문이다. [13.3] 화학의 예를 들어보면 부티르산(Buttersäure)은 포름산프로필(Propylformat)과 다른 물체이다. 그러나 이 둘은 똑같은 화학적 요소인 탄소(C)·수소(H)·산소(O)로 구성되어 있고 또 동일한 구성비율 C4H8O2로 되어 있다. [13.4] 이제 부티르산을 포름산프로필과 등치시킨다면 이 관계에서 첫째, 포름산프로필은 오직 C4H8O2라는 존재형태로만 간주되고, 둘째, 부티르산 역시 C4H8O2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포름산프로필을 부티르산과 등치시키게 되면 부티르산의 화학적 요소는 물체적 형태와 구별되어 표현되는 셈이다. [13.5]

13.1
(DK) Durch ihre Beziehung auf den Rock als ihr "Äquivalent" oder mit ihr "Austauschbares".
[수정 번역] 자신[아마포]의 "등가물"로서 또는 자신과 "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웃옷과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13.2
(SS) In this relation the coat is the mode of existence of value, is value embodied, for only as such is it the same as the linen.
(BF) In this relation the coat counts as the form of existence of value, as the material embodiment of value, for only as such is it the same as the linen.
(DK) In diesem Verhältnis gilt der Rock als Existenzform von Wert, als Wertding, denn nur als solches ist er dasselbe wie die Leinwand.
(비봉판) 이 관계에서 저고리는 가치의 존재형태[즉, 가치의 물적 형상]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저고리는 오직 그러한 것으로서만 아마포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길판과 비봉판은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비봉판은 "Wertding"을 '"물적 형상"으로 번역했다. 길판 번역이 나아 보인다.
[수정 번역] 이 관계에서 웃옷은 가치의 존재형태, 즉 가치물(價値物, Wertding)로 간주되는데, 웃옷은 그런 가치물로서만 아마포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13.3
(SS) On the other hand, the linen’s own value comes to the front, receives independent expression, for it is only as being value that it is comparable with the coat as a thing of equal value, or exchangeable with the coat.
(BF) On the other hand, the linen's own existence as value comes into view or receives an independent expression, for it is only as value that it can be related to the coat as being equal in value to it, or exchangeable with it.
(DK) Andrerseits kommt das eigne Wertsein der Leinwand zum Vorschein oder erhält einen selbständigen Ausdruck, denn nur als Wert ist sie auf den Rock als Gleichwertiges oder mit ihr Austauschbares bezüglich.
(비봉판) 다른 한편으로, 이 관계에서 아마포 자신의 가치로서의 존재가 독립적인 표현을 얻는다. 왜냐하면, 오직 가치로서만 아마포는 저고리[등가이자 자기와 교환될 수 있는 물건]와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andrerseits"는 "andererseits" (=on the other hand)와 같은 뜻이다. 비봉판은 "Wertsein"을 "가치로서의 존재"라고 번역했는데, 길판 번역이 나아 보인다. "zum Vorschein kommen"는 영어로 "to appear"를 뜻한다. "auf ... bezüglich"는 영어로 "relating to ..."를 뜻한다.
[수정 번역] 한편, (여기에서) 아마포 자신의 가치존재가 나타나거나 또는 독자적인 표현을 갖는데, 오직 가치로서 그것이 자신의 등가물(Gleichwertiges) 혹은 교환물(Austauschbares)인 웃옷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13.4
(DK) Beide bestehn jedoch aus denselben chemischen Substanzen - Kohlenstoff (C), Wasserstoff (H) und Sauerstoff (O), und zwar in gleicher prozentiger Zusammensetzung, nämlich C4H8O2
[수정 번역] 그러나 이 둘은 똑같은 화학적 요소인 탄소(C)·수소(H)·산소(O)로 구성되어 있고 또 동일한 구성비율, 즉 C4H8O2로 되어 있다.
13.5
(DK) Durch die Gleichsetzung des Propylformats mit der Buttersäure wäre also ihre chemische Substanz im Unterschied von ihrer Körperform ausgedrückt.
길판은 "Körperform"을 "물체적 형태"로, 비봉판은 "물적 형태"로 번역했다. 비봉판의 번역이 나아 보인다.

만일 우리가 모든 상품이 가치의 측면에서는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결물이라고 말한다면, 우리의 분석은 상품을 추상적 가치(Wertabstraktion)로 환원시키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상품에 대해 그 현물형태와는 다른 어떤 가치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14.1] 그러나 한 상품과 다른 상품과의 가치관계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여기에서 상품의 가치성격은 다른 상품과 자신과의 관계에 따라 드러나게 된다.

14.1
(SS) If we say that, as values, commodities are mere congelations of human labour, we reduce them by our analysis, it is true, to the abstraction, value; but we ascribe to this value no form apart from their bodily form. It is otherwise in the value relation of one commodity to another.
(BF) If we say that, as values, commodities are simply congealed quantities of human labour, our analysis reduced them, it is true, to the level of abstract value, but does not give them a form of value distinct from their natural forms.
(DK) Sagen wir: als Werte sind die Waren bloße Gallerten menschlicher Arbeit, so reduziert unsre Analyse dieselben auf die Wertabstraktion, gibt ihnen aber keine von ihren Naturalformen verschiedne Wertform.
길판은 "bloße"를 "단순한"으로 번역했는데, "단지"가 옳은 번역이다. 비봉판은 "Gallerten"을 "응고물"이라고 번역했는데, 길판의 "응결물"이 나아 보인다.
[수정 번역] 만일 우리가 가치로서 상품이 단지 인간노동의 응결물이라고 말한다면, 우리의 분석은 상품을 추상적 가치(Wertabstraktion)로 환원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현물형태와는 다른 가치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웃옷이 가치물로서 아마포와 등치되면 웃옷 속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도 아마포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과 등치된다. 사실 웃옷을 만드는 재단노동은 아마포를 만드는 방직노동과 서로 다른 구체적 노동이다. 그러나 방직노동과 등치됨으로써 재단노동은 두 가지 노동 모두에서 사실상 같은 성질, 즉 인간노동이라는 공통의 성질로 환원된다. 이런 우회적인 경로를 거치면 방직노동 역시 그것이 가치를 만들어내는 한, 재단노동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것, 즉 추상적 인간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의 독특한 성격은 서로 다른 종류의 상품을 등가로 표현할 때에만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런 등가적 표현만이 종류가 다른 갖가지 상품 속에 포함된 여러 종류의 노동을 사실상 그들의 공통물인 인간노동 일반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17a) [15.1]

15.1
(SS) It is the expression of equivalence between different sorts of commodities that alone brings into relief the specific character of value-creating labour, and this it does by actually reducing the different varieties of labour embodied in the different kinds of commodities to their common quality of human labour in the abstract.
(BF) It is the only expression of equivalence between different sorts of commodities which brings to view the specific character of value-creating labour, by actually reducing the different kinds of labour embedded in the different kinds of commodity to their common quality of being human labour in general.
(DK) Nur der Äquivalenzausdruck verschiedenartiger Waren bringt den spezifischen Charakter der wertbildenden Arbeit zum Vorschein, indem er die in den verschiedenartigen Waren steckenden, verschiedenartigen Arbeiten tatsächlich auf ihr Gemeinsames reduziert, auf menschliche Arbeit überhaupt.
길판은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zum Vorschein bringen"은 "to produce"를 뜻한다. "Äquivalenzausdruck"를 길판은 "등가로 표현"으로, 비봉판은 "등가의 표현"으로 번역했는데, 그냥 "등가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위 DK 문장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수정 번역] 오직 서로 다른 상품의 등가 표현만이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의 독특한 성격을 낳는데, 그것이 상이한 상품에 담긴 상이한 노동을 사실상 그들의 공통물인 인간노동 일반으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마포의 가치를 이루는 노동의 특수한 성격에 대한 얘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16.1] 유동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의 노동력, 즉 인간노동은 가치를 형성하긴 하지만 가치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응결된 상태, 즉 대상적 형태를 띠었을 때만 가치가 된다. 아마포의 가치를 인간노동의 응결물로서 표현하려면, 그것은 아마포 자체와는 물적으로 다르면서도 동시에 아마포와 그 밖의 모든 상품에 공통된 어떤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으로써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벌써 해결되었다.

16.1
(DK) Es genügt indes nicht, den spezifische Charakter der Arbeit auszudrücken, woraus der Wert der Leinwand besteht.
[수정 번역] 그런데 아마포의 가치를 이루는 노동의 특수한 성격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웃옷은 그것이 가치이기 때문에 아마포와의 가치관계에서 아마포와 질적으로 동일한 [즉 같은 성질을 가진] 물건으로 간주된다. [17.1] 그러므로 여기에서 웃옷은 가치의 모습을 드러내는 물적 존재[즉 가치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물형태]로 표현하는 물적 존재의 역할을 한다. [17.2] 그런데 웃옷이라는 상품체는 단지 하나의 사용가치일 뿐이다. [17.3] 1벌의 웃옷은 임의의 아마포 한 조각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가치를 표현하지는 않는다. [17.4] 이것은 웃옷이 아마포와의 가치관계 속에 있을 때가 가치관계 속에 있지 않을 때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치 사람들이 화려한 제복을 입었을 때가 그것을 입지 않았을 때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과 같다.

17.1
(SS) When occupying the position of equivalent in the equation of value, the coat ranks qualitatively as the equal of the linen, as something of the same kind, because it is value.
(BF) When it is in the value-relation with the linen, the coat counts qualitatively as the equal of the linen, it counts as a thing of the same nature, because it is a value.
(DK) Im Wertverhältnis der Leinwand gilt der Rock als ihr qualitativ Gleiches, als Ding von derselben Natur, weil er ein Wert ist.
[수정 번역] 웃옷은 가치이기 때문에, 아마포와의 가치관계에서 질적으로 동일한 것, 즉 같은 성질의 것으로 간주된다.
17.2
(SS) In this position it is a thing in which we see nothing but value, or whose palpable bodily form represents value.
(BF) Here it is therefore a thing in which value is manifested, or which represents value in its tangible natural form.
(DK) Er gilt hier daher als ein Ding, worin Wert erscheint oder welches in seiner handgreiflichen Naturalform Wert darstellt.
길판은 여기에서 "Ding"을 "물적 존재"로 번역했다. 그리고 "welches in seiner handgreiflichen Naturalform Wert darstellt"에 해당하는 번역을 잘못했다. 이 구절은 "ein Ding"을 수식하며 "ein Ding"은 "welches ..."라는 관계사절의 주어가 된다.
[수정 번역] 그러므로 여기에서 웃옷은 가치가 드러나는, 즉 가치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물형태로 표현하는 물적 존재로서 간주된다.
17.3
(DK) Nun ist zwar der Rock, der Körper der Rockware, ein bloßer Gebrauchswert.
길판은 "... der Rock, der Körper der Rockware ..."를 단순히 "웃옷이라는 상품체"로 번역했다.
[수정 번역] 그런데 웃옷, 즉 웃옷이라는 상품체는 단지 하나의 사용가치일 뿐이다.
17.4
(SS) A coat as such no more tells us it is value, than does the first piece of linen we take hold of.
(BF) A coat as such no more expresses value than does the first piece of linen we come across.
(DK) Ein Rock drückt ebensowenig Wert aus als das erste beste Stück Leinwand.
(비봉판) 저고리 그 자체가 가치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임의의 아마포 한 조각이 가치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독일어 구문에 익숙치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게 왜 이렇게 해석돼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웃옷의 생산에서는 실제로 인간의 노동력이 재단노동의 형태로 지출되었다. 따라서 웃옷 속에는 인간의 노동이 쌓여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웃옷은 ‘가치의 담지자’(Träger von Wert)이다. 물론 웃옷의 이러한 속성은 그것이 아무리 닳아서 해어진다 하더라도 실밥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것은 아니다. [18.1] 아마포와의 가치관계에서 웃옷은 다만 이런 측면으로만, 즉 물화(物化)된 가치, 다시 말해 가치체(價値體)로서만 간주된다. 단추를 채운 웃옷의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아마포는 그 웃옷 속에서 동족으로서의 아름다운 가치의 혼을 알아차린다. [18.2] 그러나 웃옷이 아마포의 가치를 표현하려면 아마포의 가치가 웃옷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18.3] 비유하자면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왕으로 모시려면 A에게서 왕은 B라는 육체적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그에게서 왕이란 왕이 바뀔 때마다 얼굴 모양, 머리카락 등이 함께 바뀌어야만 한다. [18.4]

18.1
(SS) In this aspect the coat is a depository of value, but though worn to a thread, it does not let this fact show through.
(BF) From this point of view, the coat is a 'bearer of value', although this property never shows through, even when the coar is at its most threadbare.
(DK) Nach dieser Seite hin ist der Rock "Träger von Wert", obgleich diese seine Eigenschaft selbst durch seine größte Fadenscheinigkeit nicht durchblickt.
길판은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수정 번역] 이런 측면에서 웃옷은 ‘가치의 담지자’(Träger von Wert)이지만, 웃옷의 이러한 속성은 그것이 아무리 닳아서 해어진다 하더라도 실밥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것은 아니다.
18.2
(SS) Sonnenschein판에는 이 문장에 해당하는 번역이 없다.
(BF) Despite its buttoned-up appearance, the linen recognizes in it a splendid kindred soul, the soul of value.
(DK) Trotz seiner zugeknöpften Erscheinung hat die Leinwand in ihm die stammverwandte schöne Wertseele erkannt.
(비봉판) 저고리가 단추를 채우고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포는 그 속에 있는 아름다운 동류의식[가치라는 동류의식]을 느낀다.
길판은 "die stammverwandte schöne Wertseele"를 "동족으로서의 아름다운 가치의 혼"이라고 번역했지만, 비봉판은 "아름다운 동류의식[가치라는 동류의식]"으로 번역했다. "동류의식이라는 아름다운 가치 혼"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수정 번역] 단추를 채운 웃옷의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아마포는 그 안에서 동류의식이라는 아름다운 가치 혼을 알아채버린다.
18.3
(SS) Sonnenschein판에는 이 문장에 해당하는 번역이 없다.
(BF) Nevertheless, the coat cannot represent value towards the linen unless value, for the latter, simultaneously assumes the form of a coat.
(DK) Der Rock kann ihr gegenüber jedoch nicht Wert darstellen, ohne daß für sie gleichzeitig der Wert die Form eines Rockes annimmt.
[수정 번역] 그러나 웃옷이 아마포의 가치를 표현하려면 아마포의 가치가 그것에 대해 즉시 웃옷의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
18.4
(SS) A, for instance, cannot be “your majesty” to B, unless at the same time majesty in B’s eyes assumes the bodily form of A, and, what is more, with every new father of the people, changes its features, hair, and many other things besides.
(BF) An individual, A, for instance, cannot be 'your majesty' to another individual, B, unless majesty in B's eyes assumes the physical shape of A, and, moreover, changes facial features, hair and many other things, with every new 'father of his people'.
(DK) So kann sich das Individuum A nicht zum Individuum B als einer Majestät verhalten, ohne daß für A die Majestät zugleich die Leibesgestalt von B annimmt und daher Gesichtszüge, Haare und manches andre noch mit dem jedesmaligen Landesvater wechselt.
길판은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수정 번역] 그러므로,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왕으로 모시려면 A에게 왕은 B라는 육체적 형태를 취해야 하므로, 얼굴 모양과 머리카락 등도 매번 왕이 바뀔 때마다 바뀌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웃옷이 아마포의 등가를 이루는 가치관계(價値關係)에서 웃옷의 형태는 가치형태로 간주된다. [19.1] 상품 아마포의 가치가 상품 웃옷의 물체로 [즉 한 상품의 가치가 다른 상품의 사용가치로] 표현되는 것이다. [19.2] 사용가치로서의 아마포는 ‘웃옷과 같은 것’, 따라서 웃옷과 똑같은 것으로 보인다. [19.3] 그리하여 아마포는 자신의 현물형태와는 다른 가치형태를 획득한다. 아마포의 가치존재는 아마포와 웃옷의 동질성에 따라 나타나는데, 이는 마치 기독교도의 양과 같은 성질이 그와 하느님의 어린 양(예수—옮긴이)과의 동질성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과 같다.

19.1
(DK) Im Wertverhältnis, worin der Rock das Äquivalent der Leinwand bildet, gilt also die Rockform als Wertform.
DK 문장에는 "그리하여"로 해석할만한 독일어 단어가 없다.
19.2
(SS) The value of the commodity linen is expressed by the bodily form of the commodity coat, the value of one by the use value of the other.
(BF) The value of the commodity linen is therefore expressed by the physical body of the commodity coat, the value of one by the use-value of the other.
(DK) Der Wert der Ware Leinwand wird daher ausgedrückt im Körper der Ware Rock, der Wert einer Ware im Gebrauchswert der andren.
길판은 "daher"를 해석하지 않았는데, 사실 바로 앞 문장의 "그리하여"가 이 문장에 있어야 한다.
[수정 번역] 그리하여 상품 아마포의 가치가 상품 웃옷의 물체로, 즉 한 상품의 가치가 다른 상품의 사용가치로 표현된다.
19.3
(SS) As a use value, the linen is something palpably different from the coat; as value, it is the same as the coat, and now has the appearance of a coat.
(BF) As a use-value, the linen is something palpably different from the coat; as value, it is identical with the coat, and therefore looks like the coat.
(DK) Als Gebrauchswert ist die Leinwand ein vom Rock sinnlich verschiednes Ding, als Wert ist sie "Rockgleiches" und sieht daher aus wie ein Rock.
길판의 번역은 이상하다. 문맥을 놓고 따져봤을 때, "sinnlich verschiednes Ding,"와 "als Wert ist" 사이에서 문장을 끊어 번역해야 한다.
[수정 번역] 사용가치로서 아마포는 웃옷과 감각적으로 구별되는 물건이지만, 가치로서 아마포는 '웃옷과 같은 것'이므로 그것은 마치 웃옷처럼 보인다.

앞서 상품가치의 분석에서 얘기된 모든 것이 이제는 아마포 자신에 의해서 그것과 다른 상품, 즉 웃옷과의 관계를 통해서 얘기되고 있다. [20.1] 아마포는 단지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인 상품의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인간노동이라는 추상적인 성질의 노동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아마포는 웃옷이 자신과 같은 것으로서 가치라는 측면에서 자신과 똑같은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20.2] 자신의 숭고한 가치대상성은 자신의 뻣뻣한 몸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 아마포는 자신의 가치가 웃옷의 모습을 띠고 있으며 가치물로서 자신은 웃옷과 쌍둥이처럼 똑같다고 말한다. 덧붙여 얘기한다면, 상품의 언어에는 히브리어 말고도 비교도 쓸 만한 여러 방언이 있다. 예를 들어 독일어 ‘Wertsein’(가치존재)이라는 말은, 라틴어계의 동사 ‘valere’, ‘valer’, ‘valoir’ 따위보다는 못하지만, 상품 B를 상품 A와 등치시키는 일 자체가 상품 A 자신의 가치표현이라는 점을 적절히 표현해준다. 파리의 가치는 미사 한 번의 가치와 같다(Paris vaut bien une messe)! [20.3] [20.4]

20.1
(SS) We see, then, all that our analysis of the value of commodities has already told us, is told us by the linen itself, so soon as it comes into communication with another commodity, the coat.
(BF) We see, then, that everything our analysis of the value of commodities told us is repeated by the linen itself, as soon as it enters into association with another commodity, the coat.
(DK) Man sieht, alles, was uns die Analyse des Warenwerts vorher sagte, sagt die Leinwand selbst, sobald sie in Umgang mit andrer Ware, dem Rock, tritt.
길판은 "as soon as"에 해당하는 "sobald"를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다.
[수정 번역] 주지하다시피, 이전에 상품가치의 분석에서 얘기된 모든 것을 아마포 자신이 다른 상품, 즉 웃옷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자마자 다시 언급하고 있다.
20.2
(SS) In order to tell us that its own value is created by labour in its abstract character of human labour, it says that the coat, in so far as it is worth as much as the linen, and therefore is value, consists of the same labour as the linen.
(BF) In order to tell us that labour creates its own value in its abstract quality of being human labour, it says that the coat, in so far as it counts as its equal, i.e. is value, consists of the same labour as it does itself.
(DK) Um zu sagen, daß die Arbeit in der abstrakten Eigenschaft menschlicher Arbeit ihren eignen Wert bildet, sagt sie, daß der Rock, soweit er ihr gleichgilt, also Wert ist, aus derselben Arbeit besteht wie die Leinwand.
길판은 영어로 "in so far as"에 해당하는 독일어 "soweit"를 번역하지 않았다. 그리고 "die Arbeit in der abstrakten Eigenschaft menschlicher Arbeit"는 "인간노동의 추상적 성질에서 노동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수정 번역] 인간노동의 추상적 성질에서 노동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형성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아마포는 웃옷이 동등하다고 간주되는 한에서, 즉 가치일 경우에만 그것은 자신과 동일한 노동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20.3
(SS) The German “Wertsein,” to be worth, for instance, expresses in a less striking manner than the Romance verbs “valere,” “valer,” “valoir,” that the equating of commodity B to commodity A, is commodity A’s own mode of expressing its value.
(BF) The German word 'Werstein' (to be worth), for instance, brings out less strikingly than the Romance ver, 'valere', 'valer', 'valoir', that equating of commodity B with commodity A is the expression of value proper to commodity A.
(DK) Das deutsche "Wertsein" drückt z.B. minder schlagend aus als das romanische Zeitwort valere, valer, valoir, daß Gleichsetzung der Ware B mit der Ware der eigne Wertausdruck der Ware A ist.
(비봉판) 예를 들어, 상품 B를 상품 A에 등치하는 것이 상품 A의 가치를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나타냄에 있어 독일어의 'Wertsein'(가치가 있다)은 라틴어 계통의 동사 'Valere', Valer', 'Valoir'보다 적절하지 못하다.
길판은 이 부분을 오역했다. "daß Gleichsetzung ... der Ware A ist"는 "das romanische Zeitwort valere, valer, valoir"를 수식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drückt ... minder schlagend aus als ~"는 "~보다 덜 와닿게 표현한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즉, 마르크스는 이 문장에서 ‘Wertsein’이 상품어로서 앞에서 나열한 라틴어계 동사보다 그다지 좋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비봉판이 길판보다 제대로 된 번역을 했다.
[수정 번역] 예를 들어 독일어 ‘Wertsein’(가치존재)는 상품 B를 상품 A의 특정 가치표현에 등치시킨다는 뜻의 라틴어계 동사 ‘valere’, ‘valer’, ‘valoir’보다는 덜 와닿게 표현한다.
20.4
MEW 주석 23번을 보면, 이 말은 1593년 앙리 4세가 국가정책적인 이익을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어떤 맥락에서 이 문장이 인용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하여 이 가치관계를 매개로 상품 B의 현물형태는 상품 A의 가치형태가 된다. 바꾸어 말해서 상품 B의 몸체는 상품 A의 가치의 거울이 된다. 18) [21.1] 상품 A는 상품 B와의 관계를 가치체로 [즉 인간노동의 물상화(物象化, Materiatur)로] 설정함으로써 사용가치 B를 상품 A 자신의 가치표현의 재료로 삼는다. [21.2] 따라서 사용가치로서의 상품 B에 표현되어 있는 상품 A의 가치는 상대적 가치형태를 취한다.

21.1
(DK) Vermittelst des Wertverhältnisses wird also die Naturalform der Ware B zur Wertform der Ware A oder der Körper der Ware B zum Wertspiegel der Ware A.
길판은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수정 번역] 그리하여 이 가치관계를 매개로 상품 B의 현물형태는 상품 A의 가치형태가 되며, 또는 상품 B의 몸체는 상품 A의 가치의 거울이 된다.
21.2
(SS) By putting itself in relation with commodity B, as value in propriâ personâ, as the matter of which human labour is made up, the commodity A converts the value in use, B, into the substance in which to express its, A’s, own value.
(BF) Commodity A, then in entering into a relation with commodity B as an object of value, as a materialization of human labour, makes the use-value B into the material through which its own value is expressed.
(DK) Indem sich die Ware A auf die Ware B als Wertkörper bezieht, als Materiatur menschlicher Arbeit, macht sie den Gebrauchswert B zum Material ihres eignen Wertausdrucks.
길판은 "Materiatur"를 "물화"로 번역했는데, 여기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가 "material"이므로 비봉판의 번역 "체현물"이 타당하다고 본다.
[수정 번역] 상품 A는 상품 B와의 관계를 가치체, 즉 체현물(Materiatur)로 놓음으로써 사용가치 B를 자기 자신의 가치표현의 재료로 삼는다.

나. 상대적 가치형태의 양적 규정성


가치를 표현하는 상품은 모두 15부셸의 밀, 100파운드의 커피 등과 같이 일정한 양의 사용대상들이다. 이 일정한 양의 상품들은 일정량의 인간노동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가치형태는 가치 일반뿐만 아니라 양적으로 규정된 가치, 즉 가치크기도 표현해야만 한다. 따라서 상품 B에 대한 상품 A의 가치관계, 즉 웃옷에 대한 아마포의 가치관계에서 웃옷은 가치체 일반으로서 아마포와 질적으로 등치될 뿐만 아니라 일정량의 아마포[즉 예를 들어 20엘레의 아마포]는 일정량의 가치체나 등가물[즉 예를 들어 1벌의 웃옷]과도 등치된다. [22.1]

22.1
(DK) Im Wertverhältnis der Ware A zur Ware B, der Leinwand zum Rocke, wird daher die Warenart Rock nicht nur als Wertkörper überhaupt der Leinwand qualitativ gleichgesetzt, sondern einem bestimmten Leinwandquantum, z.B. 20 Ellen Leinwand, ein bestimmtes Quantum des Wertkörpers oder Äquivalents, z.B. 1 Rock.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지만, 길판은 "상품 종류"라는 뜻의 "Warenart"를 번역하지 않았다.
[수정 번역] 상품 B에 대한 상품 A의 가치관계, 즉 웃옷에 대한 아마포의 가치관계에서 상품종류인 웃옷은 가치체 일반으로서 아마포와 질적으로 등치될 뿐만 아니라 일정량의 아마포, 예를 들어 20 엘레의 아마포는 일정량의 가치체나 등가물, 예를 들면 1벌의 웃옷과도 등치된다.

‘20엘레의 아마포=1벌의 웃옷, 또는 20엘레의 아마포는 웃옷 1벌의 가치가 있다’라는 등식은 웃옷 1벌에 아마포 20엘레와 동일한 양의 가치실체가 들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두 상품 양이 같은 양의 노동[또는 같은 노동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23.1] 그러나 20엘레의 아마포나 1벌의 웃옷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은 방직노동이나 재단노동의 생산력이 변동함에 따라 변한다. 이제 그러한 변동이 가치크기의 상대적 표현에 끼치는 영향을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23.1
(DK) Die Gleichung: "20 Ellen Leinwand = 1 Rock oder: 20 Ellen Leinwand sind 1 Rock wert" setzt voraus, daß in 1 Rock gerade so viel Wertsubstanz steckt als in 20 Ellen Leinwand, daß beide Warenquanta also gleich viel Arbeit kosten oder gleich große Arbeitszeit.
원문에 없는 괄호([])를 번역과정에서 번역자가 임의로 사용했다.

① 아마포의 가치는 변동하는데 19) 웃옷의 가치는 불변인 경우. 예를 들어 토지의 비옥도가 감소하여 아마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2배로 늘어난다면 아마포의 가치 역시 2배로 커질 것이다. 그러면 이제 1벌의 웃옷에는 20엘레의 아마포에 비해 노동시간이 절반밖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20엘레의 아마포=1벌의 웃옷 대신 20엘레의 아마포=2벌의 웃옷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직기의 개량으로 아마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아마포의 가치 역시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 이제 20엘레의 아마포=1/2벌의 웃옷이 될 것이다. 상품 A의 상대적 가치, 즉 상품 B로 표현된 상품 A의 가치는 상품 B의 가치가 불변일 경우 상품 A의 가치에 정비례하여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② 아마포의 가치는 불변인데 웃옷의 가치가 변동할 경우. 예를 들어 양털깎기가 여의치 않아서 웃옷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이 2배로 늘어난다면 20엘레의 아마포=1벌의 웃옷 대신 20엘레의 아마포=1/2벌의 웃옷이 될 것이다. 반면 웃옷의 가치가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그때는 20엘레의 아마포=2벌의 웃옷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상품 A의 가치가 불변일 경우 상품 B로 표현되는 상품 A의 상대적 가치는 상품 B의 가치에 반비례하여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①과 ②의 여러 경우를 비교해보면 상대적 가치의 크기가 똑같이 변한다 하더라도 그 원인은 정반대일 수가 있다. 즉 20엘레의 아마포=1벌의 웃옷이라는 등식이 ㉠ 아마포의 가치가 2배로 증가하거나 웃옷의 가치가 절반으로 줄어들 때는 20엘레의 아마포=2벌의 웃옷이라는 등식이 되고, ㉡ 아마포의 가치가 절반으로 줄거나 웃옷의 가치가 2배로 늘어났을 때는 20엘레의 아마포=1/2벌의 웃옷이라는 등식이 된다.




③ 웃옷과 아마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양이 같은 방향, 같은 비율로 동시에 변동할 경우. 이 경우에는 그것들의 가치가 아무리 변하더라도 20엘레의 아마포=1벌의 웃옷은 여전히 그대로 변하지 않는다. 이것들의 가치변동은 가치가 불변인 제3의 상품과 비교해보아야 비로소 드러난다. 모든 상품의 가치가 동시에 같은 비율로 증가하거나 감소할 경우 그 상품들의 상대적인 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상품들의 실제 가치변동은 같은 시간 동안에 생산되는 상품량이 일반적으로 과거보다 더 많은지 적은지에 따라 드러나게 될 것이다.




④ 웃옷과 아마포 각각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 따라서 각 상품의 가치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변동하면서 그 비율이 불균등한 경우 또는 그 방향이 반대일 경우 등. 있을 수 있는 이런 모든 경우의 조합(Kombination)이 한 상품의 상대적 가치에 미치는 영향은 ①, ②, ③의 경우를 응용함으로써 간단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가치크기의 실제 변동은 가치크기의 상대적 표현이나 상대적 가치의 크기에 그대로 남김 없이 반영되지 않는다. 어느 한 상품의 상대적 가치는 그 상품의 가치가 변하지 않을 경우에도 변동할 수 있다. 또 그 상품의 가치가 변동할 경우에도 그 상품의 상대적 가치는 변하지 않을 수 있다. 끝으로 상품의 가치크기와 이 가치크기의 상대적 표현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변동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20) [29.1]

29.1
DK) Ihr relativer Wert kann konstant bleiben, obgleich ihr Wert wechselt, und endlich brauchen gleichzeitige Wechsel in ihrer Wertgröße und im relativen Ausdruck dieser Wertgröße sich keineswegs zu decken.
길판은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수정 번역] 상품의 가치가 변동할 경우에도 그 상품의 상대적 가치는 변하지 않을 수 있으며, 끝으로 상품의 가치크기와 이 가치크기의 상대적 표현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변동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주석>


17) 베일리(S. Bailey)처럼 가치형태의 분석에 몰두해온 몇 안 되는 경제학자들이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했던 이유는 첫째, 그들이 가치형태와 가치를 혼동했기 때문이고, 둘째, 그들이 현장에서 움직이는 실천적 부르주아들의 일상적 사고의 영향을 받아 처음부터 양적 규정성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양을 다루는 것이 ... 가치이다." ("The command of quantity ... constitutes value.") (베일리, 『화폐와 그 가치변동』, 런던, 1837, 11쪽).




17a) 제2판의 주: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 이후, 가치의 성질을 간파한 최초의 경제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유명한 프랭클린(Frankli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업이란 일반적으로 어떤 노동을 다른 노동과 교환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든 물건의 가치는 노동을 통해서 가장 올바르게 평가된다.” ("Trade in general being nothing else but the exchange of labour for labour, the value of all things is ... most justly measured by labour.") (프랭클린, 『프랭클린 저작집』, 스파크스[Sparks] 엮음, 보스턴, 1836, 제2권, 267쪽). 프랭클린은 그가 모든 물건의 가치를 ‘노동을 통해’ 평가함으로써 교환되는 노동들 사이의 차이를 배제하였고, 그럼으로써 이들 노동을 동등한 인간노동으로 환원시켰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한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어떤 노동’이라고 말하고 다음에는 ‘다른 노동’이라고 말하며, 마지막에는 모든 물건의 가치의 실체로서 더 이상의 아무런 형용사도 없이 그냥 ‘노동’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설명 있다]

N2.1
길판은 주석문을 번역할 때, 영어로 된 원문을 제대로 참조하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길판은 “상업이란 일반적으로 어떤 노동을 다른 노동과 교환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든 물건의 가치는 노동을 통해서 가장 올바르게 평가된다.”로 DK에 나와 있는 문장을 그대로 번역했지만, 실제 원문(SS와 BF에 나와 있다)은 다음과 같다. "Trade in general being nothing else but the exchange of labour for labour, the value of all things is ... most justly measured by labour." 즉 "all thing is"와 "most justly measured by labour" 사이에 “…"이 있다. 따라서 "모든 물건의 가치는”과 "노동을 통해서 가장 올바르게 평가된다” 사이에 "…”를 추가로 넣어야 한다. 그리고 번역도 "가장 올바르게 평가된다"보다는 "가장 정당하게 평가된다"로 바꿔야 한다.
"프랭클린은 그가 모든 물건의 … 그냥 ‘노동’이라고만 말하고 있다"를 다음과 같이 수정 번역할 수 있다.
(DK) Franklin ist sich nicht bewußt, daß, indem er den Wert aller Dinge "in Arbeit" schätzt, er von der Verschiedenheit der ausgetauschten Arbeiten abstrahiert - und sie so auf gleiche menschliche Arbeit reduziert. Was er nicht weiß, sagt er jedoch. Er spricht erst von "der einen Arbeit", dann "von der andren Arbeit", schließlich von "Arbeit" ohne weitere Bezeichnung als Substanz des Werts aller Dinge.
[수정 번역] 프랭클린 자신은 사물의 가치를 "노동으로" 평가함으로써, 교환되는 노동 사이의 차이를 배제했다는 것 - 그리하여 동등한 인간노동으로 환원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의식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어떤 노동"이라고 말하고 다음에는 "다른 노동"이라고 말하며, 마지막에는 모든 사물의 가치의 실체로서 더이상 수식 없이 "노동"에 관해 말하고 있다.

18)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도 상품과 같다. 인간은 거울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나는 나다”(Ich bin ich)라고 하는 피히테(Fichte)류의 철학자로 세상에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일단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비춰본다. 갑이라는 인간은 을이라는 인간을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비로서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갑에게는 을 전체가, 즉 머리카락과 살갗으로 이루어진 을의 육체적인 모습 그대로가 인간이라는 종족의 현상형태로 간주된다. [설명 있다]

N3.1
(SS) In a sort of way, it is with man as with commodities. Since he comes into the world neither with a looking glass in his hand, nor as a Fichtian philosopher, to whom “I am I” is sufficient, man first sees and recognises himself in other men. Peter only establishes his own identity as a man by first comparing himself with Paul as being of like kind. And thereby Paul, just as he stands in his Pauline personality, becomes to Peter the type of the genus homo.
(BF) In a certain sense, a man is the same situation as a commodity. As he neither enters into the world in possession of a mirror, nor as Fichtean philosopher who can say 'I am I', a man first sees and recognizes himself in another man. Peter only relates to himself as a man through his relation to another man, Paul, in whom recognizes his likeness. With this, however, Paul also becomes from head to toe, in his physical form as Paul, the form of appearance of the species man for Peter.
(DK) In gewisser Art geht's dem Menschen wie der Ware. Da er weder mit einem Spiegel auf die Welt kommt noch als Fichtescher Philosoph: Ich bin ich, bespiegelt sich der Mensch zuerst in einem andren Menschen. Erst durch die Beziehung auf den Menschen Paul als seinesgleichen bezieht sich der Mensch Peter auf sich selbst als Mensch. Damit gilt ihm aber auch der Paul mit Haut und Haaren, in seiner paulinischen Leiblichkeit, als Erscheinungsform des Genus Mensch.
길판의 번역은 매우 이상하다. 우선 "bespiegelt sich ... in einem andren Menschen"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비춰본다"로 번역하면 된다. 굳이 길판처럼 길게 늘일 이유가 없다. 길판은 "Paul"을 "을"로 "Peter"를 "갑"으로 번역했는데, 그냥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 즉 "바울"과 "베드로"로 번역하면 된다. 그리고 길판은 "durch die Beziehung auf den Menschen Paul als seinesgleichen"를 "을이라는 인간을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설정함으로써"라고 번역했는데, 틀린 번역이다. "seinesgleichen"은 "자신을 닮은"이란 뜻이며, "durch die Beziehung auf ..."는 "...과의 관계를 통해서"란 뜻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되는 바울이라는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마지막 문장은 정말 이상한데, "der Paul mit Haut und Haaren, in seiner paulinischen Leiblichkeit"은 "그들의 바울과 같은 육체 안에서 온전한 육체를 가진 바울은"이라고 번역해야 하며, "갑에게는 을 전체가"에 대한 문장은 위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수정 번역]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상품과 같다. 인간은 거울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나는 나다”(Ich bin ich)라고 하는 피히테(Fichte)류의 철학자로 세상에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일단 타인을 통해서 자신을 비춰본다. 단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되는 바울이라는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베드로는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바울과 같은 육체 안에서 온전한 육체를 가진 바울은 인간 종의 현상형태로서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관계를 맺는다.

19) 여기에서 ‘가치’라는 표현은 이미 앞서 여러 곳에서 그러했듯이 양적으로 규정된 가치의 의미, 즉 가치크기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20) 제2판의 주: 가치크기와 그 상대적 표현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를 속류 경제학자들은 잘 알려진 그 교묘한 방법으로 이용해왔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A에 지출되는 노동이 감소하지 않더라도 A와 교환되는 B의 가치가 등귀함으로써 A의 가치가 하락한다는 사실이 일단 인정되면, 당신들의 일반적 가치원리는 붕괴된다. … 만일 A의 가치가 B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등귀하여 B의 가치가 A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하락한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한 상품의 가치가 언제나 그 상품에 체화된 노동량으로 규정된다는 리카도의 대명제의 토대는 와해되어버린다. 왜냐하면 A의 비용상의 어떤 변동이 그것과 교환되는 B의 관계에서 A 자체의 가치를 변동시킬 뿐만 아니라, B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에 전혀 변동이 없는데도 A의 가치에 대한 B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변동시킨다면, 한 물품에 지출된 노동량이 그 가치를 규제한다는 학설뿐만 아니라 한 물품의 생산비가 그 가치를 규제한다고 하는 학설도 함께 붕괴되기 때문이다” ("Once admit that A falls, because B, with which it is exchanged, rises, while no less labour is bestowed in the meantime on A, and your general principle of value falls to the ground ... If he [Ricardo] allowed that when A rises in value relatively to B, B falls in value relatively to A, he cut away the ground on which he rested his grand proposition, that the value of a commodity is ever determined by the labour embodied in it, for if a change in the cost of A alters not only its own value in relation to B, for which it is exchanged, but also the value of B relatively to that of A, though no change has taken place in the quantity of labour to produce B, then not only the doctrine falls to the ground which asserts that the quantity of labour bestowed on an article regulates its value, but also that which affirms the cost of an article to regulate its value") (브로드허스트[J. Broadhurst], 『경제학』, 런던, 1842, 11•14쪽).
브로드허스트는 같은 논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10/20, 10/50, 10/100 등의 분수를 한 번 생각해보라. 10이라는 수는 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 비례적인 크기, 즉 20, 50, 100이라는 분모에 대한 그 상대적인 크기는 계속 감소한다. 그리하여 어떤 정수, 가령 10의 크기는 그 속에 포함된 1이라는 단위 수의 ‘규제’를 받는다는 대원칙이 붕괴한다.






Posted by metas :


모든 가치형태의 비밀은 이 단순한 가치형태 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 가치형태의 분석은 처음부터 어려움이 따른다.

여기서 우리가 예를 든 두 종류의 상품인 아마포와 웃옷은 명백히 서로 다른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포는 웃옷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웃옷은 이 가치표현의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전자는 능동적인 역할을 하고 후자는 수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포의 가치는 상대적 가치로 표시되고 있다. 즉 그것은 상대적 가치형태(relative Werform)로 존재한다. 웃옷은 등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따라서 등가형태(等價形態, Äquivalentform)로 존재한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서로 의존해 있으면서 서로를 제약하는 불가분의 두 계기(Momente)이지만 동시에 동일한 가치표현의 상호배타적이고 대립적인 극단, 즉 가치표현의 양극이다. 이 양극은 가치표현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맺는 두 개의 다른 상품으로 늘 나누어진다.


『자본 I-1』(도서출판 길), 104~105쪽.


모든 가치 형태의 비밀은 이 단순한 가치형태 속에 숨어 있다. 그러므로 이 가치형태 분석이 우리의 중요한 난관이다.

종류가 다른 두 상품 A와 B(우리의 예에서는 아마포와 저고리)는 여기서 분명히 두 개의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아마포는 자기의 가치를 저고리로 표현하며, 저고리는 이러한 가치표현의 재료가 된다. 제1상품은 능동적 역할을 하며, 제2상품은 수동적 역할을 한다. 제1상품은 자기의 가치를 상대적 가치로 표현한다. 바꾸어 말해, 그 상품은 상대적 가치형태로 있다. 제2상품은 등가(물)(: equivalent)로서 기능한다. 다시 말해, 그 상품은 등가형태로 있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상호 의존하고 상호 제약하는 불가분의 계기들이지만, 그와 동시에 상호 배제하는 또는 상호 대립하는 극단들[즉, 가치표현의 두 극]이다. 이 두 극은 가치표현에 의해 상호관련맺는 상이한 상품들이 맡는다.

『자본론 I-상』(비봉 출판사), 61쪽.


Das Geheimnis aller Wertform steckt in dieser einfachen Wertform. Ihre Analyse bietet daher die eigentliche Schwierigkeit.

Es spielen hier zwei verschiedenartige Waren A und B, in unsrem Beispiel Leinwand und Rock, offenbar zwei verschiedene Rollen. Die Leinwand drückt ihren Wert aus im Rock, der Rock dient zum Material dieses Wertausdrucks. Die erste Ware spielt eine aktive, die zweite eine passive Rolle. Der Wert der ersten Ware ist als relativer Wert dargestellt, oder sie befindet sich in relativer Wertform. Die zweite Ware funktioniert als Äquivalent oder befindet sich in Äquivalentform.

Relative Wertform und Äquivalentform sind zueinander gehörige, sich wechselseitig bedingende, unzertrennliche Momente, aber zugleich einander ausschließende oder entgegengesetzte Extreme, d.h. Pole desselben Wertausdrucks; sie verteilen sich stets auf die verschiedenen Waren, die der Wertausdruck aufeinander bezieht.

『Das Kapital. Band I』 in Marxists Internet Archive (MIA) [링크]


The whole mystery of the form of value lies hidden in this simple form. Our real difficulty, therefore, is to analyse it.

Here two different kinds of commodities (in our example the linen and the coat) evidently play two different parts. The linen expresses its value in the coat; the coat serves as the material in which that value is expressed. The first commodity plays an active role, the second a passive one. The value of the first commodity is represented as relative value, in other words the commodity is in the relative form of value. The second commodity fulfils the function of equivalent, in other words it is in the equivalent form.

The relative form of value and the equivalent form are two inseparable moments, which belong to and mutually condition each other; but the same time, they are mutually exclusive or opposed extremes, i.e. poles of the expression of value. They are always divided up between the different commodities brought into relation with each other by that expression.

『Capital Volume I』 (Penguin Classics), pp. 139~140.


The whole mystery of the form of value lies hidden in this elementary form. Its analysis, therefore, is our real difficulty.

Here two different kinds of commodities (in our example the linen and the coat), evidently play two different parts. The linen expresses its value in the coat; the coat serves as the material in which that value is expressed. The former plays an active, the latter a passive, part. The value of the linen is represented as relative value, or appears in relative form. The coat officiates as equivalent, or appears in equivalent form.

The relative form and the equivalent form are two intimately connected, mutually dependent and inseparable elements of the expression of value; but, at the same time, are mutually exclusive, antagonistic extremes – i.e., poles of the same expression. They are allotted respectively to the two different commodities brought into relation by that expression.

『Capital Volume I』 in MIA [링크]


자본론 독일어본과 영어 번역본 두 가지 그리고 한국어 번역본 두 가지를 비교 및 공부하던 중에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했는데, 바로 독일어 'Moment'에 대한 번역의 차이다. 길판과 비봉판은 이것을 '계기'로 번역했지만, 펭귄판은 독일어본과 동일하게 'moments'로, 조넨샤인판(『Capital Volume I』 in MIA)에서는 "elements of the expression of value", 즉 "가치표현의 원소"로 길게 풀어서 번역했다. 그렇다면 누구의 번역이 맞을까?

우선 우리의 관심사인 'Moment'가 놓여 있는 독일어 문장을 한 번 살펴보자. [길판 혹은 비봉판 둘 가지 가운데 하나를 골라 쓰면 좋을 것 같지만 둘 다 번역에 문제가 있어 보이기 때문에, 독일어를 다시 번역했다. 번역에 사용한 문장은 위 인용문 가운데 『Das Kapital. Band I』에 있는 굵은 글씨체로 표시된 부분이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서로 필요로 하고 상호 의존적인 불가분의 Moment지만, 또한 상호 배타적이며 또는 배제하는 극단, 즉 동일한 가치표현의 극으로, 그것은 항상 가치표현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다른 상품으로 퍼져나간다." (Relative Wertform und Äquivalentform sind zueinander gehörige, sich wechselseitig bedingende, unzertrennliche Momente, aber zugleich einander ausschließende oder entgegengesetzte Extreme, d.h. Pole desselben Wertausdrucks; sie verteilen sich stets auf die verschiedenen Waren, die der Wertausdruck aufeinander bezieht.) [길판의 "서로 제약하는"이란 풀이는 오역인데, 과거분사형 'bedingende'의 원형인 'bedingen'은 영어로 'to necessiate', 'to cause', 또는 'to presuppose'를 뜻하기 때문이다.]

독일어 'Moment'는 영어 'moment'와 동일한 뜻이며, 한국어로는 '순간', '한때', '시기/기회', '중요성', '계기(契機)', '(통계에서)적률(積率)', '(역학에서)모멘트' 등의 다양한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길판과 비봉판에서 독일어 'Moment'를 번역할 때 선택한 '계기(契機) '란 단어는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바뀌게 되는 원인이나 기회'를 뜻한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독일어 원전에서 'Moment'가 '계기'란 뜻으로 사용되었다면, 위 문장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상대적인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상호 의존적이며 떼어낼 수 없는 원인이자 기회이며 동시에 상호 배타적이며 또는 배제하는 가치표현으로 맺어진 극이다."

상대적인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인데, 그것이 서로에게 원인이자 기회가 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럽다. 사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상대적인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상품 사이의 가치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등식의 항에 해당한다. 그런데 수학에서 등식이라는 것은 종속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등호(=)를 기준으로 서로의 위치를 바꿔도 항상 변함이 없는 대등한 입장을 나타낸다. 더불어 이러한 등호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위치한 항[즉 상대적인 가치형태와 등가형태]은 항상 등치되어야만 하는 필연적 존재가 된다. 따라서 앞에서 보인 것처럼 'Moment'를 '계기'로 번역해서는 상대적인 가치형태와 등가형태의 대등한 관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Moment'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르크스는 과학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특히 과학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과 열정은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에 자주 묘사되었으며, 실제로 마르크스가 지인들과 주고 받은 서신을 살펴보면 당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대해 그가 상당한 식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말년에 그의 가치론을 수식으로 일반화해 나타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수학 연구에도 몰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이러한 마르크스의 지적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고 난 후에야 우리는 'Moment'가 나타내는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문제의 독일어 문장으로 돌아가자. 이 문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동등한 조건에서) 서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상호의존적인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그 어떤 것"이며, 동시에 "상호 배타적이며 배제하는 극단(Extreme)이자 극(Pole)"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은 '가치표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상호 의존성과 배타성을 동시에 나타내는 양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Moment'의 성격이 규정되는데, 'Moment'에 대한 여러 가지 의미 중 여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은 바로 물리학(혹은 고전역학)이다.

'모멘트(moment)'는 물리학(혹은 고전역학)에서 "어떤 종류의 물리적 효과가 하나의 물리량뿐만 아니라 그 물리량의 분포상태에 따라서 정해질 때에 정의되는 양" 또는 "회전운동에서 물체를 회전시키는 힘의 크기를 나타내는 상대적인 양" 등을 설명하기 위해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나는 전공이 생물학이라 물리를 잘 모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 아주 기초적인 수준 내에서 '모멘트'의 일반적인 개념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예를 들어 실로 연결된 동일한 질량의 두 물체 A와 B가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양 극에 있는 두 물체는 같은 방향으로, 즉 북쪽이면 북쪽으로 남쪽이면 남쪽으로 움직여보자. 만약 A와 B가 동일한 힘으로 움직인다면 두 물체는 저항력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런데 둘 중 어느 하나가 좀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 일정 지점까지는 직선운동을 나타내겠지만, 그 이후에는 원운동을 하면서 임의의 방향으로 두 물체 A와 B는 한 덩어리가 되어 직선운동을 하게 된다. 이외에도 두 물체 A와 B의 질량의 차이, 그리고 최초 운동 방향의 차이 등여러 가지 변인에 따라 하나로 연결된 두 물체 A와 B는 다양한 운동 양상을 보일 수 있는데, 이러한 운동이 가지는 상대적 운동 총량을 모멘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두 물체 A와 B가 어떻게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는가 이다. 만일 두 물체가 실 등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두 물체의 운동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의존성도 없을뿐더러 배타적이지도 않다. 그렇지만 실로 연결된 두 물체는 서로의 운동 방향 혹은 운동성이 상호 영향을 받으며 운동 방향이 정반대인 경우에는 배타적이기까지 하며, 어떤 상황에서는 힘의 합력이 제로가 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두 물체 A와 B 사이에는 상대성이 존재하며, 이러한 상대성은 두 물체를 연결하는 실을 통해 표현된다.

상대적인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용가치가 상대적인 가치형태가 된다면, 그 사용가치는 자신을 등가형태로 놓을 수 없고 대신 그 위치에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가 놓여져야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더불어 이러한 가치관계는 서로에게 거울과 같은 가치표현을 통해 매개된다. 이렇게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실에 묶인 채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는 두 물체 A와 B의 움직임처럼, 가치표현이라 불리는 실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상대적인 효과, 즉 모멘트를 유발하게 된다.

바로 이런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Moment'를 이 부분에 도입한 것이 아닐까? 물리학에 대한 아주 짧은 식견으로 'Moment'에 대해 설명해봤는데, 이게 실제로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혹시 내가 착각할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어쨌든,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그의 과학에 대한 사랑을 찾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 같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장담이나 확신은 못하지만 말이다.


PS. 혹시라도 이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서 모멘트 일반에 대한 나의 이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꼭 내게 정확하고 올바른 개념을 알려주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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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Das Kapital』독일어판을 한국어로 번역한 강 교수(이하 강 교수)의 『자본』과 두 가지 영어 번역판인 Sonnenschein판(이하 SS)과 Penguin Classics의 Ben Fowkes 번역판(자본론 1에 해당, 이하 BF), 그리고 David Fernbach 번역판(자본론 2 및 3에 해당, 이하 DF2DF3로 각각 표기)을 참조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MIA(Marxists Internet Archive)에 있는 독일어 원본(이하 DK)을 참조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내용은 『자본I-1』 95~102쪽에 해당한다.



제1편 상품과 화폐
제1장 상품
제2절 상품에 나타난 노동의 이중성


처음에는 상품이 우리에게 양면(兩面)적인 것(Zwieschlächtiges, twofold natures), 즉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서 나타났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노동도 그것이 가치로 표현되는 경우 이미 사용가치의 창조자로서의 특징을 지니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1] 상품에 포함된 노동의 이러한 이중적 성질을 비판적으로 지적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 12) 이 점은 경제학의 이해에서 결정적인 도약점(跳躍占, Springpunkt)이므로 여기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해둘 필요가 있다.

1.1
(SS) Later on, we saw also that labour, too, possesses the same twofold nature; for, so far as it finds expression in value, it does not possess the same characteristics that belong to it as a creator of use values.
(BF) Later on it was seen that labour, too, has a dual character: in so far as it finds its expression in value, it no longer possesses the same characteristics as when it is the creator of use-values.
(DK) Später zeigte sich, daß auch die Arbeit, soweit sie im Wert ausgedrückt ist, nicht mehr dieselben Merkmale besitzt, die ihr als Erzeugerin von Gebrauchswerten zukommen.
중요해 보이지는 않지만, 강 교수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 DK는 없는 '그런데'라는 표현을 번역 과정에서 추가했다. 그리고 영어로 "no longer"에 해당하는 표현인 독일어 "nicht mehr"를 "이미 ... 않다"라고 번역했다. 뉘앙스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이 부분을 "더이상 ... 않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지 않았겠느냐는 판단이 든다. 더불어 "soweit sie im Wert ausgedrückt ist"를 "노동도 그것이 가치로 표현되는 경우"로 번역했는데, 'soweit'는 영어로 'so far as/in so far as'로 번역할 수 있다.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중에, 노동이 가치로 표현되는 한 더 이상 사용가치의 창조자로서의 특징을 지니지 않게 됨이 드러났다."

2개의 상품, 즉 1벌의 웃옷과 10엘레(Elle: 독일에서 쓰는 길이의 단위. 약 60센티미터에 해당한다—옮긴이)의 아마포를 예로 들어보자. 그리고 전자는 후자에 비해 2배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자. 즉 10엘레의 아마포=W라면, 1벌의 웃옷=2W라고 하자.




웃옷은 어떤 특수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용가치이다. 그것을 생산하려면 특정 종류의 생산활동이 필요하다. 이 활동은 그 목적·작업방식·대상·수단·결과 등에 따라서 규정된다. 이처럼 유용성이 그 생산물의 사용가치로 표현되는 노동[즉 그 생산물이 사용가치로 표현되는 노동]을 우리는 간단히 유용노동(有用勞動, nützliche Arbeit)이라고 한다. [3.1] 이런 관점에서 노동은 항상 그 유용성과 관련되어 고찰된다.

3.1
(SS) The labour, whose utility is thus represented by the value in use of its product, or which manifests itself by making its product a use value, we call useful labour.
(BF) We use the abbreviated expression 'useful labour' for labour whose utility is represented by the use-value of its product, or by the fact that its product is a use-value.
(DK) Die Arbeit, deren Nützlichkeit sich so im Gebrauchswert ihres Produkts oder darin darstellt, daß ihr Produkt ein Gebrauchswert ist, nennen wir kurzweg nützliche Arbeit.
강 교수 번역에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될 수 있으면 독일어 원전에 맞게 번역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예를 들면, 강 교수는 "deren Nützlichkeit sich so im Gebrauchswert ihres Produkts"를 "유용성이 그 생산물의 사용가치로 표현되는"으로 번역했는데, 여기에는 '표현되는'으로 해석할 수 있는 독일어가 없다. 아마도 편의상 의역을 한 것 같다. 하지만 '표현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의미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 교수는 "darin darstellt, daß ihr Produkt ein Gebrauchswert ist"를 하나로 합쳐도 될 것을 굳이 괄호([]) 안에 따로 적고 있는데, 이는 마르크스가 부연 설명을 한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또한, 강 교수는 "nennen wir kurzweg nützliche Arbeit"를 "우리는 간단히 유용노동이라고 한다"라고 번역했는데, 독일어 'nennen'에 해당하는 부분을 완전히 번역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해도 해석에 큰 문제는 없다.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유용성이 생산물의 사용가치에 있고 또는 그 생산물이 그 안에서 사용가치임을 나타내는 노동을 우리는 간단히 유용노동이라고 부른다."

웃옷과 아마포가 질적으로 다른 사용가치이듯이, 그것들의 현존재(現存在, Dasein)를 매개하는 노동 또한 질적으로 서로 다른 재단노동과 방직노동이다. [4.1] 만약 이들 물품이 질적으로 서로 다른 사용가치가 아니고 따라서 질적으로 서로 다른 유용노동의 생산물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아예 상품으로 서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웃옷과 웃옷이 서로 교환되지 않듯이, 사용가치도 동일한 가치가 서로 교환되지는 않는다.

4.1
(SS) As the coat and the linen are two qualitatively different use values, so also are the two forms of labour that produce them, tailoring and weaving.
(BF) As the coat and the linen are qualitatively different use-values, so also are the forms of labour through which their existence is mediated — tailoring and weaving.
(DK) Wie Rock und Leinwand qualitativ verschiedne Gebrauchswerte, so sind die ihr Dasein vermittelnden Arbeiten qualitativ verschieden — Schneiderei und Weberei.
'verschiedne'는 'verschieden(=different)'와 같다.

온갖 다양한 사용가치 또는 상품체들에는 똑같이 온갖 다양한 유용노동이 나타나 있는데 이들은 사회적 분업을 통해서 속(屬)·종(種)·과(科)·아종(亞種)·변종(變種)들로 분류된다. [5.1] 이러한 사회적 분업은 상품생산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거꾸로 상품생산이 사회적 분업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5.2] 고대 인도의 공동체에서는 사회적 분업이 존재했지만, 생산물이 상품으로 되지 않았다. 또는 좀 더 최근의 예를 든다면, 모든 공장에서 노동은 체계적으로 분할되어 있지만, 이 분할이 각 노동자의 개별 생산물 사이의 교환으로 이어져 있지는 않다. [5.3] 자립적이고 서로 독립해 있는 사회적 노동의 생산물만이 서로 상품으로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5.1
(SS) To all the different varieties of values in use there correspond as many different kinds of useful labour, classified according to the order, genus, species, and variety to which they belong in the social division of labour.
(BF) The totality of heterogeneous use-values or physical commodities reflects a totality of similarly heterogeneous forms of useful labour, which differ in order, genus, species and variety: in short, a social division of labour.
(DK) In der Gesamtheit der verschiedenartigen Gebrauchswerte oder Warenkörper erscheint eine Gesamtheit ebenso mannigfaltiger, nach Gattung, Art, Familie, Unterart, Varietät verschiedner nützlicher Arbeiten - eine gesellschaftliche Teilung der Arbeit.
'사회적 분업'을 강조하고자 한 마르크스의 의도를 따른다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온갖 다양한 사용가치 또는 상품체에는 마찬가지로 온갖 다양한 유용노동이 속(屬)·종(種)·과(科)·아종(亞種)·변종(變種)으로 따라 나타나는데, 즉 사회적 분업이다."
5.2
(SS) This division of labour is a necessary condition for the production of commodities, but it does not follow, conversely, that the production of commodities is a necessary condition for the division of labour.
(BF) This division of labour is a necessary condition for commodity production, although the converse does not hold; commodity production is not a necessary condition for the social division of labour.
(DK) Sie ist Existenzbedingung der Warenproduktion, obgleich Warenproduktion nicht umgekehrt die Existenzbedingung gesellschaftlicher Arbeitsteilung.
DK의 한 문장을 강 교수는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업은 상품생산의 필요조건이지만, 거꾸로 상품생산이 사회적 분업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5.3
(SS) Or, to take an example nearer home, in every factory the labour is divided according to a system, but this division is not brought about by the operatives mutually exchanging their individual products.
(BF) Or, to take an example nearer home, labour is systematically divided in every factory, but the workers do not bring about this division by exchanging their individual products.
(DK) Oder, ein näher liegendes Beispiel, in jeder Fabrik ist die Arbeit systematisch geteilt, aber diese Teilung nicht dadurch vermittelt, daß die Arbeiter ihre individuellen Produkte austauschen.
강 교수는 "dardurch vermittelt"를 '이어져'라고 번역했는데, '일어나지(는)'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또는 좀 더 최근의 예를 든다면, 모든 공장에서 노동은 체계적으로 분할되어 있지만, 이 분할이 각 노동자의 개별 생산물 사이의 교환으로 일어나지는 않다."

이리하여 우리는 모든 상품의 사용가치에 일정한 합목적적(合目的的)인 생산활동 또는 유용노동이 들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6.1] 각각의 사용가치는 그 속에 질적으로 서로 다른 유용노동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상품으로서 만날 수 없다. [6.2] 생산물이 일반적으로 상품의 형태를 띠는 사회[즉 상품생산자의 사회]에서는 이들 유용노동의 질적인 차이가 자립적인 생산자의 개인사업으로 각기 독립적으로 운영되다가 하나의 복합적인 체계로 [즉 사회적 분업으로] 발전한다. [6.3]

6.1
(SS) To resume, then: In the use value of each commodity there is contained useful labour, i.e., productive activity of a definite kind and exercised with a definite aim.
(BF) To sum up, then: the use-value of every commodity contains useful labour, i.e. productive activity of a definite kind, carried on with a definite aim.
(DK) Man hat also gesehn: in dem Gebrauchswert jeder Ware steckt eine bestimmte zweckmäßig produktive Tätigkeit oder nützliche Arbeit.
강 교수는 'zweckmäßig'를 거의 예외 없이 '합목적적'으로 번역했으며, 영어 번역본에서도 (적어도 내가 확인한 부분에서는) "exercised with a definite aim"으로 번역했다. "이리하여 우리는 모든 상품의 사용가치에 일정한 합목적적 생산활동 또는 유용노동이 들어 있는 것을 봤다."
6.2
(SS) Use values cannot confront each other as commodities, unless the useful labour embodied in them is qualitatively different in each of them.
(BF) Use-values cannot confront each other as commodities unless the useful labour contained in them is qualitatively different in each case.
(DK) Gebrauchswerte können sich nicht als Waren gegenübertreten, wenn nicht qualitativ verschiedne nützliche Arbeiten in ihnen stecken.
6.3
(SS) In a community, the produce of which in general takes the form of commodities, i.e., in a community of commodity producers, this qualitative difference between the useful forms of labour that are carried on independently of individual producers, each on their own account, develops into a complex system, a social division of labour.
(BF) In a society whose products generally assume the form of commodities, i.e. in a society of commodity producers, this qualitative difference between the useful forms of labour which are carried on independently and privately by individual producers develops into a complex system, a social division of labor.
(DK) In einer Gesellschaft, deren Produkte allgemein die Form der Ware annehmen, d.h. in einer Gesellschaft von Warenproduzenten, entwickelt sich dieser qualitative Unterschied der nützlichen Arbeiten, welche unabhängig voneinander als Privatgeschäfte selbständiger Produzenten betrieben werden, zu einem vielgliedrigen System, zu einer gesellschaftlichen Teilung der Arbeit.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한 문장으로 표현해도 될 것을 굳이 괄호([]) 안에 따로 표기하는 것은 좋지 않다.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생산물이 일반적으로 상품 형태를 띠는 사회, 즉 상품생산자 사회에서는 자립적 생산자의 개인사업으로서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이들 유용노동의 질적 차이가 복합적인 체계, 즉 사회적 분업으로 발전한다."

웃옷을 입는 사람이 재단사 자신이건 그의 고객이건 상관없이 언제나 웃옷은 사용가치로 작용한다. [7.1] 마찬가지로 재단노동이 특수한 직업이 되어 사회적 분업의 자립적인 한 부분을 이룬다 해도 웃옷과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의 관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7.2] 웃옷을 입지 않을 수 없는 곳에서는 인간은 누군가가 재단사로 되기 수천 년 전부터 벌써 웃옷을 만들어왔다. [7.3] 그러나 웃옷이나 아마포 등 천연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은 모든 소재적 부의 요소의 현존재(現存在)는 늘 특수한 자연소재를 특수한 인간 욕망에 맞추려는 특수한 합목적적 생산활동을 통해 매개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7.4] 그런 까닭에 사용가치를 낳는 어머니로서 [즉 유용노동으로서] 노동은 그 사회형태가 무엇이든 그것과는 무관하게 인간의 존재조건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그리하여 인간의 생활을 매개하기 위한 영원한 자연필연성(自然必然性, Naturnotwendigkeit)이다. [7.5]

7.1
(SS) Anyhow, whether the coat be worn by the tailor or by his customer, in either case it operates as a use value.
(BF) It is moreover a matter of indifference whether the coat is worn by the tailor or by his customer. In both cases it acts as a use-value.
(DK) Dem Rock ist es übrigens gleichgültig, ob er vom Schneider oder vom Kunden des Schneiders getragen wird. In beiden Fällen wirkt er als Gebrauchswert.
DK의 두 문장을 강 교수와 SS는 한 문장으로 번역했다. 좀 밋밋하기는 하지만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웃옷을 재단사가 입든 혹은 손님이 입든 상관없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웃옷은 사용가치로 작용한다."
7.2
(SS) Nor is the relation between the coat and the labour that produced it altered by the circumstance that tailoring may have become a special trade, an independent branch of the social division of labour.
(BF) So, too, the relation between the coat and the labour that produced it is not in itself altered when tailoring becomes a special trade, an independent branche of the social division of labour.
(DK) Ebensowenig ist das Verhältnis zwischen dem Rock und der ihn produzierenden Arbeit an und für sich dadurch verändert, daß die Schneiderei besondre Profession wird, selbständiges Glied der gesellschaftlichen Teilung der Arbeit.
어떤 것이 더 좋은 번역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번역한 것이 독일어/영어 어순에 더 잘 맞는다고 믿고 싶다. "웃옷과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의 관계는 재단노동이 사회적 분업의 자립적 한 부분인 특수한 직업이 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7.3
(SS) Wherever the want of clothing forced them to it, the human race made clothes for thousands of years, without a single man becoming a tailor.
(BF) Men made clothes for thousands of years, under the compulsion of the need for chlothing, without a single man ever becoming a tailor.
(DK) Wo ihn das Kleidungsbedürfnis zwang, hat der Mensch jahrtausendelang geschneidert, bevor aus einem Menschen ein Schneider ward.
"옷옷을 입지 않을 수 없는 곳"에 해당하는 DK 문장 "Wo ihn das Kleidungsbedürfnis zwang"에는 반어적 표현법이 없다. 그리고 강 교수는 'Mensch'를 '사람'으로 번역했는데, '인류'가 적당하다고 보지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웃옷을 입어야만 하는 곳에서 인류는 누군가 재단사가 되기 수천 년 전에 웃옷을 만들었다."
7.4
(SS) But coats and linen, like every other element of material wealth that is not the spontaneous produce of Nature, must invariably owe their existence to a special productive activity, exercised with a definite aim, an activity that appropriates particular nature-given materials to particular human wants.
(BF) But the existence of coats, of linen, of every element of material wealth not provided in advance by nature, had always to be mediated through a specific productive activity appropriate to its purpose, a productive activity that assimilated particular natural materials to particular human requirements.
(DK) Aber das Dasein von Rock, Leinwand, jedem nicht von Natur vorhandnen Element des stofflichen Reichtums, mußte immer vermittelt sein durch eine spezielle, zweckmäßig produktive Tätigkeit, die besondere Naturstoffe besondren menschlichen Bedürfnissen assimiliert.
"... mußte immer vermittelt ...."를 "... 않으면 안 되었다"고 표현할 이유가 없는데도, 강 교수는 그렇게 번역했다.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웃옷, 아마포 등 자연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모든 소재적 부의 요소의 존재는 늘 특수한 자연소재를 특수한 인간 욕망에 맞추려는 특수한 합목적적 생산활동을 통해 매개 되어야만 한다."
7.5
(SS) So far therefore as labour is a creator of use value, is useful labour, it is a necessary condition, independent of all forms of society, for the existence of the human race; it is an eternal nature-imposed necessity, without which there can be no material exchanges between man and Nature, and therefore no life.
(BF) Labour, then, as the creator of use-values, as useful labour, is a condition of human existence which is independent of all forms of society; it is an eternal natural necessity which mediates the metabolism between man and nature, and therefore human life itself.
(DK) Als Bildnerin von Gebrauchswerten, als nützliche Arbeit, ist die Arbeit daher eine von allen Gesellschaftsformen unabhängige Existenzbedingung des Menschen, ewige Naturnotwendigkeit, um den Stoffwechsel zwischen Mensch und Natur, also das menschliche Leben zu vermitteln.
강 교수는 'Bildnerin'을 (대자연 어머니 즉, 가이아를 가리키는) '어머니'로 번역했으며, SS와 DK는 'creator', 즉 '창조자'로 번역했다. 그리고 "von allen Gesellschaftsformen unabhängige"을 "그 사회형태가 무엇이든 그것과는 무관하게"라고 아주 길게 번역했다. 이것 말고도 짚을 게 더 있지만, 그냥 재번역하자. "그러므로 사용가치의 창조자로서, 즉 유용노동으로서 노동은 모든 사회형태와 무관한 인간의 존재조건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즉 인간생활을 매개하는 영원한 자연필연성이다."

사용가치인 웃옷이나 아마포 등의 상품체들은 자연소재와 노동이라는 두 요소의 결합물이다. 웃옷이나 아마포 등에서 그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유용노동을 모조리 제거해버리면 거기에는 언제나 인간의 도움 없이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물적 기초만이 남는다. [8.1] 생산과정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연 그 자체의 방식에 따르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단지 소재의 형태를 바꿀 수 있을 뿐이다. 13) [8.2] 뿐만 아니라 이 형태를 변경하는 노동 그 자체에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력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따라서 노동이 그것을 통해 생산되는 사용가치나 소재적 부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가 말했듯이, 노동은 소재적 부의 아버지이고 땅은 그 어머니이다. [8.3]

8.1
(SS) If we take away the useful labour expended upon them, a material substratum is always left, which is furnished by Nature without the help of man.
(BF) If we subtract the total amount of useful labour of different kinds which is contained in the coat, the linen, etc., a material substratum is always left.
(DK) Zieht man die Gesamtsumme aller verschiednen nützlichen Arbeiten ab, die in Rock, Leinwand usw. stecken, so bleibt stets ein materielles Substrat zurück, das ohne Zutun des Menschen von Natur vorhanden ist.
간결하게 번역하자. "웃옷, 아마포 등에 들어 있는 모든 유용노동을 모조리 제거하면, 그 뒤에는 언제나 인간의 도움 없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물적 기초만이 남는다."
8.2
(SS) The latter can work only as Nature does, that is by changing the form of matter.
(BF) When man engages in production, he can only proceed as nature does herself, i.e. he can only change the form of the materials.
(DK) Der Mensch kann in seiner Produktion nur verfahren, wie die Natur selbst, d.h. nur die Formen der Stoffe ändern.
강 교수는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단지 생산과정에서 자연 그 자체를 따라서 할 수밖에 없는데 즉, 소재 형태를 바꾸는 것뿐이다."
8.3
윌리엄 페티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Labour is the father of material wealth, the earth is its mother." 『A treatise of Taxes and Contributions』, published anonymously by William Petty, London, 1667, p. 47.

여기서 이제 사용대상으로서의 상품에서 가치로서의 상품으로 넘어가 보자.

우리의 가정에 따르면 웃옷은 아마포에 견주어 2배의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양적인 차이일 뿐이며, 그 차이는 아직 우리의 당면한 관심사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일 1벌의 웃옷이 지니는 가치가 10엘레의 아마포가 지니는 가치의 2배라면 20엘레의 아마포가 1벌의 웃옷과 같은 가치크기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가치로서의 웃옷과 아마포는 모두 동일한 실체를 지닌 물품이고, 동일한 노동의 객관적 표현이다. 그러나 재단노동(裁斷勞動)과 방직노동(紡織勞動)은 질적으로 다른 노동이다. 물론 동일한 사람이 번갈아가며 재단도 하고 아마포도 짜는 사회상태도 있다. 이러한 사회상태에서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노동방식은 다만 한 개인의 노동의 변형일 뿐이며 아직 서로 다른 두 개인의 특수하고 고정된 기능이 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마치 한 재단공이 오늘 만드는 웃옷과 내일 만드는 바지를 동일한 개인노동의 변형으로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9.1] 또 우리가 금방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 수요의 방향이 바뀌는 데 따라서 인간노동의 일정 부분이 어떤 때는 재단노동이라는 형태로, 어떤 때는 방직노동이라는 형태로 번갈아가며 공급된다. [9.2] 물론 이와 같은 노동의 형태 변화가 아무런 마찰 없이 진행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어쨌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9.3] 이 생산활동의 규정성(Bestimmtheit), 즉 노동의 유용한 성격을 무시한다면, 생산활동에서 남는 것은 그것이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라는 점뿐이다. [9.4] 재단노동과 방직노동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생산활동이긴 하지만 모두 인간의 두뇌·근육·신경·손 등의 생산적 지출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양자는 모두 인간노동이다. 이것들은 다만 인간노동력을 지출하는 2개의 서로 다른 형태일 뿐이다. 물론 여러 가지 형태로 노동력이 지출되려면 인간노동력 그 자체가 어느 정도 발달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는 단지 인간노동을, 즉 인간노동 일반의 지출만을 나타낸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장군이나 은행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 반해 그냥 인간은 매우 평범한 역할만을 하는데 (장군이나 은행가 같은 직위를 얻으면 인간은 중요해지지만, 직위에서 떠난 그냥의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로, 여기에서 지위는 특수한 유용적 노동의 성격을, 직위가 없는 단순한 인간은 인간노동 일반을 뜻하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다. 직위는 아무나 가질 수 없지만[특수], 인간은 누구나가 똑같이 인간이다[일반]. —옮긴이) 14) 인간노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9.5] 인간노동 일반이란 특별하게 발달하지 않은 보통사람이 누구나 평균적으로 자신의 육체 속에 갖고 있는 단순한 노동력의 지출이다. [9.6] 물론 단순한 평균노동(平均勞動, einfache Durchschnittsarbeit)도 나라가 다르고 문화수준이 다르면 그 성격이 달라진다. 그러나 현존하는 어떤 사회에서 그것은 일정한 것이다. [9.7] 복잡노동(複雜勞動, kompliziertere Arbeit)은 그저 단순노동(單純勞動, einfache Arbeit)이 제곱된 것 또는 배가된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따라서 적은 양의 복잡노동은 더 많은 양의 단순노동과 같다. [9.8] 실제로 이런 환산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보고 있다. [9.9] 어떤 상품이 아무리 복잡한 노동의 생산물이라 해도 그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단순노동의 생산물과 동일하게 등치시키고, 따라서 그 가치 자체는 단순노동의 일정한 양을 나타낼 뿐이다. 15) 갖가지 노동을 그 도량단위인 단순노동으로 환산해내는 여러 비율은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생산자들의 배후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생산자들에게는 그것이 관습에 의해 주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9.10] 지금부터는 모든 종류의 노동력을 곧바로 단순노동력으로 간주하겠는데, 이것은 환산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일 뿐이다. [9.11]

9.1
(SS) There are, however, states of society in which one and the same man does tailoring and weaving alternately, in which case these two forms of labour are mere modifications of the labour of the same individual, and not special and fixed functions of different persons, just as the coat which our tailor makes one day, and the trousers which he makes another day, imply only a variation in the labour of one and the same individual.
(BF) There are, however, states of society in which the same man alternately makes clothes and weaves. In this case, these two different modes of labour are only modifications of the labour of the same individual and not yet fixed functions peculiar to different individuals, just as the coat our tailor makes today, and the pair of trousers he makes tomorrow, require him only to vary his own individual labour.
(DK) Es gibt jedoch Gesellschaftszustände, worin derselbe Mensch abwechselnd schneidert und webt, diese beiden verschiednen Arbeitsweisen daher nur Modifikationen der Arbeit desselben Individuums und noch nicht besondre feste Funktionen verschiedner Individuen sind, ganz wie der Rock, den unser Schneider heute, und die Hosen, die er morgen macht, nur Variationen derselben individuellen Arbeit voraussetzen.
DK의 한 문장을 강 교수는 세 문장으로, BF는 두 문장으로 나눴다. 강 교수는 영어로 'however'을 뜻하는 독일어 'jedoch'를 '물론'이라고 번역했으며 영어로 'therefore' 혹은 'thus'에 해당하는 'daher'는 번역하지 않았다. "diese beiden verschiednen Arbeitsweisen"은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노동방식"으로 번역했는데, 직역하면 "이런 다양한 노동방식"이지만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인다. 마찬가지로 "verschiedner Individuen"을 "서로 다른 두 개인"이라 번역한 것도 문제는 없어 보인다. 강 교수는 영어로 'require'을 뜻하는 'voraussetzen'을 '간주하는'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오역이다. "필요로 하는"으로 번역해야 한다.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번갈아가며 재단도 하고 아마포도 짜는 사회상태가 있고, 따라서 이런 다양한 노동방식은 다만 한 개인의 노동이 변하는 것일 뿐이며 아직은 서로 다른 개인에게 특수하고 고정된 기능은 아닌데, 마치 우리의 재단공이 오늘 만드는 웃옷과 내일 만드는 바지가 단지 개인노동의 변형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9.2
(SS) Moreover, we see at a glance that, in our capitalist society, a given portion of human labour is, in accordance with the varying demand, at one time supplied in the form of tailoring, at another in the form of weaving.
(BF) Moreover, we can see at a glance that in our capitalist society a given portion of labour is supplied alternatively in the form of tailoring and in the form of weaving, in accordance with changes in the direction of the demand for labour.
(DK) Der Augenschein lehrt ferner, daß in unsrer kapitalistischen Gesellschaft, je nach der wechselnden Richtung der Arbeitsnachfrage, eine gegebene Portion menschlicher Arbeit abwechselnd in der Form von Schneiderei oder in der Form von Weberei zugeführt wird.
DK의 "Der Augenschein lehrt ferner, ..."을 영어 번역본은 "Moreover, we (can) see at a glance that ..."으로 표현했고, 강 교수는 "또 우리가 금방 눈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로 나타냈다. 이것을 구글 번역기로 분석하면 "The inspection further teaches that ..."인데, 독일어로 직역하면 "또한 면밀한 조사를 통해 ... 알 수 있다 / 또한 면밀한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 정도로 표현할 수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판단이 잘 안 선다.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것도 맞는 것 같다. 어쨌든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또한, 면밀한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 수요의 방향이 바뀌는 데 따라서 인간노동의 일정 부분이 재단노동의 형태 또는 방직노동의 형태로 번갈아가며 공급된다는 사실이다."
9.3
(SS) This change may possibly not take place without friction, but take place it must. // Productive activity, if we leave out of sight its special form, …
(BF) This change in the form of labour may well not take place without friction, but it must take place. // If we leave aside the determinate quality of productive activity, …
(DK) Dieser Formwechsel der Arbeit mag nicht ohne Friktion abgehn, aber er muß gehn. Sieht man ab von der Bestimmtheit der produktiven Tätigkeit und daher vom nützlichen Charakter der Arbeit, ...
SS와 BF는 이 부분에서 단락을 나눴지만, DK와 강 교수 번역은 단락을 나누지 않았다. '//'이 SS와 BF에서 임의로 단락을 나눈 부분이다.
9.4
(SS) Productive activity, if we leave out of sight its special form, viz., the useful character of the labour, is nothing but the expenditure of human labour power.
(BF) If we leave aside the determinate quality of productive activity, and therefore the useful character of the labour, what remain is its quality of being an expenditure of human labour-power.
(DK) Sieht man ab von der Bestimmtheit der produktiven Tätigkeit und daher vom nützlichen Charakter der Arbeit, so bleibt das an ihr, daß sie eine Verausgabung menschlicher Arbeitskraft ist.
"... 점뿐이다"라고 번역해도 상관없지만, 굳이 이렇게 번역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9.5
(SS) And just as in society, a general or a banker plays a great part, but mere man, on the other hand, a very shabby part, so here with mere human labour.
(BF) And just as, in civil society, a general or a banker plays a great part but man as such plays a very mean part, so, here too, the same is true of human labour.
(DK) Wie nun in der bürgerlichen Gesellschaft ein General oder Bankier eine große, der Mensch schlechthin dagegen eine sehr schäbige Rolle spielt, so steht es auch hier mit der menschlichen Arbeit.
강 교수의 <역자 주>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해당 구절을 Sonnenschein 판에서 먼저 확인했으나, MIA는 엉뚱한 부분을 링크로 걸어놓았다(MIA가 링크로 연결해 놓은 헤겔 『법철학』 구절은 제244절에 해당한다) [링크]. 마르크스가 참조한 구절을 가리키는 제대로 된 링크는 다음과 같다 [링크]. 더불어, 헤겔 『법철학』 원본의 250쪽에 있는 제190절을 번역했다.

a. Die Art des Bedürfnisses und der Befriedigung

Das Tier hat einen beschränkten Kreis von Mitteln und Weisen der Befriedigung seiner gleichfalls beschränkten Bedürfnisse. Der Mensch beweist auch in dieser Abhängigkeit zugleich sein Hinausgehen über dieselbe und seine Allgemeinheit, zunächst durch die Vervielfältigung der Bedürfnisse und Mittel und dann durch Zerlegung und Unterscheidung des konkreten Bedürfnisses in einzelne Teile und Seiten, welche verschiedene partikularisierte, damit abstraktere Bedürfnisse werden.

Im Rechte ist der Gegenstand die Person, im moralischen Standpunkt das Subjekt, in der Familie das Familienglied, in der bürgerlichen Gesellschaft überhaupt der Bürger (als bourgeois) – hier auf dem Standpunkte der Bedürfnisse (vgl. § 123 Anm.) ist es das Konkretum der Vorstellung, das man Mensch nennt; es ist also erst hier und auch eigentlich nur hier vom Menschen in diesem Sinne die Rede.

a. 욕구와 충족의 양식

동물은 제한된 욕구(Bedürfnisse)를 충족(Befriedigung)하기 위한 동일하게 제한된 방법(Weise)과 수단(Mittel)을 가지고 있다. 인간 역시 이러한 의존성(Abhängigkeit)에 놓여 있음에도 이것에 대한 초탈(Hinausgehen über dieselbe)과 그것[초탈]의 보편성(Allgemeinheit)을 동시에 나타내는데, 첫째, 욕구와 수단의 배가(Vervielfältigung)를 통해서, 그다음에는 구체적 욕구를 다양하게 특화해 추상화한 개개의 부분과 측면으로 세분화(Zerlegung und Unterscheidung)해서 나타낸다.

[추상]법에서 대상(Gegenstand)은 인격(Person)이고, 도덕적 입장에서는 주체(Subjekt)이며 가족에서는 가족 구성원(Familienglied)이며 부르주아 사회(bürgerlichen Gesellschaft) 일반에서는 시민(Bürger)(또는 부르주아)이다—여기서 욕구의 관점으로 바라봤을 때(§123 주해 참조) 그것[대상]은 인간이라 불리는 표상(Vorstellung)의 구체화(Konkretum)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인간을 언급하는 것은 처음이며 또한 실제로 여기에서는 적절하게 유일한 때이다.

참고로 BF에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이 있다.

Hegel says here: 'In civil society as a whole, at the standpoint of needs, what we have before us is the composite idea which we call man. Thus this is the first time, and indeed the only time, to speak of man in this sense' (Hegel's Philosophy of Rght, tr. T. M. Knox, Oxford, 1952, p. 127).
9.6
(SS) It is the expenditure of simple labour power, i.e., of the labour power which, on an average, apart from any special development, exists in the organism of every ordinary individual.
(BF) It is the expenditure of simple labour-power, i.e. of the labour-power possessed in his bodily organism by every ordinary man, on the average, without being developed in any special way.
(DK) Sie ist Verausgabung einfacher Arbeitskraft, die im Durchschnitt jeder gewöhnliche Mensch, ohne besondere Entwicklung, in seinem leiblichen Organismus besitzt.
DK에서는 "단순 노동력 지출"을 강조하고 있다. "특별히 발달하지 않은 보통사람이 자기 육체 안에 평균적으로 가진 것이 바로 단순 노동력 지출이다."
9.7
(SS) Simple average labour, it is true, varies in character in different countries and at different times, but in a particular society it is given.
(BF) Simple average labour, it is true, varies in character in different countries and at different cultural epoches, but in a particular society it is given.
(DK) Die einfache Durchschnittsarbeit selbst wechselt zwar in verschiednen Ländern und Kulturepochen ihren Charakter, ist aber in einer vorhandnen Gesellschaft gegeben.
강 교수는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강 교수는 'Kulturepoche'를 '문화수준'으로 번역했지만, 문맥상 마르크스는 "어떤 사회에서 시대[혹은 시간]에 따른 문화의 발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ist ... in einer vorhandnen Gesellschaft gegeben"에 대해서도 SS와 BF는 "in particular society it is given"이라 번역했는데, 강 교수는 "그러나 현존하는 어떤 사회에서 그것은 일정한 것이다"라고 번역했다. "... 알려졌다/주어졌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하나 헷갈리는 것은 자본론 전체에서 'vorhandnen'이 계속 나오는데, 독일어 사전에서 이와 유사한 단어는 오직 'vorhanden'으로 영어로는 'existing'을 뜻한다. 그런데 독일어 유의어 사전을 찾아보면 'vorhandnen'과 유사한 뜻으로 'von allem', 영어로는 'particularly‘라는 단어를 찾아준다 [링크]. 어떤 해석이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영어 번역[SS와 BF 모두 'particular'로 번역했다]을 따르기로 한다.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단순 평균노동 그 자체도 나라가 다르고 [같은 나라에서도] 문화수준[혹은 문화의 시대]이 다르면 그 성격은 변하지만, 특정 사회에서는 알려졌다."
9.8
(SS) Skilled labour counts only as simple labour intensified, or rather, as multiplied simple labour, a given quantity of skilled being considered equal to a greater quantity of simple labour.
(BF) More complex labour counts only as intensified, or rather multiplied simple labour, so that a smaller quantity of complex labour s considered equal to a larger quantity of simple labour.
(DK) Kompliziertere Arbeit gilt nur als potenzierte oder vielmehr multiplizierte einfache Arbeit, so daß ein kleineres Quantum komplizierter Arbeit gleich einem größeren Quantum einfacher Arbeit.
DK의 한 문장을 강 교수는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강 교수는 'als'와 'vielmehr'의 뜻이 같다고 보고 하나로 합쳐서 번역했지만, 따로 번역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복잡노동은 단지 제곱 되거나 혹은 그저 배가된 단순노동으로 간주될 뿐이므로, 적은 양의 복잡노동은 더 많은 양의 단순노동과 같다."
9.9
(SS) Experience shows that this reduction is constantly being made.
(BF) Experience shows that this reduction is constantly being made.
(DK) Daß diese Reduktion beständig vorgeht, zeigt die Erfahrung.
강 교수의 한국어 번역은 이상하다. "경험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아는 것"이 올바른 어법이다. 그리고 '실제로'란 표현도 독일어 문장 안에는 없다.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환산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9.10
(SS) The different proportions in which different sorts of labour are reduced to unskilled labour as their standard, are established by a social process that goes on behind the backs of the producers, and, consequently, appear to be fixed by custom.
(BF) The various proportions in which different kinds of labour are reduced to simple labour as their unit of measurement are established by a social process that goes on behind the backs of the producers; these proportions therefore appear to the producers to have been handed down by tradition.
(DK) Die verschiednen Proportionen, worin verschiedne Arbeitsarten auf einfache Arbeit als ihre Maßeinheit reduziert sind, werden durch einen gesellschaftlichen Prozeß hinter dem Rücken der Produzenten festgesetzt und scheinen ihnen daher durch das Herkommen gegeben.
DK의 한 문장을 강 교수는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그리고 "scheinen ... gegeben"은 영어로 "seem to be given"와 비슷한 뜻이다.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갖가지 노동을 그 도량단위인 단순노동으로 환산하는 다른[여러 가지] 비율은 생산자의 배후에서 사회적 과정으로 결정되므로, 이것은 생산자에게 관습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9.11
(SS) For simplicity’s sake we shall henceforth account every kind of labour to be unskilled, simple labour; by this we do no more than save ourselves the trouble of making the reduction.
(BF) In the interests of simplification, we shall henceforce view every form of labour-power, directly as simple labour-power; by this we shall simply be saving ourselves the trouble making the reduction.
(DK) Der Vereinfachung halber gilt uns im Folgenden jede Art Arbeitskraft unmittelbar für einfache Arbeitskraft, wodurch nur die Mühe der Reduktion erspart wird.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강 교수는 이 부분을 너무 성의 없이 번역한 것 같다. "명료함을 위해 앞으로는 갖가지 노동력을 곧바로 단순노동력으로 간주할 텐데, 이는 단순히 환산의 수고를 덜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리하여 가치로서의 웃옷과 아마포에서는 그 사용가치의 차이가 배제되듯이 이러한 가치로 표현되는 노동에서도 그 유용형태의 차이, 즉 재단노동과 방직노동의 차이는 배제된다. [10.1] 사용가치로서의 웃옷과 아마포는 목적이 정해진 생산활동과 직물 및 실 사이의 결합물이다. 반면 가치로서의 웃옷과 아마포는 단지 동질의 노동이 응결된 것일 뿐이며, 또한 그것들의 가치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도 마찬가지로 직물이나 실에 대한 생산적 행동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노동력의 지출로서만 간주된다. [10.2] 재단노동과 방직노동이 사용가치로서의 웃옷이나 아마포의 형성요소(形成要素, Bilsungselemente)가 되는 것은 재단노동과 방직노동의 질(質)이 서로 다른 데 근거한 것이다. 반면 재단노동과 방직노동이 웃옷과 아마포 가치의 실체가 되는 것은 오로지 재단노동과 방직노동의 특수한 질이 배제되어 양자가 동일한 질, 곧 인간노동이라는 질을 지니고 있다는 데 근거한 것이다. [10.3]

10.1
(SS) Just as, therefore, in viewing the coat and linen as values, we abstract from their different use values, so it is with the labour represented by those values: we disregard the difference between its useful forms, weaving and tailoring.
(BF) Just as, in viewing the coat and the linen as values, we abstract from their different use-values, so, in the case of the labour represented by those values, do we disregard the difference between its useful values, tailoring and weaving.
(DK) Wie also in den Werten Rock und Leinwand von dem Unterschied ihrer Gebrauchswerte abstrahiert ist, so in den Arbeiten, die sich in diesen Werten darstellen, von dem Unterschied ihrer nützlichen Formen, der Schneiderei und Weberei.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가치로서 웃옷과 아마포에서 그 사용가치의 차이가 배제되듯이, 이러한 가치로 대변되는 노동에서도 그 유용형태의 차이, 즉 재단노동과 방직노동의 차이는 배제된다."
10.2
(SS) As the use values, coat and linen, are combinations of special productive activities with cloth and yarn, while the values, coat and linen, are, on the other hand, mere homogeneous congelations of undifferentiated labour, so the labour embodied in these latter values does not count by virtue of its productive relation to cloth and yarn, but only as being expenditure of human labour power.
(BF) The use-values coat and linen are combinations of, and, on the other, productive activity with a definite purpose, and, on the other, cloth and yarn; the values coat and linen, however, are merely congealed quantities of homogenous labour. In the same way, the labour contained in these values does not count by virtue of its productive relation to cloth and yarn, but only as being expenditure of human labor-power.
(DK) Wie die Gebrauchswerte Rock und Leinwand Verbindungen zweckbestimmter, produktiver Tätigkeiten mit Tuch und Garn sind, die Werte Rock und Leinwand dagegen bloße gleichartige Arbeitsgallerten, so gelten auch die in diesen Werten enthaltenen Arbeiten nicht durch ihr produktives Verhalten zu Tuch und Garn, sondern nur als Verausgabungen menschlicher Arbeitskraft.
DK의 한 문장을 BF와 강 교수는 다른 방식으로 두 문장으로 나눴다. 예를 들면 BF는 "... merely congealed quantities of homogenous labour. In the same way, …"로 문장을 나눠 번역했으며, 강 교수는 "… 직물 및 실 사이의 결합물이다. 반면 가치로서의 웃옷과 아마포는 …"으로 문장을 나눠 번역했다.
10.3
(SS) Tailoring and weaving are necessary factors in the creation of the use values, coat and linen, precisely because these two kinds of labour are of different qualities; but only in so far as abstraction is made from their special qualities, only in so far as both possess the same quality of being human labour, do tailoring and weaving form the substance of the values of the same articles.
(BF) Tailoring and weaving are the formative elements in the use-values coat and linen, precisely because these two kinds of labour are of different qualities; but only in so far as abstraction is made from their particular qualities, only in so far as both possess the same quantity of being human labour, do tailoring and weaving form the substance of the values of the two articles mentioned.
(DK) Bildungselemente der Gebrauchswerte Rock und Leinwand sind Schneiderei und Weberei eben durch ihre verschiednen Qualitäten; Substanz des Rockwerts und Leinwandwerts sind sie nur, soweit von ihrer besondren Qualität abstrahiert und beide gleiche Qualität besitzen, die Qualität menschlicher Arbeit.
강 교수는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그러나 웃옷과 아마포는 가치 일반이기도 하지만 일정한 크기를 갖는 가치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의 가정에 따르면 웃옷 1벌은 10엘레의 아마포에 비해 2배의 가치가 있다. [11.1] 이들의 이러한 가치크기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아마포는 웃옷에 비하여 절반의 노동밖에 들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웃옷의 생산에는 아마포의 생산에 비하여 2배의 시간 동안 노동력이 지출되어야 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11.1
(SS) Coats and linen, however, are not merely values, but values of definite magnitude, and according to our assumption, the coat is worth twice as much as the ten yards of linen.
(BF) Coat and linen, however, are not merely values in general, but values of definite magnitude, and, following our assumption, the coat is worth twice as much as the 10 yards of linen.
(DK) Rock und Leinwand sind aber nicht nur Werte überhaupt, sondern Werte von bestimmter Größe, und nach unsrer Unterstellung ist der Rock doppelt soviel wert als 10 Ellen Leinwand.
강 교수는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웃옷과 아마포는 가치 일반일 뿐만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진 가치이며, 우리의 가정에 따르면 웃옷 1벌은 10엘레의 아마포에 비해 2배의 가치가 있다."

요컨대 상품에 들어 있는 노동은 사용가치와 관련해서는 질적인 의미만 인정되지만, 가치크기와 관련해서는 이미 다른 어떠한 질도 지니고 있지 않은 인간노동으로 환원되어 양적인 의미만 인정된다. 전자의 경우에는 노동의 방법과 내용(Wie und Was)이 문제가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양(Wieviel), 즉 시간의 길이가 문제가 된다. 한 상품의 가치크기는 그 상품에 들어 있는 노동량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상품들은 일정한 비율 아래에서는 늘 같은 크기의 가치이어야 한다.




가령 웃옷 1벌의 생산에 필요한 모든 유용노동의 생산력이 변하지 않는다면 웃옷의 가치크기는 웃옷의 양이 늘어남에 따라 커진다. 만약 1벌의 웃옷이 x노동일(Arbeitstag)을 나타낸다면 2벌은 2x의 노동일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웃옷 1벌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2배로 늘어나거나 반으로 줄어드는 경우를 보자. 앞의 경우에는 1벌의 웃옷이 이전의 2벌과 같은 크기의 가치를 가지며, 뒤의 경우에는 2벌이 이전의 1벌과 같은 크기의 가치밖에 갖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건 웃옷은 변함없이 똑같은 유용성이 있고 웃옷에 들어 있는 유용노동의 질도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13.1] 단지 웃옷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량은 변하였다.

13.1
(SS) In the first case one coat is worth as much as two coats were before; in the second case, two coats are only worth as much as one was before, although in both cases one coat renders the same service as before, and the useful labour embodied in it remains of the same quality.
(BF) In the first case, one coat is worth as much as two coats were before; in the second case two coats are only worth as much as one was before, although in both cases one coat performs the same service, and the useful labour contained in it remains of the same quality.
(DK) Im ersten Fall hat ein Rock soviel Wert als vorher zwei Röcke, im letztern Fall haben zwei Röcke nur soviel Wert als vorher einer, obgleich in beiden Fällen ein Rock nach wie vor dieselben Dienste leistet und die in ihm enthaltene nützliche Arbeit nach wie vor von derselben Güte bleibt.
강 교수는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더 많은 양의 사용가치는 그 자체로 더 많은 소재적 부를 이룬다. 2벌의 웃옷은 1벌보다 큰 소재적 부이다. 2벌은 두 사람이 입을 수 있지만 1벌은 한 사람밖에 입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소재적 부의 양이 증가하는데도 그 가치크기는 그에 상응하여 오히려 감소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같은 상반된 변화는 노동의 이중적 성격(zwieschlächtigen Charakter der Arbeit)에서 비롯된다. 생산력은 물론 언제나 구체적이고 유용한 노동의 생산력이고, 사실상 주어진 시간 안에서의 합목적적 생산활동의 작용 정도만을 규정한다. [14.1] 그런 까닭에 유용노동은 생산력의 상승 또는 저하에 비례하여 더욱 풍부한 또는 더욱 빈약한 생산물의 원천이 된다. [14.2] 반면 생산력의 변동은 가치로 표현되는 노동 그 자체에는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생산력은 노동의 구체적 유용형태에 속하므로 노동에서 구체적인 유용형태가 제거되어버리고 나면 이미 노동에 더 이상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된다. [14.3] 그래서 동일한 노동은 생산력이 아무리 변해도 같은 시간 동안에는 늘 같은 크기를 산출한다. 그러나 이 노동은 같은 시간 동안에 서로 다른 양의 사용가치를 산출한다. 즉 생산력이 높아지면 좀 더 많은 사용가치를 산출하고 생산력이 낮아지면 좀 더 적은 사용가치를 산출한다. [14.4] 그러므로 노동의 산출능력을 증대시키고 따라서 노동에 의해 제공되는 사용가치의 양을 증대시키는 생산력의 변동 바로 그것이 이 증대된 사용가치 총량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총계를 단축시킬 때는 이 증대된 사용가치 총량의 가치크기는 감소한다. 그 역의 경우에는 반대가 된다. [14.5]

14.1
(SS) Productive power has reference, of course, only to labour of some useful concrete form, the efficacy of any special productive activity during a given time being dependent on its productiveness.
(BF) By 'productivity‘ of course, we always mean the productivity of concrete useful labour; in realty this determines only the degree of effectiveness of productive activity directed towards a given purpose within a given period of time.
(DK) Produktivkraft ist natürlich stets Produktivkraft nützlicher, konkreter Arbeit und bestimmt in der Tat nur den Wirkungsgrad zweckmäßiger produktiver Tätigkeit in gegebnem Zeitraum.
강 교수는 "den Wirkungsgrad zweckmäßiger produktiver Tätigkeit"을 "합목적적 생산활동의 작용 정도"라고 번역했는데 'Wirkungsgrad'는 영어로 '(degree of) effectiveness'를 뜻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 "합목적적 생산활동의 유효성 정도"
14.2
(SS) Useful labour becomes, therefore, a more or less abundant source of products, in proportion to the rise or fall of its productiveness.
(BF) Useful labour becomes, therefore, a more or less abundant source of products in direct proportion as its productivity rises or falls.
(DK) Die nützliche Arbeit wird daher reichere oder dürftigere Produktenquelle im direkten Verhältnis zum Steigen oder Fallen ihrer Produktivkraft.
강 교수와 SS는 'direckten'을 번역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유용노동은 생산력의 상승 또는 저하에 직접 비례하여 더욱 풍부한 또는 더욱 빈약한 생산물의 원천이 된다."
14.3
(SS) Since productive power is an attribute of the concrete useful forms of labour, of course it can no longer have any bearing on that labour, so soon as we make abstraction from those concrete useful forms.
(BF) As productivity is an attribute of labour in its concrete useful form, it naturally ceases to have any bearing on that labour as soon as we abstract from its concrete useful form.
(DK) Da die Produktivkraft der konkreten nützlichen Form der Arbeit angehört, kann sie natürlich die Arbeit nicht mehr berühren, sobald von ihrer konkreten nützlichen Form abstrahiert wird.
강 교수는 영어로 "as soon as ..."에 해당하는 sobald를 "... 하면"으로 번역했다. "von ihrer konkreten nützlichen Form abstrahiert wird"에서 "구체적인 유용형태(ihrer konkreten nützlichen Form)"가 없어지는 것은 문맥상 '노동력(Produktivkraft)'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독일어 동사 'berühren'는 영어로 'touch' 즉, '관계를 맺다'를 뜻하는데, 강 교수는 '영향을 미친다'로 번역했다.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생산력은 노동의 구체적 유용형태에 속하므로 (생산력에서) 구체적인 유용형태가 제거되자마자 그것은 노동과 더이상 관계를 맺을 수 없다."
14.4
(SS) But it will yield, during equal periods of time, different quantities of values in use; more, if the productive power rise, fewer, if it fall.
(BF) But it provides different quantities of use-values during equal periods of time; more, if productivity rise; fewer, if it falls.
(DK) Aber sie liefert in demselben Zeitraum verschiedene Quanta Gebrauchswerte, mehr, wenn die Produktivkraft steigt, weniger, wenn sie sinkt.
DK의 한 문장을 강 교수는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그러나 이 노동은 같은 시간 동안에 서로 다른 양의 사용가치를 산출하는데, 생산력이 커지면 좀 더 많은 사용가치를 산출하고, 생산력이 낮아지면 좀 더 적은 사용가치를 산출한다."
14.5
(SS) The same change in productive power, which increases the fruitfulness of labour, and, in consequence, the quantity of use values produced by that labour, will diminish the total value of this increased quantity of use values, provided such change shorten the total labour time necessary for their production; and vice versâ.
(BF) For this reason, the same change in productivity which increases the fruitfulness of labour, and therefore the amount of use-values produced by it, also brings about a reduction in the value of this increased total amount, if it cuts down the total amount of labour-time necessary to produce the use-values. The converse also holds.
Derselbe Wechsel der Produktivkraft, der die Fruchtbarkeit der Arbeit und daher die Masse der von ihr gelieferten Gebrauchswerte vermehrt, vermindert also die Wertgröße dieser vermehrten Gesamtmasse, wenn er die Summe der zu ihrer Produktion notwendigen Arbeitszeit abkürzt. Ebenso umgekehrt.
강 교수의 번역은 어딘가 이상하다. DK가 특별히 강조 구문이 아님에도 번역은 "생산력 변동"을 강조하는 그런 식으로 해놨다. 어쨌든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노동 생산성과 곧이어 노동이 제공하는 사용가치 양을 증가시키는 생산력의 이러한 변동은 만일 그것이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총계를 단축할 때면 이 증대된 총량의 가치크기를 감소시키며, 그 역은 반대가 된다."

모든 노동은 한편으로 생리학적 의미에서의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일한 인간노동 또는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을 통해서 그것은 상품가치를 형성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모든 노동은 특수한 목적이 정해진 형태로서의 인간노동력의 지출이고, 이 구체적인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을 통해서 그 노동은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16) [15.1]

15.1
(SS) On the other hand, all labour is the expenditure of human labour power in a special form and with a definite aim, and in this, its character of concrete useful labour, it produces use values.
(BF) On the other hand, all labour is an expenditure of human labour-power in a particular form and with a definite aim, and it is in this quality of being concrete useful labour that it produces use-values.
(DK) Alle Arbeit ist andrerseits Verausgabung menschlicher Arbeitskraft in besondrer zweckbestimmter Form, und in dieser Eigenschaft konkreter nützlicher Arbeit produziert sie Gebrauchswerte.

<주석>

12) 앞의 책. 12~13쪽 이하.




13) "Tutti i fenomeni dell’universo, sieno essi prodotti della mano dell’uomo, ovvero delle universali leggi della fisica, non ci danno idea di attuale creazione, ma unicamente di una modificazione della materia. Accostare e separare sono gli unici elementi che l’ingegno umano ritrova analizzando l’idea della riproduzione: e tanto e riproduzione di valore (value in use, although Verri in this passage of his controversy with the Physiocrats is not himself quite certain of the kind of value he is speaking of) e di ricchezze se la terra, l’aria e l’acqua ne’ campi si trasmutino in grano, come se colla mano dell’uomo il glutine di un insetto si trasmuti in velluto ovvero alcuni pezzetti di metalio si organizzino a formare una ripetizione." "세상의 모든 현상은 그것이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졌든 물리학의 일반법칙에 의해서 이루어졌든, 사실 창조라기보다는 다만 소재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결합과 분리는 인간정신이 재생산이라는 표상(Vorstellung)의 분석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찾아내는 유일한 요소이다. 이것은 가치(사용가치를 말한다. 그러나 중농주의자들과의 이 논쟁에서 베리는 자기가 어떤 종류의 가치를 말하는지 스스로도 모르고 있다)나 부의 재생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토지나 공기와 물이 밭에서 곡식으로 바뀌는 경우이건 누에의 배설물이 인간의 손에 의해 명주실로 바뀌는 경우이건, 또는 몇 개의 작은 금속조각이 모여 시각을 알리는 시계로 조립되는 경우이건 이것은 언제나 적용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베리[Pietro Verri], 『경제학 고찰』(Meditazioni sulla Economia Politica), 초판, 1771, 쿠스토디(Custodi) 엮음. 『이탈리아 경제학 고전 전집』(Custodi’s edition of the Italian Economists), 근세편(Parte Moderna), 제15권, 21~22쪽).




14) 헤겔(G. W. F. Hegel), 『법철학』(Philosophie des Rechts), 베를린, 1840, 250쪽, 제190절 참조.




15) 독자가 주의해야 할 점은, 여기서 말하는 가치는 1노동일(Arbeitstag)에 대하여 노동자가 받는 임금(Arbeitslohn)이나 가치가 아니라 그의 노동일이 대상화된 상품가치라는 사실이다. 임금이라는 범주는 이 단계의 서술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16) 제2판의 주: "오직 노동만이 모든 시대에 모든 상품의 가치를 평가하고 비교할 수 있는 궁극적이고 진정한 척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같은 양의 노동은 언제 어디서든지 노동자 자신에게 동일한 가치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건강이나 체력 또는 활동이 정상상태이고, 또 그가 갖고 있는 숙련이 평균 수준을 유지할 때, 그는 늘 자신의 휴식•자유•행복을 똑같은(노동이 이루어진 만큼-옮긴이) 양으로 희생시켜야만 한다." ("Equal quantities of labour must at all times and in all places have the same value for the labourer. In his normal state of health, strength, and activity, and with the average degree of skill that he may possess, he must always give up the same portion of his rest his freedom, and his happiness.") (애덤 스미스, 『국부론』, 제1편, 제5장[104~105쪽]). 스미스는 여기에서(모든 곳에서는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상품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량에 의한 가치의 규정을 노동가치에 의한 상품가치의 규정과 혼동하고 있으며, 따라서 같은 양의 노동은 언제나 같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또 상품의 가치로 나타나는 한, 노동은 노동력의 지출로 간주될 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리지만 다시 그 지출을 휴식이나 자유 또는 행복의 희생으로만 생각하고 정상적인 생명활동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근대적인 임노동자를 눈으로 보면서도 그렇게 하였다. — 주9에서 인용한 애덤 스미스의 익명의 선배는 훨씬 더 적절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이 1주일 동안 생활필수품을 만들었다. ... 그리고 그와 물건을 교환하려는 사람이 가장 정확하게 그것의 등가물을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똑같은 노동과 시간을 들인 물건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 말고는 없다. 사실 이것은 일정 시간 동안 어떤 사람이 어떤 물건에 소비한 노동과 같은 시간 동안 다른 물건에 소비한 다른 사람의 노동을 맞바꾸는 것을 뜻한다." ("one man has employed himself a week in providing this necessary of life ... and he that gives him some other in exchange cannot make a better estimate of what is a proper equivalent, than by computing what cost him just as much labour and time which in effect is no more than exchanging one man’s labour in one thing for a time certain, for another man’s labour in another thing for the same time.") (『금리 일반, 특히 공채이자에 관한 고찰』, 39쪽), {제4판의 주: 영어는 여기에서 고려하는 노동의 두 측면에 대해 각기 다른 말을 갖는다는 장점이 있다. 사용가치를 만들어내고 질적으로 규정되는 노동은 'work'로 'labour'와는 구별되고, 가치를 만들어내고 양적으로 측정되는 노동은 'labour'로 'work'와 다시 구별된다. — 영어판의 14쪽 주를 보라. — 엥겔스} [N6.1]

N6.1
BF에는 엥겔스의 주석에 대한 코멘트가 나와 있다. 대략 다음과 같다. "엥겔스의 말이 항상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가능한 엥겔스의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Unfortunately, English usage does not always correspond to Engel's distinction. We have tried to adopt it where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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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Das Kapital』독일어판을 한국어로 번역한 강 교수(이하 강 교수)의 『자본』과 두 가지 영어 번역판인 Sonnenschein판(이하 SS)과 Penguin Classics의 Ben Fowkes 번역판(자본론 1에 해당, 이하 BF), 그리고 David Fernbach 번역판(자본론 2 및 3에 해당, 이하 DF2DF3로 각각 표기)을 참조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MIA(Marxists Internet Archive)에 있는 독일어 원본(이하 DK)을 참조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내용은 『자본I-1』 87~95쪽에 해당한다.



제1편 상품과 화폐

제1장 상품
제1절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가치실체·가치크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 집적' 1) 으로 나타나고, 하나하나의 상품(商品, Ware)은 이러한 부의 기본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부터 시작한다.



상품은 우선 외적 대상으로, 그 속성을 통해 인간의 여러 가지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적 존재(Ding)이다. 이 욕망의 성질이 무엇인지는, 즉 이 욕망이 뱃속(생리적인 욕구—옮긴이)에서 나온 것인지 머릿속(정신적인 욕구—옮긴이)에서 나온 것인지 그것은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다. 2) 또 그 물적 존재가 생활수단, 즉 향유의 대상으로서 직접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가 아니면 생산수단으로서 간접적으로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가도 여기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철·종이 따위의 모든 유용물은 질과 양이라는 이중의 관점에서 각각 고찰될 수 있다. [3.1] 이들 각각의 물적 존재는 많은 속성을 갖춘 하나의 전체(Ganze)이며, 따라서 여러 방면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 여러 방면, 즉 물적 존재의 다양한 용도를 발견해내는 것은 역사의 업적에 해당한다. 3) 이 유용물(有用物)들의 양(量)을 측정하는 사회적 척도를 찾아내는 일도 역시 그러하다. [3.2] 상품의 척도가 다양해진 이유는 한편으로는 측정해야 할 대상의 본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관습 때문이다.

3.1
(SS) Every useful thing, as iron, paper, &c., may be looked at from the two points of view of quality and quantity.
(BF) Every useful thing, for example, iron, paper, etc., may be looked ad from the two points of view of quality and quantity.
(DK) Jedes nützliche Ding, wie Eisen, Papier usw., ist unter doppelten Gesichtspunkt zu betrachten, nach Qualität und Quantität.
DK의 'doppelten Gesichtspunkt'를 SS와 BF에서는 'two points of view', 강 교수는 '이중의 관점'으로 번역했다. 독일어를 영어로 번역한 'two points of view'는 한국어로 풀이하면 '두 가지 관점'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내가 보기에 '두 가지 관점'과 '이중의 관점'은 엄연히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즉, '두 가지 관점'은 따로 떼 생각할 수 있는 관점이며 그것이 중첩되는지 혹은 시공간적으로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지 여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중의 관점'은 서로 중첩되어 동시에 나타나는 어떤 '관점'을 뜻하며 둘 사이에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 문장에서 어떤 것이 더 나은 해석일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지만, 상황에 따라서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3.2
(SS) So also is the establishment of socially-recognized standards of measure for the quantities of these useful objects.
(BF) So also is the invention of socially recognized standards of measurement for the quantities of these useful objects.
(DK) So die Findung gesellschaftlicher Maße für die Quantität der nützlichen Dinge.
DK의 ‘Findung’을 SS는 ‘establishment’, BF는 ‘invention’, 그리고 강 교수는 ‘찾다’라고 번역했다.

어떤 한 물적 존재의 유용성은 그 물적 존재를 사용가치(使用價値, Gebrauchswert)로 만든다. 4) 그러나 이 유용성은 공중에 떠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 유용성은 상품체(商品體, Warenkörper)의 속성에 따라 제약되며, 따라서 상품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4.1] 그러므로 철·밀·다이아몬드 같은 상품체는 그 자체로서 사용가치 또는 재화(財貨)이다. [4.2] 상품체의 이러한 성격은 그 유용성을 얻기 위해 인간이 소비한 노동의 양이 얼마 인지와는 무관하다. 사용가치를 고찰할 때는 언제나 몇 개의 시계, 몇 엘레의 배, 몇 톤의 철 따위와 같이 그 양적인 규정성(規定性, Bestimmtheit: 항상 일정한 양적 단위로 표현된다는 뜻—옮긴이)이 전제된다. 상품의 사용가치는 독자적인 하나의 교과목, 즉 상품학(商品學, Warenkunde)의 소재를 제공한다. 5) 사용가치는 오로지 사용되거나 소비됨으로써 스스로를 실현한다. 사용가치는 부의 사회적 형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 부의 소재적 내용을 구성한다. 또한, 사용가치는 우리가 고찰하게 될 사회형태에서 교환가치(Tauschwert)의 소재적 담지자가 된다. [4.3]

4.1
(SS) Being limited by the physical properties of the commodity, it has no existence apart from that commodity.
(BF) It is conditioned by the physical properties of the commodity, and has no existence apart from the latter.
(DK) Durch die Eigenschaften des Warenkörpers bedingt, existiert sie nicht ohne denselben.
좀 더 자연스럽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 유용성은 상품체 속성에 따라 제약되므로 상품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번역하고 보니 별 차이는 없어 보인다.
4.2
(SS) A commodity, such as iron, corn, or a diamond, is therefore, so far as it is a material thing, a use value, something useful.
(BF) It is therefore the physical body of the commodity itself, for instance, iron, corn, a diamond, which is the use-value or useful thing.
(DK) Der Warenkörper selbst, wie Eisen, Weizen, Diamant usw., ist daher ein Gebrauchswert oder Gut.
DK의 'Gut'를 SS는 ‘something useful’, BF는 ‘useful thing’, 그리고 강 교수는 '재화'로 번역했다.
4.3
지금까지 내가 찾은 바에 따르면, 강 교수는 Träger에 대한 부분을 독일어 초판 서문을 제외하고는 전부 ‘담지자’로 번역했다. 독일어 초판 서문에서는 '담당자'로 번역했다.

교환가치는 우선 양적 관계, 즉 어떤 하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비율로 나타나며 6) 이 비율은 때와 장소에 따라 끊임없이 바뀐다. 그러므로 교환가치는 우연적이고도 순전히 상대적인 것처럼 보이고, 따라서 상품에 들어 있는 내재적인 교환가치, 곧 내재적 가치(valeur intrinsèque)라는 것은 일종의 형용모순(形容矛盾, contradicto in adjecto)처럼 보인다.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7) [5.1]

5.1
DK에서는 이 문장 앞에 주석 7)이 달려 있다. 즉, 이런 식으로 써야 한다. "… 이 비율은 때와 장소에 따라 끊임없이 바뀐다. 7)"

어떤 하나의 상품, 예를 들어 1쿼터의 밀은 x량의 구두약, y량의 비단, z량의 금 따위의 상품, 요컨대 다른 여러 상품과 제각기 다른 비율로 교환된다. 따라서 밀은 하나의 교환가치가 아니라 수많은 교환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x량의 구두약이나 y량의 비단 또는 z량의 금 등도 각각 1쿼터의 밀의 교환가치를 나타내기 때문에, x량의 구두약이나 y량의 비단 또는 z량의 금 등은 서로 대체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서로 같은 크기의 교환가치라야만 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첫째, 같은 상품에 적용되는 여러 교환가치는 모두 동일한 어떤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둘째, 교환가치는 일반적으로 교환가치 그 자체와는 구별되는 다른 어떤 내용물의 표현양식이자 '현상형태'일 수 있다. [6.1]

6.1
(SS) Therefore, first: the valid exchange values of a given commodity express something equal; secondly, exchange value, generally, is only the mode of expression, the phenomenal form, of something contained in it, yet distinguishable from it.
(BF) It follows from this that, firstly, the valid exchange-values of a particular commodity express something equal, and secondly, exchange-value cannot be anything other than the mode of expression, the ‘form of appearance’, of a content distinguishable from it.
(DK) Es folgt daher erstens: Die gültigen Tauschwerte derselben Ware drücken ein Gleiches aus. Zweitens aber: Der Tauschwert kann überhaupt nur die Ausdrucksweise, die "Erscheinungsform" eines von ihm unterscheidbaren Gehalts sein.
앞의 두 문장에 해당하는 주석이다. 특별한 뜻은 없고, 이 부분은 그냥 독일어 및 다른 영어 번역과 같이 기록해봤다.
[추가 부분 #1: grainydays 님께서 지적해주신 부분]: [6.1]에 해당하는 부분, 특히 강 교수가 번역한 "'교환가치는 일반적으로 교환가치 그 자체와는 구별되는 다른 어떤 내용물의 표현양식이자 '현상형태'일 수 있다"에 대한 DK 원본 "Der Tauschwert kann überhaupt nur die Ausdrucksweise, die "Erscheinungsform" eines von ihm unterscheidbaren Gehalts sein"에 대한 강 교수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 "'현상형태'일 수 있다"를 "'현상형태'일 수밖에 없다"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이는 독일어 문장 안에 영어로는 "only … at all"에 해당하는 "nur … überhaupt"란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SS에서는 "only … , yet …" 그리고 BF에서는 "cannot be anything other than …"이란 표현으로 번역되었으며, 이것은 『자본론』의 일본어 번역본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강 교수의 번역은 "이러이러 할 수 있다"라는 '가능성(可能性)'의 측면을 말해줄 뿐이지만, 제대로 된 번역은 마르크스가 말하고 싶었던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라는 '당위성(當爲性)', 즉 교환가치의 필연적 특징을 강조하고 있다.

2개의 상품, 예를 들어 밀과 철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들의 교환비율은 그 크기가 얼마이건 언제나 일정한 양의 밀과 얼마만큼의 철이 등치 된다는 등식, 예를 들어 1쿼터의 밀=a첸트너(Zentner: 100파운드, 즉 50킬로그램을 나타내는 중량단위—옮긴이)의 철로 표현될 수 있다. 이 등식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것은 2개의 서로 다른 물적 존재, 곧 1쿼터의 밀과 a첸트너의 철 속에는 양자에 공통된 어떤 것이 같은 크기로 들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어떤 제3의 것과 동등한데, 이 제3의 것은 그 자체로서는 전자도 후자도 아닌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모두, 교환가치인 한에서는, 이 제3의 것으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



간단한 기하학적 예를 들어보면 이것은 분명해진다. 온갖 다각형의 면적을 측정하여 서로 비교하기 위해 우리는 그 다각형을 몇 개의 삼각형으로 분해한다. 그리고 삼각형 자신의 면적은 외견상의 모양과는 전혀 다른 표현으로, 즉 밑변x높이의 1/2로 환원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상품의 교환가치도 그 양을 표시해줄 수 있는 어떤 공통물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 [8.1]

8.1
(SS) In the same way the exchange values of commodities must be capable of being expressed in terms of something common to them all, of which thing they represent a greater or less quantity.
(BF) In the same way the exchange values of commodities must be reduced to a common elements, of which they represent a greater or a lesser quantity.
(DK) Ebenso sind die Tauschwerte der Waren zu reduzieren auf ein Gemeinsames, wovon sie ein Mehr oder Minder darstellen.
DK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품의 교환가치는 대체로 그 양을 나타내는 어떤 공통물로 환원되어야만 한다."

이 공통물은 상품의 기하학적·물리학적·화학적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자연적인 속성일 수가 없다. 상품의 물체적 속성은 일반적으로 상품을 유용하게 하고 따라서 상품을 사용가치로 만드는 경우에만 고려되는 것이다. 반면 상품들 간의 교환관계는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를 사상(捨象, Abstraktion)해버림으로써 비로소 그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9.1] 교환관계 내에서는 어느 하나의 사용가치란 그저 적당한 비율로 존재하기만 하면 그 밖의 다른 사용가치와 똑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또는 옛날에 바번(Barbon)이 말했듯이,

어떤 상품이든 교환가치의 크기가 같다면 이들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같은 크기의 교환가치를 갖고 있는 여러 물건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8)

사용가치라는 면에서 각 상품은 일단 질(質)적인 차이를 통해서 구별되지만, 교환가치라는 측면에서는 오로지 양(量)적인 차이를 통해서만 서로 구별되며, 이 경우 거기에는 사용가치가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

9.1
(SS) But the exchange of commodities is evidently an act characterised by a total abstraction from use value.
(BF) But clearly, the exchange relation of commodities is characterized precisely by its abstraction from their use-values.
(DK) Andererseits aber ist es grade die Abstraktion von ihren Gebrauchswerten, was das Austauschverhältnis der Waren augenscheinlich charakterisiert.
SS를 BF 및 강 교수 번역과 비교했을 때,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 그리고 DK의 'grade'는 현대 독일어에서는 'gerade'로 표현되는 것으로 영어로는 'precisely'를 뜻한다.

이제 상품체에서 사용가치를 제외시켜버리면 거기에 남는 것은 단 하나의 속성, 곧 노동생산물(勞動生産物, Arbeitsprodukt)이라는 속성뿐이다. 그러나 이 노동생산물도 이미 우리에게는 다른 의미로 변화되어 있다. 노동생산물에서 사용가치를 배제해버리면, 그 노동생산물을 사용가치로 만드는 물적인 여러 성분이나 형태도 함께 배제되어버린다. 그것은 이미 책상이나 집 또는 실 등과 같은 유용한 물건이 아니다. 노동생산물의 감각적인 성질들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또한, 그것은 이미 가구노동이나 건축노동 또는 방적노동 등과 같은 일정한 생산적 노동의 산물도 아니다. 노동생산물의 유용한 성격과 더불어 노동생산물에 표현되어 있는 노동의 유용한 성격도 사라지고, 그와 함께 또한 이들 노동의 갖가지 구체적인 형태도 사라진다. 그것들은 이미 서로 구별되지 않는, 즉 모두가 동등한 인간노동인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된다. [10.1]

10.1
(SS) Along with the useful qualities of the products themselves, we put out of sight both the useful character of the various kinds of labour embodied in them, and the concrete forms of that labour; there is nothing left but what is common to them all; all are reduced to one and the same sort of labour, human labour in the abstract.
(BF) With the disappearance of the useful character of the products of labour, the useful character of the kinds of labour embodied in them also disappears; this in turn entails the disappearance of the different concrete forms of labour. They can no longer be distinguished, but are all together reduced to the same kind of labour, human labour in the abstract.
(DK) Mit dem nützlichen Charakter der Arbeitsprodukte verschwindet der nützlicher Charakter der in ihnen dargestellten Arbeiten, es verschwinden also auch die verschiedenen konkreten Formen dieser Arbeiten, sie unterscheiden sich nicht länger, sondern sind allzusamt reduziert auf gleiche menschliche Arbeit, abstrakt menschliche Arbeit.
DK에서 한 문장으로 나타낸 것을 영어 번역과 강 교수 번역은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이를 다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노동 생산물의 유용한 성격과 더불어 그 안에 내재한 노동의 유용한 성격도 사라지고, 이러한 노동의 구체적인 형태도 또한 사라지며, 그것은 더는 서로 구별되지 않는 모두가 동일한 인간노동인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한다."

그러면 이제 이들 노동생산물에 남아 있는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들 노동생산물에 남아 있는 것은 허깨비 같은 동일한 대상성(對象性, Geständlichkeit), 곧 무차별한 인간노동의 응결물(凝結物), 다시 말해 지출된 인간노동의 단순한—그 지출형태와는 무관한—응결물뿐이다. 이들 응결물은 그저 그것들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고 인간의 노동이 거기에 쌓여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11.1] 바로 이런 공통된 사회적 실체가 응결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이들 응결물은 바로 가치(價値, Werte), 즉 상품가치(商品價値, Warenwerte)이다. [11.2]

11.1
(SS) All that these things now tell us is, that human labour power has been expended in their production, that human labour is embodied in them.
(BF) All these things now tell us is that human labour-power has been expended to produce them, human habour is accumulated in them.
(DK) Diese Dinge stellen nur noch dar, daß in ihrer Produktion menschliche Arbeitskraft verausgabt, menschliche Arbeit aufgehäuft ist.
BF 그리고 SS와 비교했을 때, 강 교수 번역이 더 나아 보인다.
11.2
(SS) When looked at as crystals of this social substance, common to them all, they are – Values.
(BF) As crystals of this social substance, which is common to them all, they are values – commodity values.
(DK) Als Kristalle dieser ihnen gemeinschaftlichen Substanz sind sie Werte - Warenwerte.
아무리 해석해봐도 'common'이나 '공통된'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는 이 문장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SS, BF 그리고 강 교수의 번역 모두 이해의 편의를 위해 마르크스가 쓰지 않은 'common‘ 혹은 '공통된'이란 표현을 번역본 안에 사용하고 있다. 물론 독일어로 'gemein'이 'common'이란 뜻을 나타내긴 하지만, 합성어 'gemeinschaftlichen'이 'social'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위 표현을 따로 쓸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BF와 강 교수는 'Warenwerke'를 각각 '상품가치'와 'commodity values'로 번역했지만, SS는 'Values'로 번역했다.

상품의 교환관계 그 자체에서만 본다면 상품의 교환가치는 사용가치와 전혀 별개의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12.1] 그리고 실제로 노동생산물에서 사용가치를 배제해버리면, 우리는 방금 얘기했던 노동생산물의 가치를 얻게 된다. 따라서 상품의 교환관계 또는 교환가치에 나타나는 공통요소는 상품의 가치이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교환가치가 상품가치의 필연적인 표현양식 또는 현상형태임을 알게 되겠지만, 우선은 이런 형태와 무관하게 가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2.2]

12.1
(SS) We have seen that when commodities are exchanged, their exchange value manifests itself as something totally independent of their use value.
(BF) We have seen that when commodities are in the relations of exchange, their exchange-value manifests itself as something totally independent of their use-value.
(DK) Im Austauschverhältnis der Waren selbst erschien uns ihr Tauschwert als etwas von ihren Gebrauchswerten durchaus Unabhängiges.
DK에는 "우리는 이미 보았다" 또는 "We have seen that …"에 해당하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이해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저 표현을 넣은 것 같지만, 좀 이상하다. 어쨌든 다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상품의 교환 관계 그 자체에서 교환가치는 마치 사용가치와 무관한 것처럼 나타난다."
12.2
(SS) The progress of our investigation will show that exchange value is the only form in which the value of commodities can manifest itself or be expressed. For the present, however, we have to consider the nature of value independently of this, its form.
(BF) The progress of the investigation will lead use back to exchange-value as the necessary mode of expression, or form of appearance, of value. For the present, however, we must consider the nature of value independently of its form of appearance.
(DK) Der Fortgang der Untersuchung wird uns zurückführen zum Tauschwert als der notwendigen Ausdrucksweise oder Erscheinungsform des Werts, welcher zunächst jedoch unabhängig von dieser Form zu betrachten ist.
SS와 BF는 DK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눠 번역했다.

어떤 사용가치 또는 재화가 가치를 지니는 까닭은 추상적인 인간노동이 그 속에 대상화(對象化, vergegenständlicht) 또는 체화(體化, materialisiert)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가치의 크기는 어떻게 측정되는가? 그것은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가치를 형성하는 실체', 즉 노동의 양으로 측정된다. 노동의 양 그 자체는 노동이 지속된 시간으로 측정되고, 노동시간은 다시 1시간이라든가 하루라든가 하는 일정한 단위를 그 척도로 삼는다.



상품의 가치가 그것을 생산하는 동안에 지출된 노동량에 따라 정해진다면 게으르고 숙련이 낮은 사람일수록 상품을 생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상품은 그만큼 가치가 더 큰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치의 실체를 이루는 노동은 동일한 인간노동이며 동일한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다. 상품세계의 가치로 나타나는 사회의 전체 노동력은 무수히 많은 개별 노동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모두 똑같은 인간노동력으로 간주된다. 각 개별 노동력이 이처럼 모두 동일한 인간노동력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이들 각각의 개별 노동력이 모두 사회적 평균노동력이라는 성격을 띠고, 또한 바로 그런 사회적 평균노동력으로 작용하며, 그리하여 어떤 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서도 오로지 평균적으로 필요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이 소요되어야 한다. [14.1]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란 주어진 정상적인 사회적 생산조건 아래에서 그 사회의 평균적인 숙련과 노동강도로써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시간이다. [14.2]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증기 직기가 도입됨으로써 일정한 양의 실로 베를 짜는 데 소요되는 노동이 예전에 비해 대략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영국의 수직공(手織工: 증기 직기를 사용하지 않는 노동자—옮긴이)들은 베를 짜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이전에 비해 사실상 아무런 변화가 없음에도 이제 그들의 개별 노동시간의 생산물은 사회적 노동시간의 절반만을 나타내는 데 불과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 가치도 이전 가치의 절반으로 떨어져 버렸다.


14.1
(SS) Each of these units is the same as any other, so far as it has the character of the average labour power of society, and takes effect as such; that is, so far as it requires for producing a commodity, no more time than is needed on an average, no more than is socially necessary.
(BF) Each of these units is the same as any other, to the extent that it has the character of a socially average unit of labour-power and acts as such, i.e. only needs, in order to produce a commodity, the labour time which I necessary on an average, or in other words is socially necessary.
(DK) Jede dieser individuellen Arbeitskräfte ist dieselbe menschliche Arbeitskraft wie die andere, soweit sie den Charakter einer gesellschaftlichen Durchschnitts-Arbeitskraft besitzt und als solche gesellschaftliche Durchschnitts-Arbeitskraft wirkt, also in der Produktion einer Ware auch nur die im Durchschnitt notwendige oder gesellschaftlich notwendige Arbeitszeit braucht.
강 교수 번역은 의역이 지나치게 강한 것 같은데, 직역을 좀 섞어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개별 노동력이 사회적 평균노동력의 특징을 띠고 있고 사회적 평균노동력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며 어떤 상품을 생산하는 데 있어서 평균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요구하는 한, 이러한 개별 노동력 각각은 서로 간에 동일한 인간 노동력이다."
14.2
(SS) The labour time socially necessary is that required to produce an article under the normal conditions of production, and with the average degree of skill and intensity prevalent at the time.
(BF) Socially necessary labour-time is the labour-time required to produce any use-value under the conditions of productin normal for a given socienty and with the average degree of skill and intensity of labour prevalent in that society.
(DK) Gesellschaftlich notwendige Arbeitszeit ist Arbeitszeit, erheischt, um irgendeinen Gebrauchswert mit den vorhandenen gesellschaftlich-normalen Produktionsbedingungen und dem gesellschaftlichen Durchschnittsgrad von Geschick und Intensität der Arbeit darzustellen.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란 사회적으로 정상인 생산조건과 평균적인 숙련도 및 노동 강도가 주어졌을 때 사용가치를 생산하는데 요구되는 노동시간이다."

그래서 어떤 사용가치의 가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 즉 그 사용가치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뿐이다. 9) [15.1] 여기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나하나의 상품을 그것이 속한 종류의 평균표본으로 간주한다. 10) 따라서 같은 크기의 노동량이 포함된 상품들, 또는 같은 노동시간에 생산될 수 있는 상품들은 같은 크기의 가치를 갖는다. 한 상품의 가치와 다른 상품의 가치 사이의 비율은 한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과 다른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 사이의 비율과 같다.

가치로서의 상품은 그저 일정한 양의 응결된 노동시간일 뿐이다. 11) [15.2]

15.1
(SS) We see then that that which determines the magnitude of the value of any article is the amount of labour socially necessary, or the labour time socially necessary for its production.
(BF) What exclusively determines the magnitude of the value of any article is therefore the amount of labour socially necessary, or the labour-time socially necessary for its production.
(DK) Es ist also nur das Quantum gesellschaftlich notwendiger Arbeit oder die zur Herstellung eines Gebrauchswerts gesellschaftlich notwendige Arbeitszeit, welche seine Wertgröße bestimmt.
강 교수 번역과는 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데, 어쨌든 다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래서 사용가치의 가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 또는 사용가치 생산을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15.2
(SS) The value of one commodity is to the value of any other, as the labour time necessary for the production of the one is to that necessary for the production of the other. "As values, all commodities are only definite masses of congealed labour time."
(BF) The value of a commodity is related to the value of any other commodity as the labour-time necessary for the production of the one is related to the labour-time necessary for the production of the other. 'As exchange-values, all commodities are merely definite quantities of congealed labour-time.'
(DK) Der Wert einer Ware verhält sich zum Wert jeder andren Ware wie die zur Produktion der einen notwendige Arbeitszeit zu der für die Produktion der andren notwendigen Arbeitszeit. "Als Werte sind alle Waren nur bestimmte Maße festgeronnener Arbeitszeit."
DK의 한 문장을 강 교수는 단락으로 나눴다.

그러므로 만약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 상품의 가치 크기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생산력에 변화가 생기면 그에 따라 이 노동시간도 변한다. 노동생산력은 여러 가지 다양한 요인들에 따라서 결정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노동자들의 평균적인 숙련 수준, 과학과 그 기술적 응용 가능성의 발전수준, 생산과정의 사회적 결합 정도, 생산수단의 규모와 능률 그리고 갖가지 자연적 조건 등이 중요한 요인들이다. 예를 들어 같은 양의 노동이라 해도 풍년에는 8부셸(bushel: 영국의 곡물량 척도로, 약 36리터가 조금 넘는 부피를 나타낸다—옮긴이)의 밀로 표시되던 것이 흉년에는 겨우 4부셸의 밀로 표시된다. 같은 양의 노동으로 부광(富鑛)에서는 빈광(貧鑛)에서보다 더 많은 금속을 산출한다. 다이아몬드는 지표에 나와 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하는 데 평균적으로 많은 노동시간이 든다. 그런 까닭에 다이아몬드는 작은 크기로도 많은 노동을 표시한다. 제이콥(Jacob)은 금에 대하여, 일찍이 그 가치가 제대로 지불된 적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다이아몬드의 경우 그것은 더욱 그러하다. 에슈베게(Eschwege)에 따르면, 브라질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1823년을 기준으로 과거 80년 동안 산출한 총생산액은 브라질의 사탕농장이나 커피농장에서 1년 반 동안 산출한 평균생산물의 가격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실제 다이아몬드의 생산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이 들었고 따라서 더 많은 가치를 나타내야 하는데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16.1] 다이아몬드 광산이 부광이면 부광일수록 동일한 노동량은 더 많은 다이아몬드를 나타내고, 그만큼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떨어질 것이다. 만약 아주 적은 노동량으로 석탄을 다이아몬드로 바꿀 수 있다면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벽돌의 가치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노동생산력이 높을수록 어떤 물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그만큼 작고 또 그 물품에 응결되어 있는 노동량도 그만큼 작으며 따라서 그 물품의 가치도 그만큼 작아진다. 거꾸로 노동생산력이 낮을수록 어떤 물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그만큼 길고 따라서 물품의 가치도 그만큼 커진다. [16.2] 따라서 한 상품의 가치 크기는 그 상품에 실현된 노동량에 정비례하고 그 노동생산력에 반비례하여 변동한다. *


16.1
SS) According to Eschwege, the total produce of the Brazilian diamond mines for the eighty years, ending in 1823, had not realised the price of one-and-a-half years’ average produce of the sugar and coffee plantations of the same country, although the diamonds cost much more labour, and therefore represented more value.
(BF) According to Eschwerge, the total produce of the Brazilian diamond mines for the eighty years ending in 1823 still did not amount to the proce of 1 1/2 years' avergae produce of the sugar and coffee plantations of the same country, although the diamonds represented much more labour, therefore more value.
(DK) Nach Eschwege hatte 1823 die achtzigjährige Gesamtausbeute der brasilischen Diamantgruben noch nicht den Preis des 11/2jährigen Durchschnittsprodukts der brasilischen Zucker oder Kaffeepflanzungen erreicht, obgleich sie viel mehr Arbeit darstellte, also mehr Wert.
강 교수 번역은 DK, SS 및 BF와 비교했을 때 미묘하게 다르다. 그리고 DK에서 나타나는 것보다도 더욱 당위적이며 단정적으로 표현한다. 마지막 부분에 있는 "obgleich sie viel mehr Arbeit darstellte, also mehr Wert"를 적절하게 해석해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다이아몬드 생산에는 더 많은 노동력이 들어 있고 더 많은 가치가 나타남에도 그렇다."
16.2
(SS) In general, the greater the productiveness of labour, the less is the labour time required for the production of an article, the less is the amount of labour crystallised in that article, and the less is its value; and vice versâ, the less the productiveness of labour, the greater is the labour time required for the production of an article, and the greater is its value.
(BF) In general, the greater the productivity of labour, the less the labour-time required to produce an article, the less the mass of labour crystallized in that article, and the less its value. Inversely, the less the productivity of labour, the greater the labour-time necessary to produce an article, and the greater its valeue.
(DK) Allgemein: Je größer die Produktivkraft der Arbeit, desto kleiner die zur Herstellung eines Artikels erheischte Arbeitszeit, desto kleiner die in ihm kristallisierte Arbeitsmasse, desto kleiner sein Wert. Umgekehrt, je kleiner die Produktivkraft der Arbeit, desto größer die zur Herstellung eines Artikels notwendige Arbeitszeit, desto größer sein Wert.
DK에서 두 문장으로 나타난 표현을 SS에서는 한 문장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강 교수는 'Artikels'을 물품으로 번역했다. 강 교수는 책 전반에서 'Ware'를 '상품'으로 'Artikel'을 '물품'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사실 둘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영어 번역에서도 'commodity'와 'article'은 같은 의미로 계속 번갈아가면서 사용되는데, 이것을 굳이 '상품' 혹은 '물품'으로 따로 번역할 필요없이 '상품'으로 일괄 번역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다. 참고로 'article'은 '
one of a class of artifacts'란 뜻이며, 'commodity'는 'articles of commerce'란 뜻이다.

어떤 물적 존재는 가치가 아니면서도 사용가치일 수가 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그 물적 존재의 효용이 노동에 의해 매개(vermittelt)되어 있지 않은 경우다. 예를 들면 공기나 처녀지, 천연의 초원이나 야생의 수목 따위가 그러하다. 어떤 물적 존재는 상품이 아니면서도 유용한 것일 수 있으며 또한 인간노동의 산물일 수도 있다. 자신의 생산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것이지 상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단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타인을 위한 사용가치, 즉 사회적 사용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단지 타인을 위해서 생산하는 것만으로도 안 된다. 중세의 농민은 영주에게 바치기 위해 세곡(稅穀)을 생산했고, 성직자를 위해 십일조 곡물을 생산했다. 그러나 세곡과 십일조 곡물은 모두 타인을 위해 생산된 것이면서도 상품이 되지는 못했다. 상품이 되려면 생산물은 교환을 통해 그것이 사용가치로써 쓰일 다른 사람의 손으로 옮아가야만 한다.} 11a) 마지막으로 어떤 물적 존재도 사용대상이 되지 않고서는 가치가 될 수 없다. 만일 어떤 물적 존재가 쓸모가 없다면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도 쓸모없는 것이고 또한 노동으로 인정되지도 않으며, 따라서 가치를 이루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

1) 카를 마르크스, 『경제학 비판』, 베를린, 1859, 3쪽(MEW Bd. 13, 15쪽).



2) "욕구(desire, Verlangen)는 욕망(want, Bedürfnis)을 포함한다. 욕망은 육체에 배고픔이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에도 당연히 나타나는 갈증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물적 존재는 정신의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점 때문에 가치를 갖는다." (“Desire implies want, it is the appetite of the mind, and as natural as hunger to the body … The greatest number (of things) have their value from supplying the wants of the mind.”) (바번[Nicholas Barbon], 『새 화폐의 무게를 줄이는 문제에 대한 고찰』, 런던, 1696, 2~3쪽).



3) "물적 존재들은 철을 끌어당기는 자석의 속성처럼 어디에서나 똑같이 작용하는 내재적인 속성(intrinsick vertue: 이것은 사용가치를 나타내는 바번의 독특한 용어이다)을 지니고 있다." (“Things have an intrinsick value which in all places have the same vertue; as the loadstone to attract iron.”) (같은 책, 6쪽). 철을 끌어당기는 자석의 속성은 그 속성을 매개로 한 자석의 극성을 발견한 뒤에야 비로서 유용해졌다.



4) "모든 물적 존재의 자연적 가치(natural worth)는 필요를 충족시키거나 인간생활에 편의를 제공하기에 적합하다는 점에 있다."(“The natural worth of anything consists in its fitness to supply the necessities, or serve the conveniencies of human life.”) (로크[John Locke], 「이자율 인하의 결과에 관한 몇 가지 고찰」, 1691, 『저작집』 제2권, 런던, 1777, 28쪽). 17세기 영국 저술가들의 글에서는 사용가치(使用價値, Gebrauchswert)를 뜻하는 '가치'(worth)라는 말과 교환가치(交換價値, Tauschwert)를 뜻하는 '가치'(value)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것은 직접적인 것은 튜튼어(Teutonic word)로 표현하고 반성적인 것은 라틴어(Romance word)로 표현하곤 하던 영어의 정신에 전적으로 따른 것이다.

N4.1
'튜튼어'란 표현을 독일어 원전에서는 'germanisch'로 나타냈으며, '라틴어'는 'romanish'로 기술했다. 강 교수가 번역한 '튜튼어'와 '라틴어'란 표현은 '영어판'에서 사용된 번역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5)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구매자로서 상품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가설(ficto juris)이 지배한다.

N5.1
(SS) In bourgeois societies the economic fictio juris prevails, that every one, as a buyer, possesses an encyclopedic knowledge of commodities.
(BF) In brougeois society the legal fiction prevails that each person, as a buyer, has an encyclopedic knowledge of commodities.
(DK) In der bürgerlichen Gesellschaft herrscht die fictio juris, daß jeder Mensch als Warenkäufer eine enzyklopädische Warenkenntnis besitzt.
독일어 'enzyklopädisches'는 영어로 'encyclopedic (영어로 풀이하면 broad in scope or content)'을 뜻하는데, 이것을 강 교수는 '완전한'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번역은 '해박한'이 맞다.

6) "가치는 한 물건과 다른 물건, 어떤 생산물의 일정량과 다른 생산물의 일정량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환비율이다." (“La valeur consiste dans le rapport d’échange qui se trouve entre telle chose et telle autre entre telle mesure d’une production et telle mesure d’une autre.“) (르 트론[Le Trosne], 「사회적 이해에 대하여」, 『중농학파』, 데르[Daire] 엮음, 파리, 1846, 889쪽).



7) "내재적인 교환가치(intrinsick value)를 가진 것은 어디에도 없다."(“Nothing can have an intrinsick value.”) (바번, 앞의 책 6쪽). 또는 버틀러(Butler)가 말했듯이 "물건의 가치는 그것이 자신의 대가로 가져올 수 있는 바로 그 크기이다."



8) "… 100파운드스털링의 가치가 있는 납이나 철은 100파운드스털링의 가치가 있는 금이나 은과 똑같은 크기의 교환가치를 갖고 있다." ("One sort of wares are as good as another, if the value be equal. There is no difference or distinction in things of equal value ... One hundred pounds worth of lead or iron, is of as great a value as one hundred pounds worth of silver and gold.") (바번, 앞의 책, 53~57쪽).



9) 제2판의 주: "The value of them (the necessaries of life) when they are exchanged the one for another, is regulated by the quantity of labour necessarily required, and commonly taken in producing them." (사용대상, 즉 생필품이 서로 교환될 때, 그것들의 가치는 그 생산에 반드시 필요하고 통상 소요되는 노동량에 따라 결정된다. 『금리 일반, 특히 공채이자에 관한 고찰』, 런던, 36•37쪽). 18세기에 간행된 이 주목할 만한 익명의 저서에는 간행연도가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이 책은 조지 2세 치하인 1739년이나 1740년경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 "같은 종류의 생산물은 모두 본래 하나의 무리를 이루는 것이므로 그 가격은 개별적인 조건들과 무관하게 한꺼번에 일반적으로 결정된다." (“Toutes les productions d’un même genre ne forment proprement qu’une masse, dont le prix se détermine en général et sans égard aux circonstances particulières.“) (르 트론, 앞의 글, 893쪽).



11) 카를 마르크스, 앞의 책, 6쪽



* 제1판에는 여기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덧붙여 있다. "우리는 이제 가치의 실체를 알았다. 그것은 노동이다. 우리는 가치크기척도를 알았다. 그것은 노동시간이다. 가치의 형태, 이것이야말로 가치교환가치라는 도장을 찍어주지만 이 형태를 분석하는 것은 이제부터 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먼저 그전에 이미 발견된 가치의 여러 성격을 조금 더 상세하게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11a) {제4판의 주: 내가 괄호 안에 이 문구를 써넣은 것은 마르크스가 생산자 이외의 사람에 의해 소비된 생산물은 모두 상품으로 간주했다는 오해가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이다.-엥겔스}





Posted by metas :


2012년 5월 10일 자 경향신문에 "나노 구조물을 이용해 물질 표면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기술 개발"에 대한 내용의 기사가 올라왔다 [1]. 실제로 그들의 연구 성과는 2012년 5월 10일 세계적인 권위의 학술지인 네이쳐(Nature)의 표지 논문으로 선정되었다 [2].

나는 생물학 전공이기 때문에 이 연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모르며, 그들이 과학적으로 의미 있다고 주장하는 "균열을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는 기술"에 어떤 유용성이 있는지도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렇지만, 그들의 연구 결과가 네이쳐 표지 논문으로 실렸다는 사실이나 이 분야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그 연구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이 일이 어떤 과학기술적 의미가 있는지는 나의 우둔한 머리로 100% 파악하기는 어려워도 대충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대단한 과학적 업적보다는 이 연구의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에 더욱 눈길이 쏠린다. 그리고 그것은 이 연구가 내포하는 과학적 업적보다도 사실상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연구자가 지녀야 할 "연구 윤리(research ethics, 硏究倫理)"에 관한 문제이다.


네이쳐 표지에 소개된 문제의 논문 [출처: 네이쳐 온라인]



내가 이 이야기를 들은 때는 9일경 실험실 동료 선배와 대화 중에서였다. "다음 아고라에 모 대학원생이 자신의 연구가 도둑질당했다며 하소연하는 글이 올라왔어."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남의 연구를 도둑질해?"라며 내심 의심을 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배가 가르쳐 준 그 웹 사이트에 접속했고, 그 글을 통해 모 대학원생이 주장하는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 특히 여기에는 모 대학원생의 실험실 동료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작성한 댓글과 답글도 있어 그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3, 4]. 대략적인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모 대학원생은 남 교수가 제안한 아이디어를 자신의 연구주제로 정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 열심히 일했다. 최초 아이디어 제안자는 남 교수가 분명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와 수고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남 교수는 자신의 이런 공로를 깡그리 무시한 채 공동 저자는 고사하고 저자 목록에도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확인 결과, 「Patterning by controlled cracking」이란 제목의 논문에 명시된 저자는 단 세 명뿐이었으며, 놀랍게도 그들 모두는 이름 있는 대학에서 한 자리 잡고 있는 교수—이화여대 남구현 교수, 이화여대 박일흥 교수, 카이스트 고승환 교수—였다 [5].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 연구와 관련된 실험을 전부 교수들이 했단 말인가? 연구와 관련된 제반 사정을 잘 모르는 이라면 "저 사람들은 대학에서 학생도 가르치며 자기 연구도 열심히 하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수업도 열심히 하고 손에 파이펫(pipette)을 들고 손수 실험에 열심히 참여하는 초능력자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실험을 위주로 하는 연구 프로젝트에서 교수의 역할은 총괄 책임자다. 즉, 자신의 실험실에 많은 박사 후 연구원과 대학생을 거느리고, 이들의 개별 혹은 공동 연구를 전체적으로 지휘하고 조언하면서 연구 방향을 잡아주고, 그 결과를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기업 부서의 팀장 혹은 그 이상의 위치에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간혹 교수 중에 자신이 직접 실험하는 사람(즉, 초능력자)도 있다. 어떤 교수는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결과를 논문으로 작성해 제1저자와 교신 저자를 동시에 해먹는 보기 드문 놀라운 사례도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수많은 대학원생과 박사 후 연구원의 연구를 지도하면서 자신만의 연구를 단독으로 진행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한국에서 교수는 학기 중에 학부생과 대학원생의 수업도 진행해야 하며, 학위를 마친 대학원생의 논문도 심사해야 하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학술지의 논문 심사와 더불어 원활한 실험실 운영 혹은 연구 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연구비 확보를 위해 수많은 보고서와 씨름해야 한다 [6]. 게다가 보직까지 있는 교수라면 실험을 직접 진행한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상황이 이런데 과연 교수 자신이 연구를 직접 진행할 수 있을까?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는 일종의 관례(慣例)가 있다. 물리학이나 화학 등의 다른 실험 연구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바로 연구자의 연구 기여도에 대한 인식이며, 이것은 논문에서 저자를 배열하는 순서에 그대로 반영된다.

대부분의 연구는 한 명 혹은 두세 명 이상이 주도해 진행하며, 교수는 극히 일부의 사례를 제외하면 통상 총괄 책임자로 연구에 참여한다. 연구가 진행되고 최종적으로 마무리되면 연구 기여도에 따라 authorship을 부여하는데, 연구에 가장 많이 기여한 사람(들)에게 제1저자(first author)란 칭호가 주어지며 연구 기여도가 엇비슷할 정도로 큰 사람이 두 명 이상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공동 연구자(co-author)라고 부른다. 그리고 연구에 직접 참여했거나 혹은 직접 관여하지는 않더라도 일의 진행에 여러모로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은 논문에 제2저자, 제3저자, 제4저자 식으로 나열하며, 연구 총괄 책임자 역할을 한 교수는 저자 목록의 맨 마지막에 교신 저자(corresponding author)로 명시된다 [7].

그러므로 예(例)의 모 대학원생 주장이 사실이라면, 네이쳐 표지로 선정된 「Patterning by controlled cracking」이란 논문의 제1저자는 연구에 대한 기여도가 제일 높은 사람—자신이 연구를 주도적으로 진행했다고 주장하는 모 대학원생—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제1저자로 논문에 이름을 올린 남구현 교수는 (진정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그의 기여가 핵심적이었다면) 공동 저자나 혹은 (단순히 아이디어 차원에서 머물러 있었다면) 제2저자 이하 또는 교신 저자의 위치에 이름이 올라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업계의 상식이 이런데도, 남구현 교수는 자신을 제1저자 및 교신 저자로 논문에 이름을 올렸으며, 카이스트 고승환 교수는 남 교수와 함께 공동 교신 저자 위치에 올랐다. 그리고 모 대학원생이 소속해 있는 연구실의 책임 연구자인 박일흥 교수는 제2저자로 올라와 있다 [8]. 게다가 이 연구에서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생각되는 모 대학원생의 이름—그리고 모 대학원생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연구에 참여해 실체적인 기여를 했을 각 실험실에 소속된 다른 대학원생(들)의 이름—은 기껏해야 감사의 표시를 알리는 "Acknowledgement" 에 조그맣게 올라와 있을 뿐이다. 그것도 전체 이름이 아닌 "J.-A. Jeon"이란 약어로 말이다 [5].

남구현 교수도 "석사과정 때부터 생각해온 아이디어들을 구현한 것인데 박일흥 교수가 무리한 요구를 해와 받아들이지 않았다"라며 나름 항변을 한다 [1]. 그러나 자신이 처음 아이디어를 제시했다고 해서 그 연구를 당당하게 100%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순히 아이디어만 제시했거나, 연구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기여도가 작다면 제1저자가 될 수 없음은 당연한 사실 아닐까? 그리고 모 대학원생이 연구에 직접 참여해 많은 기여를 했다는 것은 실험실 동료들도 증언하는 바인데,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이것은 무조건 내 업적이야"라고 주장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바와 다를 게 뭐가 있는가? [3, 4]

물론, 연구에서 "처음”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일종의 우선권을 인정한다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지켜져 온) 무언(無言)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최초로 아이디어를 낸 것과 실제로 그 일 대한 기여도는 분명 구분되어야 하며 각각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 업계 상식이 이러한데도, 같은 팀에서 동료 연구자의 노고는 깡그리 무시하고 오히려 "자신이 최초로 아이디어를 제시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타인의 연구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설령 자신이 거기에 기여한 바가 있다손 치더라도) 도둑질하는 행위는 분명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여기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일화를 하나 들어보겠다. 바로 제자의 업적을 도둑질해 자신의 일인 것처럼 포장해 노벨상을 탄 어느 훌륭하신 분의 이야기다. 1960년대에 펄서(pulsar)라는 맥동(脈動)하는 전파 항성이 발견되었다. 이 천체는 매우 빠르고 규칙적인 전파를 방출했으며, 이 발견은 일약 학계의 대관심을 끌었다. 왜냐하면, 천문학자들은 펄사가 오랫동안 가설로 남아 있던 항성 진화의 흔적인 중성자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공로로 1974년 노벨 물리학상은 펄서 발견에 결정적 역할을 한 공로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천문 연구 책임자였던 앤터니 휴이시(Antony Hewish)에게 수여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둡고 불편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펄서를 발견하고 열정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노벨상을 수상한 휴이시가 아니라 그의 제자인 조셀린 벨(Jocelyn Bell)이라는 젊은 여자 대학원생이란 사실이다 [9]. 실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만행위(欺瞞行爲)가 아닐 수 없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앤터니 휴이시와 그의 스승에게 뒷통수를 얻어 맞은 조셀린 벨. 당시의 모습.

[사진 출처: 순서대로 Science Photo Library, Women in Science]



연구자라면 누구나 최초의 발견을 하고 싶어하고 동료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최고의 연구를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은 연구 과정이 힘들고 어려워도 연구자가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보상심리로 작용한다. 물론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이 우선적으로 작용하고 그것이 연구의 원동력이 된 사례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이름을 뛰어난 연구를 통해 세상에 알리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일 것이다. 하지만 성공을 위해서 남의 노고를 무시하고 가로채는 도둑질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연구자의 상식일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상식이다. 오로지 제대로 된 연구 윤리 위에서 뛰어난 연구 업적을 남기는 자만이 역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제대로 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일로 계기로 국내 연구 윤리—특히 연구 기여와 관련된 부분—가 제대로 확립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며, 모 대학원생에게 이번 일로 큰 불이익이 돌아가질 않길 바란다.


참고문헌


[1] 30대 과학자 논문 네이처 표지에 실렸다. 경향신문. 2012년 5월 10일. [링크]
[2] 네이쳐 온라인판의 Vol. 485, No. 7397 상단에 나와 있는 About the cover를 참조하라 [링크]
[3] 대학원생은 노예인가?? 교수가 연구결과 독식, 네이처 발표. 다음 아고라. 2012년 5월 8일. [링크]
[4] 같은 연구실 학생입니다. 다음 아고라. 2012년 5월 8일. [링크]
[5] Nam KH, Park IH, and Ko SW. 2012. Patterning by controlled cracking. Nature. 485: 221-224. [링크]
[6] 말은 이렇게 썼지만, 한국에서 연구비 획득을 위한 연구 보고서는 대부분 대학원생이 작성한다. 하지만 원래는 교수 혹은 박사 후 연구원이 하는 일이다.
[7] 트위터 아이디 @ensual 님과 @sioum 님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주셨다. "수학계에서도 학술지에 투고하고 수정하는 것을 담당하는 교신 저자 개념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저자의 배열은 연구에 대한 기여도가 아닌 알파벳 순으로 나열하며 모든 저자는 논문에 동등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본다."
[8]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번 논문의 공동저자 중 한 명인 박일흥 교수는 최근 남 교수에게 자신을 교신 저자로 넣고 남 교수의 이름은 저자 목록에서 빼야 한다는 내용의 e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박 교수는 남 교수를 교신저자로 등록한 네이쳐에도 항의 e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링크]
[9]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 윌리엄 브로드, 니콜라스 웨이드 저/김동광 옮김. 미래인. 2008년. 205-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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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략한 소개

이 글은 2007년 『Biochimica et Biophysica Acta』라는 학술저널(research journal)에 게재된 인간 프리온 병(human prion disease)에 관한 소개 논문(review article)이다. 논문의 제목은 「Update on human prion disease」이며, 저자는 영국 University of College London의 Jonathan Wadsworth와 John Collinge이다. 의학과 생물학과 관련된 전문 용어가 많아서, 각 용어는 "괄호 ()" 안에 영어와 한자로 같이 표기했다. 본문 안에 [숫자]로 표시한 부분은 논문 원본에 기재된 참고문헌 번호이며, <숫자>로 표시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번역하면서 추가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따로 주석처리한 것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인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원 논문 <Wadsworth JDF, and Collinge J. 2007. Update on human prion disease. Biochim Biophys Acta 1772: 598-609>을 참조했음을 명시하기 바란다. [링크] 그리고 내 번역이 도움되었다면 "나의 번역이 도움되었음"을 표현해주는 것도 고맙긴 하겠다. 참고로 번역 #1[링크], 번역 #2[링크], 번역 #3[링크]도 있으니, 순서대로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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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간 프리온 병의 말단 조직 발병(peripheral pathogenesis)

뇌 내 PrPSc 연구와 더불어 말단 조직(peripheral tissues, 末端組織)에 대한 감염 연구도 함께 진행되었다. 이들 연구에서 vCJD의 발병(pathogenesis, 發病)은 다른 CJD와 매우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vCJD 환자의 림프세망 조직(lymphoreticular tissues, -細網組織)에서는 PrPSc가 기꺼이 확인되지만, 일반적인 CJD나 유전성 프리온 병에서는 그렇지 않다 [84, 108, 137-142]. 시체에서 추출한 뇌하수체 호르몬(pituitary hormone, 腦下垂體-)을 사용해 나타나는 iCJD [138] 또는 쿠루에서 [우리의 보고하지 않은 결과(our unpublished data)] 편도선에 프리온 감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vCJD의 특이적인 발병이 감염의 말단 경로(peripheral routes of infection)보다는 프리온 계통의 효과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림프 소절(lymphoid follicles, -小節)의 밀도(density, 密度)에 따라서 vCJD 말단 조직의 PrPSc 농도는 매우 다양할 수 있는데, 뇌를 기준으로 상대적인 비교를 했을 때 편도선(tonsil, 扁桃腺)에서 PrPSc 농도는 뇌에 존재하는 양의 10%이고 [84, 138] 직장(rectum, 直腸)에서는 0.002% 정도 존재한다 [84]. 제4t형이라 불리는 특이한 형태의 PrPSc는 사망 전(ante-mortem) 그리고 사망 후(post-mortem) vCJD 환자의 편도선에서 모두 나타나고 [84, 138] (그림 1), 여기에는 수혈로 이차 감염된 vCJD 사례도 포함된다 [87]. 편도선에 존재하는 제4t형 PrPSc는 vCJD에서 나타나는 제4형 글리코형(glycoform) PrPSc의 비율에서 차이가 나는데 [84, 138], 이것은 PrP 당화(glycosylation, 糖化)에 대한 조직 및 계통 특이적 효과(tissue- and strain-specific effect)의 중첩(superimposition, 重疊)이 있음을 암시한다 [80, 138]. 림프세망 조직 감염은 신경 침투(neuroinvasion, 神經浸透)보다 시간상으로 먼저 발생한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vCJD가 진행하기 전의 환자에서 적출해 보관한 외과 수술 표본(surgical samples)에서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81, 143], 편도선 생검(tonsil biopsy, 扁桃腺生檢)으로 초기 임상 단계 혹은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도 확진(firm diagnosis, 確診)이 가능하다 [4]. 초기 진단은 추가 검사(further investigation, 追加檢査)를 필요 없게 하는데, 여기에는 뇌 생검(brain biopsy, 腦生檢)이 있으며, [아마도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잠재적인 처치 조건(treatable conditions, 處置條件)을 배제하는 데 필요하고, 광범위한 중추 신경계 손상이 발생하기 전에 사전에 개입하는 것이 목적인 잠재적인 처치법(treatment)과 임상 시험(clinical trials)의 출현으로 그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4]. 지금까지 편도선 생검은 임상에서 vCJD를 진단할 때 100% 감도(sensitivity, 感度)와 특이성(specificity, 特異性)를 보였다 [84, 94, 137, 138] [그리고 우리의 보고하지 않은 결과(and our unpublished data)].

vCJD가 말단 조직에서 특이적으로 발병한다는 사실은 대중 일반의 vCJD 감염을 조사하는 것이 목적인 유병률 탐색(prevalence screening, 有病率探索)의 근거가 됐다. 수술 과정 중에 익명의 환자에서 얻은 림프세망 조직을 사용한 프리온 탐색(screening)이 두 번 시행되었다 [81, 82]. 편도선이 충수(appendix, 蟲垂)보다 vCJD를 진단하는데 더 나은 것으로 보이지만 [144], 12,000개라는 상당히 많은 충수 표본을 대상으로 한 후향 탐색(retrospective screening, 後向探索)에서 양성 반응을 보이는 표본(specimens)이 세 개가 보고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81]. 2,000개의 편도선 표본을 이용한 시험적인 규모의 전향 연구(prospective study, 前向硏究)에서는, 이 방법이 실제로 매우 높은 감도를 보임에도, 프리온에 대해 어떠한 양성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82]. 그러나 이 검사에서 음성이 나왔다 하더라도 상당한 지역 감염(community infection)이 없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연구에서 사용한 표본 크기(sample size)가 상대적으로 작았으며, 인구통계적이며 연령과 관련한 요소(demographic and age-related factors)가 진단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장기간 지속되는 잠복기 중에는 프리온 감염 여부를 확인 못 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82]. 따라서 영국에서 vCJD 프리온 감염의 유병률(prevalence, 有病率)을 파악하기 위해 질병 관련 PrP를 찾아내기 위한 100,000여 개의 편도선 표본을 탐색할 목적으로 국가적인 대규모 연구(national large scale study)가 지금 영국 보건부(Department of Health)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다.

8. vCJD 프리온의 이차 전염

vCJD 특이한 발병과 더불어서, 알려지지 않았지만 임상적 증상이 없는 BSE 프리온 감염이 잠재적으로 매우 높은 유병률을 보인다는 사실은 혈액 제제(blood products, 血液製劑)와 오염된 수술 및 의료 도구를 통해 vCJD 프리온이 의원성으로 전염될 수 있다는 중차대한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80, 84, 142, 145].

실제로 수혈과 연관된 vCJD 프리온 감염의 세 가지 사례가 프리온에 노출되었다고 알려진 개체의 매우 작은 코호트(cohort)에서 이미 보고되었다 [85-87]. 프리온은 전형적인 살균 과정(conventional sterilization procedures)에서도 살아남으며, 프리온으로 오염된 외과용 스테인리스 수술 도구를 멸균(滅菌) 후 쥐에 이식했을 때, 눈에 띌 만한 효율로 쥐가 프리온에 감염되었다 [146, 147].

사전 예방적 위험 감소 수단(precautionary rick reduction measures)이 혈액과 혈액 제제에 이미 적용되고 있다 [85, 148]. 그러나 오염된 외과 수술 도구 사용으로 발생할 수 있는 vCJD 의원성 전염(iatrogenic transmission)에 대한 우려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vCJD가 쥐에 대한 감염할 때, 낮은 규정 농도(titer, 規定濃度) 수준의 전염성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심각하게 낮추는 감염 장벽(transmission barrier, 感染障壁)이 관계되어 있다 [77-79, 149]. vCJD 프리온 분석을 위해 사용할 감염 장벽이 없는 모델(transmission barrier-free model) 개발이 늦어지고 있기 때문에, 위험 예측 모델(risk assessment models) 구축을 위해서 PrPSc에 대한 높은 감도의 면역 측정법(immunodetection, 免疫測定法)을 이용해 혈액과 같은 말단 조직(peripheral tissue)에 존재하는 PrPSc 양에 대한 상한선(upper limit, 粳隔線)을 결정한다 [84, 141, 142]. vCJD에서 고농도의 PrPSc는 대부분 중추 신경계(central nerve system, 中樞神經系)과 림프세망 조직에서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외과적으로 중요한 조직 상당수가 뇌보다 10,000-100,000배 낮은 수준의 PrPSc 양을 보이지만 [84], vCJD 직장(rectum, 直腸)에서 프리온 전염성을 확인하는 연구 결과는, 비록 PrPSc를 거의 찾아내지 못했음에도, vCJD에서 나타나는 실험적으로 [확인한] 설치류 프리온 계통(experimental rodent prion strain)과 매우 유사한 PrPSc/프리온 전염성 비율(PrPSc/prion infectivity ratios)과 일치한다 [145]. 이러한 발견은 vCJD 프리온 이차 전염을 줄이려는 위험 감소 전략(risk reduction strategies)을 결정하는 PrPSc 분석의 가치(value)를 강하게 지지할 뿐만 아니라, vCJD의 의원성 전염이 오염된 내시경(endoscopes, 內視鏡), 생검용 겸자(biopsy forceps, 生檢用鉗子) 또는 외과 수술 도구 사용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를 더욱 증폭시킨다 [142, 145, 147, 150, 151].

vCJD 유행의 궁극적인 규모(eventual size)가 어느 정도일지 예측하는 연구는 매우 다양하지만, vCJD의 현재 사례를 근거로 한 최근의 몇몇 평가에서 전체적인 유행(total epidemic)은 상대적으로 작을 것이라는 전망을 했다 [152]. 그러나 핵심적인 불확실성(key uncertainties), 특히 잠복기 주요 유전적 영향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해 주의가 필요하다 [54, 55]. 중요한 것은, 그러한 모델로는 감염 개체 수를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로,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쿠루의 평균 잠복기는 대략 12년인 것으로 측정되었으며 [75], 인간의 시체에서 추출한 뇌하수체 호르몬 사용으로 발생한 iCJD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잠복기를 보인다 [70]. 그러나 쿠루의 최대 잠복기는 50년을 넘을 수 있다 [75]. 소와 인간 사이의 BSE 전염 장벽(transmission barrier)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직접 측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소와 쥐 사이의 BSE 전염 장벽은 비교 종말점 적정법(comparative endpoint titration, 比較終末點滴定法) 검사 덕분에 실험적으로 잘 밝혀졌다. BSE 프리온은 경구 복용(oral dosing, 經口服用) 등으로 쉽게 실험 쥐에 전염된다 [153]. C57B1/6라는 실험 쥐를 이용해 확인한 쥐의 LD50(50% 사망률[mortality, 死亡率]을 보이는 치사량[lethal dose, 치사량])은 소보다 약 500배 높다 [154]. 그리고 평균 잠복기도 세 배에서 네 배 증가한다. 인간 BSE 감염에서도 30년 혹은 그 이상의 평균 잠복기가 나타날 수 있다고 예상할 수 있으며, 일반적인 인간 수명(typical human lifespan)에 근접하는 (또는 그것을 능가할지도 모르는) 상당히 긴 잠복기가 이 경우에 나타날 수도 있다 [75]. 그러나 (인간 대 인간 전염이 원인인) vCJD 이차 전염의 평균 잠복기는 BSE 프리온에 노출되었 때 나타나는 vCJD 일차 전염보다 상당히 짧을 것으로 예상했다. vCJD 이차 전염의 첫 임상 사례에서 나타난 잠복기는 6-6.5년이었는데 [85, 87], 이것은 경구 경로(oral route, 經口經路)를 통한 감염이 유전성 경로(parental routes)보다 전형적으로 더 긴 잠복기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vCJD의 일차 전염으로 나타나는 가장 짧은 잠복기도 (이차 전염으로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길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가장 어린 환자의 사례를 근거로 vCJD 일차 전염의 최단 잠복기(the shortest incubation periods)를 사전 평가(preliminary estimate, 事前評價)했을 때 대략 12개월이었으며, 이는 vCJD 이차 전염의 최단 잠복기를 외삽(extrapolation, 外揷)해서 얻은 결과와 일치한다 [75].

VV와 MV 같은 PRNP 유전자 코돈 129번 유전형(PRNP codon 129 genotypes)을 가진 개체 또한 BSE 프리온에 의한 일차 전염 또는 vCJD에 의한 이차 전염 후에 상당히 긴 평균 잠복기를 보이는 병이 진행하는지는 불분명한 채로 남아 있다. PRNP 129MV 유전형의 피를 수혈한 사람의 림프세망 조직에 프리온이 감염되었음을 생검으로 확인했다는 보고가 있으나, 그는 파열된 복부 대동맥류(ruptured aortic aneurysm, -腹部大動脈類)로 죽었으며 신경 장애를 겪었는지에 대한 알려진 증거는 없다. 그리고 뇌에서 vCJD가 발생했을 때 나타나는 병적 특징(pathological features)도 없었다 [86]. 이 개체가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임상적으로 프리온 병이 진행되었을지 그리고 vCJD의 표현형이 나타났을지도 분명치 않다. 프리온 감염의 잠복(subclinical, 潛伏) 혹은 보균(carrier, 保菌) 상태가 동물 모델에서 확인되었는데 [134, 155], 이것은 인간 프리온 단백질을 발현하는 유전자 이식 쥐에 BSE 또는 vCJD를 접종하는 실험으로 밝혀졌다 [79, 131, 132, 136]. 이렇게 '인간화(humanized)'된 유전자 이식 쥐를 이용해 프리온에 대한 감수성을 모델링해서 얻은 결과에서 뜻하는 바는, 그런 유전형[MV 또는 VV]을 가진 개체도 프리온에 감염되기 쉽지만 다른 프리온 계통 형태(different prion strain types)를 선택하고 증식하기 때문에 vCJD와는 다른 질병 표현형이 진행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다 [131, 132]. PRNP 129MV 유전형의 피로 수혈받은 환자의 뇌에서 PrPSc가 검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프리온의 분자 계통 타이핑(molecular strain typing) 적용을 어렵게 한다. 비록 이런 사례를 나타내는 환자의 비장(spleen, 脾臟)에 존재하는 PrPSc가 vCJD에서 보이는 사례와 닮았다고 하지만,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분자 계통 타이핑 시험을 어렵게 하는 포스포텅스틱산 침전법(phosphotungstic acid precipitation, -沈澱法)이란 검사가 필요하다 [84]. 덧붙여, 인간 PrP 129V를 발현하는 유전자 이식 쥐에 vCJD를 접종했을 때에는 나타나지만 아직 인간에서 그 사례가 알려지지 않은 제5형 PrPSc에는 비슷한 글리코형(glycoform) 프로필이 존재한다 [77, 131, 132]. 이 환자에서는 vCJD를 일으키는 프리온과 다른 프리온 계통이 증식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중요한 것은, Peden과 그의 동료들이 비장과 자궁 림프절(cervical lymph node, 子宮-)에서 비정상 PrP가 검출되었다 할지라도 이 환자의 편도선, 충수, 혹은 대장(large intestine, 大腸)에 있는 림프 소절에서는 PrPSc를 찾아낼 수가 없었음을 보고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vCJD에 걸린 임상 사례에서 편도선 감염은 변함없이 나타났지만, Peden과 그의 동료들은 이런 사례가 (vCJD 일차 전염으로 추정되는 BSE에 대한 노출 경로가 경구가 아니라 정맥주사인) 감염 경로와 관련된 특징적인 발병을 나타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인간 대 인간) 이차 전염에는 종간 장벽이 없다는 사실이 질병 표현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PRNP codon 129MM 유전자형의 피를 수혈한 최근 사례 대부분에서 편도선을 검사했을 때 제4t형 PrPSc가 검출되었다는 사실은 [87], MV 유전형의 피를 수혈한 사람의 편도선에서 PrPSc가 보이지 않는 이유가 (수혈자의) PRNP 유전형과 아마도 특정 프리온 계통을 선택한 영향으로 나타난 게 아니냐는 반론이 나오게 했다. 이러한 발견은 BSE 프리온이 음식에 과도하게 노출된 영국과 다른 나라 내에서 지속적인 감시(continued surveillance)와 모든 형태의 인간 프리온 병에 대한 검사(investigation)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림 1. 인간 프리온 병에서 프리온 단백질과 관련된 질병의 특징. (A) 뇌에 제1-4형 PrPSc를 나타내거나 편도선 생검에서 제4t형 PrPSc를 보이는 조직을 proteinase K[단백질 분해 효소의 한 종류]로 처리한 균질 현탁액(homogenate, 均質懸濁液)을 3F4라는 단일 클론 항체(monoclonal antibody)를 사용해 면역블롯검사(immunoblot)를 한 결과. sCJD와 iCJD와 같은 일반적인 CJD 환자의 뇌에서는 제1-3형의 PrPSc를 보이나, vCJD에 걸린 환자의 뇌와 편도선에서는 제4형과 제4t형 PrPSc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B, C) sCJD 혹은 vCJD 환자의 뇌는 ICSM35라는 항(抗) PrP 단일 클론 항체(anti-PrP monoclonal antibody)을 사용해 면역조직학검사를 했을 때, 비정상적인 PrP 면역반응(immonureactivity)이 나타난다. sCJD에서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PrP 침전(deposition, 沈澱)은 대부분 방산 형태(放散形態)의 시냅스 모양과 같은 염색(diffuse, synapse staining) 패턴을 공통적으로 보이지만, vCJD 환자의 뇌에서는 링 모양의 해면체 공포(spongiform vacuole)로 둘러쌓인 둥근 아밀로이드 코어(amyloid cores)로 구성된 붉은 PrP 반점이 나타난다. 그림 B와 C에서 스케일 바(scale bar)는 50 μm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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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략한 소개

이 글은 2007년 『Biochimica et Biophysica Acta』라는 학술저널(research journal)에 게재된 인간 프리온 병(human prion disease)에 관한 소개 논문(review article)이다. 논문의 제목은 「Update on human prion disease」이며, 저자는 영국 University of College London의 Jonathan Wadsworth와 John Collinge이다. 의학과 생물학과 관련된 전문 용어가 많아서, 각 용어는 "괄호 ()" 안에 영어와 한자로 같이 표기했다. 본문 안에 [숫자]로 표시한 부분은 논문 원본에 기재된 참고문헌 번호이며, <숫자>로 표시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번역하면서 추가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따로 주석처리한 것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인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원 논문 <Wadsworth JDF, and Collinge J. 2007. Update on human prion disease. Biochim Biophys Acta 1772: 598-609>을 참조했음을 명시하기 바란다. [링크] 그리고 내 번역이 도움되었다면 "나의 번역이 도움되었음"을 표현해주는 것도 고맙긴 하겠다. 참고로, 번역 #1[링크], 번역 #2[링크], 번역 #4[링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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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간 프리온 병의 표현형 다양성(phenotypic variability)에 대한 분자 근거(molecular basis)

인간 프리온 병에서 관찰되는 임상적인 이종성(heterogeneity, 異種性)은 아직 설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각각의 프리온 분리주(isolates, 分離株) 또는 종류(strain, 種類)가 같은 숙주에서 전파 가능하며 특유의 임상적·병리학적 특징을 통해 생물학적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수년간 분명해졌다 [2, 101, 102]. 그러므로 sCJD와 다른 종류의 프리온 병에서 보이는 임상병리학적 이종성(clinicophathological heterogeneity, 臨床病理學的異種性)에 대한 비율(proportion, 比率)은 개별적인 인간 프리온 변종의 증식과 관계있을 것이다. 프리온 증식(propagation of prion)에 대한 단백질 유일 모델(protein-only model)의 체계(framework) 내에서, 각각의 임상적·신경병리학적 표현형은 서로 다른 물리화학적 특성(divergent physicolchemical properties)을 가진 각각의 PrPSc 이소형(isoform)의 증식으로 결정될 것으로 생각한다 [1, 2, 9-11, 103, 104]. 게다가 숙주의 유전체(host genome)도 각각의 비정상적인 PrP 이소형(isoform) 증식에 관여할 것으로 여겨진다 [79, 105, 106].

지금까지 우리는, 제한적인 proteinase K 분해법(proteinase K digestion)으로 처리한 뇌의 균질 현탁액(homogenate, 均質懸濁液)을 사용한 면역블롯검사(immunoblot)에서 구별 가능한, 산발성 그리고 후천성 프리온 병과 연관된 4가지 형태의 인간 PrPSc를 확인했다 [10, 12, 15] (그림 1). 제1-3형 PrPSc(PrPSc types 1-3)는 일반적인 CJD 환자(sCJD 혹은 iCJD)의 뇌에서 주로 나타나지만, 제4형 PrPSc는 vCJD 환자의 뇌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난다 [10, 12, 15]. 초기에 일반적인 CJD 환자에서 보이는 PrPSc 형태를 분류할 때 단지 제1형과 제2형 PrPSc라는 두 가지 밴드 패턴(banding patterns)만 묘사했는데 [11], Gambetti와 그의 동료들이 보고한 제1형 패턴은 우리가 발견한 것과 같으며 Gambetti의 제2형 패턴은 우리가 찾아낸 (proteinase K digestion으로 생성된) 제3형의 조각 크기와 같다 [13, 107] <1, 2>. 제4형 PrPSc는 주로 이당화(di-glycosylated, 二糖化)된 글리코형(glycoform, -型)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CJD에서 나타나는 PrPSc 타입과 (proteinase K digestion 방법으로 조각내지 않아도) 쉽게 구분되지만, 제4형 PrPSc는—비록 제4형 PrPSc를 제2b형으로 인식하는 대안적 분류법(alternative classification)에서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107]—다른 것과 확연히 구별되는 조각 크기를 보인다 [15].

산발성 그리고 후천성 프리온 병과 연관된 인간 PrPSc 형태를 확인(identification)하는 것과 더불어, 분자 계통 타이핑(molecular strain typing) 기법으로 유전성 인간 프리온 병에서 나타나는 표현형 이종성(phenotypic heterogeneity)에 대한 통찰(insight, 洞察)을 얻을 수 있다 [53, 108] <3>. 인간 프리온의 계통 다양성(human prion strain diversity)은 PrPSc 형태(conformation, 形態)와 당화(glycosylation, 糖化)의 다양성(variance, 多樣性)으로 발생한다는 현재 증거와 동일하게, 점(點) 돌연변이(point mutation)가 원인인 유전성 프리온 병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proteinase K digestion법으로 생성된) PrPSc 조각의 글리코형(glycoform) 비율은 전형적인 CJD와 vCJD에서 나타나는 것과 다르다 [108-112] <4>. 같은 PRNP 돌연변이를 가진 개체(individuals, 個體)라도 (proteinase K digestion법으로 분석했을 때) 다른 크기의 조각을 보이는 PrPSc를 증식할 수 있다 [108, 109, 113]. 그러나 명백히, 21-30 kDa 분자량 범위에서 PrPSc를 검출하는 것이 (형태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일관된 특징(consistent feature)은 결코 아니다 <5>. 대신 몇몇 사례, 특히 아밀로이드 반점(amyloid plaque)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우라면 7-15 kDa 범위에서 단백질 분해효소에 저항성을 가진 작은 조각(smaller protease-resistant fragments)이 나타난다 [53, 108-110, 113, 114]. 야생형(wild type, 野生型) PrP가 병적인 이소형(pathological isoform)으로 증식하는 것 또한 유전성 프리온 병에서 표현형 다양성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 [23, 115-117]. 이러한 총체적인 자료를 놓고 판단했을 때 PrPSc 이소형은 독특한 물리화학적 특성을 지닌 채 유전성 프리온 병에서 생성될 것이며, 이것은 proteinase K digestion법에 대한 감도(sensitivity, 感度)를 통해 반영되거나 또는 산발성·후천성 프리온 병에서 증식하는 PrPSc 형태와는 매우 다른 PrPSc/prion 전염성(infectivity, 傳染性) 비율로 (그 특성이) 반영될 것이다. 예를 들어, P102L 유전성 프리온 병에서는 서로 다른 물리화학적 특성을 지니며 단백질 분해효소 저항성이 있는 PrP의 세 가지 이소형이 증식할 수 있다. PrP 102L에서 얻은 개별적인 비정상 이형태체(conformers, 異形態體) 두 가지는 (proteinase K digestion법으로 분석했을 때) 21-30 kDa 혹은 약 8 kDa 크기에서 단백질 분해효소 저항성을 나타내는 조각이 나타나지만 [23, 108-110, 118], 야생형 PrP의 비정상적 이형태체에서는 대략 21-30 kDa에 해당하는 조각(proteolytic fragments)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23]. PrP 102L과 야생형 PrP에서 (proteinase K digestin법으로) 생성된 약 21-30 kDa 크기의 조각 중에 글리코형(glycoform)이 차지하는 비율은 둘 사이에 차이가 별로 없지만, sCJD와 후천성 CJD 환자에 있는 야생형 PrP를 proteinase K digestion법으로 분석해서 얻은 조각의 크기와 비교했을 때에는 두드러진 차이가 나타난다 [23]. 잠재적인 신경 독성(neurotoxicity, 神經毒性) 및 양적인 차이와 더불어, 이들 개별적인 질병 관련 PrP 종(species, 種)에 대한 신경병리학적 타겟팅(neuropathological targeting)의 차이를 통해 P102L 유전성 프리온 병에서 어떻게 다양한 표현형 발생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분자 메커니즘(molecular mechanism)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모든 유전성 프리온 병이 같은 메커니즘으로 발병하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PRNP A117V 돌연변이는 PrPSc를 만들지 않고도 신경 질환(neurological disease, 神經疾患)을 일으킬 것으로 여겨지는 막 단백질 형태(transmembrane forms)의 PrP(PrPctm)를 생성한다 [58]. 모든 유전성 프리온 병이 접종으로 전염될 수 있는지도 현재 알려지지 않았다.

인간 PrPSc 형태에 대한 통합된 국제적 분류법(unified international classification)과 명명법(nomenclature, 命名法)을 만들려는 노력은 sCJD에서 나타나는 일부 PrPSc 아형(subtype, 阿型)의 아미노 말단 형태(N-terminal conformation)가 시험관에서 금속 이온 점유(metal-ion occupancy) [12, 15] 혹은 용매(solvent, 溶媒)의 pH 때문에 [119-121] 변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복잡해졌다. 게다가, 같은 뇌 안에 서로 다른 PrPSc 형태가 공존(co-existence, 共存)한다는 증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13, 15, 21, 23, 108-110, 122-127]. pH 단독으로도 sCJD에서 나타나는 PrPSc의 아미노 말단의 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이 최근에 제안되었지만 [120, 121], 이런 해석은 다른 연구에서 지지받지 못했으며 [12, 17, 124], 대신 pH 7.4로 엄격히 조절된 실험 조건에서 구리(copper) 혹은 아연(zinc) 이온이 존재할 때에만 특정 PrPSc 구조가 나타났다 [12]. 방법론적 차이(methodological differences), 명명법, 그리고 PrPSc에 있는 상대적으로 미묘한 생화학적 차이(relatively subtle biochemical difference)에 대해 의견의 일치가 있지 않았지만, 인간 프리온 병에서 나타나는 표현형 다양성은 개별적인 물리화학적 특성이 있는 질병 관련 PrP 이소형(disease-related PrP isoform)과 상당 부분 관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프리온 연구자 사이에서 의견이 매우 일치한다 [9, 18, 124, 127, 128]. 중요한 것은, 단백질 분해효소에 민감한 PrP의 병적 이소형(pathological isoform)이 동물과 인간 프리온 병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명백해지고 있으므로 [18, 104, 129, 130] 단백질 분해효소 검사법(protease digestion)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진단법의 개발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형태 의존적 면역분석법(conformation-dependent immunoassay)은 최근에 인간 프리온 병에서 매우 높은 진단 민감도(diagnostic sensitivity, 診斷敏感度)를 보였음이 보고되었다 [18, 104].

PrP의 대체 구조(alternative conformations, 代替構造) 혹은 집합 상태(assembly states, 集合狀態)로 인간 프리온 병에서 나타나는 임상병리학적 이형성(heterogeneity)에 대한 분자 기질(molecular substrates, 分子基質)을 파악할 수 있다는 가설(hypothesis)은 (그리고 이것이 다른 형태의 인간 프리온 계통의 존재와 관련이 있다는 가설은) 유전자 이식 쥐(transgenic mice)를 이용한 전염 실험(transmission experiments)으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129번 위치가 발린(V) 또는 메티오닌(M)으로 되어 있는 인간 PrP 단백질을 발현하는 유전자 이식 쥐를 사용한 (전염) 실험에서, 이러한 다형성이 인간 PrP 이형태체(conformers, 異形態體)의 증식 및 이와 연관된 신경병리증 패턴(pattern of neuropathology)의 발생 모두에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10, 77, 79, 131, 132]. 생물리학적 측정(biophysical measurements)에 따르면, 프리온 계통 선택(protein strain selection)에 대해 129번에 위치한 아미노산의 종류[M 혹은 V]가 강력한 효과를 보이는 이유는 PrPSc 또는 그것의 전구체(precursor, 前驅體) 구조(conformation) 혹은 그러한 구조를 형성하는 속도(kinetics, 速度)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PrPC의 구조 형성(folding, 構造形成), 역학(dynamics, 力學) 혹은 안정성(stability, 安定性)에는 측정 가능한 수준에서 아무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133]. 이들 연구 결과는 프리온 전염 장벽에 대한 구조 선택 모델(a conformational selection model of prion transmission barriers)과 일치하며 [2, 80, 131, 134] (이 모델은 최근에 효모의 프리온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재현되었다 [135]), 프리온 계통 다양성은 PrP의 구조(conformation)와 당화(glycosylation)의 조합에 따라 나타난다고 주장함으로써 프리온 감염에 대한 단백질 유일 모델을 뒷받침하고 있다 [2]. 이러한 발견 속에서 우리는 사람에서 프리온 병 감수성(prion disease susceptibility)과 표현형(phenotype)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주요 유전자좌(locus, 遺傳子座)로서 PRNP 유전자 129번 코돈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분자 근거(molecular basis)를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우리는 유전자 이식 쥐를 이용한 모델링 연구(transgenic modeling studies)에서 vCJD/BSE 프리온 계통에 노출된 결과로 생성될 수 있는 V129와 M129라는 인간 PrP에 대해 공통적으로 선호되는 PrPSc 구조가 없음을 알았다 [131]. 접종물(inoculum, 接種物)의 종류와 숙주(host, 宿主)의 PrP에 나타나는 129번 코돈(codon)의 유전자형(genotype, 遺傳子型)에 따라 BSE에서 유래된 프리온(BSE-derived prions)의 일차 전염 또는 이차 전염(primary or secondary transmission)은 네 가지 다른 프리온 질병 표현형(disease phenotype)이 나타날 수 있다. 인간 PrP M129에 대해 동형 접합자인 유전자 이식 쥐(transgenic mice)에서는 각각 sCJD 또는 vCJD와 일치하며 신경병리증(neuropathologies, 神經病理症)을 보이는 제2형 혹은 제4형 PrPSc가 증식하지만, PrP V129에 대해 동형 접합자인 유전자 이식 쥐에서는 다른 패턴의 신경병리증이 나타나는 제5형 PrPSc가 증식하거나 또는 PrPSc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임상적인 프리온 병(clinical prion disease in the absence of detectable PrPSc)이 발생한다 [77, 131]. 접종물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질병 표현형이 인간의 PrP 129MV를 발현하는 이형 접합성 유전자 이식 쥐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132]. 그러나 제4형 PrPSc의 증식은 붉은 PrP 반점(florid PrP plaques)이 대량으로 발생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기 때문에, PrP 129MV 유전형에서는 표현형 가운데 어떤 것도 vCJD에서 나타나는 신경병리학적 표현형(neuropathological phenotype)을 닮지 않았다 [132]. 신뢰할만한 분자 및 병리학적 재현(recapitulation, 再現)이 가능한 동물 모델(animal model)에서조차도 외삽(extrapolation, 外揷)할 때 주의를 기울어야 하지만 [79, 131] (그림 2), Manson과 그의 동료들의 발견과 매우 비슷한 우리의 연구 결과에서 일차 인간 BSE 프리온 감염(primary human BSE infection)과 의원성 경로(iatrogenic routes)를 통한 vCJD 프리온 이차 감염(secondary infection)은 단일 질병 표현형(single disease phenotype)에 한정(限定)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136]. PrPSc 형태에 따른 모든 인간 프리온 병 사례를 계층화(stratification, 階層化)한다면 BSE 노출 패턴(BSE exposure patterns) 또는 vCJD 프리온의 의원성 출처(iatrogenic sources)와 관계된 특정 PrPSc 아종(subtypes, 亞種)의 상대적인 빈도 변화를 재빨리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2, 79, 131, 132].



그림 1. 인간 프리온 병에서 프리온 단백질과 관련된 질병의 특징. (A) 뇌에 제1-4형 PrPSc를 나타내거나 편도선 생검에서 제4t형 PrPSc를 보이는 조직을 proteinase K[단백질 분해 효소의 한 종류]로 처리한 균질 현탁액(homogenate, 均質懸濁液)을 3F4라는 단일 클론 항체(monoclonal antibody)를 사용해 면역블롯검사(immunoblot)를 한 결과. sCJD와 iCJD와 같은 일반적인 CJD 환자의 뇌에서는 제1-3형의 PrPSc를 보이나, vCJD에 걸린 환자의 뇌와 편도선에서는 제4형과 제4t형 PrPSc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B, C) sCJD 혹은 vCJD 환자의 뇌는 ICSM35라는 항(抗) PrP 단일 클론 항체(anti-PrP monoclonal antibody)을 사용해 면역조직학검사를 했을 때, 비정상적인 PrP 면역반응(immonureactivity)이 나타난다. sCJD에서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PrP 침전(deposition, 沈澱)은 대부분 방산 형태(放散形態)의 시냅스 모양과 같은 염색(diffuse, synapse staining) 패턴을 공통적으로 보이지만, vCJD 환자의 뇌에서는 링 모양의 해면체 공포(spongiform vacuole)로 둘러쌓인 둥근 아밀로이드 코어(amyloid cores)로 구성된 붉은 PrP 반점이 나타난다. 그림 B와 C에서 스케일 바(scale bar)는 50 μm를 가리킨다.

그림 2. 유전자 이식 쥐에서 vCJD의 분자 그리고 신경병리학적 표현형의 재현(recapitulation). vCJD 프리온이 Tg(HuPrP129M+/+ Prnp0/0)-35라는 유전자 이식 쥐[Tg35라 명명]에 일차 감염해서 제4형 PrPSc가 증식했고 vCJD의 신경병리학적 특징(hallmark)인 붉은 PrP 반점(florid PrP plaques)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vCJD 프리온이 Tg(HuPrP129V+/+ Prnp0/0)-152라는 유전자 이식 쥐[Tg152라 명명]에 일차 감염했을 때는 제5형 PrPSc와 Tg152 쥐에서 이차 감염이 일어난 후에도 지속하는 개별적인 신경병리학적 패턴이 나타났다. 그러나 Tg35 쥐에서 이차 감염이 발생하면 제4형 또는 제2형 PrPSc가 증식하며 각각 vCJD 또는 sCJD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신경병리증(neorupathologies)이 나타난다. (A) vCJD와 sCJD(PRNP 129 MM 유전자형) 또는 유전자 이식 쥐에서 얻은 뇌의 균질 현탁액(homogenate, 均質懸濁液) proteinase K로 처리한 다음에 3F4라는 항(抗) PrP 단일 클론 항체(anti-PrP monoclonal antibody)로 면역블롯 검사(immunoblot)를 한 대표 결과. 뇌 표본 이름은 각 레인(lane) 위에 표시되어 있고, PrPSc 종류는 각 레인 아래에 기재(記載)되어 있다. (B) PrP가 양성으로 나타나는 반점(PrP-positive plaques)을 포함해 비정상적인 PrP 면역 반응성(immunoreactivity)을 보이는 유전자 이식 쥐의 뇌를 3F4라는 항(抗) PrP 단일 클론 항체(anti-PrP monoclonal antibody)로 면역조직화학 분석(immunohistochemical analysis)을 한 대표 결과. 스케일 바(scale bar)는 100 μm를 가리킨다. 아래 그림은 비정상적인 PrP 침전(deposition, 沈澱)의 지역적 분포(regional distribution)을 나타낸다. 초록색 상자 모양은 모식도 위에 나와 있는 PrP가 염색된 부위를 찍은 사진의 뇌 내 위치를 가리킨다.

<역자참조 >

<1> proteinase K digestion: proteinase K는 단백질 분해 효소의 일종으로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에서 지방족 아미노산(aliphatic amino acid, 脂肪族-)[이소류신(isoleucine), 류신(leucine), 발린(valine), 알라닌(alanine), 프롤린(proline), 그리고 메티오닌(methionine)]의 카르복실 말단(carboxyl terminus)과 방향족 아미노산(aromatic amino acid, 芳香族-)[페닐알라닌(phenylalanine), 트립토판(tryptophan), 히스티딘(histidine), 그리고 타이로신(tyrosine)]의 아미노 말단(amino terminus) 사이를 자른다. 그러므로 PRNP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했다면 이 유전자에서 발현되는 PrPSc는 구조적으로 다른 형태를 보일 것이며, PrPC 단백질을 proteinase K로 처리한 대조군(control)과 비교했을 때 다른 형태의 잘린 조각 패턴을 보일 것이다.
<2> immunoblot: Western blot이라고도 한다. 다음 블로그를 참조하시오. [링크]
<3> 분자 계통 타이핑(molecular strain typing): 분자생물학적, 유전학적, 그리고 생화학적 기법을 통해 종의 계통을 분석해 확인하는 방법을 통상 일컫는다.
<4> 생물학에서 conformation은 구조 혹은 형태라는 뜻으로 동시에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번역에서도 두 가지 표현을 상황에 따라 달리 번역했다.
<5> 돌턴(Dalton, 약자로 Da)은 영국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 기상학자며 근대 화학사에서 원자설을 처음 제안한 존 돌턴(John Dalton, FRS, 1766년 9월 6일~1844년 7월 27일)의 이름에서 따온 상대적인 분자량(molecular weight, 分子量) 단위이다. 1 kDa은 1000 Da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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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략한 소개

이 글은 2007년 『Biochimica et Biophysica Acta』라는 학술저널(research journal)에 게재된 인간 프리온 병(human prion disease)에 관한 소개 논문(review article)이다. 논문의 제목은 「Update on human prion disease」이며, 저자는 영국 University of College London의 Jonathan Wadsworth와 John Collinge이다. 의학과 생물학과 관련된 전문 용어가 많아서, 각 용어는 "괄호 ()" 안에 영어와 한자로 같이 표기했다. 본문 안에 [숫자]로 표시한 부분은 논문 원본에 기재된 참고문헌 번호이며, <숫자>로 표시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번역하면서 추가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따로 주석처리한 것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인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원 논문 <Wadsworth JDF, and Collinge J. 2007. Update on human prion disease. Biochim Biophys Acta 1772: 598-609>을 참조했음을 명시하기 바란다. [링크] 그리고 내 번역이 도움되었다면 "나의 번역이 도움되었음"을 표현해주는 것도 고맙긴 하겠다. 참고로, 번역 #1[링크], 번역 #3[링크], 번역 #4[링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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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전성 프리온 병(Inherited prion disease 혹은 familial CJD, fCJD)

대략 15%에 달하는 인간 프리온 병은 PRNP 유전자의 상염색체 우성 병원성 돌연변이(autosomal dominant pathogenic mutation, 常染色體優性病原性突然變異)와 연관이 있다 [14, 22, 52-54]. PRNP 유전자에서 발생하는 병원성 돌연변이가 어떻게 프리온 병을 일으키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았지만, 대부분 돌연변이는 PrPC가 PrPSc로 전이하는 경향성을 크게 해 프리온 단백질의 열역학적 안정성(thermodynamic stability, 熱力學的安定性)을 떨어뜨려 병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하는데, 돌연변이 발생만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증거도 존재한다 [55, 56]. 실험적으로 조작해 만든 프리온 유전자 돌연변이(experimentally manipulated mutations of the prion gene)는, 검출할 수 있을만한 양의 단백질 분해효소에 저항성을 보이는 PrP 단백질(protease-resistant PrP)을 만들지 않음에도, 자발적인 신경변성(spontaneous neurodegeneration, 自發的神經變性)을 일으킬 수 있다 [57, 58]. 이러한 발견은 모든 fCJD가 같은 메커니즘으로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낳으며, 이런 점에서 모든 fCJD가 접종으로 전염 가능한지는 현재 알려지지 않았다 [52].

30개 이상의 상염색체 우성 병원성 PRNP 돌연변이(autosomal dominant pathogenic PRNP mutations)가 보고되었다 [2, 3, 53, 54]. 적절한 임상 환경(clinical setting)에서 병원성 PRNP 돌연변이 확인(identification)은 유전성 프리온 병 진단과 돌연변이에 따른 질병의 하위분류(subclassification, 下位分類), 그리고 가족력이 있는 집단(affected families)을 대상으로 하는 증상 전 유전자 검사(presymptomatic genetic testing)에 유용하다 [4, 52, 54, 59]. 전통적으로, 유전성 프리온 병은 발현되는 임상 증후군(presenting clinical syndromes)에 따라 GSS, CJD 또는 FFI의 세 가지 하위분류(subdivision, 下位分類)로 나뉜다. 게르스트만-슈트로이슬러-샤인커 병(Gerstmann–Straüssler–Scheinker, GSS) 환자에서는 일반적인 CJD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전형적으로 더 긴 임상 경로를 거치며 나중에 발생하는 치매와, 추체로 특징(pyramidal features, 錐體路特徵)를 동반한 만성적인 소뇌실조(cerebellar ataxia, 小腦失調)가 나타난다 [52]. 치명적 가족성 불면증(fatal familial insomnia, FFI)는 진행성 불치성 불면증(progressive untreatable insomnia), 자율신경 기능장애(dysautonomia, 自律神經機能障礙)와 치매, 선택적 시상변성(selective thalamic degeneration, 選擇的視床變性)의 특징이 나타나며, PRNP 유전자의 178번 codon에서 일어나는 미스센스 돌연변이(missense mutation)와 공통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만, PRNP 유전자에 어떠한 돌연변이가 발생하지 않은 산발적 FFI(sporadic FFI)의 사례가 보고된 적도 있다 [61, 62]. 신기하게도, 몇몇 가족은 CJD나 GSS 표현형에도 일치하지 않는 사례뿐만 아니라 유사 CJD/GSS 사례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표현형 다양성(phenotypic variability, 表現型多樣性)을 보이기도 한다 [19, 53, 54, 63-66]. (fCJD에서는) 진행성 치매, 소뇌실조(cerebellar ataxia, 小腦失調), 추체로 징후(pyramidal signs, 錐體路徵候), 무도병(chorea, 舞蹈病), 간대성 근경련증(myoclonus, 間代性筋痙攣症), 추체외로 특징(extrapyramidal features, 錐體外路特徵), 가성구징후(pseudobulbar signs, 假性驅徵候), 발작(seizures, 發作) 그리고 근위축증적 특징(amyotrophic features) 등이 다양한 조합으로 나타난다. 이런 비전형적인 프리온 병은, 비록 PrP 면역조직학검사에서 보통 양성으로 판명되더라도, 해면상뇌병증(spongiform encephalopathy, 海綿狀腦病症)에 대한 전형적인 조직학적 특징(classical histological features)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64]. 다른 종류의 돌연변이를 가진 개인 사이에 중복되어 나타나는 표현형의 존재(the existence of phenotypic overlap)와, 심지어는 PRNP 유전자에 같은 돌연변이를 가지는 가족 구성원에서도 그러한 표현형이 나타난다는 것은, 유전성 프리온 병의 정확한 분류는 순전히 돌연변이에 근거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19, 67]. 유전성 프리온 병에서 나타나는 광범위한 표현형 다양성과 이 병에서 잘 나타나는 알츠하이머 병(Alzheimer’s disease) 같은 잘 알려진 다른 형태의 신경변성 조건(neurodegenerative conditions)을 흉내 내는 특징(ability to mimic) 때문에, PRNP 분석은 진단 미확정의 발광 장애(dementing disorder, 發狂障碍) 혹은 운동실조 장애(ataxic disorder, 運動失調障碍) 증상을 보이는 모든 환자에게 고려되어야 한다 [19, 63, 64, 68].

5. 후천성 프리온 병(Acquired prion disease)

인간 프리온 병이 전염성 질환이기는 하지만, 후천성 프리온 병은 최근까지도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편이다.

5.1. 의원성 CJD(iatrogenic CJD, iCJD)

의료 처치과정(medical procedure) 중에 발생하는 의원성 CJD(iatrogenic CJD, 醫原性-)의 두 가지 주요 원인은 경질막 조직편(dura matter graft, 硬質膜組織片) 이식(implantation, 移植)과 인간 사체(human cadavers, 人間死體)의 뇌하수체(pituitary glands, 腦下垂體)에서 추출한 성장호르몬(growth hormone)으로 환자에게 처치(treatment, 處置)했을 때이다 [69. 70] <1>. 그리고 앞의 두 가지보다 드물기는 하지만, 각막이식(corneal transplantation, 角膜移植), 오염된 EEG 전극(electrode, 電極)의 이식(implantation), 오염된 기구(instruments)나 장치(apparatus)를 사용한 외과수술(surgical operations)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69, 70] <2>. iCJD에서 나타나는 임상증상은 병의 원인, 특히 인간 프리온에 노출된 경로(the route of exposure to human prions)와 관련 있다 [52, 70, 71]. 말초 부위에 감염된 경우(peripheral routes of infection)는 전형적으로 오랜 잠복기를 보이며, 보통 치매보다는 근위축증(amyotrophy, 筋萎縮症)이 임상적 특징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유사 쿠루증후군(kuru-like syndrome) 증상이 나타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경질막 조직편 이식수술로 인간 프리온에 노출된 환자는, 프리온 감염이 뇌에서 아주 가까운 지점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전형적으로 sCJD와 유사한 임상증상을 보이지만 [72], 예외적인 사례로 보고되어 있다 [73].

5.2. 쿠루(Kuru)

가장 잘 알려진 후천성 인간 프리온 병의 예인 쿠루(Kuru)는 파푸아 뉴기니(Papua New Guinea) 동부 고지대(Eastern Highlands)에 사는 포레 어족(Fore linguistic group, -語族)에서 행해진 식인행위(cannibalism, 食人行爲)로 전염되어 나타났다 [28, 52, 74, 75]. 쿠루의 두드러진 임상증상은 진행성 소뇌실조(progressive cerebellar ataxia, 進行性小腦失調)며, sCJD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치매는 매우 늦게 나타나거나 혹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전구 증상(prodome, 前驅症狀)과 세 가지 임상 단계(clinical stages, 臨床段階)로 보행 단계(ambulatory stag, 步行段階), 상좌 단계(sedentary stage, 常座段階) 그리고 3차 단계(tertiary stage, 3次段階)가 알려졌다 [52, 74, 75] <3>. 잘 알려진 대로, 쿠루는 사람이 인간 프리온에 감염되었을 때 잠복기가 50년 이상 지속할 수도 있다는 사례를 보여줬다 [75]. PRNP 코돈 129 유전자형(PRNP codon 129 genotype)는 쿠루의 잠복기와 감수성(susceptibility, 感受性)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쿠루 유행(kuru epidemic)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생존자는 이 대립유전자에 대해 이형 접합자(heterozygote, 異型接合子)였음이 밝혀졌다 [27, 28, 75]. 코돈 129번에 대한 이형 접합자에 대한 분명한 생존 이득(survival adavantage, 生存利益)이 포레족(Fore族)에 작용한 선택압(selection pressure, 選擇壓)이라는 강력한 근거를 제시한다 [28, 25] <4>. 그러나 전 세계적인 단상형 다형성(haplotype diversity, 單相型多形性) 분석연구와 PRNP 유전자의 코딩/논코딩 대립유전자 빈도(allele frequency of coding and non-coding polymorphisms of PRNP) 조사 결과를 보면, [이형 접합자 이익(heterozygote advantage) 때문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변이(variation, 變異)가 있는] 이 유전자좌(locus, 遺傳子座)에 작용하는 균형 선택(balancing selection, 均衡選擇)이 진화적으로 매우 오래되었고 지리적으로 광범위함을 뜻하고 있다 [28] <5>. 균형 선택에 대한 증거는 단지 인간 유전자 몇 개에서만 나타난다. 다섯 대륙에 나타나는 식인행위에 대한 생화학적·물리학적 증거로 판단했을 때, 식인행위는 선사 시대(human prehistory, 先史時代)에 프리온 병을 유행시켰고, 그 결과로 PRNP 유전자에 대해 균형 선택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한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28].

5.3. 변형 CJD(variant CJD, vCJD)

1995년 이후 영국에서 새로운 형태의 인간 프리온 병인 변형 CJD(variant CJD, vCJD)가 출현했고 [76] 이것의 원인이 소에서 소해면상뇌병증(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줄여서 BSE, -海綿狀腦病症)을 일으키는 프리온과 같다는 사실이 실험적으로 밝혀진 결과 [10, 77-79], BSE 유행이 영국과 다른 나라의 공중 보건(public health)에 개별적인 그리고 아마도 심각한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며 전세계적으로 우려를 표명했다 [4, 80]. 종간 장벽(species barrier, 種間障壁)을 뛰어넘는 프리온 병에 나타나는 극단적으로 장기간 지속되는 다양한 잠복기가 뜻하는 바는 이 병이 나타나기 시작한 후 몇 년 뒤에야 프리온 병이 유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75, 80-83]. 그 사이에,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 병을 몸 안에서 키우고 있고, 수혈(blood transfusion, 輸血), 혈액 제제(blood products, 血液製劑), 조직 혹은 장기 이식, 그리고 다른 형태의 의원성 경로(iatrogenic routes, 醫原性經路)를 통해 프리온을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켰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우리는 직면했다 [80, 84-87].

지금까지, 인간에서 BSE 감염으로 나타난 임상증상은 PRNP 코돈 129번이 메티오닌으로 되어 있는 동형 접합자(homozygote, 同型接合子)에서 발생한 vCJD에서만 확인됐다. vCJD의 신경병리학적 특징은 일반적인 CJD(sCJD와 iCJD)에서 보이는 증상과는 사뭇 다른데, 붉은 PrP 반점(florid PrP plaque)의 다량 존재와 [76, 88] 뇌 내 제4형 PrPSc(type 4 PrPSc) 증식이 주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0, 15] (그림 1). vCJD의 초기 임상증상은 일반적인 CJD보다는 쿠루와 매우 닮았으며 행동장애와 정신과적 장애(behavioral and psychiatric disturbances), 말초 감각 장애(peripheral sensory disturbance) 그리고 소뇌실조(cerebellar ataxia, 小腦失調)가 나타난다. 공통으로 나타나는 초기 정신과적 특징은 우울증(depression), 위축증(withdrawal), 불안증(anxiety), 불면증(insomnia), 그리고 [주변환경에 대한] 무관심함[혹은 무반응](apathy, 無關心)이다. 드물게 신경학적 증상(neurological symptoms)이 정신과적 증상에 선행해서 나타나기도 한다. 초기에 공통적으로 발현되는 신경학적 특징에 대해 보고된 바는 없지만, 지각이상(paresthesia, 知覺異常) 그리고/혹은 수족 통증(pain in the limbs, 手足痛症)이 절반에 가까운 사례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상당 비율의 환자는 증상이 시작된 후 4개월 이내에 기억력 감퇴(poor memory), 통증, 감각계 관련 증상(sensory symptoms), 걸음걸이 부동성(unsteadiness of gait, -不動性) 그리고 구음장애(dysarthria, 構音障碍)와 같은 신경학적 증상을 호소한다. 방향감각상실(disorientation, 方向感覺喪失), 환각(hallucination, 幻覺), 편집증적 사고(paranoid ideation, 偏執症的思考), 작화증(confabulation, 作話症), 약화된 자립자행(impaired self-care, -自立自行) 그리고 가장 공통적인 신경학적 특징[소뇌 징후(cerebellar signs, 小腦徵候), 무도병(chorea, 舞蹈病) 그리고 시각계 관련 증상(visual symptoms)]이 병이 진행하면서 늦게 나타난다 [89]. 병의 지속기는 평균 환자 생존기간이 약 14개월로 [36], 일반적인 CJD가 약 5개월인 것과 비교했을 때 [21], 비교적 길다. 더욱이, 일반적인 CJD가 중위 연령 68세에 주로 사망하는 만발성 질환(late onset disease, 晩發性疾患)인 반면에 [21], vCJD가 발병하는 중위 연령은 26세이다 [36, 89]. EEG 검사에서 전체적인 둔화하는 패턴이 나타나지만 일반적인 CJD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주기적 변화(characteristic periodic changes)는 관찰되지 않으므로, EEG는 vCJD를 진단하는데 별 도움이 안 된다. CSF 14-3-3 단백질 존재여부(存在與否)도 vCJD 진단에 도움이 안 되는데, 보통은 음성(negative)으로 나타난다 [90]. vCJD가 상당히 진행된 사례에서 가장 유용한 비침습성 조사(non-invasive investigation, 非侵襲性調査)는 자기공명 뇌영상(magnetic resonance neuroimaging 혹은 MR neuroimaging, 磁氣共鳴腦映像)으로 특히 액체감약 반전회복(fluid attenuated inversion recovery, FLAIR) 시퀀스(sequence)이다 [91]. 시상베개(pulvinar 혹은 posterior thalamus, 視床-)에서 좌우대칭 신호(bilaternal signal) 증가가 T2 강조영상(T2-weighted images)에서 나타남이 초기 사례에서 보고됐다 [92]. 다른 형태의 인간 프리온 병에 걸린 환자를 대조군(control, 對照群)해 36개의 조직학적으로 확인된 vCJD 사례를 자기공명 뇌영상으로 분석한 후향평가(retrospective review, 後向評價)에서, 시상베개 징후(pulvinar signs, 視床--徵候)가 vCJD가 상당히 진행한 사례에서 자주 나타난다고 보고됐다 [93]. 그러나 병에 걸린 지 평균 15개월이 된 환자를 대상으로 (이 전에) 평균 10.5개월째 되는 시점에서 자기공영 뇌영상 검사를 했을 때, 시상하부 징후가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조직학적으로 확인된 vCJD 환자 사례도 이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하지만) 특징적인 자기공명 뇌영상 소견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vCJD로 진단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편도선 생검(tonsil biopsy, 扁桃腺生檢)으로 vCJD라 진단된 27가지 사례를 포함한 일련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검사에서 81% 감도(sensitivity, 感度)와 94% 특이성(specificity, 特異性)으로 진단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최근에 보고됐다 [94]. 이들 연구가 나타내는 것처럼, 시상베개 징후가 vCJD에 반드시 특이적인 것은 아니며, 이러한 MRI 형태는 sCJD와 [95] 신생물 딸림증후군적 대내변연계 뇌염(paraneoplastic limbic encephalitis)를 [96] 포함한 드문 사례에서도 보고되어 있다 [97-100].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정 조직(firm tissue, 固定組織)에 근거한 vCJD 진단은 PrPSc의 특징적인 아형(sub-type, 阿型)을 검사하기 위해 환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 편도선 생검으로 이루어진다 (다음 글 참조).




그림 1. 그림 1. 인간 프리온 병에서 프리온 단백질과 관련된 질병의 특징. (A) 뇌에 제1-4형 PrPSc를 나타내거나 편도선 생검에서 제4t형 PrPSc를 보이는 조직을 proteinase K[단백질 분해 효소의 한 종류]로 처리한 균질 현탁액(homogenate, 均質懸濁液)을 3F4라는 단일 클론 항체(monoclonal antibody)를 사용해 면역블롯검사(immunoblot)를 한 결과. sCJD와 iCJD와 같은 일반적인 CJD 환자의 뇌에서는 제1-3형의 PrPSc를 보이나, vCJD에 걸린 환자의 뇌와 편도선에서는 제4형과 제4t형 PrPSc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B, C) sCJD 혹은 vCJD 환자의 뇌는 ICSM35라는 항(抗) PrP 단일 클론 항체(anti-PrP monoclonal antibody)을 사용해 면역조직학검사를 했을 때, 비정상적인 PrP 면역반응(immonureactivity)이 나타난다. sCJD에서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PrP 침전(deposition, 沈澱)은 대부분 방산 형태(放散形態)의 시냅스 모양과 같은 염색(diffuse, synapse staining) 패턴을 공통적으로 보이지만, vCJD 환자의 뇌에서는 링 모양의 해면체 공포(spongiform vacuole)로 둘러쌓인 둥근 아밀로이드 코어(amyloid cores)로 구성된 붉은 PrP 반점이 나타난다. 그림 B와 C에서 스케일 바(scale bar)는 50 μm를 가리킨다.

<역자참조 >

<1> implantation과 transplantation는 통상 이식(移植)이라는 한국어로 번역하지만, 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즉, implantation은 "a surgical procedure that places something in the human body"이고 transplantation은 "an operation moving an organ from one organism (the donor) to another (the recipient)"인데, 전자기계 장치 혹은 보철 등을 몸에 이식하는 것이라면, 후자생체조직을 몸에 이식하는 것을 뜻한다.
<2> apparatus와 instrument도 한국어로 번역할 때 통상 비슷한 단어—기구 혹은 기계—로 번역하는데, 엄밀히 풀이하자면 apparatus는 "equipment designed to serve a specific function"으로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장비 일반을 가리키는 반면에, instrument는 "a device that requires skill for proper use"로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는 도구를 뜻한다.
<3> "sedentary stage"는 한국어로 특별히 번역된 적이 없이, 내가 임의로 상좌 단계(常座段階)라 표현했다. 참고로 sedentary는 "앉아서 하는, 앉아 있는, 앉은 자세의"를 뜻한다.
<4> 내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이 매끄럽지 못하다. 물론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부분은 특히 더 하다. "The clear survival advantage for codon 129 heterozygotes provides a powerful basis for selection pressure in the Fore."
<5> 이 부분도 해석이 매끄럽지 못하다. “However, an analysis of worldwide haplotype diversity and allele frequence of coding and non-coding polymorphisms of PRNP suggests that balancing selection at this locus (in which there is more variation than expected because of heterozygote advantage) is much older and more geographically widesp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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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는 말

이 글은 2007년 『Biochimica et Biophysica Acta』라는 학술저널(research journal)에 게재된 인간 프리온 병(human prion disease)에 관한 소개 논문(review article)이다. 논문의 제목은 「Update on human prion disease」이며, 저자는 영국 University of College London의 Jonathan Wadsworth와 John Collinge이다. 글이 좀 긴 관계로 한번에 모든 번역 내용을 올리지 않고, 시간이 나는 대로 몇 차례 나눠서 블로그에 올릴 예정이다. 의학과 생물학과 관련된 전문 용어가 많아서, 각 용어는 "괄호 ()" 안에 영어와 한자로 같이 표기했다. 본문 안에 [숫자]로 표시한 부분은 논문 원본에 기재된 참고문헌 번호이며, <숫자>로 표시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번역하면서 추가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따로 주석처리한 것이다(물론 지금은 번역하느라 바빠서 하나도 없다. 나중에 주석을 달 예정이다. 나중에 ... 나중에 ... 나중에 ...). 혹시라도 이 글을 인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원 논문 <Wadsworth JDF, and Collinge J. 2007. Update on human prion disease. Biochim Biophys Acta 1772: 598-609>을 참조했음을 명시하기 바란다. [링크] 그리고 내 번역이 도움되었다면 "나의 번역이 도움되었음"을 표현해주는 것도 고맙긴 하겠다. 난 개인적으로 연구저작물에는 '저작권'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누가 저작권 가지고 딴지를 건다면 ... 저작권은 ... 저작권은 ... 저작권은 .... 저작권은 .... 나도 잘 모르겠다.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겠다.

어쨌든, 나는 생물학(그것도 바이러스학) 전공이기는 하지만, 프리온[영어권에서는 프라이언이라고 발음하는 것 같은데, '프라이언'인지 '프라이온'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난 미국인이 아니니까]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다. 그래서 광우병과 관련된 의학적·생물학적 지식을 습득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작업을 계획했고, 나 혼자만 알기엔 좀 아쉬운 감이 있어서 내가 번역한 논문 내용을 블로그에 공개하기로 했다. 나도 모르는 부분이 많으므로 번역에 미흡한 점이 많겠지만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앞으로 이 논문은 계속 업데이트될 것이다. 특히 용어와 관련된 부분은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앞으로 주석을 계속 덧붙일 예정이다. 참고로, 번역 #2[링크], 번역 #3[링크], 번역 #4[링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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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Introduction)

프리온 병(prion disease)은 치명적인 불치성 신경변성질환(incurable neurodegenerative disease, 不治性神經變性疾患)으로 인간에게 발병하는 것으로는 크로이츠펠트-야코프 병(Creutzfeldt–Jakob disease, CJD), 게르스트만-슈트로이슬러-샤인커 병(Gerstmann–Straüssler–Scheinker disease, GSS), 치명적 가족성 불면증(fatal familial insomnia, FFI), 변형 CJD(variant CJD, vCJD), 쿠루(Kuru) 등이 있다 [1, 2]. 이 질병의 주요 특징(central feature)은 체내에서 인코딩(encoding)하는 세포 단백질인 PrPC가 비정상적인 이소형(isoform)인 PrPSc로 번역 후 전환(post-translational conversion)하는 것이다 [1, 2] 이러한 전이(transition, 轉移)는 분자 수준에서 나타나는 공유결합 수정(covalent modification)보다는 단지 형태 변화(conformational modification)로 나타나며, 그 결과로 PrPC에 단백질 효소 분해(proteolytic degradation)에 대한 부분적인 저항성(resistance, 抵抗性)과 세제 불용성(detergent insolubility, 洗劑不溶性)이 나타난다. 인간 프리온 병은 (1) 생식세포 수준에서 프리온 유전자(PRNP)에 돌연변이(mutation, 突然變異)가 발생해 후대에 유전되어(inherited) 나타나거나, (2) 프리온에 감염된 조직이 접종(inoculation, 接種)이나 음식물 섭취(dietary exposure)를 통한 감염(infection, 感染), (3) PrPSc를 만드는 보기 드물게 산발적인 사건 때문에 발병한다 [2, 3, 4]. 유일하지는 않지만, 비정상적인 PrP 이소형이 전염성 감염 인자(transmissible infectious agent) 혹은 프리온의 주요 성분(principal components)임을 지지하는 많은 증거가 있다 [1, 2, 5, 6]. 뇌에 PrPSc 축적을 수반하는 신경변성의 메커니즘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지만 [7], 단백질 분해효소 복합체(proteasome)의 기능 저해에 관여하는 세포 자살 메커니즘(apoptotic mechanism)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많은 증거가 있다. [8] 프리온의 종류(strain, 種類)와 분리주(isolates, 分離株)가 많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프리온 증식(prion propagation)에 대한 단백질 유일 모델(protein-only model)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어떻게 단백질 유일 감염 인자(protein-only infectious agent)가 사람에게 개별적인 질병 표현형(disease phenotype, 疾病表現型)을 나타낼 수 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프리온 계통 다양성(prion strain diversity)은 PrP 자체 내에서 인코딩되며, 인간 프리온의 표현형 다양성(phenotypic diversity, 表現型多樣性)은 비정상적인 PrP 이소형의 물리화학적 성질(physicochemical property)을 달리하는 것과 관계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실험적 증거가 현재 많이 제시되고 있다 [9-18].

2. 인간 프리온 병의 병인(etiology, 病因)과 임상적인 특징(clinical features)

인간 프리온 병은 발병원인에 따라 (1) 유전성(inherited), (2) 산발성(sporadic), (3) 후천성(acquired)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2]. 뚜렷한 병인(distinct etiologies)을 보이는 인간 프리온 병은 개별적 질병단위(disease entities, 疾病單位)라기보다, 지금은 임상병리학적 증후군(clinico-pathological syndromes, 臨床病理學的症候群)으로 나타나는 넓은 범위의 임상증상(clinical presentations 혹은 clinical symptoms)과 연관해 있다 [3, 4, 19].

3. 산발성 CJD(sporadic CJD, sCJD)

인간 프리온 병으로 보고된 사례(case, 事例) 가운데 약 85% 정도가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CJD이며,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백만 명당 1-2명꼴로 남녀 동등한 빈도로 발생한다 [20, 21]. sCJD 발병 원인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체세포 내 PRNP 유전자 돌연변이(somatic PRNP mutation)로 인한 발병과 [20, 22, 23] 매우 드문 확률적 사건(rare stochastic event)으로 PrPC가 자발적으로 PrPSc로 전환해서 발병한다는 가설이 제안되었다 [22]. PrP 단백질의 129번 위치에서 나타나는 다형성(polymorphism, 多形性)[여기에 메티오닌(methionine, 약어로 M)이나 발린(valine, 약어로 V)이라는 아미노산이 위치한다]은 프리온 병에 대한 감수성(susceptibility, 感受性)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21, 24-28]. 약 38%의 유럽인이 메티오닌 대립 형질(allele, 對立形質)에 대해 동형 접합자(homozygote, 同型接合子)며[MM형이라고 부른다], 11%가 발린에 대한 동형 접합자[VV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나머지 51%가 이형 접합자(heterozygote, 異型接合子)다. PRNP 유전자 129번 코돈(codon)의 동형 접합성(homozygosity, 同型接合性)은 sCJD와 후천성 CJD로 발병할 가능성을 높인다. [21, 24-28] 대부분의 sCJD는 이러한 다형성에 대해 동형 접합성을 보이는 사람에게 발생한다. 이런 감수성 인자(susceptibility factor, 感受性仁慈)는 후천성 CJD와도 관계가 있는데,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연구된 임상 사례에서 vCJD는 PRNP 유전자의 129번 코돈에서 메티오닌에 대한 동형 접합성[즉, MM형]이었다. 또한, PRNP 유전자 감수성 단상형(PRNP susceptibility haplotype, -感受性單相型)이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PRNP 유전자좌(locus, 遺傳子座) 혹은 그 주변에 sCJD에 대한 또 다른 유전적 감수성(genetic susceptibility)이 있음을 뜻한다 [29, 30].

전형적인 sCJD(classical sCJD)는 간대성 근경련증(myoclonus, 間代性筋痙攣症)을 동반한 급진행형 다초점성 치매(rapidly progressive multifocal dementia, 急進行形多焦點性癡呆) 증상을 보인다. 보통 45-75세 연령대에서 병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86세의 중위연령(median age, 中位年齡)에서 사망한다 [21]. 발병 몇 주 후에 무운동 함구증(akinetic mutism, 無運動緘口症)으로 발전하며 5개월의 중위 지속기간(median disease duration, 中位持續期間)을 거친다 [21]. 사례의 대략 3분의 1에서 나타나는 전구증상적 특징(prodromal features, 前驅症狀的特徵)으로 피로(fatigue), 불면증(insomnia), 우울(depression), 체중감소(weight loss), 두통(headaches), 전신권태(general malaise), 불분명한 통증지각(ill-defiend pain sensations, -痛症知覺) 등이 나타난다. 의식저하(mental deterioration, 意識低下) 및 간대성 근경련증과 함께 추체외로 징후(extrapyramidal signs, 錐體外路徵候), 소뇌실조(cerebellar ataxia, 小腦失調), 추체로 징후(pyramidal signs, 錐體路徵候), 피질맹(cortical blindness, 皮質盲)과 같은 부수적인 신경학적 특징(neurological features)도 자주 나타난다. CJD에만 특이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14-3-3 단백질, 신경에만 특이적으로 발현되는 에놀라제(neuronal-specific enolase, NSE), 그리고 S-100이 뇌척수액(cerebrospinal fluid, 腦脊髓液)에 많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것도 적절한 임상 상황(clinical context)에서는 진단에 도움이 될 수 있다 [21, 31-36]. 심전도(electroencephalogram, EEG, 心電圖) 검사를 통해서도 진단에 도움이 될 만한 특징적인 유사주기성의 가파른 파동 활동(pseudoperiodic sharp wave activity)이 측정될 수 있지만, 전체 임상 사례의 약 60%에서만 나타난다 [21].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확산강조 자기공명영상(diffusion-weighted magnetic resonance imaging, diffusion-weighted MRI)에서 측정한 피질 신호 변화(cortical signal changes)는 CJD 진단에 매우 도움이 된다 [37-42]. CJD에 대한 신경병리학적 확인(neuropathological confirmation)은 해면체 변화(spongiform change, 海綿體變化), 신경손실(neuronal loss, 神經損失), 그리고 별아교세포증(astrocytosis, -牙細胞症) 검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PrP 아밀로이드 반점(amyloid plaques, - 斑點)은 보통 CJD에서 나타나지 않지만 [43], 면역조직화학법을 이용한 PrP 검사(PrP immunohistochemistry) 결과는 거의 항상 양성(positive, 陽性)으로 나온다 [43-45].

sCJD의 비정형적 형태(atypical forms, 非定型的形態)는 잘 알려졌다. CJD 사례의 10%가 2년 이상 지속하는 장기간 임상 경로(prolonged clinical course)을 보인다 [46]. CJD 사례의 약 10%에서 인지장애(cognitive impairment, 認知障碍)보다는 소뇌실조(cerebellar ataxia, 小腦失調)가 나타나는데, 이런 경우는 운동실조성 CJD(ataxic CJD)라고 부른다 [47]. CJD의 하이덴하인 변종(Heidenhain’s variant of CJD)은 후두엽(occipital lobes, 後頭葉)의 중증병발(severe involvement, 重症竝發)을 동반한 피질맹(cortical blindness, 皮質盲)이 우세하게 나타나는 경우를 가리킨다. 일본에서 주로 임상 사례가 보고된 CJD의 범뇌염형(panencephalopathic type, 汎腦炎形)은 회백질(gray matter, 灰白質)의 해면체 공포형성(spongiform vacuolation, 海綿體空胞形成)을 동반한 대뇌백질(cerebral white matter, 大腦白質)의 광범위한 변성(extensive degeneration)이 나타나는 경우를 말한다 [47-49]. CJD의 근위축성 변종(amyotrophic variants, 筋萎縮性變種)은 발병 초기에 중증 근육쇠약(muscle wasting, 筋肉衰弱)이 나타난다고 보고되었다. 그러나 근위축증(amyotrophy, 筋萎縮症)을 동반한 치매(dementia, 癡呆) 사례 대부분은 실험적으로 전염되지 않았으며, CJD와 관련이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50,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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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은 노동절(勞動節)이다. 정부와 자본가는 "근로자의 날"이라 부르며 노동절의 의미를 퇴색(退色)하려 하지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본연(本然)의 의미는 역사의 시련을 거치면서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절은 무엇을 위한 날인가? 그것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노동자가 하나 된 목소리와 단결된 연대(連帶)로 자본주의 체제의 온갖 부조리함과 억압에 저항(抵抗)하는 투쟁의 날이며,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숭고(崇高)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희생한 선배 노동자의 투쟁을 기념하는 날이다. [1] 이런 의미에서 노동절이 드러내는 상징성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노동절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오늘날 모습을 드러냈는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전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가 흔히 노동절을 부를 때 사용하는 메이데이(May Day)란 말은 원래 고대 켈트(Celt)의 벨테인(Beltane) 축제와 고대 게르만(German) 지역의 발푸르가의 밤(Walpurgis's Night)이라는 축제에서 유래한 고대 북반구에서 5월 1일에 전통적으로 치러진 봄 축제(spring festival)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2] 영국에서는 꽃과 리본 등으로 장식한 메이폴(Maypole) 주변에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메이퀸(May Queen, 5월의 여왕)'으로 뽑았고, 아일랜드에서는 모닥불을 피워 여름이 오고 긴 겨울밤이 물러나길 기원했으며, 독일 등지에서도 영국과 아일랜드와 비슷한 형식으로 봄의 도래(到來)를 축하했다. 그러나 역사의 우연인지 혹은 처음으로 메이데이를 제안한 자의 의도인지는 지금에 와서 파악할 수 없지만, 역사의 진보(進步)는 '5월 1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으니 그것은 바로 "숭고한 희생과 단결된 저항"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며, 노동자계급에 새로운 세상이 오길 기원하는 잔칫날이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절의 탄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산업혁명 그리고 노동자의 탄생

산업혁명이 한창인 18~19세기 무렵.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인류의 생산방식은 1만 년 전의 수렵, 채취 사회를 농경 사회로 전환한 장기간의 농업혁명에 맞먹는 혹은 그 이상의 파급력(波及力)을 보인 최대규모의 역사적 변화의 원동력이었다. 이런 변화는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 저지대(低地帶), 벨기에 일부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지만, 머지않아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3] 여기에는 상호연관된 일련의 기술적 진보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는 생산력의 엄청난 증대 및 인간과 상품의 이동시간 단축이라는 혁신(革新)을 낳았다. 겉으로 보기에 세상은 좋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사회적 비극도 만연(蔓延)했다. 특히 산업혁명 전에 일어난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은 영국 농촌을 급속히 해체했으며, 이 때문에 농경지를 잃은 농부 다수는 생존을 위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이 지배하는 냉혹한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헐값으로 팔기 시작했다. [그림 1] [4, 5]

 

그림 1. 산업혁명 시절 공장(왼쪽)과 노동자의 모습(오른쪽) [출처: Patrick's Topics Blog (왼쪽), Writings on History & Media (오른쪽)]


수많은 사람의 삶이 근본부터 바뀌기 시작했으며, 특히 농촌의 붕괴는 도시의 급격한 성장을 불러왔다. 생존을 위해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게 되었지만,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저임금에 기반을 두는 소규모 산업—특히 섬유산업과 광업—에서 과도한 노동착취는 다반사(茶飯事)였으며, 심지어 여성과 어린이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족의 생계를 벌기 위해, 그리고 성인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임금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작업장에 투입되어 혹사당했다. [그림 2] [6, 7] 순전히 생존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시장"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 노동자의 삶은 더욱 자본가에 종속되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노동을 팔지 못한 사람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자본가의 노동착취 또한 가혹했다. 자본에 의한 인간통제(人間統制)가 심화하면서 자본가는 노동자가 작업장에서 조직적으로 일하도록 할 규율(規律)을 만들었고, 엄격한 규율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속에서 노동자는 영혼을 잃어버린 생체기계(生體機械)가 되어가고 있었다. [8] 노동자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의 삶은 매우 비참했으며, 18~19세기까지 도시에서는 언제나 농촌보다 훨씬 높은 빈도로 각종 전염병이 유행했고, 거주 환경은 매우 열악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사망률이 출생률을 웃돌기도 했다. [그림 3] [9]

 

그림 2. 산업혁명 당시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어린이들 [출처: The Industrial Revolution]


 

그림 3. 산업혁명 당시 주거환경 모습 [사진출처: FROGBLOG (왼쪽), History Cookbook (오른쪽)]


마침내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봉건시대의 제도적인 계급차이는 자본에 의한 물질적 계급차이로 치환(置換)됐다. 봉건영주와 귀족 그리고 농노라는 계급은 완전히 소멸하거나 혹은 있더라도 유명무실(有名無實)했지만,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부르주아(bourgeois)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가지의 큰 범주로 나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계 안에서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자본이 지배하는 국가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비록 초기에는 조직적이지 못 했지만, 지배계급의 무자비한 탄압은 노동자의 조직화한 단결을 형성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저항의 구호는 다양했다. 저임금, 열악한 노동환경, 과도한 노동강도 그리고 지나친 노동시간 등 노동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철폐(撤廢)의 대상이었다. 이것 가운데 '노동절' 탄생의 산파(産婆) 역할을 한 것은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대대적인 투쟁이었다. [10] 초기에는 임금인상을 위한 투쟁이 많았다. 그러나 노동착취가 극심해지면서 노동시간 단축은 임금인상보다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으로 급부상했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 초기에 노동자 일반의 노동시간은 최고 18시간에 달했으며, 영국 맨체스터(Manchester) 부근 한 공장의 방적공은 물 마시러 가는 것조차 금지당한 채 고온의 작업장에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받기도 했다. [11] 이렇게 하루 14~18시간이라는 장시간 노동을 줄이기 위한 노동자의 투쟁은 더디긴 하지만 조금씩 결실을 보고 있었으며, "8시간 노동 운동(Eight-Hour Movement)"에 다다랐을 때 "메이데이"의 역사적 순간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날: 1886년 미국의 노동자 대투쟁과 제2인터내셔널

첫 시작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였다. "하루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프롤레타리아의 휴일 기념식(proletarian holiday celebration)"이란 아이디어가 나왔고, 1856년 4월 21일에 총파업과 더불어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사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자 지도부는 이 행사를 단 한 번만 치르기로 계획했었다. 그러나 "노동자를 위한 날"은 오스트레일리아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큰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휴일 기념식"을 매년 정기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12]

미국에서도 "하루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한 대대적인 선동의 물결이 일었고 철강, 철도, 광산 부문 등에서 공장점거와 파업 등의 격렬한 투쟁이 발생했다. [13] 원래 프랑스계 미국인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시위는 정부와 자본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5월 1일에는 단순한 시위를 넘어선 총파업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14] 하워드 진(Howard Zinn)의 글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15]

1886년 봄에 이르면 8시간 노동을 위한 운동은 이미 성장해 있었다. 5월 1일, 이제 5년째로 접어든 미국노동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은 8시간 노동을 거부하는 모든 공장에서 전국적인 파업을 벌일 것을 호소했다.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 단장 테런스 파우덜리(Terence Powderly)는 우선 고용주와 피고용인을 상대로 8시간 노동에 대해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파업에 반대했지만, 노동기사단의 모임들은 파업 계획을 세웠다. 기관사 노동조합(Brotherhood of Engineers)의 위원장은 "두 시간 덜 일하면 두 시간 더 빈둥빈둥 돌아다니고 두 시간 더 술을 마시게 된다"고 말하며 8시간 노동에 반대했지만, 철도 노동자들은 위원장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8시간 노동제 운동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전국 1만 1,562개 공장에서 35만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디트로이트(Detroit)에서는 1만 1,000명의 노동자가 8시간 노동제 행진을 벌였다. 뉴욕에서는 2만 5,000명이 브로드웨이(Broadway)를 따라 횃불 행진을 벌였는데 제빵공 노동조합(Baker's Union)의 3,400명이 행렬의 선두에 섰다. 시카고에서는 4만 명이 파업을 벌였고, 4만 5,000명이 파업 예방조치로 노동시간 단축을 얻어냈다. 시카고의 모든 철도가 운행을 멈췄고 산업 대부분이 마비됐다. 가축수용소 역시 문을 닫았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노동자 투쟁은 매우 격렬했으며 규모 또한 상당했다. 그렇지만 자본가의 반격(反擊)도 만만치 않았다. 노동자의 연대를 분쇄하기 위해 주 민병대와 경찰에게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했으며, 친(親)자본가적인 신문에서는 연일 노동자 투쟁을 비난하며 사회안정을 위해 국가와 주 정부가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5월 3일,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졌다. 맥코믹 수확기 공장(McCormick Harvester Works) 앞에서 파업파괴자 세력과 맞서 싸우고 있던 노동자와 그 동조자가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다수가 부상을 입고 4명이 죽었다. [15]

1886년 5월 4일, 맥코믹 사건에 대한 규탄(糾彈)과 8시간 노동제를 촉구하기 위한 집회가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Haymarket Square)에서 열렸다. [16] 이곳에 180명가량의 경찰이 시위진압을 위해 파견되었고 곧 '군중해산'을 명령했다. 그렇게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하는 와중에 정체불명의 괴한이 경찰을 향해 폭탄을 던져 순식간에 경관 66명이 다치고 그 중 7명이 죽었으며, 경찰이 군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한 총격으로 시민 몇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그림 4] [15, 16]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 아무런 증거도 없었음에도 경찰은 시카고 대투쟁을 이끌었던 무정부주의 지도자 8명을 체포했고, 일리노이(Illinois) 주 판사는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항소는 기각(棄却)됐다. 헤이마켓 광장의 폭탄 테러와는 아무 관련도 없었던 그들은 사상이 불순(不純)하다는 이유로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더군다나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연설을 위해 집회에 참석했던 새뮤얼 필든(Samuel Fielden) 혼자뿐이었다. [15, 16]

그림 4. 헤이마켓 사건 당시를 묘사한 삽화 [출처: World Warrior of So Cal]


이 사건은 국제적인 관심과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미국과 일리노이 주 정부를 비난하며 8명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재판이 있은 지 1년 뒤에 일리노이 주 정부는 엘버트 파슨즈(Albert Parsons), 오거스트 스파이즈(August Spies), 아돌프 피셔(Adolph Fischer), 조지 엥겔(George Engel) 등 4명을 교수형에 처했으며, 루이스 링(LouisLingg)은 감방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입에 문 채 터뜨려 자살했다. [15, 16] 사행 집행은 전 국민을 분노케 했고, 시카고에서는 수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행렬이 이어졌다. 미국 전역에서 아직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자들의 석방을 위한 대대적인 서명운동이 벌어졌으며, 결국 신임 일리노이 주지사 존 피터 올트겔드(John Peter Altgeld)의 지시로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져 남은 3명—새뮤얼 필든(Samuel Fielden), 오스카 니비(Oscar Nebee), 마이클 슈와브(Michael Schwab)—은 무사히 석방되었다. [15, 16]

헤이마켓 사건이 발생한 후 수년 간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과 법률대응으로 미국의 노동자 투쟁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1888년에 미국노동연맹은 1886년 당시의 투쟁분위기를 다시 살리기 위해 1890년 5월 1일에 대규모 투쟁을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Bastille) 함락 100주년인 1889년 7월 14일에 파리에서 열린 제2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회의(International Worker's Congress)에서 마르크스(Karl Marx)를 포함한 많은 사회주의자는 1884~1886년의 기간 동안 진행된 미국의 노동자 대투쟁에 대한 소식을 보고받았으며, 그때의 투쟁을 재개(再開)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미국 노동자의 투쟁에 고무(鼓舞)되었고, 파리 회의(Paris Congress)는 "5월 1일"을 "국제적인 대투쟁의 날(great international demonstration)"로 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미국에서 계획하고 있던 1890년 5월 1일의 8시간 노동 쟁취에 대한 적극적 지지라는 형식을 띠고 있었다. [10, 14] 그 결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작해 미국에서 결실을 본 메이데이의 전통은 12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노동자의 단결을 과시하는 역사적인 날"로 기념되고 있다. [17]

초기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개략

지금까지 노동절의 기원에 대해 살펴봤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국제적인 노동자 대투쟁의 날"로 "5월 1일"이 결정된 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시카고 총파업이 원인이었지만, 그 파급은 미국과 유럽 지역에 국한(局限)되지 않았고 노동자가 있는 곳이라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노동자 단결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의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는 급격히 무너지고 일본을 필두로 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이 본격화됐으며, 여러 제국주의 열강과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어야만 했다. [그림 5] [18] 문제는 이러한 침략과 수탈의 대상이 고스란히 조선 민중(民衆)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 탓에 땅과 생계수단을 잃어버린 농민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야만 했는데, 일부는 농촌에 남아 소작농이 되거나 지주에게 고용되어 각종 농업노동을 담당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많은 경우 터전을 떠나 도시, 개항장, 광산, 공장, 철도 건설 공사장 등으로 흘러가 본격적인 임금노동자의 삶을 살아갔다. 하지만 일본 자본가가 운영하는 작업장 대다수에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매우 심했으며 온갖 이유를 들먹이며 자주 임금을 깎아내렸다. [19, 20]

그림 5. 강화도 조약을 묘사한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조선의 노동자도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조직을 만들고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투쟁에 나선 것은 광산노동자였고, [21] 이후 여러 곳에서 산발적인 투쟁이 일어났다. 개항 5개월째인 1898년 2월 전남 목포에서는 부두노동자들이 자본가의 수탈에 저항에 파업을 벌였으며, 1901년 2월에는 경인철도회사, 1909년 7월에는 경성전기회사 등 다양한 작업장에서 노동자는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등을 내걸며 투쟁을 벌였다. [22] 파업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의 내면에는 자신을 노동자라 여기는 주체성에 대한 의식이 싹텄으며, 전술적으로도 효과적인 투쟁 전개를 위해 좀 더 조직된 저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22]

일제의 지배가 본격화할 무렵, 1920년대 만해도 대략 80여 군데의 노동단체가 조직되었으며, 1930년대까지는 그 수가 560여 개에 이르게 되었다. 초창기 노동단체 대부분은 선진적인 지식인이나 노동운동가가 주도한 지역 중심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역량이 점차 쌓여가면서 노동운동은 지식인이나 엘리트 중심이 아닌 노동자 다수에 의한 운동으로 변모(變貌)했다. [23] 1920년, 마침내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와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라는 전국 단위의 노동자 조직이 결성되었다. [24, 25] 그러나 이들 전국 조직은 총독부의 탄압이라는 외적 요인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내적 요인으로 갖가지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다가 분열하기 시작했고,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쳐서, 1922년에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農聯盟會)'를, 1924년에는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을 각각 설립했다. [26, 27]

특히 조선노동연맹회는 3.1운동 이후 산발적으로 치러졌던 노동절 행사를 1923년에 처음으로 전국적인 차원의 운동으로 추진했다.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을 주장하며 각지에서 휴업 등의 투쟁을 벌였고, 시위, 강연회, 간담회, 연설회, 전단 살포, 야유회, 산놀이, 운동경기 등을 펼쳤다. 이렇게 계급적 관점을 고수하는 전국조직으로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활발히 활동했지만, 파벌주의와 분파투쟁에 휩쓸려 투쟁역량의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26, 28] 그러나 조선노동연맹회의 맥(脈)을 잇는 전국적인 노동단체는 이후로도 계속 설립되었고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투쟁역량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노동자 투쟁은 1929년 발생한 원산 총파업(元山總罷業)에서 절정에 달했으며, 그 지속성, 강인성, 격렬성, 조직성에 있어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노동운동사에서도 보기 드문 노동쟁의였고 우리나라 노동자계급의 성장을 잘 나타낸 투쟁이었다. [31, 32] 비록 원산 총파업을 마지막으로 해방 전까지 노동자 투쟁은 당분간 침체(沈滯)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원산에서 보여준 투쟁력은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발전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그림 6]


그림 6. 원산 총파업 당시의 모습을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 [출처: 사노련]


해방 이후 노동운동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고, 한반도는 억압적인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 전 지역은 생산위축, 물가상승, 노동자 실질임금 하락, 실업자 증가 등 사회•경제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다. 특히 공업생산력은 1939년 남한 만의 생산액이 5억 2793만 5천 엔(원)이었던 데 비해, 1946년에는 1억 5219만 2천 원으로 떨어져서 감소율이 71.2%나 되었고, 심한 생산위축 속에서 물가지수(物價指數)는 해방 전과 비교했을 때 엄청나게 급등했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으로 말미암은 전시(戰時) 통제경제의 해제, 투기활동의 성행, 패전 당시 일본의 조선은행권(朝鮮銀行券) 남발과 식량수집자금 방출, 미군정의 통화 남발, 생산활동의 일시적 정지 그리고 북한지역민의 월남과 재외동포의 귀환으로 인한 인구증가 등의 원인이 더해져 1943년과 1947년을 비교할 때 사업장 수는 1만 65개소에서 4,500개소로 55.3% 감소했고, 노동자 수도 같은 기간에 25만여 명에서 13만여 명으로 무려 47.5% 줄었다. 그 결과로 1946년 남한의 실업자 총수는 110만여 명이 되었으며 물가상승과 실업률 증가는 자연히 노동자의 실질임금을 떨어뜨렸다. [33]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인 자본가가 소유했던 회사와 공장을 접수해 노동자의 손으로 직접 운영한다는 '자주관리(自主管理)'를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바탕이 되었던 것은 지금까지 일본인 아래서 땀 흘려 일해 온 공장이 자신의 것이라는 노동자의 의식이었다. 게다가 해방 후 생필품 부족으로 말미암은 전국적인 생활고(生活苦) 해결을 위해서도 이러한 노력은 필요했다. 그래서 독립과 함께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와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도 공장노동자가 공장을 접수하여 자주적으로 관리하도록 추진했다. [34] 그리고 미군정이 들어선 후, 대중적 조직기반의 중요성을 인식한 좌익세력은 노동조합을 적극 조직했고, 1945년 11월 5~6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해방 후 첫 전국적 노동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이하 전평)이 결성되었다. [35] 그러나 미군정과 전평 사이의 대립은 여러 부분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의 결렬과 "정판사 위폐사건(精版社僞幣事件)"을 계기로 급속도로 악화하였다. [36, 37]

전평이 결성되고 사회주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우익진영에서도 1946년 3월 10일에 대한독립촉성노동총동맹(大韓獨立促成全國勞動總同盟, 이하 대한노총)을 결성했으며, 이후 대한노총은 미군정의 절대적인 지원과 우익세력의 비호 아래 조직을 늘리면서 전평의 투쟁과 활동을 분쇄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섰다. [36, 38] 이에 맞서 전평은 1946년 9월 제1차 총파업, 1947년 3월 제2차 총파업 그리고 1948년 2월 제3차 총파업으로 미군정과 우익세력에 대항했으나 미군정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붕괴 직전까지 몰렸고, 1948년 5월 남조선 단선단정 반대투쟁 총파업위원회를 구성하여 마지막 저항을 했으나 경찰, 청년단체, 대한노총의 기민한 진압작전으로 완전히 분쇄되었다. [39]

일련의 노동운동 패배와 해방 이후 민중의 참혹함 가운데서도 지주와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미국과 유엔 등을 통해서 원조받은 물자를 대중 일반에게 배분하거나 침체된 한반도의 경제상황을 일으키는데 사용하기는커녕 대부분 위정자(爲政者)의 잇속을 채우는 데만 이용했으며, 일본인의 재산으로 한국에 남아 있던 '귀속재산(歸屬財産)' 또한 거의 헐값으로 권력과 가까운 자, 식민지시대부터 연고를 가진 상공인, 식민관료 등 친일인사와 자본가계급에 넘겨줬다. 설령 "유상매수 유상분배" 원칙에 따라, 운 좋게 농민이 귀속재산이었던 농지를 분배받았다 하더라도, 여러 경제적 어려움으로 또다시 소작인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40, 41]

노동절 행사도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에 의해 탄압받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후 전평은 1946년 20만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노동절 기념식을 치렀지만, [26] 1947년 3월 제2차 총파업 이후 개최한 노동절 행사는 미군정의 좌익세력 불법화와 이승만 정권의 반공 국시로 말미암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42] 게다가 제3차 총파업이 실패로 끝나고 극심한 탄압으로 좌익진영이 와해되어 지하로 숨어든 이후, 좌익진영이 주최하는 노동절 행사는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하지만 우익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대한노총의 노동절 기념행사는 독재정권을 찬양하는 충성대회로 변질되고 말았다.

노동절 수난사 (1): 대한노총의 생일이 된 노동자의 날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엄청난 물적·인적 손실을 낳은 참혹한 전쟁으로 진보적 노동운동 세력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의 총아(寵兒)를 이끌 중심이 아닌, 이승만 정권의 들러리이자 충실한 나팔수로서 대한노총(大韓勞總)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렇지만 전쟁의 와중에 그나마 그들이 이끌 수 있는 노동자 수는 예전보다 상당히 줄어있었다. 결국 할 일 없는 어용 노총이 관심을 쏟아 부은 것은 이승만 정권에 대해 충성을 다하는 '정치꾼' 놀이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공금횡령은 예삿일이나 마찬가지였고, 파벌싸움은 끊이질 않았다. 말 그대로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연속이었다.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에도 이들의 행태는 변함없었고, 전쟁과 전쟁 중에도 여전했던 정부와 자본가의 수탈에도 대한노총은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며, 결국 (비록 어용일지언정) 그나마 남아 있던 대한노총에 대한 노동자의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43] 수난(受難)을 겪은 것은 노동절 역시 마찬가지였다.

1957년 5월 1일 노동절 기념식이 끝난 후였다. 이 날 치른 메이데이 행사는 "노동자를 위한 날"이 아니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한노총의 이승만에 대한 충성대회였지만, 상황은 한 편의 촌극(寸劇)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같은 해 5월 22일, 이승만은 "메이데이는 공산괴뢰도당들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는 날이니 반공하는 우리 대한의 노동자들은 메이데이와 구별되는 참된 명절을 제정하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상식적인 노조였다면 이승만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결사적으로 반대했을 것이다. 설령 어용이라도 대외적인 이미지를 고려한다면 표면적으로나마 "이승만의 궤변"에 유감(遺憾) 정도의 입장은 표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노총의 행동은 일사분란(一絲不亂)했다. 이승만에 대한 충성에 목 말랐던 대한노총 지도부는 곧바로 대의원대회의 결의를 열어 노동절을 대한노총의 창립일인(1946년 3월 10일)인 3월 10일로 변경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보사부(保社部)의 인준을 거쳐 1959년 3월 10일부터 (이승만 정권의 '국시(國是)'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제1회 노동절 기념행사가 열리게 됐다. [44, 45, 46] 노동절의 수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름으로라도 명맥을 지키고 있었던 노동절은 박정희 개발독재로 그 정체성마저 부정당했다.

노동절 수난사 (2): 창씨개명 당한 노동절 

박정희 독재체제에서 노동절은 1963년에 "근로자의 날"로 바뀌었다. 노동자의 날에서 더는 노동자의 주체성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근로자의 날"로 철저히 왜곡된 정치 선전에는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온 몸바치는 산업전사만이 홀로 존재했다. [47] 왜 박정희 정권은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바꿨을까? 그 이유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우선 한국의 노동자 문화가 어떤 역사적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좀 길기는 하지만 구해근의 논의(論議)를 요약해보도록 하자.

많은 학자가 지적하듯이 유럽에서는 길드(Guild)와 장인문화 전통이 산업변화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대응과 의식발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한반도에는 (적어도 조선 시대에는)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 개항 전까지 노동자의 의식발달에 영향 줄 만한 제대로 된 장인문화적 유산이 없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47] 19세기까지 한국에서 장인계층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48] 조선 시대에 장인 다수는 지배층이 필요로 하는 물품—필묵, 특수의복, 사치품 등—의 생산을 위해 고용됐다. 게다가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적 신분체계에서 장인과 상인은 농민보다 낮은 층에 속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상공업 활동이 활발해졌을 때, 장인은 상인보다 훨씬 더 세상의 변화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응했다. 예를 들어, 보부상과 이름 있는 상단은 전국적인 연결망을 갖추어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장인계층은 이 시기의 상인계층에 견줄만한 유의미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49] 그리고 일제 치하 한반도에서 다양한 형태의 임금노동자가 출현했지만, 전국적인 현상은 아니었으며 근대적 의미에서 노동자에 부합(符合)하는 집단의 출현은 일부 공업지역에 국한해 있었다.

이런 역사적·사회적 배경 속에서 개항 이후 한국의 노동자 1세대는 처음으로 근대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를 경험했다. 유럽과 같은 "노동자계급이라는 자부심" 대신 이들은 공돌이·공순이라는 명칭이 반영하는 부정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산업화 초기에 공장노동자는 노동자, 공장노동자, 공원, 근로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산업화가 계속 진행되고 공장노동자 수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정부와 자본은 산업노동자를 지칭하기 위한 공식용어로 '근로자'를 전국에 보급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부르게 했다. 그런데 근로자라는 말은 육체노동자, 비(非)육체노동자, 기술자 등 모든 종류의 피고용자를 가리키는 대단히 폭넓은 용어였다. [49, 50] 반대로 노동자는 (근대적 의미에서) 구체적으로 공장노동자 혹은 육체노동자 일반을 뜻하며, 이 안에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장인에 대한 부정적 함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1970년대 말 노동자계급의 정체성이 발달하기 시작할 때까지도 한국의 공장노동자는 자신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정의할 적절한 용어를 갖지 못했다. [51]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개발 독재정권은 이제 막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려는 노동자계급에 정체성을 각인시킬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그 이름은 '근로자'란 말로 일반화되었지만, 그것을 꾸미는 미화하는 수사(搜査)는 실로 다양했다. 1960년대 말부터 산업전사, 산업의 역군, 수출의 역군, 수출의 기수와 같은 새로운 단어들이 등장했다.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성장주의 그리고 군대식 수사가 절묘하게 결합한 이 새로운 명칭은 수출증대를 국가의 제1목표로 하는 개발독재 국가에 있어 '근로자'로 탈바꿈한 노동자를 국방을 위해 싸우는 군인과 동일시하는 메타포(metaphor)나 다름없었고, 그에 걸맞게 수출촉진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는 애국자라 칭송받았다. [51] 이렇게 남한에서 노동절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날짜를 빼앗기고,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는 이름마저 바뀌는 두 번의 치욕(恥辱)을 겪었지만, 북한에서도 노동절 처지는 김일성·김정일 세습 독재체제의 선전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남한과 마찬가지다.

다시 찾은 노동절: 미완의 승리

박정희가 죽음으로 새로운 세상이 도래(到來)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두환과 노태우를 핵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은 12·12사태를 일으켜 정권을 움켜잡고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난 광주민중항쟁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짓밟음으로써 한국사회는 또 한 번의 살벌한 겨울을 맞이하게 됐다. [52] 하지만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봄도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광주민중항쟁이 군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된 이후 민주화운동은 한동안 침체했다. 그러나 1970년대를 통해 급성장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은 여러 시행착오 끝에 하나의 통일된 전선운동으로 발전하여 전두환 정권의 1987년 공표된 4·13호헌조치를 분쇄하고 대통령직선제를 관철했다. 특히 이 시기에 일어난 여러 가지 굵직한 사건들—예를 들어,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사건,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치사사건—은 역사적인 6·10 민주화운동이라는 반정부·반독재 투쟁을 급격히 고양(高揚)했다. 이러한 민중의 대대적인 투쟁은 결국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의 6·29선언을 이끌어냈고, 수십 년에 걸친 군사독재의 어두운 그림자는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53]

민중 일반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도 저항의 물결에 동참했다. 노동운동의 불모지로 일컬어지던 거대재벌의 사업장—울산 현대중전기, 현대자동차, 현대엔진, 창원 대우중공업, 옥포 대우조선—에서 자본과 독재에 대항하기 위한 집단행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대기업에 일하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 중소기업에서 일하던 노동자 또한 마찬가지로 이러한 저항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54] 이때 노동자는 1987년 6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 총 3,311건의 노동쟁의를 일으켰고, 그 가운데 97.7%인 3,235건은 파업이었다. 여기에 참가한 총인원은 약 122만 5,830명이었다. 훗날 '노동자대투쟁'이라 불리는 거대한 투쟁의 시작은 7월 5일 울산 현대엔진 노동자의 노조결성과 파업투쟁이었으며, 동남지역의 거대 공업단지인 울산을 기점으로 마산, 창원, 부산, 광주, 대구, 대전을 거쳐 경인지역으로 빠르게 확산했다. [55] 전두환 정부 말기에 경찰력을 동원한 극심한 탄압이 있었지만, 노동자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발적인 대중투쟁을 지속하여 종래 국가와 자본이 구축한 억압적 통제체제를 깨뜨리고 운동 영역을 확장했다. [56]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국의 작업장에서 기존의 친(親)자본가적인 한국노총(韓國勞總)과 구분되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노조 설립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노동자대투쟁과 민주화운동 전후로 해서 새로 설립된 노조는 민주적이고 노동자의 주체성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전국노조 설립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노동자의 날"을 되찾기 위한 대규모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89년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전국 5천여 명의 노동자가 연세대학교에 모였다. 이 곳에서 노동자는 1886년 시카고 대투쟁 이후 제2인터내셔널의 발의로 시작된 제100주년 노동절 행사를 거행했고, 노동절의 날짜와 이름을 독재정권에게 유린당한 지 실로 수십 년 만에 노동자는 이승만 정권에 빼앗겼던 5월 1일을 되찾았다. 노동절을 되찾고자 하는 노동자의 염원(念願)과 열광적인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90년에는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서울대학교에서 3천여 명의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했으며, 전국 각지의 노조에서 노동절 기념식이 열렸고, 1991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3만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의 노동절 대회와 함께 전국 14개 지역에서 10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세계노동절대회가 개최되었다. [1]

1994년 김영삼 정부는 마침내 "노동자의 날"을 대한노총 설립일인 3월 10일이 아니라 제2인터내셔널이 "노동자 대투쟁의 날"로 선언한 5월 1일로 변경할 것을 골자로 하는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통해 유급휴일로서 5월 1일에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1, 57] 진정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진영이 정부의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얻어낸 결과였다. 이리하여 노동자는 해방 후 국가와 자본가에 의해 유린당한 노동절을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았다. 바로 우리의 이름을 되찾는 것—근로자와 근로자의 날로 불리는 노동자와 노동자의 원래 이름을 되찾는 것—이다.



참고문헌
[1] 금속노조 교육원. 2010년. 노동절의 유래 및 120주년 노동절 기념대회. [링크]
[2] May Day. 위키피디아 영어판. [링크]
[3]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Chris Harman)/천경록 옮김. 책갈피. 2005년. 412~413쪽.
[4] 같은 책. 280쪽, 308쪽, 413쪽.
[5]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Leo Huberman)/장상환 옮김. 책벌레. 134~139쪽, 206~209쪽. : 인클로저 운동은 영국에서 두 번 일어났다. 16세기에 일어난 첫 번째 인클로저 운동은 촌락(村落) 인구의 감소로 조세수입(租稅收入)이 줄어들 것을 걱정해서 1489년에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18세기에서 19세기 초반에 일어난 두 번째 인클로저 운동은 합법으로 인정되어 농민에게 치명타를 안겨주었다.
[6] 『민중의 세계사』. 414쪽.
[7]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144쪽, 149~150쪽, 224~226쪽.
[8] 『맑스주의 역사 강의』. 한형식. 그린비. 27~28쪽.
[9] 『맑스사전』. 마토바 아키히로 외 3인 엮음/오석철, 이신철 옮김. 도서출판 b. 43~44쪽. : 산업화로 인한 도시로의 과잉 인구유입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농촌보다도 극심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도시 정비로 인해 사망률은 훗날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10] Alexander Trachtenberg. 1932. The History of May Day. Marxists Internet Archive. [링크]
[11]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223쪽.
[12] Rosa Luxemburg. 1894. What Are the Origins of May Day? Marxists Internet Archive. :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노동자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처음 시작되었다고 언급한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유일하다. 다른 문헌은 (전부 다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시작한 "노동자의 날"만을 언급했다. [링크]
[13] 『민중의 세계사』. 511쪽.
[14] 『세계 노동운동사 I』. W. Z. 포스터(William Z. Foster)/정동철 옮김. 백산서당. 1986년. 151~152쪽.
[15] 『미국 민중사 1』. 하워드 진(Howard Zinn)/유강은 옮김. 이후. 2008년. 462~467쪽.
[16] Haymarket affair. 위키피디아 영어판. [링크]
[17] 『맑스주의 역사 강의』. 132쪽.
[18]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교수의 현대사 강의』. 강만길. 1999년. 15쪽. :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룬 일본에서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하야한 후 들어선 민씨 정권을 상대로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켜 강압적으로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했다. 그 결과 일본은 부산, 인천, 원산을 개항시키고 자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쌀과 면직물 교환 중심의 무역을 전개함으로써 한반도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19]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36~37쪽.
[20]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조선 출신의 자본가나 다른 나라 출신의 자본가도 일본인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임금노동자를 수탈했다.
[2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39쪽. : 문헌상 기록된 최초의 노동자 투쟁은 1888년 함경도 초산(楚山)에서 일어났다. 가혹한 세금과 핍박에 분노한 광산노동자들이 관청을 습격하고 관리들을 징치(懲治)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 폭동은 정부에서 안핵사(按覈使)를 보내서야 비로소 진정되었다. [안핵사: 조선 시대, 지방에 어떤 일이 터졌을 때에 그 일을 조사하려고 보내던 임시 벼슬]
[22] 같은 책. 41쪽.
[23] 같은 책. 65~66쪽. : 이원보가 밝혔듯이 이것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이원보는 "조선총독부가 의도적으로 노동운동을 폄하하거나 축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라며 당시 노동조합의 수는 이것보다 더 많았으리라고 추측한다. 나도 실제 노동조합의 수가 더 많았으리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은 조선총독부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이유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자료수집과정에서 발생한 단순한 집계 상의 누락 때문이 아닐까라도 생각하는데, 총독부는 그 나름대로 본국에 사실관계를 제대로 알릴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본다면 의도적 축소도 배제할 수는 없다.
[24]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 파란 사전. [링크]
[25]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네이버 백과사전. [링크]
[26]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67~73쪽.
[27]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링크]
[28] 금속노조교육원의 자료와 [1] 2001년 MAY-DAY 행사자료에는 [29] 조선노동총연맹이 1923년에 한반도에서 전국적인 노동절 행사를 처음 개최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시기상으로 봤을 때 조선노동총연맹은 1924년에 결성되었으므로 이원보와 하종강이 언급한대로 [26, 30] 조선노동연맹회가 처음으로 전국적인 노동절 행사를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9] 한국 노동절의 역사. 2001 May-Day [링크]
[30] 하종강. 2007년. '노동절'과 '근로자의 날'. 미디어 오늘. [링크]
[3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77~84쪽.
[32] 원산 총파업(元山總罷業). 파란 사전. [링크]
[33] 『고쳐 쓴 한국현대사』. 강만길. 창비. 2006년 2판. 475~476쪽.
[34]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112쪽.
[35]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링크]
[36]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117~118쪽.
[37] 정판사 위폐사건(精版社僞幣事件).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링크]
[38]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大韓獨立促成全國勞動總同盟).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링크]
[39]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123~130쪽.
[40] 『고쳐 쓴 한국현대사』. 397~398쪽.
[4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137~141쪽.
[42]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2쪽.
[43] 『우리나라 노동운동사』. 노민영. 현장문학사. 1990년. 110쪽.
[44] 같은 책. 112쪽.
[45] 『세계 노동운동사 I』. 152쪽. : 미국도 보수적인 미국노동총연맹(AFL)이 5월 1일 대신 9월의 첫째 월요일을 노동자의 날로 결정했다. 자세한 것은 위키피디아의 "Labor Day"를 참조하라. [링크]
[46] 1955년 2월 7일 개정된 정부조직법(법률 제354호) 제13조 및 제23조에 따르면 "보건사회부 장관은 의무·방역·보건·위생·약무·구호·원호·부녀문제와 노동에 관한 사무를 장리한다"라고 되어 있다. [링크]
[47]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신광영 옮김. 창작과비평사. 2002년. 205~206쪽. : 구해근의 설명에 따르면 "유럽에서 장인 집단의 특정 상황에 대한 반응은 경제적이기보다는 사회적·도덕적이었다. 그들은 협소한 경제문제보다 장인직업의 독립성, 장인정신에 입각한 노동, 그리고 도덕적으로 규제되는 직업관계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것은 유럽 장인들의 노동이 단체규칙과 규율에 따라 규제되고 사회적 관계의 친밀한 네트워크와 공동체적 정서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직업공동체로부터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화에 집단으로 강력하게 대응하기 위한 물질적 사회적 인적 자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라고 한다.
[48] 그들이 조선 시대 경제 성장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도 경제활동에서 상인·농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중요한 축을 이뤘다.
[49]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206쪽.
[50] 노동(勞動)은 "몸을 움직여 일하거나 혹은 육체와 정신을 써서 일하다"를 뜻하고, 근로(勤勞)는 "힘을 들여 부지런히 일함"을 뜻한다. 이와 연관해서 노동자(勞動者)는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임금을 받아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을 말하지만, 근로자(勤勞者)는 단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뜻할 뿐이다. 그럼에도, 사전 대부분에서는 국가가 정한 의미 그대로 근로자의 뜻을 노동자의 그것과 비슷하게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의 대가로 받는 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51]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206~207쪽.
[52] 『고쳐 쓴 한국현대사』. 364~369쪽.
[53] 같은 책. 369~376쪽.
[54]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318~320쪽.
[55] 같은 책. 331~333쪽.
[56] 같은 책. 334쪽.
[57] 근로자의 날 제정. 국가기록원.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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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11년 즈음 안철수 교수(이하 안 교수)와 박경철 씨는 여러 곳에서 청춘콘서트를 진행했다. 콘서트의 주 대상은 한국사회의 청년이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연령층이 이 시대의 귀감(龜鑑)인 안 교수에게 지혜(智慧)와 조언(助言)을 얻기 위해 참석했다. 본인이 서식(?)하고 있는 포항공대에서도 2011년 4월 26일 <기업가 정신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안 교수의 강연회가 열렸는데, 강연에 참석한 지인(知人)의 말을 빌리자면 “기업가 정신에 관한 내용은 별로 없었고, 주로 안 교수 자신이 겪어온 의사로서의 인생,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와 안철수 연구소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얻은 CEO로서의 경험, 그리고 KAIST 등지에서 얻은 교육자로서의 느낌 혹은 배운 점 등을 자신만의 진솔(眞率)한 방식으로 풀어나갔다”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지인의 주관적인 판단이므로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듣고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안 교수는 청춘콘서트 및 이와 유사한 형태의 다양한 강연을 통해 “대한민국의 위대한 멘토(mentor)”라는 칭호(稱號)에 걸맞은 교양과 친근함이 가득한 화법(話法)으로 많은 사람에게 주옥(珠玉)같은 화두를 던졌다.

그런데, 최근 안 교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불거지고 있다. 그 중 일부는 그의 반대파가 안 교수의 명성(名聲)에 흠집내려는 의도가 있지만, 어떤 것은 그의 최근 발언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대한 것도 있는고, 이것과는 별개로 안 교수 자신의 처신(處身) 혹은 안이한 대응(對應)이 원인이 되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무엇이 문제인지 본격적으로 파헤쳐보자.

때는 2011년. 장소는 가톨릭 상지대학교. 이곳에서 안 교수는 (분위기는 시골의사이지만 사실은 대한민국 모든 쁘띠 부르주아[petit bourgeois]의 로망인) 주식박사(株式博士) 박경철 씨와 함께 <세계적인 석학 안철수 교수와 시골의사 박경철과 함께하는 청년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콘서트를 개최했다 [1] [2].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는 별로 관심 없다. 그렇지만 그 강연에서 유달리 나의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안 교수와 박경철 씨 바로 뒤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문구(文句)로 강연의 제목이기도 한 “세계적인 석학 안철수 교수”라는 표현이다 [그림 1]. 안 교수에게 ‘세계적인 석학’이란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온당한지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그림 1. 가톨릭 상지대에서 열린 안 교수와 박경철 씨의 대담. [사진출처: 하리와 솔뫼 블로그]



여기서 ‘석학’의 뜻을 살펴보자. 석학(碩學)은 "학식이 높고 학문적 업적이 뛰어난 학자"를 일컫는 말이다 [3]. 그러니까 ‘석학’ 정도의 직함(職銜)은 해당 분야에서 오랫동안 몸담았고 일련의 연구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인정할만한 두드러진 업적을 이룩한 ‘위대한 학자’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학문적 명예(名譽)라고 할 수 있다. 연구소, 회사 혹은 관공서 등 공식적 기관에 단순히 적(籍)을 뒀다고 해서, 혹은 아무리 세상에 이로운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석학’이란 칭호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해서 내가 그들을 폄하(貶下)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분야에서 나름의 명예로운 호칭이 존재할 것이다) 남들(특히 동종학문 종사자)이 인정할만한 학문적인 업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뛰어나고 현명한 자라 할지라도 ‘석학’이란 칭호를 거머쥘 수 없다. ‘세계적인’과 같은 수식어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의 동료 학자가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역시 ‘세계적인 석학’이란 명예로운 직함은 마음대로 갖다 붙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노엄 촘스키(Avram Noam Chomsky)를 세계적인 석학이라고 부르지만, 단순히 그가 사회적 발언을 많이 했기 때문에 혹은 여러 분야에서 주옥같은 책을 많이 썼기 때문에 그리 부르진 않는다. 사람들이 그를 ‘석학’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가 언어학(言語學, philology)에서 학문적으로 지대한 공헌(貢獻)을 했기 때문이며 실제로 그의 언어학 연구는 많은 동료학자에게 수없이 인용된다 [4].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며, 2008년 서울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한 이후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김수행 선생은 박영호, 정운영 교수와 함께 대한민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1세대로 한국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이 설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현재도 왕성한 연구 및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5]. 최장집 선생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의 진보적 정치학자인 최장집 선생은 의회주의 정치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고 그의 학문적 논의를 확장하기 위해 최근에는 막스 베버(Marx Weber)를 연구하는 왕성함을 보이고 있다 [6]. 마지막으로 김빛내리 교수의 예를 살펴보자. 그도 앞의 두 노(老)학자와 마찬가지로 micoRNA라는 생물학의 한 분과(分科)에서 자신의 학문 분야에서 놀랄만한 성과를 이루어냈으며, 최근에는 그의 연구성과는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져 ‘석학’이라는 칭호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학문적 업적을 세우고 있다 [7]. 이처럼 ‘석학’으로 인정받는 인물은 한결같이 자신의 분야에서 학문의 진보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그림 2].


그림 2. 석학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노엄 촘스키, 김수행 선생, 김빛내리 교수, 최장집 선생. 이와 같은 사람들이 진정한 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서울대, 경향신문]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안 교수에게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칭호는 과연 온당한 것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안 교수가 과연 자신의 분야에 어떤 이바지를 했는지 확인해본다면 바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안 교수의 학문적 업적은 어느 정도일까? 현재까지 확인한 바로는 안 교수가 참여해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논문은 단 세 편뿐인 것으로 알려졌다(안 교수를 흠집 내기 위해 열과 성의를 다하는 수꼴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89]. 물론 “학문적인 공헌이 있어야만 꼭 세계적인 석학이란 칭호가 붙는 것은 아니다”라며 반박할 수도 있다 [10]. “안 교수 덕분에 한국의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발전이 있었는데 세계적인 석학이란 칭호를 붙이는 것이 뭐가 문제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안 교수가 설립한 안철수 연구소는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연구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것도 최근에는 말이 많다 [11]. 조금 더 비약해서 예를 든다면 안 교수를 존경하는 어떤 인물은 이런 식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안철수 같은 존경 받는 사람이 무려 서울대에서 교수도 재직 중인데, 그런 훌륭한 사람을 석학이라 부르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굴 석학이라 불러야 하느냐?” 물론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진짜 존재한다면 이건 완전한 억지 그 자체다.

그러나 애석한 일이지만, 그 어디에서도 학문적 성과 없이 단지 명망(名望)이 있거나, 많은 이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또는 사회적 공헌이 크다 해서 특정인에게 ‘석학’이란 칭호를 아무렇지 않게 붙이진 않는다. 안 교수가 한국에서 초창기 백신 프로그램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안 교수에게 ‘석학’이란 칭호를 붙이게 할만한 정당성을 부여해주지는 않는다.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이유를 억지로 갖다 붙인다면 우리는 빌 게이츠(Bill Gates)나 스티브 잡스(Steve Jobs) 같은 사람에게도 마땅히 ‘석학’이란 칭호를 붙여야 하며, 심지어는 이건희 같은 악덕 자본가에게도 ‘석학’이란 칭호를 붙여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물론 이건희를 언급한 것은 개그나 다름없다. 아니면 악몽이거나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 강연에서는 안 교수에게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칭호를 붙였을까? 그리고 안 교수는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명예’를 과감히 거절하지 않았을까? 우선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대단한 직함이 안 교수 본인의 의사(意思)와는 상관없이 주최 측이 더 많은 청중(聽衆)을 끌어들이려는 방편으로 안 교수와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안 교수 본인도 “좋은 게 좋은 거다”라든지 혹은 “마음에 안 들지만 주최 측의 체면을 구기는 짓은 할 수 없다”란 생각으로 잠자코 입 다물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부적절한 직함의 사용이 상지대에서만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청중을 끌어들이기 위함이라고 해도 부적절한 직함의 사용은 결국 청중을 기만하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는 사기행위(詐欺行爲)와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안 교수 본인이 양심적인 지식인이라면 이러한 눈 가리고 아웅 식의 기만(欺瞞)은 한사코 막았어야 했다 [12]. 그리고 이런 일이 이번 한 번뿐만은 아니었다. 2010년 3월 16일 오후 3시 조선대학교 자연과학대학 4층에서 열린 청춘콘서트를 포함한 몇 차례의 강연에서도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 [13] [그림 3].



그림 3. 조선대에서 개최된 안 교수와 박경철 씨의 대담 중 한 장면. [사진 출처: 서울포스트]



더 큰 문제는 안 교수에 대한 이런 기만에 대해 소위 진보언론이라 일컫는 쪽에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4]. 사실상 무관심이나 외면에 가깝다. 오로지 안 교수의 명성(名聲)을 흠집 내기에 바쁜 극우보수(내지 수꼴)만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진실로 이런 일이 잘못된 판단과 근거 없는 맹목적 믿음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면 누군가 (특히 진보진영에서) 나서서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현실에서 안 교수의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기만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수꼴 뿐이다. 욕을 먹는 것이 두려운 것인가? 아니면 안철수라는 보수층에 대한 강력한 대항마(對抗馬)를 잃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가?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안 교수에게 어떤 판타지를 품고 있는 것인가? 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오직 내가 지금 상황에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논란의 중심에서 적극 해명해야 할 당사자(즉 안 교수)는 함구(緘口)하고 있을 뿐이고 [15], 친 안 교수 성향을 보이는 진보언론은 이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진보매체라는 곳에서 ‘세계적인 석학’이란 손발이 오그라드는 직함을 아무렇지 않게 안 교수에게 붙이고 있는 실정이다.

안 교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나를 이런 식으로 비난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 “이런 수꼴이나 하는 패악질을 소위 좌파라는 당신이 왜 들쑤셔서 분란(紛亂)을 일으키느냐” 혹은 “이런 식의 당치도 않은 흠집 내기는 안 교수의 명성과 도덕성을 깎아내리는 행동이며, 종국엔 수꼴 좋은 일만 해주는 격이다. 그러니 좋은 말할 때 그만둬라”라는 파쇼적 발언으로 나에게 협박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는 것, 마치 팔이 안으로 굽듯이 우리 편 일이라면 그릇된 진영논리(陣營論理)는 당장은 훈훈한 미담(美談)인 양 인구에 회자(膾炙)하겠지만, 혹은 그런 식으로 논의를 회피하거나 그냥 모른 체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언젠간 피할 수 없는 반작용으로 우리(혹은 안 교수에게 열광하는 진영)에게 돌아올 것이다. 

어쨌거나 2012년 들어서 안 교수와 관련된 촌극(寸劇)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지만, 안 교수에게서 어떠한 해명도 나오지 않는 지금 강용석을 비롯한 소아병적인 수꼴의 난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안 교수 본인이 모든 사람이 인정하듯 진정한 양심인 혹은 지식인으로 자신을 내세우고 싶다면 말로만 그럴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명예스러운 직함의 분별없는 사용이라는, 어찌 보면 정말 사소한 것에서조차도 상식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석학’이란 소리 한 번 듣기 위해 돈도 안 되는 보잘것없는 연구에 자신의 일생을 갖다 바치는 한국의 수많은 '연구 덕후'를 위해서라도 그런 어처구니 없는 행동은 가급적 자제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내 이야기는 절대로 전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리고 이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걱정(?)에 내 마음은 공허함만 가득하다.

추신 #1:
그러고 보니 나는 오늘도 쓸데없는 일에 피 같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아, 안철수.
추신 #2:
앞에서도 계속 얘기했지만, 진보진영은 자기편 일이라고 숨기거나 외면하지 말고 제발 비판할 것은 비판해라. 내가 언급한 이런 일이 가당치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이 하나 둘 쌓이다보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추신 #3:
글 말미에 '연구 덕후'에 관해 언급했는데, 연구 덕후들은 돈도 안 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그중에는 안 교수가 거의 거저 먹기식으로 획득한 "세계적인 석학"이란 명예를 획득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안철수 그가 정말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런 식으로 저 대단한 직함을 순전히 날로 먹는다면 한국의 연구 덕후들은 정말로 절망과 상실감에 슬퍼할지도 모른다. (농담이다).
추신 #4:
이런 글을 썼다고 나를 수구꼴통으로 오해할 사람이 있을 것 같기에 노파심에서 한 마디 하겠다. 나는 정치적으로 좌파, 즉 사회주의자다. 물론 이렇게 내 정체성을 밝힌다고 믿어줄 사람은 없을 것 같지만 (-_-;;).



참고
[1] 세계적인 석학 안철수 교수와 시골의사 박경철과 함께하는 청년의 미래 특별대담. 하리와 솔뫼 블로그. [링크]
[2] 강용석, '찰스의 거짓말' 시리즈로 안철수 '공격'. 머니투데이. [링크] : 머니투데이에서 송고하고 야후코리아(Yahoo! Korea)에 올라온 이 기사는 요새 (조소적 의미에서) 개그맨보다도 더 웃긴 이제는 끈이 떨어지다 못해 더는 정치적으로도 재기 불가능한 강용석의 안 교수 씹기를 다루고 있다. 아무리 개연성 있는 이야기도 개망나니가 설치면 건설적인 비판이 될 수도 있는 이슈도 온갖 악의(惡意)가 넘쳐나는 시기 어린 질투(嫉妬)로 변하고 만다.
[3] ‘석학’을 영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a man of great learning”, “an erudite scholar”, 혹은 “a great scholar” 석학이 누구에게 주어지는 칭호인지 감이 오는가?
[4] 노엄 촘스키.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링크] : 영어가 좀 된다면 위키피디아 영어판도 좋다. [링크]
[5] 김수행.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링크] 김수행 선생의 <자본론>은 강신준 교수의 <자본>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마르크스 저술의 번역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 제대로 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내는 몇 안 되는 노(老)학자이다.
[6] 최장집.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링크]
[7] 김빛내리 교수 초청 제 62회 한림석학강연 개최. 한림원. [링크] 김빛내리 교수의 연구는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해당분야에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링크]
[8] 확인한 바로는 안 교수가 참여한 논문은 다음과 같다. <1> Kim KH, Ahn CS, Kim WG. Relationship of Plasma Potassium and Hydrogen Ion Concentrations in Acidosis-Induced Hyperkalemia and Hyperkalemia-induced Acidosis. The Seoul Journal of Medicine, Vol 34 No 2, June 1993. <2> Han J, Leem C, Ahn C, So I, Kim E, Ho W, Earm YE. Effect of Cyclic GMP on the Calcium Current in Rabbit Ventricular Myocytes. The Korean Journal of Physiology, Vol 27 No 2, Dec 1993. <3> 안철수. 의료인의 컴퓨터 활용범위. Journal of the Korean Medical Association (대한의학협회지), Vol 36 No 12, Dec 1993.” 이 정보는 불행히도 강용석의 블로그에서 퍼왔다. [링크]
[9] 안 교수가 재직 중인 디지털융합정보학과의 홈페이지를 살펴봐도 안 교수의 연구업적을 가늠할 수 있는 논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게재되어 있지 않고, 오직 그가 저술한 책에 대한 정보만 가득할 뿐이다. [링크]
[10] 이와 비슷한 의미에서 “학문적 업적이 있어야만 꼭 교수가 되고 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는가”라는 반문도 할 수 있다. 나도 꼭 학문적 업적이 있어야지만 교수가 되고 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학문 외적인 부분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사람만이 드러낼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 분명 존재하며 그런 면이 대학교육에 반영되었을 때 또 다른 시너지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러나 내가 논의하고 있는 부분은 그것이 아니다. 이 글은 “안철수 개인이 교수가 되는 것에 대해 반박하는 것이 아닌, 그에게는 과분한 칭호를 아무런 맥락 없이 갖다 붙이는 행위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한다.
[11] 세계 백신업계의 2류, 안철수 연구소의 현주소. SkepticalLeft. [링크] : 개인적으로 스렙에서 논의되는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불행히도 (그것이 사실이든 혹은 거짓이든 간에) 이런 논의와 의혹에 대해 소위 진보언론이란 곳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듯하다. 아마 안철수 개인에 대한 무한한 믿음 때문인 것 같은데, 그 이외에 다른 이유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요새 안철수를 띄우는 것을 보면 막연히 ‘황우석’이 떠오를 뿐이다. 이 기사는 <미디어 워치>같은 황색언론에서도 다루어졌는데, <미디어 워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면 ‘변희재가 발행인으로 등록된 언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된다.
[12] 안철수, 공익 앞장서는 상식·참여·실천주의자. 파이낸셜 뉴스. [링크] : 잘 알려있듯이 안 교수는 여러 매체 및 강연을 통해서 "보수와 진보가 아닌 상식과 비상식으로 나눠야 한다"고 언급해왔다.
[13] 세계적인 석학 안철수 교수와 시골의사 박경철의 리더십 대담. [링크]
[14] 몇 번을 검색해봤지만, 진보매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비판도 하지 않는다. 사실 진보매체에서 나오는 안 교수에 대한 평은 ‘호평(好評)’ 일색이다. 혹시라도 안 교수를 비판한 진보매체 혹은 기사가 있다면 나에게 알려주시길 바란다.
[15] 애석하게도 이런 논란에 대해 안 교수는 아직도 잠잠하다. 언제 해명하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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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창세기?

2012. 1. 15. 14:31 from 잡글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가 쓴 『왜 다윈이 중요한가』(Why Darwin Matters)라는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었다. 마이클 셔머, 그는 누구인가? 내가 일일이 찾아서 쓰긴 귀찮고 하니 알라딘의 작가소개를 인용하기로 하자.

리처드 도킨스, 故 스티븐 제이 굴드 등과 함께 과학의 최전선에서 사이비 과학, 창조론, 미신에 맞서 싸워온 인물이다. 1954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페퍼다인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에서 실험심리학 석사, 클레어몬트대학원대학교에서 과학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20년 동안 교수로 있으면서 옥시덴탈대학,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글렌데일대학에서 심리학과 진화론, 과학사를 강의했다.
1992년 과학저널 『스켑틱(Skeptic)』을 창간해 현재까지 발행인을 맡고 있으며, 1997년 과학주의 운동의 본거지로 회의론자 학회(Skeptics Society)를 설립해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이다. 또한 『사이언티픽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에 고정 칼럼을 기고하고 있고, 클레어몬트대학원대학교 경제학 부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물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회의론을 전파하고자 강연 및 저술, 대중 매체 활동을 벌이면서, 대중을 현혹하는 심령술사와 창조론자, 사이비 역사학자와 컬트 집단을 고발하는 데 앞장서왔다. 과학과 이성, 나아가 인류를 위협하는 세력들에 정면으로 맞서며 대중을 선도해온 과학계의 전사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故 스티븐 제이 굴드는 그를 일컬어 “이성의 힘으로 인간의 품위를 지켜내는 행동가이자, 대중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저술활동도 활발히 하는 그는 이미 여러 권의 저작을 선보였는데, ‘믿음의 3부작’이라 불리는 대표작 가운데 ‘사이비 과학과 미신, 그 밖에 우리를 미혹케 하는 것들’에 관한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Why People Believe Weird Things)》를 필두로, ‘종교의 기원과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를 주제로 한 《우리는 어떤 식으로 믿는가(How We Believe)》, ‘도덕성의 진화적 기원’을 다룬 《선악의 과학(The Science of Good and Evil)》이 있으며, 이 외에도 ‘어떻게 마음이 작동하고 우리의 사고가 오류를 범하는지’ 파헤친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 ‘과학과 사이비 과학 사이의 애매모호한 공간’을 말하는 《과학의 변경 지대(The Borderlands of Science)》, ‘찰스 다윈과 자연선택 이론을 공동으로 발견한 앨프레드 월리스’의 평전 《다윈의 그늘에서(In Darwin's Shadow)》, ‘과학과 종교의 공존’을 제시한 《왜 다윈이 중요한가(Why Darwin Matters)》 등이 있다.


『왜 다윈의 중요한가』란 책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창조론과 지적설계론은 서로 다른 것인가? 아니면 같은 것인가? 그들은 왜 과학이 아닌가? 그렇다면 종교는 진화론과 양립할 수 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인(!) 어투로 독자에게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면서 마지막에 그는 "성경의 창세기를 현대 과학의 언어로 재해석해 쓴다면 이런 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며 글을 마쳤다. 그 글이 상당히 재미있는데, 번역판이 재미있으니 원문으로 보면 더욱 재미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태초에 구체적으로 말해서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정오에 하느님께서 양자 거품의 요동으로부터 빅뱅을 창조하셨으며, 우주 인플레이션과 팽창하는 우주가 뒤를 이었다. 깊은 위에는 어둠이 있었다. 하느님께서 쿼크들을 창조하셨고, 쿼크들로 수소 원자들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수소 원자들이 융합하여 헬륨 원자가 되라고, 융합 과정에서 빛의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하라고 명령하셨다. 빛을 내는 그것을 태양이라 부르셨고, 그 과정을 행융합이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는 빛을 흐뭇하게 보였다. 왜냐하면 이제 당신쎄서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지구를 창조하셨다. 이렇게 저녁이 가고 아침이 되어 첫째 날이 지나갔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융합으로 빛을 내는 것들이 하늘에 많이 있으라 하셨다. 융합으로 빛을 내는 것들 중 일부를 무리지어 은하계라고 부르셨는데, 지구에서 보기에 이 은하계들이 수백만 광년, 심지어 수십억 광년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이냐면, 기원전 4004년에 일어난 첫 창조보다 은하계들이 먼저 창조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이것이 혼란스러워서, 하느님께서는 힘 잃은 빛을 창조하셨다. 그렇게 해서 창조 이야기는 보존되었다. 그리고 적색 거성, 백색 왜성, 퀘이사, 펄사, 초신성, 웜홀, 심지어 아무것도 빠져나갈 수 없는 블랙홀 같은 진기하고 다채로운 것들을 많이 창조하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엇에도 구속될 수 없기 때문에, 블랙홀에서 정보가 탈출할 수 있는 호킹 복사를 창조하셨다. 이것을 만드시느라 하느님께서는 힘 잃은 빛보다 더 녹초가 되셨다. 이렇게 저녁이 가고 아침이 되어 둘째 날이 지나갔다. … (후략)


이후에도 셋째 날에서 일곱 째 날까지 현대 과학의 언어로 창세기에서 지구 탄생에 대한 그 순간을 재해석했는데, 정말 재미있다. 직접 책을 읽어보시거나 아니면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보시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여유가 된다면 원문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이클 셔머가 도킨스나 굴드 만큼이나 글을 상당히 잘 쓴다는 소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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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Das Kapital』독일어판을 한국어로 번역한 강 교수(이하 강 교수)의 『자본』과 두 가지 영어 번역판인 Sonnenschein판(이하 SS)과 Penguin Classics의 Ben Fowkes 번역판(자본론 1에 해당, 이하 BF), 그리고 David Fernbach 번역판(자본론 2 및 3에 해당, 이하 DF2DF3로 각각 표기)을 참조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MIA(Marxists Internet Archive)에 있는 독일어 원본(이하 DK)을 참조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내용은 『자본I-1』 76~84쪽에 해당한다.



제4판에 부쳐

제4판에서 나는 주석과 본문을 되도록이면 최종적으로 확정하고자 하였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수행했는지는 간단히 얘기해두고자 한다.



프랑스어판과 마르크스의 자필 지시서를 다시 한 번 더 비교해본 다음 나는 프랑스어판을 바탕으로 몇 가지를 독일어 원본에 보충하였다. 그렇게 보충된 부분은 80쪽(제3판, 88쪽), 458~460쪽(제3판, 509쪽~510쪽), 547~551쪽(제3판, 600쪽), 591~593쪽(제3판, 644쪽), 596쪽(제3판, 648쪽)의 주 79 등이다. 8) 마찬가지로 나는 프랑스어판과 영어판의 예를 따라 광산노동자에 대한 기다란 주석을 본문에 삽입하였다(제4판, 461~467쪽). 9) 그 밖의 사소한 수정들은 순전히 기술적인 것들이다.



그 밖에 나는 몇 군데 해설 내용을 담은 보주(補註)를 삽입했는데, 이것은 특히 역사적 조건의 변화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그렇게 하였다. 이들 보주에는 모두 * 표시를 하고 내 이름의 첫 글자나 "D.H."를 적어 넣었다. 10)



그 사이에 출간된 영어판 때문에 많은 인용문을 완전히 새롭게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 영어판을 위해서 마르크스의 막내딸 엘리너(Eleanor)는 모든 인용문을 원문과 대조하는 수고를 해주었고, 그 덕분에 영어판에서는 전체 인용문 가운데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영어 원전에서 인용한 부분이 독일어로부터 재번역되지 않고 영어 원문 그 자체가 실리게 되었다. [4.1] 그래서 제4판에서는 이들 영어 원문을 대조하는 것이 내게 큰일이었다. 그 결과 갖가지 사소한 오류들이 발견되었다. 페이지에 대한 지시가 틀린 것은, 일부는 노트에 옮겨 적는 과정에서 잘못 적은 것이고, 일부는 판이 세 번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식 때문이었다. 인용부호나 생략부호가 틀린 것도 있었는데 이는 발췌 노트에서 인용한 양이 많을 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오류들이다. 여기저기에서 적절하지 못한 번역용어들도 발견되었다. 1843~45년 파리 시절의 낡은 노트에서 인용된 부분이 몇 군데 있었는데, 이 시절에는 마르크스가 아직 영어를 몰라서 영국 경제학자들의 책을 프랑스어 번역판으로 읽었기 때문에 이중번역 과정에서 발음에 약간의 변화가 발생한 경우가 있었고—예를 들어 스튜어트(Steuart)·유어(Ure) 등과 같이—이런 부분들은 이제 영어 원문을 직접 이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이와 마찬가지의 사소하게 부정확하거나 소홀한 부분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제 이 제4판을 예전 판들과 비교해보면 이런 힘든 교열과정이 있었음에도 그것 때문에 이 책의 내용 가운데에 변화된 것이 있었다고는 전혀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단 하나, 리처드 존스(Richard Jones)에게서 인용한 부분(제4판, 562쪽, 주 47) 11) 만은 그 원본을 찾아낼 수 없었다. 아마도 마르크스가 이 책의 제목을 잘못 썼던 것 같다. [4.2] 그 밖의 모든 인용문은 완전한 증거능력을 스스로 갖추고 있거나 아니면 현재 드러나고 있는 정확한 현실을 통해서 자신의 증거능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4.3]

4.1.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강 교수는 마르크스의 막내딸 Eleanor Marx를 '엘리너 마르크스'라 부르고 있다. 영어식으로는 그런 식으로 호명하겠지만, 독일어 방식으로 부른다면 '엘레아노르' 혹은 ;엘레아노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역시나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냥 강 교수가 독일어 원문에 충실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에 한 번 짚어본 것이다.
4.2.
마르크스는 이 책의 제목을 잘못 적은 것이 아니다. 페이지를 잘못 기재한 것이다. 37쪽 대신 36쪽이라고 기재했음을 나중에 알아냈다. 물론 강 교수는 독일어원본만(!) 번역했다고 했으므로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다.
4.3.
(SS) All the other quotations retain their cogency in full, or have enhanced it due to their present exact form.
(BF) All the other quotations retain their cogency in full, or have had their cogency enhanced by being put into their present exact form.
(DK) Alle andern behalten ihre volle Beweiskraft oder verstärken sie in der jetzigen exakten Form.
DK를 참조하면 "그 밖의 모든 인용문들은 설득력(혹은 타당성)을 충분히 유지하고 있거나 혹은 (현실을 반영하는?) 현재의 정확한 형태에서 (자신의) 설득력을 강화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이는데, 강 교수 번역과 비슷한가? 잘 모르겠다. DK의 'in der jetzigen exakten Form'에 대해서 SS는 'due to their present exact form', BF는 'by being put into their present exact form', 그리고 강 교수는 '현재 드러나고 있는 정확한 현실을 통해서'라는 다른 번역을 내놓았다. 솔직히 누가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오래된 한 옛날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한다.



내가 알기로는 마르크스의 인용문이 올바른 것인지 의심을 받은 적이 단 한 번 있었다. 그런데 이 의심이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떠돌아다니고 있어서 나는 여기에서 그것을 그대로 지나쳐버릴 수가 없다.



1872년 3월 7일 베를린에서 발간되는 독일 공장주협회 기관지 『콘코르디아』(Concordia)에 「카를 마르크스는 어떤 방식으로 인용하는가」라는 익명의 글 한 편이 실렸다. 이 글은 온갖 상스러운 욕과 표현을 모두 써가면서 1863년 4월 16일 글래드스턴(Gladstone)의 예산연설(1864년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을 가리킨다-옮긴이]의 창립선언문12)에도 인용되어 있으며, 『자본』 제1권 제4판, 617쪽과 제3판, 670~671쪽13)에 실려 있다)에 대한 인용이 날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용문 속에 나오는 "현기증이 날 정도의 이런 부와 권력의 증가는 … 전적으로 유산계급에게만 해당되고 있다"는 말은 핸서드(Hansard)의 (반[半]공식적인) 속기록에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7.1] "이 문장은 글래드스턴의 연설 가운데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거기에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굵은 글씨로) "마르크스는 이 문장을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위조하여 덧붙인 것이다!"

7.1.
(SS) It was here asserted, with an effervescence of moral indignation and unparliamentary language, that the quotation from Gladstone’s Budget Speech of April 16, 1863 (in the Inaugural Address of the 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 1864, and repeated in "Capital," Vol. I, p. 617, 4th edition; p. 671, 3rd edition) [present edition, p. 610], had been falsified; that not a single word of the sentence: "this intoxicating augmentation of wealth and power ... is ... entirely confined to classes of property" was to be found in the (semi-official) stenographic report in Hansard.
(BF) It was asserted there, with an excessive display of moral indignation and unparliamentary language, that the quotation from Gladstone’s Budget Speech of 16 April 1863 (in the Inaugural Address of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1864, and repeated in Capital, Vol. 1, pp. 805-6) had been falsified; that not a single word of the sentence: 'this intoxicating augmentation of wealth and power … is … entirely confined to classes of property' was to be found in the (semi-official) stenographic report in Hansard.
(DK) Hier wurde mit überreichlichem Aufwand von sittlicher Entrüstung und von unparlamentarischen Ausdrücken behauptet, das Zitat aus Gladstones Budgetrede vom 16. April 1863 (in der Inauguraladresse der Internationalen Arbeiterassoziation von 1864 und wiederholt im "Kapital", I, S. 617, vierter Aufl., Seite 670-671, dritte Aufl. ) sei gefälscht. Der Satz: "Diese berauschende Vermehrung von Reichtum und Macht ... ist ganz und gar auf die besitzenden Klassen beschränkt", stehe mit keinem Wort im (quasioffiziellen) stenographischen Bericht von Hansard.
SS와 BF는 DK의 두 문장을 (형식적으로는) 한 문장으로 연결했다. DK의 'mit überreichlichem Aufwand von sittlicher Entrüstung und von unparlamentarischen Ausdrücken'라는 표현을 SS는 'with an effervescence of moral indignation and unparliamentary language', BF는 'with an excessive display of moral indignation and unparliamentary language' 그리고 강 교수는 '온갖 상스러운 욕과 표현을 모두 써가면서'라고 번역했다. 아무리 해도 강 교수 같은 번역은 안 나오는데, 잘 모르겠다. 굳이 번역하면 '도덕적 분개와 비공식적인 언어의 과도한 표현'인데, 이걸 '온갖 상스러운 욕과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이 글이 실린 『콘코르디아』 해당 호를 그 해 5월에 받아본 마르크스는 6월 1일 『폴크스슈타트』(Volksstaat)를 통해서 익명의 필자에게 답변을 보냈다. 그는 자신이 인용한 잡지가 어떤 것이었는 것이 기억해내지 못해서 단지 똑같은 인용문이 실린 다른 두 개의 영국 서적을 명시한 다음 다시 『타임스』(Times)의 보도를 인용하였다. 그 보도에 따르면 글래드스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의 부에 관한 문제의 진상이다. 나 개인으로서는 이런 현기증이 날 정도의 엄청난 부와 권력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것이 내가 믿고 있는 바와 같이 유복한 계급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우려와 아픔을 안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상태는 아무것도 알려지고 있지 않다. 내가 지금까지 얘기했던 부와 권력의 증가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모두 정확한 보고에 근거하는 것인데, 그것들은 전적으로 유산계급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현상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글래드스턴은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에게 고통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또한 그것은 바로 사실이기도 하다고, 즉 이 현기증을 일으키는 엄청난 권력과 부의 증가가 전적으로 유산계급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일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반공식적인 핸서드의 속기록과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중에 다시 정정된 속기록판을 통해서 글래드스턴은 약삭빠르게도 영국 재무장관의 입에서 나온 얘기로는 위험한 부분을 삭제해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영국 의회의 오래된 전통에 따른 것으로, 베벨과 논쟁하던 라스커가 지어낸 날조와는 전혀 내용이 다른 것이다."



익명의 인물은 더욱 격분하였다. 『콘코르디아』 7월 4일 치의 답변에서 그는 2차 자료에 대한 문제는 건드리지 않은 채 소극적인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암시적인 얘기를 늘어놓았다. 즉 의회연설은 속기록에 따라 인용하는 것이 '관례'라는 것과 『타임스』의 보도(여기에 '허위로 덧붙인' 문장이 포함되어 있다)와 핸서드의 속기록(여기에는 그 덧붙인 문장이 없다)은 '실질적으로 완전히 일치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타임스』의 보도 내용 안에는 '창립선언에 포함되어 있는 그 악명 높은 구절과는 정반대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물은 그 『타임스』의 보도가 자신이 얘기한 그 '정반대'의 내용과 함께 바로 그 ‘악명 높은 구절’도 분명히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 이 익명의 인물은 자신이 암초에 걸렸으며 단지 새로운 구실 거리를 통해서만 자신이 구출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막 보여준 바와 같이 '뻔뻔스러운 거짓말'로 가득 찬 그의 논문에 온갖 쓰레기 같은 험담, 예를 들어 '악의'(mala fides), '파렴치함', '허위진술', '그 거짓 인용', '뻔뻔스러운 거짓말', '완전히 날조된 인용', '이 날조', '뻔한 비열함' 등과 같은 단어들을 채워 넣었다. 또한, 그는 쟁점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음 논문에서 글래드스턴이 말한 내용들이 우리('거짓말쟁이'가 아닌 익명의 인물)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논의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런 엉뚱한 견해가 마치 이 문제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면서 말이다! 그가 말한 다음 논문은 『콘코르디아』 7월 11일 치에 실려 있다.



마르크스는 여기에 대해서 다시 한 번 8월 7일 치 『폴크스슈타트』를 통해 답변을 했는데 이번에는 문제가 된 부분과 관련된 1863년 4월 17일 자 『모닝 스타』(Morning Star)와 『모닝 애드버타이저』(Morning Advertiser)의 보도를 소개하였다. 두 신문 모두에 따르면 글래드스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되어 있다. 즉 그는 현기증이 날 정도의 이 부와 권력의 증가가 만일 실질적으로 유복한 계급(classes in easy circumstances)에만 국한된 현상이라고 생각될 경우 이것을 우려스러운 것으로 간주하고자 하는데, 그럼에도 이러한 부의 증가 현상은 사실상 유산계급에만 한정되어 나타나고 있다(entirely confined to classes possessed of property)고 그는 말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두 신문의 보도도 바로 그 ‘허위로 덧붙여졌다’는 문장을 그대로 싣고 있다. 여기에 마르크스는 『타임스』와 핸서드 속기록의 본문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 있다. 즉 다음 날 아침에 발간된 별개의 세 신문에 똑같이 실린 보도 내용을 통해서 실제로 얘기되었다고 확인된 문장이 잘 알려진 '관례'에 따라 교열을 받은 핸서드의 속기록에서는 빠져 있으며,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글래드스턴이 그 부분을 '나중에 슬쩍 훔쳐내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르크스는 자신이 이 익명의 인물과 더 이상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익명의 인물도 그것으로 만족한 듯 보였고, 마르크스도 최소한 그 뒤로는 『콘코르디아』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이것으로 사건은 끝나고 묻혀버린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뒤에도 한 두 번 케임브리지 대학(the University of Cambridge)과 교류가 있는 사람들에게서 마르크스가 『자본』 속에서 저질렀다는 범죄, 즉 집필과 관련된 그 엄청난 범죄에 대한 은밀한 소문이 들려오곤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조사를 해보아도 그 이상 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지 여덟 달 뒤인 1883년 11월 29일 자 『타임스』에 케임브리지(Cambridge)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로부터 배달된 편지가 한 통 실렸다. 발신자는 세들리 테일러(Sedly Taylor)로 되어 있었는데, 극히 온건한 협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던 이 인간이 뜻밖에도 이 편지에서 케임브리지의 풍문은 물론 『콘코르디아』의 익명의 인물에 대해서도 그 내막을 우리에게 드디어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다.



매우 특이하게 생각되는 것은 … 창립선언문 속에 글래드스턴의 연설을 그대로 옮겨 넣은 그 나쁜 짓을 폭로한 것이 … 브렌타노(Brentano) 교수(당시에는 브레슬라우[Breslau]에 있었고 지금은 스트라스부르[Strassburg]에 있다)였다는 것이다. 그 인용문을 변호하려고 했던 … 카를 마르크스는 브렌타노의 능숙한 공격에 몰려 곧바로 궁지에 빠지게 되자 교활하게도 글래드스턴이 1863년 4월 7일 자 『타임스』에 보도된 자신의 연설 내용 가운데 영국 재무장관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발언 부분은 핸서드의 속기록이 발간되기 전에 서둘러 삭제해버렸다고 주장하였다. 브렌타노가 두 원문을 꼼꼼하게 대조함으로써 마르크스가 교활한 발췌를 통해 바꿔치기해버린 글래드스턴 인용문의 의미가 이들 『타임스』와 핸서드의 속기록 모두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자 마르크스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사건의 진상이었다! 그리고 브렌타노가 『콘코르디아』를 통해서 벌린 이 익명의 싸움은 케임브리지 생산협동조합의 환상에 찬란하게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 독일 공장주협회의 성 게오르크(Sankt Georg: 용을 퇴치한 전설로 유명한 기독교의 성자-옮긴이)는 '능숙한 공격'으로 이처럼 칼을 휘둘렀고, 지옥의 용 마르크스는 '곧바로 궁지'에 빠져 그의 발아래에서 죽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한 편의 서사시 같은 이 무용담은 우리의 성 게오르크가 저지른 술책을 은폐하는 구실을 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이미 '덧붙인 거짓말'이나 '날조'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교활하게 발췌된 인용'이 문제가 되고 있을 뿐이다. 전체적인 문제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버렸으며 왜 그것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성 게오르크와 그의 케임브리지 앞잡이 모두 잘 알고 있었다. [16.1]

16.1.
(SS) The whole issue was shifted, and St. George and his Cambridge squire very well knew why.
(BF) The whole issue was shifted, and St. George and his Cambridge shield-bearer were very well aware why they had done this.
(DK) Die ganze Frage war verschoben, und Sankt Georg und sein Cambridger Schildknappe wußten sehr genau weshalb.
DK의 'Schildknappe'는 영어로 'squire', 한국어로는 '기사(騎士)의 종자(從者)'를 뜻한다. 강 교수는 '앞잡이'로 번역했다.

엘리너 마르크스는 『타임스』가 게재를 거절했기 때문에 1884년 2월 월간지 『투데이』(To-Day)를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밝혔다. 엘리너는 여기에서 원래 문제가 된 단 하나의 쟁점, 즉 마르크스가 그 문장을 '허위로 덧붙였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대하여 세들리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마르크스와 브렌타노 사이의 논쟁에서 "어떤 문장이 글래드스턴의 연설에 실제로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문제"는, 내가 보기에 "그 인용문이 글래드스턴이 말하려고 했던 의미를 그대로 살리려고 했느냐 아니면 그것을 왜곡하려 했느냐의 문제에 비하면" "매우 부차적인 의미"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 다음 그는 『타임스』의 보도가 "사실상 말의 내용에서 모순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수긍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머지 내용을 정확하게, 즉 글래드스턴이 말하려고 했던 자유주의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바로 그것이 글래드스턴이 정말로 말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투데이』, 1884년 3월). 여기에서 가장 우스운 것은 이 케임브리지의 소인배가 연설문의 인용을 이제는, 익명의 브렌타노가 '관례'라고 존중했던 핸서드 속기록이 아니라 똑같은 브렌타노가 '틀림없이 잘못 씌어졌다'고 지적했던 바로 그 『타임스』의 보도에 따라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물론 문제가 된 그 문장이 빠져 있는 것은 바로 핸서드 속기록인데 말이다!



엘리너 마르크스는 이 주장을 『투데이』 같은 호 안에서 간단하게 무력화시켰다. 먼저 테일러가 1872년의 논쟁을 모두 읽었을 경우 그는 사실을 '허위로' '덧붙였을'뿐만 아니라 '삭제해' 버리기까지 한 셈이다. 그렇지 않고 그가 이 논쟁을 읽지 않았다면 그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확실한 것은 마르크스가 '허위로 덧붙였다'고 주장한 브렌타노의 고발에 대해서 그가 단 한 순간도 지지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그는 이제 마르크스가 무엇을 덧붙인 것이 아니라 중요한 구절을 하나 숨겨버렸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 구절은 창립선언문의 5쪽에 이른바 '허위로 덧붙여졌다'고 언급되는 바로 그 구절 몇 줄 앞에 인용되어 있다. 또한, 글래드스턴의 연설에서 드러나는 모순에 관해서 말한다면, 『자본』 618쪽(제3판, 672쪽)의 주 105 15) 에서 '1863년과 1864년 글래드스턴의 예산연설에서 계속 드러나는 모순들'에 대해서 얘기한 사람은 바로 마르크스가 아닌가! 마르크스는 단지 이들 모순을 세들리 테일러처럼 자유주의적인 태평스러움으로 해소해버리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엘리너 마르크스가 밝힌 답변의 결론을 요약하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반대로 마르크스는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조금도 무엇을 허위로 덧붙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글래드스턴의 연설 가운데 분명하게 얘기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핸서드 속기록에서 누락되어버린 어떤 구절을 망각되지 않도록 되살려놓았던 것이다."



이것으로 세들리 테일러도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20년 동안 이 두 큰 나라에 걸쳐서 교수 일당이 벌여온 음모가 거둔 전체적인 성과는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해서 그 정직성을 문제 삼지 않게 되었다는 것과 그 이후로 세들리 테일러는 브렌타노의 논쟁적 저작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고 또한 브렌타노는 핸서드 속기록의 완전무결성에 대한 교황적 권위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1890년 6월 25일, 런던
프리드리히 엥겔스


<주석>
 

8) 이 책의 130, 517~519, 610~613, 655~657, 660쪽을 볼 것.
9) 이 책의 519~525쪽을 볼 것.
10) 이 책에서는 { }로 묶고 '엥겔스'(원문에는 F.E.로 되어 있다-옮긴이)라고 표기하였다.
11) 이 책의 625쪽을 볼 것.
12) MEW판 16권, 3~13권을 볼 것.
13) 이 책의 680/681쪽을 볼 것.
14) 이 책의 682쪽을 볼 것.




Posted by metas :
이 글은 『Das Kapital』독일어판을 한국어로 번역한 강 교수(이하 강 교수)의 『자본』과 두 가지 영어 번역판인 Sonnenschein판(이하 SS)과 Penguin Classics의 Ben Fowkes 번역판(자본론 1에 해당, 이하 BF), 그리고 David Fernbach 번역판(자본론 2 및 3에 해당, 이하 DF2DF3로 각각 표기)을 참조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MIA(Marxists Internet Archive)에 있는 독일어 원본(이하 DK)을 참조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내용은 『자본I-1』 70~75쪽에 해당한다.



영어판 서문

『자본』의 영어판 발간에는 별다른 해명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지난 몇 년 동안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여러 이론이 영국과 미국에서 정기간행물이나 최신 저작들을 통해서 공격을 받거나 옹호되기도 하고 때로는 제대로 설명되거나 오해받기도 하는 등 온갖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 영어판이 왜 지금까지 미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1883년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직후 이 책의 영어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이 책의 번역을 떠맡겠다고 나선 사람은 마르크스와 나의 오랜 친구이자 이 책에 대해서 아마 어느 누구보다 정통한다고 생각되는 새뮤얼 무어(Samuel Moore)였다. 실로 그 영어판의 발간은 마르크스 유고에 대한 유언 집행자 모두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다. [2.1] 나는 초고와 원본을 비교하여 수정된 부분 가운데 내가 생각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제시해주는 일을 맡기로 하였다. 그런데 무어가 자신의 직업적인 일에 쫓겨 우리 모두가 바라는 만큼 빠른 속도로 번역을 마칠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졌을 때 이번에는 에이블링(Dr. Aveling)이 이 일의 일부를 떠맡겠다고 제안하였고, 우리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와 함께 마르크스의 막내딸 에이블링 부인이 인용문들을 맡아서 영국의 저자들이나 청서(淸書)에서 발췌하여 마르크스가 독일어로 옮겨놓은 부분을 모두 원문 그대로 복원하는 일을 맡기로 하였다. [2.2]

2.1.
(SS) When, soon after the author's death in 1883, it became evident that an English edition of the work was really required, Mr. Samuel Moore, for many years a friend of Marx and of the present writer, and than whom, perhaps, no one is more conversant with the book itself, consented to undertake the translation which the literary executors of Marx were anxious to lay before the public.
(BF) When, soon after the author’s death in 1883, it became evident that an English edition of the work was really required, Mr Samuel Moore, for many years a friend of Marx and of the present writer, and than whom, perhaps, no one is more conversant with the book itself, consented to undertake the translation which the literary executors of Marx were anxious to lay before the public.
(DK) Als es, bald nach dem Tode des Verfassers im Jahre 1883, klar wurde, daß eine englische Ausgabe des Werkes wirklich benötigt wurde, erklärte sich Herr Samuel Moore, ein langjähriger Freund Marx' und des Schreibers dieser Zeilen, und mit dem Buch selbst vertrauter vielleicht als irgend jemand, dazu bereit, die Übersetzung zu übernehmen, die es die literarischen Testamentsvollstrecker von Marx drängte, der Öffentlichkeit vorzulegen.
SS, BF, DK의 한 문장을 강 교수는 이 문장과 앞의 문장 두 개로 나눴다.
2.2.
(SS) This has been done throughout, with but a few unavoidable exceptions.
(BF) This has been done throughout, with but a few unavoidable exceptions.
(DK) Das ist durchgängig geschehen bis auf einige unvermeidbare Ausnahmen.
이 문장 다음에 SS, BF, DK에는 위와 같은 문장이 더 있지만, 강 교수는 번역하지 않았다. 번역의 노고는 위로하지만 저자가 쓴 단 한 문장 단 한 단어라도 절대로 빼먹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작업은, 몇몇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책 전반을 거쳐 샅샅이 이루어졌다."

이 책 가운데 다음 부분은 에이블링이 번역한 것이다. ① 제10장(노동일)과 제11장(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 ② 제6편(임금, 제19장~제22장) ③ 제24장 제4절(갖가지 사정)부터 이 책의 끝 부분까지—여기에는 제24장의 마지막 부분과 제25장 그리고 제8편 전체(제26장~제33장)가 해당된다. ④ 두 개의 저자 서문, 나머지 부분은 모두 무어가 번역하였다. [3.1] 따라서 번역자들은 각자 자신이 담당한 부분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지만, 나는 이 책 전체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3.1.
강 교수가 빠뜨린 부분이다. 물론 독일어판에는 없으니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엥겔스가 영어판에서는 (자신의 임의대로? 아니면 마르크스가 지시한 대로?) 독일어판본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했다는 것은 눈여겨봐야 할 점이다. 엥겔스는 『자본론』의 영어판을 독일어와는 다르게 구성을 바꿨는데, 4장의 세 개 절과 24장의 일곱 개 절을 독립된 장으로 나눴고 본원 축적에 대한 부분을 8편으로 만들었다. 독일어판과 영어판의 목차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독일어판 1-3장=영어판 1-3장, 독일어판 4장=영어판 4-6장, 독일어판 5-23장=7-25장, 독일어판 24장=영어판 26-32장, 독일어판 25장=영어판 33장, 독일어판 7편=영어판 7-8편.

줄곧 우리 작업의 대본이 된 것은 독일어 제3판이었는데 이것은 마르크스가 남겨둔 메모의 도움을 받아 1883년에 내가 편집한 것으로, 그 메모에는 제2판의 본문 가운데 1873년에 출간된 프랑스어판에 맞추어 바꾸어야 할 부분이 표시되어 있었다. 6) 제2판의 본문에 표시된 이들 수정사항은 마르크스가 영어판 번역을 위해서 자필로 표시해둔 수정사항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이었는데, 원래 이 영어판 번역은 10년 전 미국에서 출판하기로 계획했다가 무엇보다 제대로 된 번역자를 찾을 수 없어서 포기했던 것이었다. 영어 번역을 위한 이 수고(手稿)는 우리의 오랜 친구인 뉴저지 주 호브켄에 사는 조르게(F. A. Sorge)가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 이 수고는 프랑스어판에서 몇 가지를 더 발췌하여 삽입하도록 지시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제3판을 위한 최근의 지시사항들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이어서 나는 그것이 특별히 우리에게 난점을 해결해준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어려운 부분에서 프랑스어판 본문이 참고가 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번역을 위해서 원문의 전체적인 의미 가운데 뭔가가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경우 마르크스 자신이 무엇을 희생시키려 했을지를 판단하는 근거로만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독자들을 위해서 제거하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어려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몇몇 용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의미와는 물론 경제학에서 통상 사용되는 의미와도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모든 학문의 새로운 견해는 이 학문에서 사용되던 전문용어들의 혁명을 포함한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화학이다. 화학에서는 대략 20년마다 전체 용어가 완전히 바뀌고 유기화합물 가운데 이름이 계속 변해오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경제학은 지금까지 대체로 상공업부문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으로 만족해왔으며, 그 결과 그런 용어들로 표현되는 생각들이 갖는 좁은 한계에 스스로 갇혀왔다는 점을 완전히 간과해왔다. 그래서 고전파 경제학도 그들이 이미 이윤과 지대가 생산물 가운데 노동자가 자신의 기업가(기업가는 불불[不拂, unbezahlt] 부분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소유자는 아니지만, 그것을 최초로 취득하는 자이다)에게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불 부분의 일부, 즉 그것의 조각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윤과 지대의 일상적인 개념의 한계를 한 번도 뛰어넘지 못했고, 또한 생산물 가운데 이 불불 부분(마르크스는 이것을 잉여가치라고 일컬었다)을 하나의 전체로서 한 번도 포괄적으로 고찰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결국 이들의 원천과 본질은 물론 가치나 나중에 배분되는 법칙에 대해서도 전혀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5.1] 이와 비슷하게 농업이나 수공업이 아닌 모든 산업도 매뉴팩처(Manufacture)라는 용어와 아무런 구분 없이 함께 사용되었는데 이로 인해 경제사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커다란 시기, 즉 수공업노동의 분화에 기초한 원래의 매뉴팩처 시기와 기계에 기초한 근대산업 시기 사이의 구별이 사라져버렸다. 그렇지만 근대 자본주의 생산을 인류의 경제사에서 하나의 단순한 발전단계로 간주하는 이론은, 이 생산양식을 결코 소멸하지 않는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저술가들이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과는 전혀 다른 용어들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5.1.
(SS) Thus, though perfectly aware that both profits and rent are but sub-divisions, fragments of that unpaid part of the product which the labourer has to supply to his employer (its first appropriator, though not its ultimate exclusive owner), yet even classical Political Economy never went beyond the received notions of profits and rents, never examined this unpaid part of the product (called by Marx surplus-product) in its integrity as a whole, and therefore never arrived at a clear comprehension, either of its origin and nature, or of the laws that regulate the subsequent distribution of its value.
(BF) Thus, though perfectly aware that both profits and rent are but sub-divisions, fragment of that unpaid part of the product which the labourer has to supply to his employer (its first appropriator, though not its ultimate exclusive owner), yet even classical political economy never went beyond the received notions of profits and rents, never examined this unpaid part of the product (called by Marx surplus product) in its integrity as a whole, and therefore never arrived at a clear comprehension, either of its origin and nature, or of the laws that regulate the subsequent distribution of its value.
(DK) So ist selbst die klassische politische Ökonomie, obgleich sie sich vollkommen bewußt war, daß sowohl Profit wie Rente nur Unterabteilungen, Stücke jenes unbezahlten Teils des Produkts sind, das der Arbeiter seinem Unternehmer(dessen erstem Aneigner, obgleich nicht letztem, ausschließlichem Besitzer) liefern muß, doch niemals über die üblichen Begriffe von Profit und Rente hinausgegangen, hat sie niemals diesen unbezahlten Teil des Produkts(von Marx Mehrprodukt genannt) in seiner Gesamtheit als ein Ganzes untersucht und ist deshalb niemals zu einem klaren Verständnis gekommen weder seines Ursprungs und seiner Natur, noch auch der Gesetze, die die nachträgliche Verteilung seines Werts regeln.
문장이 너무 길어 번역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강 교수의 번역은 뭔가 문제가 있다. 특히 'Mehrprodukt'은 ‘잉여생산물’이라고 해석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Verteilung seines Werts'를 '가치의 분배'가 아니라 '가치나 … 분배'라고 번역했다. "그리하여 고전파 정치경제학도, 이윤과 지대 둘 다 노동자가 고용주(불불 부분의 궁극적 소유자는 아니지만, 최초 수혜자)에게 제공해야만 하는 생산물의 불불 부분의 조각들이라는 일부분임을 완벽히 알고 있음에도, 결코 이윤과 지대의 일상적 개념을 뛰어넘지 않았고, 이런 생산물의 불불 부분(마르크스가 잉여생산물이라고 부른 것)을 전체로서 포괄적으로 조사한 적도 없으며, 그래서 그 기원과 본질을 물론 가치의 뒤이은 분배를 조절하는 법칙에 대해서도 명확히 이해한 적이 없다."

마르크스의 인용방식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여둘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대부분의 경우 마르크스의 인용도 보통의 방식대로 본문에서 제기된 주장에 대해 문서적인 증거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경제학 저술가들을 인용한 많은 부분에서는 어떤 하나의 견해가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누구에 의해 처음 명시적으로 주장되었는지를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이런 인용은 인용된 견해가 해당 시기에 지배적이던 사회적 생산 및 교환 조건을 어느 정도 적절하게 표현했는지 그 중요성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마르크스가 그 견해들을 인정하는지 여부나 그 견해가 일반적인 타당성이 있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들 인용은 경제학의 역사로부터 발췌한 주석으로서 본문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번역한 것은 전체 저작의 제1권에 해당할 뿐이다. 그러나 이 제1권은 상당 부분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결된 전체를 이루고 있으며 지난 20년 동안 독립된 저작으로 간주되어왔다. 1885년에 내가 독일어로 출간한 제2권은 제3권이 없이는 전적으로 불완전한 것인데, 제3권은 1887년 말까지도 출간될 가능성이 없다. 제2권과 제3권의 영어판 준비는 제3권의 독일어 원본이 출간되고 난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자본』은 유럽 대륙에서 종종 ‘노동자 계급의 성서’라고 불린다. 이 저작에서 얻어진 결론들이 독일과 스위스는 물론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 미국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에서 날이 갈수록 점점 위대한 노동계급운동의 기본원칙으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으며 또한 모든 나라의 노동 계급이 이들 결론이야말로 바로 자신들의 상태와 열망을 가장 잘 표현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은 이 운동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8.1] 그리고 영국에서도 마르크스의 이론은 지금 이 순간 사회주의 운동—노동자 계급 못지않게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확산되고 있는—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영국의 경제상태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불가항력적인 국가적 필요 때문에 강력히 요구되는 시점이 급속하게 다가오고 있다. 생산과 시장이 끊임없이 급속하게 확대되지 않으면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영국 산업체계의 움직임이 정지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자유무역은 그 밑천이 모두 드러나고 말았다. 맨체스터(Manchester)에서까지도 왕년의 이 경제적 복음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7) 급속하게 발전한 외국의 산업은 도처에서, 즉 보호관세 지역과 중립적 시장은 물론 심지어 영국의 국내시장에서까지도 영국의 생산을 위협하고 있다. [8.2] 생산력의 증가는 기하급수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반해 시장의 확대는 기껏해야 산술급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1825년부터 1867년까지 10년을 주기로 침체, 호황, 과잉생산, 위기를 반복적으로 거쳐 가던 순환은 이제 중단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를 지속적이고 만성적인 불황의 절망적인 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위한 것일 뿐으로 보인다. 고대하는 호황의 시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호황기의 징조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그것은 언제나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는 동안 겨울철이 다가올 때마다 '실업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다. 그러나 실업자 수는 해마다 부풀어 오르고 있는데 이 문제에 답변을 제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실업자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고 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시점에서 우리는 영국의 경제상태와 경제사에 대한 평생의 연구를 통해서 자신의 전 이론을 수립하고 이 연구를 통해 최소한 유럽에서 영국이야말로 불가항력적인 사회혁명이 전적으로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는 결론을 얻은 이 인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물론 그는 영국의 지배 계급이 이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혁명에 대하여 ‘노예제 옹호 반란’(proslavery rebellion)도 없이 굴복하리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는다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1886년 11월 5일
프리드리히 엥겔스


8.1.
(SS) “Das Kapital” is often called, on the Continent, “the Bible of the working class.” That the conclusions arrived at in this work are daily more and more becoming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the great working-class movement, not only in Germany and Switzerland, but in France, in Holland and Belgium, in America, and even in Italy and Spain, that everywhere the working class more and more recognises, in these conclusions, the most adequate expression of its condition and of its aspirations, nobody acquainted with that movement will deny.
(BF) Capital is often called, on the Continent, ‘the Bible of the working class’. That the conclusions arrived at in this work are daily more and more becoming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the great working-class movement, not only in Germany and Switzerland, but in France, in Holland and Belgium, in America, and even in Italy and Spain, that everywhere the working class more and more recognizes, in these conclusions, the most adequate expression of its condition and of its aspirations, nobody acquainted with that movement will deny.
(DK) "Das Kapital" wird auf dem Kontinent oft "die Bibel der Arbeiterklasse" genannt. Daß die in diesem Werk gewonnenen Schlußfolgerungen täglich mehr und mehr zu grundlegenden Prinzipien der großen Bewegung der Arbeiterklasse werden, nicht nur in Deutschland und der Schweiz, sondern auch in Frankreich, in Holland und Belgien, in Amerika und selbst in Italien und Spanien; daß überall die Arbeiterklasse in diesen Schlußfolgerungen mehr und mehr den angemessensten Ausdruck ihrer Lage und ihrer Bestrebungen anerkennt, das wird niemand leugnen, der mit dieser Bewegung vertraut ist.
이 문장도 상당히 긴 편인데, 누구의 번역이 적당한지는 잘 모르겠다. 내 번역은 다음과 같다. "『자본론』은 유럽 대륙에서 흔히 ‘노동자 계급의 성서’라고 불린다. 이 저작에서 도달한 결론들이 날이 갈수록 점점 독일과 스위스뿐만 아니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미국 심지어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도 위대한 노동자 계급운동의 기본 원칙들이 되어가고 있으며, 곳곳에서 노동자 계급이 점점 자신의 상태와 열망에 대한 가장 적당한 표현을 이러한 결론들에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 운동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8.2.
(SS) Foreign industry, rapidly developing, stares English production in the face everywhere, not only in protected, but also in neutral markets, and even on this side of the Channel.
(BF) Foreign industry, rapidly developing, stares English production in the face everywhere, not only in protected, but also in neutral markets, and even on this side of the Channel.
(DK) Die sich schnell entwickelnde ausländische Industrie starrt der englischen Produktion überall ins Gesicht, nicht nur auf zollgeschützten, sondern auch auf neutralen Märkten und sogar diesseits des Kanals.
번역상의 차이일 뿐이겠지만, 강 교수는 '노려보고 있다'라고 번역했는데, SS, BF, DK는 '목전에 다가오다' 혹은 '눈 앞에 있다' 정도로 해석된다. 그렇다고 의미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주석>
 

6)『자본. 카를 마르크스』(Le Capital. Par Karl Marx), 루아(M. J. Roy) 옮김, 저자 완전 교열, 파리, 라샤트르(Lachâtre) 간행. 이 번역본에는 특히 마지막 부분에 독일어 제2판을 상당히 수정 보완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7) 오늘 오후에 맨체스터 상업회의소의 4분기 회의에서는 자유무역 문제를 둘러싸고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다. 다음과 같은 취지의 결의안이 상정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들이 자유무역에 대한 영국의 사례를 본받아 따르기를 40년간이나 기다려왔으나 그것은 허사였다. 그래서 우리 회의소는 이제 이런 관점을 바꾸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결의안은 찬성 21표, 반대 22표의 단 한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이브닝 스탠더드』[Evening standard], 1886년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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