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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0.11 [서평]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를 읽고



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라는 과학철학자가 저술한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이라 불리는 비과학의 함정(Nonsense on Slits: How to Tell Science from Bunk)』이란 책을 발견했다. 책일 빌릴까 잠깐 고민하다가, 도서 대여가 돈 드는 일도 아니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대출 신청을 했다. 사실, 이 책이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을 곧바로 접하지 않은 이유는 이 책을 “그저 흔하디흔한 과학철학서”나 “시중에 많이 나도는 사이비 과학 폭로서” 정도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의 판단이 근거라곤 전혀 없는 개인적 편견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정말로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한 작품이었다.



[출처: 알라딘]



이 책은 연성 과학(soft science, 軟性科學)과 경성 과학(hard science, 硬性科學)의 특징을 살피면서 카를 포퍼(Karl Popper)라는 고집스러운 과학철학자 할아범이 오래전에 제기한 과학의 경계 문제(the Problem of demarcation, 境界問題)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늘날 과학으로 인정되거나 스스로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다양한 과학에 관해 고찰하면서, 이들을 진짜 과학(real science), 거의 과학(almost science) 그리고 사이비 과학(pseudo-science)으로 분류했다. 영광스런 무대 위에 오른 후보는 다음과 같다.


(1) 철학보다 더욱 철학적이 되어버린 현대 물리학의 다채로운 우주론(cosmology, 宇宙論), (2) 진화생물학 이론을 받아들였지만 진정한 과학인지는 진실로 의심되는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 進化心理學), (3) 한때 미국을 풍미했던 외계 지적 생명체에 관한 대대적 탐사 프로젝트인 세티(SETI,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4) 진정한 과학인 진화생물학과 사이비과학의 전형(典型)인 너무나도 끈질기고 병적으로 집요한 창조론(creationism, 創造論)과 그 적자(嫡子)인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 知的設計論), (5) 과학이 아니라고 오래전에 판명되었지만 아직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점성술(astrology, 占星術) 등등. 진화심리학에 관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저자는 진화심리학을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신, (인간을 다루지 않는) 사회생물학은 엄연한 (거의) 과학이라고 판단한다.


저자는 언론에 의해 조장되거나 왜곡된 과거와 오늘날 과학의 현주소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살피면서, 비과학적 주제가 언론을 통해서 어떻게 과학적으로 포장되는지, 과학적 사실이 어떻게 해서 과학적 사실이 아닌 것처럼 인식되어버리는지, 그리고 불순한 의도를 가진 세력이 과학을 어떤 식으로 교묘하게 왜곡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더불어, 저자는 유명한 과학자나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니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그리고 과거와 오늘날의 지식인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씽크 탱크(Think Tank)가 불리는 집단의 사례를 분석해 이들이 어떤 식으로 과학을 왜곡하는 데 앞장서는지 보였다.


과학 진영과 비과학 진영의 충돌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이 책에서 다루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지적 사기(intellectual impostures, 知的詐欺)라 불리는 물리학자 앨런 소칼(Alan Sokal)의 짓궂은 장난(?)으로 시작된 과학 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봄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과학을 오해하는지 설명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파울 파이어벤트(Paul Feyerabend)라는 괴팍하면서도 걸출한 철학자의 과학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오해의 실체를 파헤쳤다. 이와 함께, 저자는 과학을 교조적 선언으로 받드는 과학주의(scientism, 科學主義)도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피글리우치는 과학이 발전하는 원리에 관해서도 고찰했다. 실제로, 그는 책에서 토마스 쿤(Thomas Kuhn)의 유명한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일이 과학 발전 과정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인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물리학에서는 그런 측면이 있지만, 생물학 같은 분야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진실로, 이 책은 정말 잘 쓰인 책이다. 과학철학자이면서도 식물학과 유전학을 전공한 저자의 경험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 책의 내용은 실험 생물학을 전공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크게 와 닿는다. 덧붙여, 이 책은 그 어떤 대중적 과학철학/과학사회학 도서보다도 재미있다.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숨넘어갈 정도로 낄낄거리며 웃은 적도 있다. 그만큼 이 책의 문장 하나하나가 촌철살인(寸鐵殺人) 그 이상의 의미와 유머로 가득하다. 과학이 무엇인가, 과학철학이 무엇인가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을 읽기 바란다.





Posted by meta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