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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새 증후군

2011. 11. 7. 13:20 from 잡글

"과학자들은 좋겠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요."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나는 애매한 웃음을 지으면서 "예, 뭐 그런 셈이지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건 아마 어떤 세계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에서 연구를 시작했을 때 연구실에서 내 위치는 박사후 과정(Post Doctor)이었다. 박사 연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자리는 교육 과정을 끝낸 연구원이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기간이다.
이과계 연구원들은 대학 4년 과정을 마치면 대학원으로 진학한다. 일본이든 미국이든 석사 2년, 박사 3년, 합계 5년이 표준이다. 이때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연구 프로젝트를 다루면서 여러 편의 논문을 쓰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소속된 연구실의 교수로부터 주제를 받는다. 그리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우리에게 박사 학위는 연구원으로서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한 운전면허증에 불과하다.
사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실험으로 밤이고 낮이고 고생하다가 겨우 박사 학위를 받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후의 인생이 그리 밝은 것은 아니다. 연구원으로서 취직할 수 있는 곳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운이 좋다면 대학의 조교 자리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 이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돈을 받는 건 맞지만 그 외의 겻들은 전혀 상상과 다르다.
조교로 채용된다는 것은 아카데미의 탑을 오르기 위한 사다리에 발을 얹어놓은 것임과 동시에 계급사회에 진입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카데미 밖에서는 보기에는 반짝이는 탑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어둡고 칙칙한 문어단지 속이다. 강좌제라 불리는 이 구조의 내부에는 전군대적인 계급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교수 이외의 모든 사람은 하인이나 다름 없다. 조교―강사―조교수. 자신의 인격은 팔아버리고, 나를 버리고 교수에게 빌붙어서는 그 사다리에서 혹시 발을 헛디디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걸레질, 가방 대신 들어주기, 온갖 잡무와 학대를 끝까지 견뎌낸 자만이 이 문어단지의 가장 안쪽에 마련된 방석 위에 앉을 수 있다. 오래된 대학의 교수실은 어느 곳이나 죽은 새 냄새가 난다.
죽은 새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새는 넓은 하늘을 유유히 날고 있다. 성공하여 이름을 날린 위대한 교수님. 우아한 날개는 기류를 세차게 박차고 더욱 높은 곳을 향한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죽은 새 증후군. 옛날부터 우리 연구원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일종의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의 이름이다.
우리는 빛나는 희망과 넘칠 듯한 자신감을 가지고 출발선에 선다. 보는 것, 듣는 것마다 날카롭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하나의 결과는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우리는 세상의 누구보다도 실험 결과를 빨리 알고 싶어하므로 기꺼이 몇 날 밤을 새기도 한다. 경험을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업무에 능숙해진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일이 더 잘 진행되는지를 알기 때문에 어디에 주력하면 되는지, 어떻게 우선 순위를 매기면 되는지 눈에 보인다. 그러면서 점점 더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된다. 무슨 일을 하든 실수 없이 해낼 수 있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렇지만 가장 노련해진 부분은, 내가 얼마나 일을 정력적으로 해내고 잇는지를 세상에 알리는 기술이다. 일은 원숙기를 맞이한다. 모두가 칭찬을 아까지 않는다. 새는 참으로 우아하게 날개를 펴고 항공을 날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때 새는 이미 죽은 것이다. 이제 그의 정렬은 모두 다 타버리고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후쿠오카 신이지, <생물과 무생물 사이>, 75~77쪽


후쿠오카 신이치라는 일본 출신 생리학자의 저서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신이치는 PCR을 발견한 (진정한 자유인이라 할 수 있었던) 캐리 멀리스(Kary B. Mullis)를 소개하기 위해 자신의 모국인 일본의 과학계의 현실에 대해 담담하게 서술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한국의 과학계에 몸을 담고 있거나 한때 몸담았던 적이 있었다면 후쿠오카 신이치가 묘사한 일본의 과학계가 한국과는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블루오션 혹은 잭팟이 터지길 바라며 아름다운 장밋빛 미래를 가슴에 품고 갖은 고생을 견디며 연구에 매진하지만, 학위 수여 후 돌아오는 것은 불안정한 연구원 생활이다. 사람들은 박사 학위가 세상의 온갖 부와 명예에 대한 보증수표라도 되는 양 떠들어대지만, 허울을 벗겨보면 그것은 대부분 거짓 혹은 과장에 가깝다. 혹시나 명예 정도는 있을지 몰라도―한국에서는 박사 학위를 소지한 사람은 뭔가 대단한 게 있는 것처럼 취급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그냥 그게 전부다.―명예가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다. 명예가 램프의 요정 '지니'는 아니다.

연구자가 안정적으로 연구를 계속하려면 교수 혹은 선임급 이상의 연구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직책을 얻으려면 뛰어난 능력을 증명해줄 수 있는 업적이 필요하다. 즉 셀(Cell), 사이언스(Science), 네이처(Nature)라는 '대단한' 저널에 자신의 연구 업적을 발표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저널에 발표하는 게 쉽지 않다. 일의 중요도가 선별 기준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이것만으로 '대단한' 저널에 자신의 연구를 발표할 기회를 잡지는 못한다. 바로 인지도 혹은 정치력이다.

백인이 선점한 과학계에서 비(非)서구권 출신의 비(非)백인이, 그것도 미국·유럽이 아닌 한국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조그만 나라에서 몇십 점 되는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의 영향력이 있는 좋은 저널에 논문을 내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만약 한국의 어떤 교수 혹은 연구원이 빅 저널(big journal)에 자신의 연구를 발표했다면 그 연구가 뛰어나거나, 연구의 책임자로 포함되어 있는 교수 혹은 연구원의 학계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함을 의미한다.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업적도 중요하지만, 한국에선 특히 연줄―학연, 지연 그리고 혈연―도 강하게 작용한다. 아무리 좋은 논문을 내도 연줄이 없으면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내 선배 중에도 연구 실적은 좋지만, 연줄이 없어서 한국에서 직장을 잡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이들은 낫다. 자신들이 원하면 미국 같은 곳에서 교수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미국에서 교수가 되어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쪽도 연구비를 따내기 위한 경쟁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은 소수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연구를 계속해 나갈 수 있다. 연구비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돈이 있고, 이런 여건이 충족되므로 자기가 먹고 사는 건 걱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머지는 어떤가? 교수도 되지 못하고 연구소의 연구원도 되지 못한 수많은 박사들… 후쿠오카 신이치는 죽은 새 증후군을 얘기했지만, 교수가 되지 못하고 안정된 연구원도 되지 못한 다수의 박사 학위 소지자들은 날지도 못한 채 둥지 밖에서 정처 없이 떠돌기만 한다. "넓은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꿈"을 꾸며 둥지 밖으로 나가지만,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끊임 없는 경쟁을 종용받으며 과학에 대한 꿈과 열정은 점점 더 사라진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삶을 두려워하며 삶에 대한 희망을 잃은 채 쓸쓸히 죽어간다. 후쿠오카 신이치가 언급한 것처럼 연구자의 일부는 죽은 새 증후군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성공한 자의 이야기다. 연구자 다수는 그냥 방치되어 두려움에 떨다가 이름도 모를 병으로 쓸쓸히 죽어 간다.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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