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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4.26 노동절의 기원 그리고 한국의 노동절 역사 2


5월 1일은 노동절(勞動節)이다. 정부와 자본가는 "근로자의 날"이라 부르며 노동절의 의미를 퇴색(退色)하려 하지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본연(本然)의 의미는 역사의 시련을 거치면서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절은 무엇을 위한 날인가? 그것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노동자가 하나 된 목소리와 단결된 연대(連帶)로 자본주의 체제의 온갖 부조리함과 억압에 저항(抵抗)하는 투쟁의 날이며,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숭고(崇高)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희생한 선배 노동자의 투쟁을 기념하는 날이다. [1] 이런 의미에서 노동절이 드러내는 상징성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노동절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오늘날 모습을 드러냈는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전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가 흔히 노동절을 부를 때 사용하는 메이데이(May Day)란 말은 원래 고대 켈트(Celt)의 벨테인(Beltane) 축제와 고대 게르만(German) 지역의 발푸르가의 밤(Walpurgis's Night)이라는 축제에서 유래한 고대 북반구에서 5월 1일에 전통적으로 치러진 봄 축제(spring festival)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2] 영국에서는 꽃과 리본 등으로 장식한 메이폴(Maypole) 주변에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메이퀸(May Queen, 5월의 여왕)'으로 뽑았고, 아일랜드에서는 모닥불을 피워 여름이 오고 긴 겨울밤이 물러나길 기원했으며, 독일 등지에서도 영국과 아일랜드와 비슷한 형식으로 봄의 도래(到來)를 축하했다. 그러나 역사의 우연인지 혹은 처음으로 메이데이를 제안한 자의 의도인지는 지금에 와서 파악할 수 없지만, 역사의 진보(進步)는 '5월 1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으니 그것은 바로 "숭고한 희생과 단결된 저항"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며, 노동자계급에 새로운 세상이 오길 기원하는 잔칫날이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절의 탄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산업혁명 그리고 노동자의 탄생

산업혁명이 한창인 18~19세기 무렵.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인류의 생산방식은 1만 년 전의 수렵, 채취 사회를 농경 사회로 전환한 장기간의 농업혁명에 맞먹는 혹은 그 이상의 파급력(波及力)을 보인 최대규모의 역사적 변화의 원동력이었다. 이런 변화는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 저지대(低地帶), 벨기에 일부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지만, 머지않아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3] 여기에는 상호연관된 일련의 기술적 진보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는 생산력의 엄청난 증대 및 인간과 상품의 이동시간 단축이라는 혁신(革新)을 낳았다. 겉으로 보기에 세상은 좋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사회적 비극도 만연(蔓延)했다. 특히 산업혁명 전에 일어난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은 영국 농촌을 급속히 해체했으며, 이 때문에 농경지를 잃은 농부 다수는 생존을 위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이 지배하는 냉혹한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헐값으로 팔기 시작했다. [그림 1] [4, 5]

 

그림 1. 산업혁명 시절 공장(왼쪽)과 노동자의 모습(오른쪽) [출처: Patrick's Topics Blog (왼쪽), Writings on History & Media (오른쪽)]


수많은 사람의 삶이 근본부터 바뀌기 시작했으며, 특히 농촌의 붕괴는 도시의 급격한 성장을 불러왔다. 생존을 위해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게 되었지만,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저임금에 기반을 두는 소규모 산업—특히 섬유산업과 광업—에서 과도한 노동착취는 다반사(茶飯事)였으며, 심지어 여성과 어린이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족의 생계를 벌기 위해, 그리고 성인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임금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작업장에 투입되어 혹사당했다. [그림 2] [6, 7] 순전히 생존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시장"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 노동자의 삶은 더욱 자본가에 종속되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노동을 팔지 못한 사람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자본가의 노동착취 또한 가혹했다. 자본에 의한 인간통제(人間統制)가 심화하면서 자본가는 노동자가 작업장에서 조직적으로 일하도록 할 규율(規律)을 만들었고, 엄격한 규율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속에서 노동자는 영혼을 잃어버린 생체기계(生體機械)가 되어가고 있었다. [8] 노동자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의 삶은 매우 비참했으며, 18~19세기까지 도시에서는 언제나 농촌보다 훨씬 높은 빈도로 각종 전염병이 유행했고, 거주 환경은 매우 열악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사망률이 출생률을 웃돌기도 했다. [그림 3] [9]

 

그림 2. 산업혁명 당시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어린이들 [출처: The Industrial Revolution]


 

그림 3. 산업혁명 당시 주거환경 모습 [사진출처: FROGBLOG (왼쪽), History Cookbook (오른쪽)]


마침내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봉건시대의 제도적인 계급차이는 자본에 의한 물질적 계급차이로 치환(置換)됐다. 봉건영주와 귀족 그리고 농노라는 계급은 완전히 소멸하거나 혹은 있더라도 유명무실(有名無實)했지만,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부르주아(bourgeois)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가지의 큰 범주로 나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계 안에서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자본이 지배하는 국가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비록 초기에는 조직적이지 못 했지만, 지배계급의 무자비한 탄압은 노동자의 조직화한 단결을 형성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저항의 구호는 다양했다. 저임금, 열악한 노동환경, 과도한 노동강도 그리고 지나친 노동시간 등 노동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철폐(撤廢)의 대상이었다. 이것 가운데 '노동절' 탄생의 산파(産婆) 역할을 한 것은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대대적인 투쟁이었다. [10] 초기에는 임금인상을 위한 투쟁이 많았다. 그러나 노동착취가 극심해지면서 노동시간 단축은 임금인상보다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으로 급부상했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 초기에 노동자 일반의 노동시간은 최고 18시간에 달했으며, 영국 맨체스터(Manchester) 부근 한 공장의 방적공은 물 마시러 가는 것조차 금지당한 채 고온의 작업장에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받기도 했다. [11] 이렇게 하루 14~18시간이라는 장시간 노동을 줄이기 위한 노동자의 투쟁은 더디긴 하지만 조금씩 결실을 보고 있었으며, "8시간 노동 운동(Eight-Hour Movement)"에 다다랐을 때 "메이데이"의 역사적 순간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날: 1886년 미국의 노동자 대투쟁과 제2인터내셔널

첫 시작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였다. "하루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프롤레타리아의 휴일 기념식(proletarian holiday celebration)"이란 아이디어가 나왔고, 1856년 4월 21일에 총파업과 더불어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사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자 지도부는 이 행사를 단 한 번만 치르기로 계획했었다. 그러나 "노동자를 위한 날"은 오스트레일리아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큰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휴일 기념식"을 매년 정기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12]

미국에서도 "하루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한 대대적인 선동의 물결이 일었고 철강, 철도, 광산 부문 등에서 공장점거와 파업 등의 격렬한 투쟁이 발생했다. [13] 원래 프랑스계 미국인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시위는 정부와 자본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5월 1일에는 단순한 시위를 넘어선 총파업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14] 하워드 진(Howard Zinn)의 글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15]

1886년 봄에 이르면 8시간 노동을 위한 운동은 이미 성장해 있었다. 5월 1일, 이제 5년째로 접어든 미국노동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은 8시간 노동을 거부하는 모든 공장에서 전국적인 파업을 벌일 것을 호소했다.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 단장 테런스 파우덜리(Terence Powderly)는 우선 고용주와 피고용인을 상대로 8시간 노동에 대해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파업에 반대했지만, 노동기사단의 모임들은 파업 계획을 세웠다. 기관사 노동조합(Brotherhood of Engineers)의 위원장은 "두 시간 덜 일하면 두 시간 더 빈둥빈둥 돌아다니고 두 시간 더 술을 마시게 된다"고 말하며 8시간 노동에 반대했지만, 철도 노동자들은 위원장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8시간 노동제 운동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전국 1만 1,562개 공장에서 35만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디트로이트(Detroit)에서는 1만 1,000명의 노동자가 8시간 노동제 행진을 벌였다. 뉴욕에서는 2만 5,000명이 브로드웨이(Broadway)를 따라 횃불 행진을 벌였는데 제빵공 노동조합(Baker's Union)의 3,400명이 행렬의 선두에 섰다. 시카고에서는 4만 명이 파업을 벌였고, 4만 5,000명이 파업 예방조치로 노동시간 단축을 얻어냈다. 시카고의 모든 철도가 운행을 멈췄고 산업 대부분이 마비됐다. 가축수용소 역시 문을 닫았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노동자 투쟁은 매우 격렬했으며 규모 또한 상당했다. 그렇지만 자본가의 반격(反擊)도 만만치 않았다. 노동자의 연대를 분쇄하기 위해 주 민병대와 경찰에게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했으며, 친(親)자본가적인 신문에서는 연일 노동자 투쟁을 비난하며 사회안정을 위해 국가와 주 정부가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5월 3일,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졌다. 맥코믹 수확기 공장(McCormick Harvester Works) 앞에서 파업파괴자 세력과 맞서 싸우고 있던 노동자와 그 동조자가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다수가 부상을 입고 4명이 죽었다. [15]

1886년 5월 4일, 맥코믹 사건에 대한 규탄(糾彈)과 8시간 노동제를 촉구하기 위한 집회가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Haymarket Square)에서 열렸다. [16] 이곳에 180명가량의 경찰이 시위진압을 위해 파견되었고 곧 '군중해산'을 명령했다. 그렇게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하는 와중에 정체불명의 괴한이 경찰을 향해 폭탄을 던져 순식간에 경관 66명이 다치고 그 중 7명이 죽었으며, 경찰이 군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한 총격으로 시민 몇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그림 4] [15, 16]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 아무런 증거도 없었음에도 경찰은 시카고 대투쟁을 이끌었던 무정부주의 지도자 8명을 체포했고, 일리노이(Illinois) 주 판사는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항소는 기각(棄却)됐다. 헤이마켓 광장의 폭탄 테러와는 아무 관련도 없었던 그들은 사상이 불순(不純)하다는 이유로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더군다나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연설을 위해 집회에 참석했던 새뮤얼 필든(Samuel Fielden) 혼자뿐이었다. [15, 16]

그림 4. 헤이마켓 사건 당시를 묘사한 삽화 [출처: World Warrior of So Cal]


이 사건은 국제적인 관심과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미국과 일리노이 주 정부를 비난하며 8명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재판이 있은 지 1년 뒤에 일리노이 주 정부는 엘버트 파슨즈(Albert Parsons), 오거스트 스파이즈(August Spies), 아돌프 피셔(Adolph Fischer), 조지 엥겔(George Engel) 등 4명을 교수형에 처했으며, 루이스 링(LouisLingg)은 감방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입에 문 채 터뜨려 자살했다. [15, 16] 사행 집행은 전 국민을 분노케 했고, 시카고에서는 수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행렬이 이어졌다. 미국 전역에서 아직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자들의 석방을 위한 대대적인 서명운동이 벌어졌으며, 결국 신임 일리노이 주지사 존 피터 올트겔드(John Peter Altgeld)의 지시로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져 남은 3명—새뮤얼 필든(Samuel Fielden), 오스카 니비(Oscar Nebee), 마이클 슈와브(Michael Schwab)—은 무사히 석방되었다. [15, 16]

헤이마켓 사건이 발생한 후 수년 간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과 법률대응으로 미국의 노동자 투쟁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1888년에 미국노동연맹은 1886년 당시의 투쟁분위기를 다시 살리기 위해 1890년 5월 1일에 대규모 투쟁을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Bastille) 함락 100주년인 1889년 7월 14일에 파리에서 열린 제2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회의(International Worker's Congress)에서 마르크스(Karl Marx)를 포함한 많은 사회주의자는 1884~1886년의 기간 동안 진행된 미국의 노동자 대투쟁에 대한 소식을 보고받았으며, 그때의 투쟁을 재개(再開)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미국 노동자의 투쟁에 고무(鼓舞)되었고, 파리 회의(Paris Congress)는 "5월 1일"을 "국제적인 대투쟁의 날(great international demonstration)"로 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미국에서 계획하고 있던 1890년 5월 1일의 8시간 노동 쟁취에 대한 적극적 지지라는 형식을 띠고 있었다. [10, 14] 그 결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작해 미국에서 결실을 본 메이데이의 전통은 12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노동자의 단결을 과시하는 역사적인 날"로 기념되고 있다. [17]

초기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개략

지금까지 노동절의 기원에 대해 살펴봤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국제적인 노동자 대투쟁의 날"로 "5월 1일"이 결정된 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시카고 총파업이 원인이었지만, 그 파급은 미국과 유럽 지역에 국한(局限)되지 않았고 노동자가 있는 곳이라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노동자 단결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의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는 급격히 무너지고 일본을 필두로 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이 본격화됐으며, 여러 제국주의 열강과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어야만 했다. [그림 5] [18] 문제는 이러한 침략과 수탈의 대상이 고스란히 조선 민중(民衆)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 탓에 땅과 생계수단을 잃어버린 농민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야만 했는데, 일부는 농촌에 남아 소작농이 되거나 지주에게 고용되어 각종 농업노동을 담당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많은 경우 터전을 떠나 도시, 개항장, 광산, 공장, 철도 건설 공사장 등으로 흘러가 본격적인 임금노동자의 삶을 살아갔다. 하지만 일본 자본가가 운영하는 작업장 대다수에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매우 심했으며 온갖 이유를 들먹이며 자주 임금을 깎아내렸다. [19, 20]

그림 5. 강화도 조약을 묘사한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조선의 노동자도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조직을 만들고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투쟁에 나선 것은 광산노동자였고, [21] 이후 여러 곳에서 산발적인 투쟁이 일어났다. 개항 5개월째인 1898년 2월 전남 목포에서는 부두노동자들이 자본가의 수탈에 저항에 파업을 벌였으며, 1901년 2월에는 경인철도회사, 1909년 7월에는 경성전기회사 등 다양한 작업장에서 노동자는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등을 내걸며 투쟁을 벌였다. [22] 파업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의 내면에는 자신을 노동자라 여기는 주체성에 대한 의식이 싹텄으며, 전술적으로도 효과적인 투쟁 전개를 위해 좀 더 조직된 저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22]

일제의 지배가 본격화할 무렵, 1920년대 만해도 대략 80여 군데의 노동단체가 조직되었으며, 1930년대까지는 그 수가 560여 개에 이르게 되었다. 초창기 노동단체 대부분은 선진적인 지식인이나 노동운동가가 주도한 지역 중심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역량이 점차 쌓여가면서 노동운동은 지식인이나 엘리트 중심이 아닌 노동자 다수에 의한 운동으로 변모(變貌)했다. [23] 1920년, 마침내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와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라는 전국 단위의 노동자 조직이 결성되었다. [24, 25] 그러나 이들 전국 조직은 총독부의 탄압이라는 외적 요인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내적 요인으로 갖가지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다가 분열하기 시작했고,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쳐서, 1922년에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農聯盟會)'를, 1924년에는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을 각각 설립했다. [26, 27]

특히 조선노동연맹회는 3.1운동 이후 산발적으로 치러졌던 노동절 행사를 1923년에 처음으로 전국적인 차원의 운동으로 추진했다.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을 주장하며 각지에서 휴업 등의 투쟁을 벌였고, 시위, 강연회, 간담회, 연설회, 전단 살포, 야유회, 산놀이, 운동경기 등을 펼쳤다. 이렇게 계급적 관점을 고수하는 전국조직으로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활발히 활동했지만, 파벌주의와 분파투쟁에 휩쓸려 투쟁역량의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26, 28] 그러나 조선노동연맹회의 맥(脈)을 잇는 전국적인 노동단체는 이후로도 계속 설립되었고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투쟁역량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노동자 투쟁은 1929년 발생한 원산 총파업(元山總罷業)에서 절정에 달했으며, 그 지속성, 강인성, 격렬성, 조직성에 있어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노동운동사에서도 보기 드문 노동쟁의였고 우리나라 노동자계급의 성장을 잘 나타낸 투쟁이었다. [31, 32] 비록 원산 총파업을 마지막으로 해방 전까지 노동자 투쟁은 당분간 침체(沈滯)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원산에서 보여준 투쟁력은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발전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그림 6]


그림 6. 원산 총파업 당시의 모습을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 [출처: 사노련]


해방 이후 노동운동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고, 한반도는 억압적인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 전 지역은 생산위축, 물가상승, 노동자 실질임금 하락, 실업자 증가 등 사회•경제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다. 특히 공업생산력은 1939년 남한 만의 생산액이 5억 2793만 5천 엔(원)이었던 데 비해, 1946년에는 1억 5219만 2천 원으로 떨어져서 감소율이 71.2%나 되었고, 심한 생산위축 속에서 물가지수(物價指數)는 해방 전과 비교했을 때 엄청나게 급등했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으로 말미암은 전시(戰時) 통제경제의 해제, 투기활동의 성행, 패전 당시 일본의 조선은행권(朝鮮銀行券) 남발과 식량수집자금 방출, 미군정의 통화 남발, 생산활동의 일시적 정지 그리고 북한지역민의 월남과 재외동포의 귀환으로 인한 인구증가 등의 원인이 더해져 1943년과 1947년을 비교할 때 사업장 수는 1만 65개소에서 4,500개소로 55.3% 감소했고, 노동자 수도 같은 기간에 25만여 명에서 13만여 명으로 무려 47.5% 줄었다. 그 결과로 1946년 남한의 실업자 총수는 110만여 명이 되었으며 물가상승과 실업률 증가는 자연히 노동자의 실질임금을 떨어뜨렸다. [33]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인 자본가가 소유했던 회사와 공장을 접수해 노동자의 손으로 직접 운영한다는 '자주관리(自主管理)'를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바탕이 되었던 것은 지금까지 일본인 아래서 땀 흘려 일해 온 공장이 자신의 것이라는 노동자의 의식이었다. 게다가 해방 후 생필품 부족으로 말미암은 전국적인 생활고(生活苦) 해결을 위해서도 이러한 노력은 필요했다. 그래서 독립과 함께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와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도 공장노동자가 공장을 접수하여 자주적으로 관리하도록 추진했다. [34] 그리고 미군정이 들어선 후, 대중적 조직기반의 중요성을 인식한 좌익세력은 노동조합을 적극 조직했고, 1945년 11월 5~6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해방 후 첫 전국적 노동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이하 전평)이 결성되었다. [35] 그러나 미군정과 전평 사이의 대립은 여러 부분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의 결렬과 "정판사 위폐사건(精版社僞幣事件)"을 계기로 급속도로 악화하였다. [36, 37]

전평이 결성되고 사회주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우익진영에서도 1946년 3월 10일에 대한독립촉성노동총동맹(大韓獨立促成全國勞動總同盟, 이하 대한노총)을 결성했으며, 이후 대한노총은 미군정의 절대적인 지원과 우익세력의 비호 아래 조직을 늘리면서 전평의 투쟁과 활동을 분쇄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섰다. [36, 38] 이에 맞서 전평은 1946년 9월 제1차 총파업, 1947년 3월 제2차 총파업 그리고 1948년 2월 제3차 총파업으로 미군정과 우익세력에 대항했으나 미군정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붕괴 직전까지 몰렸고, 1948년 5월 남조선 단선단정 반대투쟁 총파업위원회를 구성하여 마지막 저항을 했으나 경찰, 청년단체, 대한노총의 기민한 진압작전으로 완전히 분쇄되었다. [39]

일련의 노동운동 패배와 해방 이후 민중의 참혹함 가운데서도 지주와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미국과 유엔 등을 통해서 원조받은 물자를 대중 일반에게 배분하거나 침체된 한반도의 경제상황을 일으키는데 사용하기는커녕 대부분 위정자(爲政者)의 잇속을 채우는 데만 이용했으며, 일본인의 재산으로 한국에 남아 있던 '귀속재산(歸屬財産)' 또한 거의 헐값으로 권력과 가까운 자, 식민지시대부터 연고를 가진 상공인, 식민관료 등 친일인사와 자본가계급에 넘겨줬다. 설령 "유상매수 유상분배" 원칙에 따라, 운 좋게 농민이 귀속재산이었던 농지를 분배받았다 하더라도, 여러 경제적 어려움으로 또다시 소작인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40, 41]

노동절 행사도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에 의해 탄압받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후 전평은 1946년 20만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노동절 기념식을 치렀지만, [26] 1947년 3월 제2차 총파업 이후 개최한 노동절 행사는 미군정의 좌익세력 불법화와 이승만 정권의 반공 국시로 말미암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42] 게다가 제3차 총파업이 실패로 끝나고 극심한 탄압으로 좌익진영이 와해되어 지하로 숨어든 이후, 좌익진영이 주최하는 노동절 행사는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하지만 우익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대한노총의 노동절 기념행사는 독재정권을 찬양하는 충성대회로 변질되고 말았다.

노동절 수난사 (1): 대한노총의 생일이 된 노동자의 날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엄청난 물적·인적 손실을 낳은 참혹한 전쟁으로 진보적 노동운동 세력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의 총아(寵兒)를 이끌 중심이 아닌, 이승만 정권의 들러리이자 충실한 나팔수로서 대한노총(大韓勞總)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렇지만 전쟁의 와중에 그나마 그들이 이끌 수 있는 노동자 수는 예전보다 상당히 줄어있었다. 결국 할 일 없는 어용 노총이 관심을 쏟아 부은 것은 이승만 정권에 대해 충성을 다하는 '정치꾼' 놀이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공금횡령은 예삿일이나 마찬가지였고, 파벌싸움은 끊이질 않았다. 말 그대로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연속이었다.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에도 이들의 행태는 변함없었고, 전쟁과 전쟁 중에도 여전했던 정부와 자본가의 수탈에도 대한노총은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며, 결국 (비록 어용일지언정) 그나마 남아 있던 대한노총에 대한 노동자의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43] 수난(受難)을 겪은 것은 노동절 역시 마찬가지였다.

1957년 5월 1일 노동절 기념식이 끝난 후였다. 이 날 치른 메이데이 행사는 "노동자를 위한 날"이 아니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한노총의 이승만에 대한 충성대회였지만, 상황은 한 편의 촌극(寸劇)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같은 해 5월 22일, 이승만은 "메이데이는 공산괴뢰도당들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는 날이니 반공하는 우리 대한의 노동자들은 메이데이와 구별되는 참된 명절을 제정하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상식적인 노조였다면 이승만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결사적으로 반대했을 것이다. 설령 어용이라도 대외적인 이미지를 고려한다면 표면적으로나마 "이승만의 궤변"에 유감(遺憾) 정도의 입장은 표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노총의 행동은 일사분란(一絲不亂)했다. 이승만에 대한 충성에 목 말랐던 대한노총 지도부는 곧바로 대의원대회의 결의를 열어 노동절을 대한노총의 창립일인(1946년 3월 10일)인 3월 10일로 변경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보사부(保社部)의 인준을 거쳐 1959년 3월 10일부터 (이승만 정권의 '국시(國是)'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제1회 노동절 기념행사가 열리게 됐다. [44, 45, 46] 노동절의 수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름으로라도 명맥을 지키고 있었던 노동절은 박정희 개발독재로 그 정체성마저 부정당했다.

노동절 수난사 (2): 창씨개명 당한 노동절 

박정희 독재체제에서 노동절은 1963년에 "근로자의 날"로 바뀌었다. 노동자의 날에서 더는 노동자의 주체성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근로자의 날"로 철저히 왜곡된 정치 선전에는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온 몸바치는 산업전사만이 홀로 존재했다. [47] 왜 박정희 정권은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바꿨을까? 그 이유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우선 한국의 노동자 문화가 어떤 역사적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좀 길기는 하지만 구해근의 논의(論議)를 요약해보도록 하자.

많은 학자가 지적하듯이 유럽에서는 길드(Guild)와 장인문화 전통이 산업변화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대응과 의식발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한반도에는 (적어도 조선 시대에는)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 개항 전까지 노동자의 의식발달에 영향 줄 만한 제대로 된 장인문화적 유산이 없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47] 19세기까지 한국에서 장인계층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48] 조선 시대에 장인 다수는 지배층이 필요로 하는 물품—필묵, 특수의복, 사치품 등—의 생산을 위해 고용됐다. 게다가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적 신분체계에서 장인과 상인은 농민보다 낮은 층에 속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상공업 활동이 활발해졌을 때, 장인은 상인보다 훨씬 더 세상의 변화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응했다. 예를 들어, 보부상과 이름 있는 상단은 전국적인 연결망을 갖추어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장인계층은 이 시기의 상인계층에 견줄만한 유의미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49] 그리고 일제 치하 한반도에서 다양한 형태의 임금노동자가 출현했지만, 전국적인 현상은 아니었으며 근대적 의미에서 노동자에 부합(符合)하는 집단의 출현은 일부 공업지역에 국한해 있었다.

이런 역사적·사회적 배경 속에서 개항 이후 한국의 노동자 1세대는 처음으로 근대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를 경험했다. 유럽과 같은 "노동자계급이라는 자부심" 대신 이들은 공돌이·공순이라는 명칭이 반영하는 부정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산업화 초기에 공장노동자는 노동자, 공장노동자, 공원, 근로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산업화가 계속 진행되고 공장노동자 수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정부와 자본은 산업노동자를 지칭하기 위한 공식용어로 '근로자'를 전국에 보급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부르게 했다. 그런데 근로자라는 말은 육체노동자, 비(非)육체노동자, 기술자 등 모든 종류의 피고용자를 가리키는 대단히 폭넓은 용어였다. [49, 50] 반대로 노동자는 (근대적 의미에서) 구체적으로 공장노동자 혹은 육체노동자 일반을 뜻하며, 이 안에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장인에 대한 부정적 함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1970년대 말 노동자계급의 정체성이 발달하기 시작할 때까지도 한국의 공장노동자는 자신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정의할 적절한 용어를 갖지 못했다. [51]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개발 독재정권은 이제 막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려는 노동자계급에 정체성을 각인시킬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그 이름은 '근로자'란 말로 일반화되었지만, 그것을 꾸미는 미화하는 수사(搜査)는 실로 다양했다. 1960년대 말부터 산업전사, 산업의 역군, 수출의 역군, 수출의 기수와 같은 새로운 단어들이 등장했다.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성장주의 그리고 군대식 수사가 절묘하게 결합한 이 새로운 명칭은 수출증대를 국가의 제1목표로 하는 개발독재 국가에 있어 '근로자'로 탈바꿈한 노동자를 국방을 위해 싸우는 군인과 동일시하는 메타포(metaphor)나 다름없었고, 그에 걸맞게 수출촉진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는 애국자라 칭송받았다. [51] 이렇게 남한에서 노동절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날짜를 빼앗기고,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는 이름마저 바뀌는 두 번의 치욕(恥辱)을 겪었지만, 북한에서도 노동절 처지는 김일성·김정일 세습 독재체제의 선전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남한과 마찬가지다.

다시 찾은 노동절: 미완의 승리

박정희가 죽음으로 새로운 세상이 도래(到來)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두환과 노태우를 핵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은 12·12사태를 일으켜 정권을 움켜잡고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난 광주민중항쟁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짓밟음으로써 한국사회는 또 한 번의 살벌한 겨울을 맞이하게 됐다. [52] 하지만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봄도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광주민중항쟁이 군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된 이후 민주화운동은 한동안 침체했다. 그러나 1970년대를 통해 급성장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은 여러 시행착오 끝에 하나의 통일된 전선운동으로 발전하여 전두환 정권의 1987년 공표된 4·13호헌조치를 분쇄하고 대통령직선제를 관철했다. 특히 이 시기에 일어난 여러 가지 굵직한 사건들—예를 들어,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사건,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치사사건—은 역사적인 6·10 민주화운동이라는 반정부·반독재 투쟁을 급격히 고양(高揚)했다. 이러한 민중의 대대적인 투쟁은 결국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의 6·29선언을 이끌어냈고, 수십 년에 걸친 군사독재의 어두운 그림자는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53]

민중 일반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도 저항의 물결에 동참했다. 노동운동의 불모지로 일컬어지던 거대재벌의 사업장—울산 현대중전기, 현대자동차, 현대엔진, 창원 대우중공업, 옥포 대우조선—에서 자본과 독재에 대항하기 위한 집단행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대기업에 일하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 중소기업에서 일하던 노동자 또한 마찬가지로 이러한 저항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54] 이때 노동자는 1987년 6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 총 3,311건의 노동쟁의를 일으켰고, 그 가운데 97.7%인 3,235건은 파업이었다. 여기에 참가한 총인원은 약 122만 5,830명이었다. 훗날 '노동자대투쟁'이라 불리는 거대한 투쟁의 시작은 7월 5일 울산 현대엔진 노동자의 노조결성과 파업투쟁이었으며, 동남지역의 거대 공업단지인 울산을 기점으로 마산, 창원, 부산, 광주, 대구, 대전을 거쳐 경인지역으로 빠르게 확산했다. [55] 전두환 정부 말기에 경찰력을 동원한 극심한 탄압이 있었지만, 노동자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발적인 대중투쟁을 지속하여 종래 국가와 자본이 구축한 억압적 통제체제를 깨뜨리고 운동 영역을 확장했다. [56]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국의 작업장에서 기존의 친(親)자본가적인 한국노총(韓國勞總)과 구분되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노조 설립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노동자대투쟁과 민주화운동 전후로 해서 새로 설립된 노조는 민주적이고 노동자의 주체성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전국노조 설립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노동자의 날"을 되찾기 위한 대규모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89년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전국 5천여 명의 노동자가 연세대학교에 모였다. 이 곳에서 노동자는 1886년 시카고 대투쟁 이후 제2인터내셔널의 발의로 시작된 제100주년 노동절 행사를 거행했고, 노동절의 날짜와 이름을 독재정권에게 유린당한 지 실로 수십 년 만에 노동자는 이승만 정권에 빼앗겼던 5월 1일을 되찾았다. 노동절을 되찾고자 하는 노동자의 염원(念願)과 열광적인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90년에는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서울대학교에서 3천여 명의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했으며, 전국 각지의 노조에서 노동절 기념식이 열렸고, 1991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3만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의 노동절 대회와 함께 전국 14개 지역에서 10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세계노동절대회가 개최되었다. [1]

1994년 김영삼 정부는 마침내 "노동자의 날"을 대한노총 설립일인 3월 10일이 아니라 제2인터내셔널이 "노동자 대투쟁의 날"로 선언한 5월 1일로 변경할 것을 골자로 하는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통해 유급휴일로서 5월 1일에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1, 57] 진정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진영이 정부의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얻어낸 결과였다. 이리하여 노동자는 해방 후 국가와 자본가에 의해 유린당한 노동절을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았다. 바로 우리의 이름을 되찾는 것—근로자와 근로자의 날로 불리는 노동자와 노동자의 원래 이름을 되찾는 것—이다.



참고문헌
[1] 금속노조 교육원. 2010년. 노동절의 유래 및 120주년 노동절 기념대회. [링크]
[2] May Day. 위키피디아 영어판. [링크]
[3]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Chris Harman)/천경록 옮김. 책갈피. 2005년. 412~413쪽.
[4] 같은 책. 280쪽, 308쪽, 413쪽.
[5]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Leo Huberman)/장상환 옮김. 책벌레. 134~139쪽, 206~209쪽. : 인클로저 운동은 영국에서 두 번 일어났다. 16세기에 일어난 첫 번째 인클로저 운동은 촌락(村落) 인구의 감소로 조세수입(租稅收入)이 줄어들 것을 걱정해서 1489년에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18세기에서 19세기 초반에 일어난 두 번째 인클로저 운동은 합법으로 인정되어 농민에게 치명타를 안겨주었다.
[6] 『민중의 세계사』. 414쪽.
[7]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144쪽, 149~150쪽, 224~226쪽.
[8] 『맑스주의 역사 강의』. 한형식. 그린비. 27~28쪽.
[9] 『맑스사전』. 마토바 아키히로 외 3인 엮음/오석철, 이신철 옮김. 도서출판 b. 43~44쪽. : 산업화로 인한 도시로의 과잉 인구유입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농촌보다도 극심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도시 정비로 인해 사망률은 훗날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10] Alexander Trachtenberg. 1932. The History of May Day. Marxists Internet Archive. [링크]
[11]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223쪽.
[12] Rosa Luxemburg. 1894. What Are the Origins of May Day? Marxists Internet Archive. :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노동자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처음 시작되었다고 언급한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유일하다. 다른 문헌은 (전부 다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시작한 "노동자의 날"만을 언급했다. [링크]
[13] 『민중의 세계사』. 511쪽.
[14] 『세계 노동운동사 I』. W. Z. 포스터(William Z. Foster)/정동철 옮김. 백산서당. 1986년. 151~152쪽.
[15] 『미국 민중사 1』. 하워드 진(Howard Zinn)/유강은 옮김. 이후. 2008년. 462~467쪽.
[16] Haymarket affair. 위키피디아 영어판. [링크]
[17] 『맑스주의 역사 강의』. 132쪽.
[18]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교수의 현대사 강의』. 강만길. 1999년. 15쪽. :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룬 일본에서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하야한 후 들어선 민씨 정권을 상대로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켜 강압적으로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했다. 그 결과 일본은 부산, 인천, 원산을 개항시키고 자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쌀과 면직물 교환 중심의 무역을 전개함으로써 한반도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19]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36~37쪽.
[20]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조선 출신의 자본가나 다른 나라 출신의 자본가도 일본인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임금노동자를 수탈했다.
[2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39쪽. : 문헌상 기록된 최초의 노동자 투쟁은 1888년 함경도 초산(楚山)에서 일어났다. 가혹한 세금과 핍박에 분노한 광산노동자들이 관청을 습격하고 관리들을 징치(懲治)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 폭동은 정부에서 안핵사(按覈使)를 보내서야 비로소 진정되었다. [안핵사: 조선 시대, 지방에 어떤 일이 터졌을 때에 그 일을 조사하려고 보내던 임시 벼슬]
[22] 같은 책. 41쪽.
[23] 같은 책. 65~66쪽. : 이원보가 밝혔듯이 이것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이원보는 "조선총독부가 의도적으로 노동운동을 폄하하거나 축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라며 당시 노동조합의 수는 이것보다 더 많았으리라고 추측한다. 나도 실제 노동조합의 수가 더 많았으리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은 조선총독부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이유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자료수집과정에서 발생한 단순한 집계 상의 누락 때문이 아닐까라도 생각하는데, 총독부는 그 나름대로 본국에 사실관계를 제대로 알릴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본다면 의도적 축소도 배제할 수는 없다.
[24]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 파란 사전. [링크]
[25]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네이버 백과사전. [링크]
[26]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67~73쪽.
[27]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링크]
[28] 금속노조교육원의 자료와 [1] 2001년 MAY-DAY 행사자료에는 [29] 조선노동총연맹이 1923년에 한반도에서 전국적인 노동절 행사를 처음 개최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시기상으로 봤을 때 조선노동총연맹은 1924년에 결성되었으므로 이원보와 하종강이 언급한대로 [26, 30] 조선노동연맹회가 처음으로 전국적인 노동절 행사를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9] 한국 노동절의 역사. 2001 May-Day [링크]
[30] 하종강. 2007년. '노동절'과 '근로자의 날'. 미디어 오늘. [링크]
[3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77~84쪽.
[32] 원산 총파업(元山總罷業). 파란 사전. [링크]
[33] 『고쳐 쓴 한국현대사』. 강만길. 창비. 2006년 2판. 475~476쪽.
[34]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112쪽.
[35]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링크]
[36]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117~118쪽.
[37] 정판사 위폐사건(精版社僞幣事件).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링크]
[38]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大韓獨立促成全國勞動總同盟).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링크]
[39]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123~130쪽.
[40] 『고쳐 쓴 한국현대사』. 397~398쪽.
[4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137~141쪽.
[42]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2쪽.
[43] 『우리나라 노동운동사』. 노민영. 현장문학사. 1990년. 110쪽.
[44] 같은 책. 112쪽.
[45] 『세계 노동운동사 I』. 152쪽. : 미국도 보수적인 미국노동총연맹(AFL)이 5월 1일 대신 9월의 첫째 월요일을 노동자의 날로 결정했다. 자세한 것은 위키피디아의 "Labor Day"를 참조하라. [링크]
[46] 1955년 2월 7일 개정된 정부조직법(법률 제354호) 제13조 및 제23조에 따르면 "보건사회부 장관은 의무·방역·보건·위생·약무·구호·원호·부녀문제와 노동에 관한 사무를 장리한다"라고 되어 있다. [링크]
[47]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신광영 옮김. 창작과비평사. 2002년. 205~206쪽. : 구해근의 설명에 따르면 "유럽에서 장인 집단의 특정 상황에 대한 반응은 경제적이기보다는 사회적·도덕적이었다. 그들은 협소한 경제문제보다 장인직업의 독립성, 장인정신에 입각한 노동, 그리고 도덕적으로 규제되는 직업관계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것은 유럽 장인들의 노동이 단체규칙과 규율에 따라 규제되고 사회적 관계의 친밀한 네트워크와 공동체적 정서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직업공동체로부터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화에 집단으로 강력하게 대응하기 위한 물질적 사회적 인적 자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라고 한다.
[48] 그들이 조선 시대 경제 성장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도 경제활동에서 상인·농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중요한 축을 이뤘다.
[49]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206쪽.
[50] 노동(勞動)은 "몸을 움직여 일하거나 혹은 육체와 정신을 써서 일하다"를 뜻하고, 근로(勤勞)는 "힘을 들여 부지런히 일함"을 뜻한다. 이와 연관해서 노동자(勞動者)는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임금을 받아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을 말하지만, 근로자(勤勞者)는 단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뜻할 뿐이다. 그럼에도, 사전 대부분에서는 국가가 정한 의미 그대로 근로자의 뜻을 노동자의 그것과 비슷하게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의 대가로 받는 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51]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206~207쪽.
[52] 『고쳐 쓴 한국현대사』. 364~369쪽.
[53] 같은 책. 369~376쪽.
[54]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318~320쪽.
[55] 같은 책. 331~333쪽.
[56] 같은 책. 334쪽.
[57] 근로자의 날 제정. 국가기록원.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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