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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08 중세시대의 생명의 기원에 관한 생각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연발생설



  

그림 1. (왼쪽) 프랑스 화가 필립 드 샹파뉴(Philippe de Champaigne, 1602~1674년)가 그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초상화 [출처: Wikipedia]. (가운데) 『신국론』의 첫 페이지 [출처: Wikipedia]. (오른쪽)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 [출처: Flavin's Corner].



성(聖)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년)는 4세기 무렵인 후기 로마 제국 시절에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활동한 신학자로, 가톨릭에서는 4대 교부(theological father, 敎父) 중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1] [그림 1, 왼쪽]. 하지만 기독교의 역사적 대부이자 대학자로 알려진 아우구스티누스도 처음부터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가 북아프리카 출신의 이교도이긴 했지만] 그의 어머니가 심지어 독실한 [당시 기독교 신자는 대부분 독실(!)했다고 한다] 기독교 신자였음에도 말이다.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던 20대의 한 유형이라고나 할까? 철학적 사고에 심취해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 한 여성과 동거를 하면서 [세속적 의미의 결혼은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아이를 하나 두기도 했고, 당시엔 [초기 기독교보다도] 체계적 이론을 정립하고 있었던 마니교(摩尼敎)에 심취해 10년간 신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니교의 교리 자체에 내재한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마니교 신도와의 갈등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는 마니교에서 뛰쳐나왔으며 플라톤 철학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렇게 젊은 시절을 다양한 철학적 사고 사이에서 방황(?)하며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그리스 철학과 수사학에 능하며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명인 [능력자]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Sanctus Aurelius Ambrosius, 330~397년)를 만나면서 그는 본격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살게 되었다 [2].


마니교와 귀의했었던 경험과 그리스 철학을 공부했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기독교 교리에는 기독교적인 색채보다는 [기독교 입장에서는] 이교도적인 분위기를 풍겼으며, 플라톤적인 철학을 공부한 아우구스티누스 덕분에 기독교 교리는 암브로시우스에 이후 한 층 더 강화되고 체계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3]. 특히, 세상이 빛과 어둠의 투쟁으로 창조되었다는 마니교의 이원론(二元論)적 영향으로 성경 내용 가운데 유달리 구약성경 창세기 부분의 천지창조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 그가 제시한 기독교 철학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창조 과정을 묘사할 때, 공인된 성경보다는 성경 외전(Apocrypha)을 탐독하는 경향이 강했다 [3].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창조 과정을 설명할 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은] 당대의 주류 과학이론인 자연발생설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인 천동설(geocentricism)에 맞춰 설명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3]. 그가 그리스 과학에 대해 얼마만큼 조예가 깊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플라톤 등 다양한 철학자의 이론을 공부했다는 역사적 사실로 짐작하건대, 그가 어느 정도 그리스적 우주론과 과학관에 어느 정도 식견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그의 유명한 두 저작 『신국론(De civitate dei)』과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De Genesi ad litteram)』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성경 창세기 1장 20절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물에는 생물 떼가 번성하고 새들은 땅 위 하늘에서 날아다니라 말씀하셨습니다”를 인용하면서 지속적 창조를 가능케 하는 신의 칙령으로써 자연발생의 가능성을 자주 논의했다 [4, 5] [그림 1, 가운데와 오른쪽]. 이렇듯, 고대 그리스 때 비롯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어느 정도 정립된 자연발생의 원리는 중세에 이르렀을 때 종교적 권위가 더해져 당대에 무시 못할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흰뺨기러기(barnacle goose) 그리고 조개삿갓(goose barnacle)


서기 5세기경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쇠락과 1054년 동∙서 교회의 분리 시기 동안에 유럽에서 그리스 과학의 영향력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례에서 살핀 대로 자연발생과 천동설을 포함한 당대 과학의 원리 몇 가지는 종교적 믿음과 권위가 어우러져 그 영향력이 한 층 더 강화되고 오랫동안 지속했다. 그러한 믿음 가운데 일부는 성경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교회에 예속된 성직자의 권위가 더해지면서 공고해진 때도 있었다.



 

그림 2. (왼쪽) Branta leucopsis란 학명의 흰뺨기러기(barnacle goose)와 [출처: Wikipedia] (오른쪽) 페둔쿨라타목(order Pedunculata)에 속하는 갑각류인 Lepas anatifera란 학명의 조개삿갓(goose barnacle) [출처: Wikipedia]. 생김새와 계통발생의 기원이 전혀 다른 두 생명체는 한때 같은 기원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로 “barnacle goose”와 “goose barnacle”을 들 수 있다. ‘barnacle’과 ‘goose’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은 분명 다른데, 전자는 한국어로 Branta leucopsis란 학명의 “흰뺨기러기”며, 후자는 페둔쿨라타목(order Pedunculata)에 속하는 갑각류인 Lepas anatifera란 학명의 “조개삿갓”이다 [11, 12] [그림 2]. 계통적 기원이 다른 두 생명체가 단어 배열만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 경위는 분명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이 이름의 기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나 헤로도토스의 서사시 등을 포함한 고대 그리스의 유산에서 비롯하지 않았단 사실이다 [7]. 대신, 이 분야를 연구하는 어떤 학자는 두 단어의 기원이 1) 11세기 무렵 다미엔 신부(Father Damien)라고 알려진 인물이 "조류는 인도의 실론 섬에서 그렇듯이 나무에서 만들어진다"라는 묘사와, 2)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Kabbalah)의 경전이며 13세기경에 제작되었다고 알려진 『조하르(Zohar)』에 나와 있는 "랍비 아바(Abba)가 조류가 부화하는 열매가 달린 나무를 봤다"란 문구라고 생각한다 [7] [그림 3]. 그 기원이 어떻든, “barnacle goose”와 “goose barnacle”에 관한 신화는 6~7세기 동안 전 유럽을 풍미했는데, 거기에는 [오늘날 관점에서는 말도 안 되는] 과학적인 근거,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어느 정도는 세속적인 이유도 포함되어 있다.



그림 3. (왼쪽) 영국의 식물학자인 존 제라드(John Gerard, 1545~1611년)가 1597년에 저술한 『Herball』, 또는 『Generall Historie of Plantes』란 제목의 책에 그려진 삽화. 이 그림은 조개삿갓에서 흰뺨기러기가 태어난다는 고대의 믿음을 묘사하고 있다. 식물을 소개하는 이 책에서 조개삿갓과 흰뺨기러기기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오른쪽) 왼쪽의 그림을 현대적으로 다시 재현해 낸 그림 [출처: Sea Rescue].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들 두 생명체의 계통적 기원과 외형이 엄청나게 다를지라도, 당시 사람의 눈엔 이들 두 생명체의 모습이 얼핏 비슷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 그림 3의 왼쪽에 나와 있는 흰뺨기러기와 그림 4의 조개삿갓을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조개삿갓 껍질은 흰뺨기러기의 무늬 양식과 비슷하며, 조개의 극모(cirrhus, 棘毛)는 새의 깃털처럼 보인다. 어떤 기록자는 조개삿갓의 극모가 어린 흰뺨기러기의 물갈퀴 발가락을 닮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7].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다시 유럽인 중에 그 누구도 흰뺨기러기의 어린 개체를 관찰한 적이 없다. 그런데 여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흰뺨기러기는 여름에 북극 인근의 툰드라 지역에서 새끼를 낳아 기르며 겨울에는 유럽과 프랑스를 포함한 북반구 남쪽으로 이동하는 철새이기 때문이다 [11]. 따라서 성체가 새끼를 낳고, 새끼가 나중에 자라서 또 새끼를 낳는다는 당연한 상식을 체득하고 있던 사람에게 새끼의 모습이라고는 눈 씻고 둘러봐도 찾아볼 수 없었던 흰뺨기러기의 생활은 매우 이상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따라서 새가 이동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지라도, “새끼를 낳지 않는” 흰뺨기러기가 어떻게 해안 연안에 매년 주기적으로 출몰하는지 알 수 없었던 당시 유럽인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흰뺨기러기가 [당대 유럽인이 생각하기에 모양도 매우 비슷한] 이들 조개 옆에 서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면, 현대적 과학 지식이 전무한 사람의 눈에 흰뺨기러기는 마치 조개삿갓에서 태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림 4. 조개삿갓을 개체 하나를 확대해서 나타낸 그림. 얼핏 봤을 때, 조개삿갓 껍질은 흰뺨기러기의 무늬 양식과 비슷하며, 조개의 극모(cirrhus, 棘毛)는 새의 깃털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흰뺨기러기가 이들 조개 옆에 서 있는 모습이 자주 관찰되었다면, 현대적 과학 지식이 전무한 당대 사람의 눈에 흰뺨기러기는 마치 조개삿갓에서 태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출처: Arkive].



일례로, 1188년에 아일랜드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성직자이자 브레콘(Brecon)의 부주교인 웨일스(Wales)의 제럴드(Gerald of Wales 또는 라틴어로 Giraldus Cambrensis, 1146~1223년)는 아일랜드에서 조개삿갓이 엄청나게 붙어 있는 통나무 위에 흰뺨기러기가 서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음을 그의 여행기에 기록했다 [6]. 게다가, 제럴드 부주교는 흰뺨기러기의 비자연적인 발생이 성경에서 말하는 무원죄 잉태설(Immaculate Conception, 無原罪孕胎設)의 증거라고 믿었다 [13, 6]. 그 근거는 꽤 종교적이다. “인간의 첫 번째 탄생은 남자와 여자 없이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 아담(Adam)을 만든 것이 시작이며, 두 번째 탄생은 여자 없이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Eve)를 만든 것이며, 세 번째 탄생은 원죄를 떠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남자와 여자의 결함으로 원죄가 대물림하는 인간이 태어나는 것이지만, 네 번째는 남자 없이 성모 마리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것으로 그 자체로 원죄가 끊기는 대격변이다. 그런데 그 어떤 성적 결합 없이 삿갓조개에서 흰뺨기러기가 태어난다. 이것이야말로 원죄 없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예수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6] 우리의 제럴드 신부가 갑각류의 유성생식을 알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당대의 지적 수준에서 [그것도 종교가 지배하는 중세시대에서] 이런 식의 해석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제럴드 신부의 주장은 당대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14~1294년)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및 과학에 조예가 깊었던 가톨릭교 성인인 대(大) 알베르투스 (Saint Albertus Magnus, 1193? 또는 1206?~1280) 등의 인물에게 조롱과 비판을 받긴 했지만 [7], 그의 주장이 이후 미친 영향은 상당했다. 특히, 흰뺨기러기가 조개삿갓에서 발생한다는 굳건한 믿음은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광야에서 금식하고 시험받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되살리기 위하여 단식과 속죄를 하는 종교적 절기인 사순절(Lent, 四旬節)에 행해진 단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과는 달리,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는 사순절을 매우 엄격하게 지켰는데, 하루에 한 끼, 저녁은 먹되 채소는 가능하며, 생선과 달걀을 제외한 육류는 먹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후대에는 이러한 엄격함이 어느 정도 완화되긴 했지만, 적어도 성직자나 수도승 집단 안에서는 이러한 엄격함이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런데 흰뺨기러기가 조개삿갓에서 태어난다는 주장은 바로 이 부분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제럴드 부주교의 주장을 계기로 당시 교황의 권위가 덜 미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성직자 사이에서는 조개삿갓에서 태어난 흰뺨기러기는 조류가 아니라는 [세속적이며 전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이 팽배했고, 사순절에는 돼지, 소고기, 양고기, 가금류 등을 먹지만 않으면 되므로, “흰뺨기러기는 가금류도 생선도 아니다”라는 당대의 상식 아닌 상식을 근거로 이들 지역의 성직자는 사순절에도 태연하게 육류인 흰뺨기러기를 섭취했다. 이에 격분한 교황 이노센트 3세(Pope Innocent III)는 “사순절 동안 흰뺨기러기 섭취를 금지한다”는 교황령을 1215년에 공표한 적도 있었다 [7].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흰뺨기러기의 조개삿갓 기원설”은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기각되기 시작했지만, 그 가설에 대한 과학적 권위는 영국 왕립학회(the Royal Society)가 설립되었어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심지어, 왕립학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로버트 모레이 경(Sir Robert Moray)이 학회 공식 모임에서 “자신은 조개삿갓의 껍질 안에서 흰뺨기러기를 닮은 생명체를 발견했으며, 흰뺨기러기는 조개삿갓의 변태(metamorphosis, 變態)로 탄생한다”라고 발표하는 일도 있었다 [7]. 결국, 이러한 믿음은 호기심 많은 일단의 박물학자 집단이 조개삿갓의 해부학적 구조를 세심히 밝히면서, 조개삿갓의 구조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흰뺨기러기와 별로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급격히 힘을 잃었으며, 나중에 흰뺨기러기의 계절성 이동이 자세히 연구되면서 “barnacle goose가 goose barnacle에서 태어난다”는 주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생명관 ― 반 헬몬트 그리고 슈밤머담


아랍어로 번역된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 라틴어로 재번역되면서 서유럽으로 소개된 적이 있었지만, 비잔틴 제국의 멸망으로 당시 그리스에 거주하고 있었던 많은 학자가 이탈리아 등지로 대거 망명하면서 본격적으로 촉발된 14~17세기 있었던 르네상스(Renaissance)의 영향으로 유럽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로마 제국의 실용성과 중세라는 [그리스 문화의 처지에서 보면] 암흑기로 한동안 잊혀졌던 고대 그리스의 흔적이 중세의 시작을 있게 했던 비잔틴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재발견됨으로써 유럽은 중세에서 벗어나 바야흐로 근대로 향하는 여정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르네상스의 영향을 실로 지대했으며, 과학도 르네상스의 은총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사고방식이 단번에 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학이 [또는 과학적 관찰이] 진보와 변혁의 대표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기저에 깔린 도그마(dogma)는 쉽사리 변하지 않으며, 때론 엄청나게 보수적이다. 하지만 변화의 흐름은 알 수 없는 방향에서 감지되기 마련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화학자이자, 생리학자이자 의사인 얀 밥티스타 반 헬몬트(Jan Baptista van Helmont, 1579~1644년)는 화학 분야와 관련된 많은 발견과 그리스어 chaos에서 유래한 ‘gas’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연발생”을 입증한(?) 실험을 기록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10]. “입증한”이란 단어를 썼다고 해서 혼동하진 말길 바란다. 중요한 것은 “입증했음”을 “기록”만 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의 실험노트에 기록한 방법으로 자연발생을 입증한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실험 노트에 기재된 “자연발생”을 재현하는 방법은 약간 오컬트적인 분위기[라고 쓰며 사기라고 읽는]가 풍기긴 하지만, 그래도 레시피는 꽤 상세히 적어놨다. 예를 들어, 쥐는 “흙을 묻힌 천 조각에 밀알을 넣고 21일간 보관하면” 만들 수 있으며, 전갈은 “벽돌 두 장 사이에 [허브의 한 종류인] 바질(basil)을 넣고 햇빛을 쪼이면” 만들 수 있다 [10]. 어쨌거나 그의 실험 노트에 적힌 내용이며, 자신은 이 방법으로 죄와 전갈 등을 만들었다고 “실험 노트”에 적어놨다. 뭔가 냄새가 풍기긴 하지만, 이 노트 덕분에 그는 나름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방법으로 자연발생을 실험적으로 입증한 첫 인물이 되었음은 틀림없다.



 

그림 5. (왼쪽) 슈밤머담의 1669년 저술인 『곤충의 자연사(Historia Insectorum Generalis 또는 The Natural History of Insects)』에 수록된 모기의 삽화. (오른쪽) 슈밤머담이 개구리 뒷다리 근육에서 신경 섬유를 추출할 때 사용한 실험 도구 [출처: Wikipedia].



자연발생설을 실험적(?)으로 지지한 반 헬몬트와는 달리, 자연발생설을 정면으로 부정한 사람이 있었다. 17세기의 네덜란드 자연철학자인 얀 슈밤머담(Jan Swammerdam, 1637~1680년)은 곤충 해부를 통해 곤충에는 알, 애벌레, 번데기, 성체와 같은 다양한 생활 형태가 있음을 발견했으며, 그의 전문 분야는 아니었지만 동물 해부학 분야에 [특히, 실험적 기법에서] 중요한 이바지를 했다고 알려졌다 [8] [그림 5]. 이것 이외에도 그는 해부와 현미경을 통한 관찰로 생명 현상에 관한 많은 것을 관찰했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당시까지 [기독교 성직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받아들였던 자연발생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얼핏 보면, 그의 반(反) 자연발생적 입장은 그가 이룩한 과학적 관찰을 토대로 형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자연발생을 부정하는 그의 지론은 오로지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했는데, 자연발생설은 그에게 “임의성과 무계획성을 대표하며 신의 뜻을 대변하지 않는 무신론적 의견”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8]. [몇몇 예외가 있긴 하지만] 유럽의 박물학자/자연철학자 대부분이 그랬듯이 “자연을 연구하는 행위”는 “신의 위대함을 밝히는 과정”이며, 특히 그에게 과학의 목적은 경건함 그 자체였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신앙심이 과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이유가 되었다면, 과학을 그만둔 이유도 순전히 그의 신앙심에서 비롯했다 [8].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며 실제로도 그가 과학 연구를 그만뒀는지 의문이지만] 말년에 그는 벨기에 북부 출신의 신비주의자이자 종말론자인 앙트와네트 부르귀뇽(Antoinette Bourignon)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졌으며, 이 때문에 1675년 [공식적으로는] 연구를 그만두고 오로지 영적∙종교적 문제에 헌신했다고 알려졌다 [8, 9].


맺음말


지금까지 중세 기독교 사상에서 나타나는 생명 발생에 관한 이론과 에피소드 그리고 중세 일부 시기에 몇몇 자연철학자가 제기한 생명관에 대해 살펴봤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도 가장 우세한 이론은 “자연발생설”이었지만, 르네상스로 접어들면서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주장에는 미세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르네상스를 지나 세상 사람들이 [전혀 혁명처럼 보이지 않는] 과학혁명의 시기라 일컫는 때를 지나면서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했다. 다음번에는 자연발생설이 실험적으로 어떻게 기각되는지를 살피도록 하겠다.


참고 문헌


[1] Augustine of Hippo. Wikipedia. [링크]
[2] 3세기 초 마니가 조로아스터교에 기독교, 불교 및 바빌로니아의 원시 신앙을 가미하여 만든 자연 종교의 하나. 선은 광명이고 악은 암흑이라는 이원설을 제창하고 채식(菜食), 불음(不淫), 단식(斷食), 정신(淨身), 예배 따위를 중요하게 여겼다. 마니의 처형과 함께 페르시아에서는 박해를 받았으나, 지중해와 중국에까지 퍼져 14세기까지 번성하였다. [출처: 네이버 사전] [자세한 내용은 Wikipedia의 마니교(Manichaeism)를 참조하시오.]
[3] Lavallee L. 1989. Augustine on the Creation Days.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32: 457-464. [링크]
[4] 『De Civitate Dei contra Paganos (The City of God)』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University of Virginia Library. [링크]
[5] 『De Genesi ad litteram (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Holy Cross. [링크]
[6] Giraldus Cambrensis (1188). Topographia Hiberniae. [링크]
[7] 『Diversion of a Naturalist』. 「XIV. The History of the Barnacle and the Goose」. Sir Edwin Ray Lankester. Ayer Publishing. 1915. pp. 118–119. [링크]
[8] Jan Swammerdam. Wikipedia. [링크]
[9] Antoinette Bourignon. Wikipedia. [링크]
[10] Jan Baptist van Helmont. Wikipedia. [링크]
[11] Barnacle goose. Wikipedia. [링크]
[12] Goose barnacle. Wikipedia. [링크]
[13] Spontaneous generation. Wikipedia.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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