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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07 공생진화론 - 거대 서관충과 황화수소 박테리아의 공생관계
지금으로부터 약 150억 년 전, 빅뱅이라 불리는 대폭발로 우주가 탄생했다. 그 결과로 수많은 원자가 생성되었고 물질 형성의 기본이 되었다. 그리고 약 45억 6700만 년 전 우주 역사의 어느 한순간에 원시 태양계가 생성되었고 지구란 별도 태양계의 한 일원으로 그 형태를 드러냈다.

생명체는 약 36억 년 전 원시 지구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졌다. 태고대(the Archean Era, 太古代)의 지구 내부는 고열과 방사능으로 뒤끓고 있었으며, 지각(地殼)의 열린 틈으로는 끊임없이 용암을 방출했다. 끊임없는 지각활동은 막대한 양의 수증기를 지표 외부로 방출했으며, 지구 표면은 수증기가 가득한 대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 지표면이 점점 식어갈 무렵, 대기 중에 응결된 수증기는 물방울을 이루어 오랫동안 지표면을 향해 비를 뿌렸고, 그 결과 마그마와 암석으로 가득 찬 지표면에는 원시적인 형태의 바다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바다 밑바닥에서는 지각의 틈새를 통해 마그마가 끊임없이 분출되었고 중금속과 황 화합물로 가득한 유독 가스를 품은 뜨거운 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어떻게 원시 지구에서 생명체가 태어날 수 있었으며 극한의 환경 속에서 어떻게 생명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기로 돌아가지 않는 한, 우리는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당시 생명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을지 대략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바로 심해 생태계의 모습을 보면 된다.

심해(深海, ocean depth) 깊은 곳에는 빛이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해수면(water layer) 등에서 서식하는 조류(alga, 藻類)나 육상 식물 등과 같이 광합성(photosynthesis, 光合成)을 통해 탄소화합물(carbohydrate, 炭素化合物)을 생성하는 생명체가 서식할 수 없다. 그런데 탄소화합물은 생명체 대부분이 사용하는 영양분이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따져본다면 산소를 직접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심해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곳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곳에도 생명체가 존재한다.


사진 출처: Wikipedia

여기서 잠시 열수분출공(hydrothermal vent, 熱水噴出孔)에 대해 알아보자. 해저 지각의 틈 사이로 스며든 바닷물은 뜨거운 마그마와 만나 데워지고 주변 암석에 들어 있던 구리, 철, 아연, 금, 은 등과 같은 금속성분을 함유한 채 지각의 틈 사이로 다시 솟아나온다. 이때 솟아나온 열수(熱水)는 최고 350ºC 정도로 뜨거워진 상태에서 해저부(海底部)에 흐르는 보통 0ºC에 가까운 차가운 물과 만나 급격히 식게 되고 열수 안에 포함되어 있던 금속성분은 지각 틈의 주변에 침전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오랫동안 반복되다 보면 굴뚝처럼 생긴 지형물이 서서히 생성되는데, 이것을 열수분출공이라 한다.

해저분출공을 발견했을 당시만 해도 깊은 바다 속에서 생물이 사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왜냐하면, 생태계(生態系, ecosystem)는 스스로 영양분 합성이 가능한 자가영양생물(autotroph)이 있어야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상과 해양에서는 광자가영양생물(photoautotroph)인 식물과 조류가 빛 에너지를 이용한 광합성 과정을 통해 탄소화합물 등의 영양분을 생성하여 생태계에 일차적인 영양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심해저(深海底), 특히 열수분출공 주변은 영양분도 없을뿐더러 황 화합물 및 중금속 같은 독성 무기물질이 가득하고 게다가 엄청 뜨겁기까지 하다. 생명체가 생존하기에는 최악의 환경이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가?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심해저의 열수분출공 주변에서 생명체가 살고 있다. 그 어떤 생태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생물종이 살아가고 있다. 대기 중에 존재하는 산소가 바닷물에 녹아 해류의 흐름으로 대양저(ocean floor, 大洋底) 끝자락까지 전해지는 것은 가능하다 치더라도, 유기물 중심의 영양분이 희소한 것처럼 보이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시아노박테리아(cyanobacteria)의 일종인 황화수소 박테리아는 화학합성(chemosynthesis, chemosynthesis, 化學合成) 반응 과정을 통해 태양 에너지(sunlight energy) 대신 황화수소(hydrogen sulfide)를 산화(oxidation)해서 나오는 화학 에너지(chemical energy)를 이용해 바닷물에 녹아 있는 이산화탄소를 탄수화물 등의 탄소화합물로 전환한다. 황화수소가 다량 함유된 열수를 뿜어내는 열수분출공에서 황화수소 박테리아는 화학자가생명체(chemoautotroph)의 역할을 함으로써 심해저 생태계에 일차적인 영양분을 제공할 수 있다. 열수방출구 주변 지역에서 황화수소 박테리아가 식물이 하는 역할을 대신 함으로써 영양분을 제공해야 하는 문제는 이제 해결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심해저 생명체가 황화수소 박테리아의 부산물을 이용할까?


사진 출처: Wikipedia

거대 서관충(giant tube worm, 학명: Rifia pachytila)은 환형동물문(phylumAnnelida, 環形動物門)에 속하는 서관충(tube worm, 棲管蟲)의 일종으로 조간대(intertidal zone, 潮間帶)와 원양생태계(pelagic zones, 遠洋生態系)에서 주로 발견된다. black smokers라 불리는 태평양 일대 대양저의 열수분출공 근처에서 살고 상당한 고농도의 황화수소에도 견딜 수 있으며, 최대 2.4 m까지 자랄 수 있다. 그런데 거대 서관충은 대형 동물에서 흔히 보이는 소화기관이 없다. 이 때문에, 거대 서관충은 다른 동물처럼 포식행위(eating, 捕食行爲)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스스로 탄수화물을 합성하는 것 외엔 영양분을 섭취할 수 없다. 하지만 지구 상에 존재하는 대형 동물 중, 스스로 영양분을 합성하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상식적인 방법으로 거대 서관충이 영양분을 확보할 방법은 없다.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십 억년 진행된 진화의 놀라운 광경은 개체의 생존―엄밀히 말하면 유전자의 생존―에 있어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 이제 우리는 경이로운 진화의 과정을 볼 것이다. 바로 거대 서관충과 황화수소 박테리아 사이의 공생관계(symbiotic relationship 혹은 symbiosis, 共生關係)다. 황화수소 박테리아는 서관충 몸 안―특히, 영양체부(trophosome, 營養體部)라 불리는 기관―에서 살아간다. 거대 서관충은 특화된 플룸 구조(vascularized red plume)을 산소, 황화수소 그리고 이산화탄소 등의 무기물을 흡수하여 황화수소 박테리아가 사는 영양체부로 보낸다. 그리고 황화수소 박테리아는 이렇게 얻은 무기물을 화학합성 반응을 통해 유기물로 전환한다. 박테리아가 합성한 유기물은 다시 거대 서관충이 사용한다.

이런 관계를 놓고, 몇몇 사람은 황화수소 박테리아가 거대 서관충 안에서 기생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대개 기생(parasitism, 寄生)이라고 하면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 쪽에서 이득을 취하는 모습을 연상하고는 한다. 특히, 박테리아와 대형 동물 간의 관계라면 이런 식의 일방적 상호관계를 상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거대 서관충과 황화수소 박테리아는 일방적 기생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 공생관계라고 볼 수 있다.

거대 서관충은 황화수소 박테리아를 통해 영양분을 얻는다. 그렇다면, 황화수소 박테리아가 거대 서관충 몸 안에 살면서 얻을 수 있는 생물학적 이점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황화수소 화학합성 과정에서 몇 가지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해양 생물은 호흡을 위해 산소를 이용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육상 동물과 마찬가지다. 해양 생물이 이용하는 산소는 대기 중의 산소가 바닷물에 용해된 것일 수도 있고, 바닷속 조류의 광합성 작용으로 생성된 산소일 수도 있다. 여하튼 이런 식으로 생성된 산소는 해류의 흐름을 타고 심연 깊은 곳까지 흘러들어 갈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헨리의 법칙(Henry's law)에 따르면 기체의 용해도는 기체의 부분압력에 비례한다. 즉, 압력이 높아지면 기체의 용해도는 증가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심해저의 용존 산소량은 심해 위쪽의 용존 산소량보다 높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 심해저의 용존 산소량은 상대적으로 낮다. 심해저에는 빛이 안 들어오므로 녹조류가 살지 못하므로 광합성을 통한 직접적 산소공급이 불가능하며, 깊이에 따른 해류속도의 차이는 용존 산소량의 불균형을 가져올 것이다. 게다가, 심해저에서 발생하는 부패 등의 화학반응은 심해저의 용존 산소량을 상대적으로 더 떨어뜨릴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황화수소 박테리아가 화학합성 반응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이용 가능한 산소량도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거대 서관충의 플럼 구조틀 통한 산소 흡입은 황화수소 박테리아 주변의 용존 산소농도를 높임으로써 화학합성 반응을 원활히 해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거대 서관충 몸 밖에서 서식하고 있을 때와 비교했을 때, 서관충 몸 안에서 서식하는 것은 이산화탄소와 황화수소 같은 화학합성 반응에 필요한 다른 무기물도 쉽게 얻을 수 있게 하는 이점이 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황화수소 박테리아는 산소 대신 질소 화합물―질산염 화합물(nitrate) 혹은 아질산염 화합물(nitrite)―을 이용해 화학합성 반응을 할 수 있다. 질소는 지구 대기의 위치에 따라 약 68~78%를 차지하는 원소로서 단백질 등과 같은 유기물질의 주요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해수에서 질소는 주로 화합물 형태로 존재하는데, 산소보다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질소 화합물을 화학합성 반응에 사용하는 것이 생존에 있어서 유리할 수 있다. 또한, 질소 화합물을 사용한 화학합성 반응의 부산물(by-product)인 암모늄 이온(ammonium ion)은 거대 서관충이 흡수하여 단백질 등의 유기물을 합성하는 데 사용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거대 서관충은 생명체에 치명적일 수 있는 질소 화합물의 농도를 체외 농도와 비교했을 때 체내에 100배 이상 농축시킬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종(異種) 간의 공생을 통한 상호작용이 진화에 있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공생진화(symbiotic evolution, 共生進化)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해저부 열수분출공에서 서식하는 거대 서관충과 황화수소 박테리아 간의 공생관계에 대해 살펴봤다. 수십억 년 전 원시 지구의 혹독한 환경에서 탄생한 생명체의 삶이 어떠했는지 우리의 지적 수준으로 가늠하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공생관계의 예에서 보여주듯이, 생명체는 다양한 환경에서 저마다의 방법으로 생존을 위해 변화해 왔고 그러한 변화는 자연선택의 결과로 나타난 종의 적응이라는 사실이다. 마그마가 지각의 틈 사이로 솟아나오고 유독 물질이 섞인 수증기가 뿜어나오는 원시 지구의 바다에서, 어떤 생명체가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체와의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협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협력관계를 구사했다는 것은 생명체의 표현형을 결정하는 수많은 유전자의 돌연변이 중 공생관계를 선택하게 한 유전적 변이(들)의 결과가 원시 지구의 환경이라는 자연선택의 요구조건에 적합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공생관계가 생존에 필요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자연선택이라는 다양한 진화 가능성 조건에서 어떤 돌연변이(들)로 인해 나타난 개체의 표현형은 공생관계가 아닌 다른 방식의 생활방식이 생존에 적합했을 수도 있으며, 그것은 공생이 아니라 기생 혹은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어떤 돌연변이는 비슷한 공생적 관계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거대 서관충과 황화수소 박테리아가 보여주는 공생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거나 혹은 상상도 하지 못할 다른 방식의 공생관계에 적합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예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진화라는 것은 임의의 개체를 구성 있는 유전자 간의 상호 경쟁 혹은 협력체계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을 구성하고 있는 유전자와의 상호 경쟁 혹은 협력체계를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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