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글로벌 시장경제에서 금융이 무너질 확률은 매우 과소평가되고 있다. 은행 손실은 한없이 악화될 수 있다. 은행 자체가 파산하는 것은 약과이다. 다른 은행에 대한 부채에 대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손실은 한 금융기관에서 다른 금융기관으로 퍼질 것이다. 규제 당국이 가장 상태가 나쁜 금융기관 주위에 방화벽을 쳐야만 위기가 더 이상 학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쁜 일은 연달아 발생하는 법이라서 한 번은 위기를 넘기더라도 두 번째, 세 번째 위기는 넘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 대부분의 경제이론가들은 잘못하고 있다. 경제 모델들이 실패해도 버리는 법이 별로 없다. 대신 틀린 경제 모델들을 '고친다'. 즉, 수정하고 한정시키고 상세화하고 확장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나쁜 씨앗에서 자라 튼튼하지 않은 나무를 풀, 못, 나사, 지지대 등으로 서서히 키워낸다. 기존 경제학은 금융시스템이 선형으로 움직이고 지속적이며 합리적이라고 가정하며, 세계의 은행들이 많이 사용하는 리스크 모델에는 이런 잘못된 가정이 반영되어 있다.
― <자본주의 4.0>, 239쪽


만델브로트(Benoit Mandelbrot)와 허드슨(Richard Hudson)이 <프랙털 이론과 금융시장(The (Mis)behavior of Market: A Fractal View of Risk, Ruin and Reward)>에서 언급한 내용을 칼레츠키가 자신의 책에서 인용했다.

여기서 만델브로트는 금융 위기에 대한 예를 들고 있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을 몇 줄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본다. "기존의 경제 모델들은 불확실성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 현실은 경제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반증함에도, 경제학자들은 억지로 현상을 경제 모델에 맞추려고 한다. 경제학자들은 합리적인 인간은 합리적인 경제활동을 한다는 순환오류에 빠져 있다. 세계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경제 모델도 타당하지 않으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똑같은 말을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불확실성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친 자본주의적이든 반 자본주의적이든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단지 둘 사이의 차이는 친 자본주의 이론가는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반 자본주의적인 이론가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필연적 모순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붕괴를 불러올 것이라고 보는 비관론적인 경향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다 큰 차이가 있다) .

자본가와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경제 이론가는 자본주의가 가장 최선이며, 가장 민주적이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도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의 심연에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가 최상이다'라는 명제가 무의식에 각인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이외 것은 최선도 아니고, 비민주적이며,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이라도 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솔직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 시스템에 치명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자본가와 자본주의 이론가도 수두룩하니 말이다. 이런 냉소적 시선에 대해 뭐라 하지 말라. 그냥 잡설은 잡설로 대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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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etas :
최근 “자본주의 4.0”이 화두다. 특히, 조선일보는 위기의 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라면서 연신 “자본주의 4.0”을 떠들어대고 있다. 도대체 “자본주의 4.0”이 무엇인가? 조선일보의 말을 빌리자면 “자본주의 4.0은 따뜻한 자본주의다". 그리고 그 따뜻한 자본주의는 기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4.0”은 기부로 철철 넘쳐나는 아름다운 자본주의 세상이다. 얼핏 들으면 정말 그럴싸해 보인다. 그런데 과연 사실일까?

[기자수첩] 386세대 기부는 생활의 일부… '자본주의 4.0'의 희망을 보다
[자본주의 4.0] 나눔으로 세상을 바꾸다, 한국의 부자 49人

아름다운 자본주의라는 것은 실재하는가? 자본주의가 정말 아름답고―인간이 만든 시스템이니 어느 정도 그 안에 내재한 모순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훌륭한 것이었다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의 본질이 물질―즉, 잉여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의 발화로 나타난 것임을 상기한다면 인간 노동까지도 상품이 되어버리는 자본주의는 전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노동이 어떠한 취급을 받는가? 모든 것은 자본으로 환원되고 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없는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쓸모가 없어진다. 사회의 모든 것은 발전과 진보라는 미명 하에 철저히 자본화되어 간다. 그리고 인간성은 점점 더 말살되고, 자본은 인간의 위에 서서 군림한다.

기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어불성설이다. 고래로부터 기부는 끊임없이 행해져 왔다. 고대 로마, 중세, 근대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그것을 기부라 부르거나 혹은 기부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기부는 많은 부자가 선심 쓰듯 가난한 자를 위해 시행된 일종의 사적 구휼책이었다. 서양뿐만이 아니다. 비슷한 경우는 동양에서도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기부가 과연 세상을 바꿨을까? 가까운 예를 들자면,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 등의 초대형 자본가의 아낌없는 기부가 진정 세상을 바꿨다고 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물어보자. 부자의 기부가 미국 사회에 만연한 가난을 궁극적으로 해결했는가?

물론, 부자의 기부가 가난한 자에게는 힘이 될 수 있다. 더불어 사회 시스템의 불완전성을 어느 정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기부는 일종의 사적 안전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스템의 본질적인 모순 때문에 가난한 자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면, 그리고 그것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극으로 치닫는다면 기부가 할 수 있는 별로 없다. 기부를 많이 하고 또한 장려하는 것은 분명히 미덕이지만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데 있어 최선책은 아니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모순을 심층부에서부터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본질 자체가 변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부는 절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가 저술한 <자본주의 4.0 –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Capitalism 4.0 – The Birth of a New Economy)>이란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자본주의 4.0”은 애당초 "기부가 철철 넘쳐나는 아름다운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와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칼레츠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4.0”의 핵심은 정부와 시장이 서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완하는 관계로 가야지만,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부란 개념을 찾은 조선일보의 능력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멍청한 것인지 알길이 없지만, 개인적인 추측으로 미루어 보건대 실상은 후자―조선일보 필진 혹은 경영진의 난독증을 동반한 멍청함―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국사회에 만연한 자본주의 모순을 "서민을 착취해 자기 배를 채운 부자가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가난한 자를 향해 기부라는 아름다운 손길을 내민다"는 형용모순으로 감추기 위해 "자본주의 4.0"이라는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먼 말을 쓴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다음은 <자본주의 4.0>이란 책에 나오는 머리말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꽤 길지만, 아나톨 칼레츠키의 의도가 충분히 드러나 있다.




마침내 <자본주의 4.0>을 다 읽었다. 솔직히 다 읽지는 않았다. 책의 뒤편에 나와 있는 "자본주의 4.0의 미래에 대한 예측"은 대충 훑어만 봤는데, 진부한 내용에 그가 말하는 것도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이 책에 그리도 관심을 두고 열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나톨 칼레츠키의 주장은 여태껏 케인즈주의자를 위시한 비주류 경제학자가 줄기차게 주장한 내용의 짬뽕이나 마찬가지다. 더불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역사관도 어느 정도 차용하긴 했는데, 그것 이외에 쓸만한 내용은 없다.

서평이라 할 것도 없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자본주의 4.0'은 너무나 뻔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시장과 정부가 서로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상호 보완 및 협력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표면적으로는 시장과 정부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적어도 1920년대의 대공황 이후에는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해왔다. 그것은 1980년대와 2000년대를 관통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정치가와 자본주의 경제학자는 작은 정부를 통한 시장의 우위를 주장했지만, 뒤에서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했다.

더불어 시장은 언제나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실상 뻔한 얘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가 얘기하는 것은 거의 케인즈주의에서 말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강력하면서도 작은 정부는 거의 말장난에 가깝다. 역시나 진부하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자본주의 시스템은 유능하고 적극적인 정부가 있어야만 시장경제가 유지될 수 있다 (2) 정부와 중앙은행이 적극적으로 경제 수요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 즉 케인즈식 총수요 관리를 해야 한다 (3) 시장과 정부는 모두 불완전하며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케인즈가 했던 얘기를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새로운 자본주의는 이전과 다를 것이라고 예상한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기조와는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본질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조가 다를 뿐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다. 거의 말장난에 가깝다.

더 이상 잡설은 늘어놓지 않겠다. 이 책에 대한 신랄한 서평이 궁금하다면 프레시안의 기사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자본주의 4.0'?…<조선>, 말장난을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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