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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18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이데올로기
어제 학내 진보신당 및 민주노총에서 활동하는 동지 몇 분과 저녁 식사를 하며 두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오랫동안 노동운동에 몸담으셔서 그런지 한국 진보정당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계셨다. 이미 알고 있는 얘기도 있었고, 처음 듣는 것도 있었다.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야사에 가까운 내용도 있었지만, 언급하기에는 껄끄러운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슨 내용이 오고 갔건 간에 무엇보다도 이 대화가 유익했던 점이 있었다. 그동안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명확하지 않았던 부분, 즉 이데올로기적 측면이나 진보정당 운동의 방향성에서 잘 정리되지 않았던 조각의 단편들이 이 ‘유익한’ 대화를 계기로 잘 짜 맞춰질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 정도일 것이다.

요새 진보진영 안팎으로 시끌벅적하다. 누구는 진보진영의 절멸을 언급하며 '진보대통합'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금은 상황이 어렵더라도 진보세력의 독자적 생존이 장기적 관점에서 중요하다고 설파한다. '진보대통합' 세력 중에서도 민주당을 포함하는 '범야권통합'을 주장하는 부류가 있고, '민주당'은 배제한 상태에서 '국민참여당'을 '진보대통합'의 범주로 보자는 세력도 있으며,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을 배제한 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통합파)를 중심으로 한 '진보대통합'의 구축을 통해 진보진영을 재정립하자는 정치적 입장을 가진 이도 있다. 전자를 제외하고는 후자 둘―국민참여당을 포함하느냐 하지 않느냐―이 현재 진보대통합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세력이 엇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진보진영의 독자생존을 주장하는 쪽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진보신당 내에서는 '사회당'과의 통합을 주장하는 이도 있고, 통합의 범위를 '사노위'까지 확대하자는 쪽도 있으며, '진보신당'의 독자적 노선을 계속 이끌어 나가자는 주장도 소수이긴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녹색좌파'를 주장하는 분파도 있으며, '노동자 전위 정당'만이 사회변혁을 위한 최선의 수단이라는 극좌파 세력도 당 안팎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통합파와 마찬가지로 독자 쪽도 정치적 의견을 수렴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서로 간의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통합파만큼이나 독자적 세력화를 주장하는 쪽도 피차일반인 것 같다.

어떤 이데올로기적 노선을 가지고 어떤 정치적 명분을 견지하든 간에 분명한 것은 민주노동당 주류와 비주류, 진보신당의 통합파 그리고 독자파, 사회당, 사노위 등을 포함한 모든 좌파세력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자신들이 처한 '좌파의 정치적 위기'라는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고, 어떤 식으로든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이 통합을 통한 좌파세력의 재구축이든 독자생존을 통한 고난의 행군이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동일하다.

누가 옳은 길이다 혹은 그릇된 길이라는 흑백논리에 대해 극명하게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한 시시비비는 진보대통합에 대한 이야기가 불거져 나오면서 진저리를 칠 정도로 거친 설왕설래를 통해 주고받았다. 애당초 그런 시시비비의 시작이 진보신당 내 통합파와 독자파 간의 정치적 논쟁에서부터 비롯한 것도 아니다. 멀게는 자주파가 득세하고 있던 민주노동당으로부터 평등파가 탈당해 진보신당을 만들 때부터 그러한 논쟁은 언제나 있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사회에서 노동자, 학생 그리고 서민 기층이 반독재 반민주 저항을 하던 그 시점에도 전술과 전략에 대한 논쟁은 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끌어온 ‘정치적’ 혹은 ‘사회적’ 논쟁은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살에 살을 붙여 왔으며, 그때 시작된 논쟁의 연장 선상에서 지루한 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때문에, 지금 그러한 것―통합이 맞느냐 독자가 맞느냐―을 따지는 것은 논쟁을 위한 논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어떻게 보면 지금 시점에서는 별로 중요해 보이진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왔다.

이유야 어쨌든, 그들이 선택한 결정의 근거는 자신의 정치적 노선 혹은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가 같다고 하더라도 개인이 내릴 수 있는 정치적 결정은 다양하며, 한 개인이 내리는 결정도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은 분명하다. 결국, 각자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자신의 선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그 어떤 결정도 (자본주의와의 타협이 아니라면 그리고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를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면) 좋다 나쁘다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들어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생각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하는 집착이 나를 괴롭혔는데, 어제 진보신당 및 민주노총 동지들과 대화를 하면서 명확해졌다. "우리가 가는 길이 과연 노동자를 위한 길인가? 우리가 가는 길이 과연 노동자를 위시한 한국사회의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길인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을 때 우리가 진보정당 운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노동자정당의 설립'이다. 민주화 이후 노조운동이 활발해지고, 복수노조법과 타임오프제를 저지하기 위한 노동자 저항운동을 하면서 많은 이들이 뼈저리게 느낀 것은 부르주아 정치판에서 노동자의 정치적 열망을 내세울 수 있는 세력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대변되는 영호남의 토호들과 사회 기득권 엘리트가 모여 만든 부르주아 정치세력은 입으로만 서민 정치를 부르짖을 뿐, 그 누구도 서민, 노동자,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민주화가 필요했던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를 갈망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민주주의를 한국사회에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노동자, 서민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를 추구했다면 양극화가 심화하지도 않았을뿐더러 한국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온갖 악법에 대해 저렇게 관망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서민은 자신들의 사회적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한 전략적인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진보정당 운동이다. 민중당으로 시작해 국민승리21을 거쳐 민주노동당을 통해 대약진했다. 진보정당을 설립하고 기반을 다지는 과정 중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때는 국회에서 많은 의석을 차지했고, 지방선거에서도 돌풍을 일으켰다. 진보정당 운동은 계속 성장하는 듯 보였고 한국사회의 앞날은 진보정당 운동을 통해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진보정당 운동은 위기에 치달았다. 진보정당 운동이 위기의 상황에 몰리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거기에 대해서 특별히 논하지는 않다. 이미 많은 사람이 원인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 원인 분석과 해결책이 정말로 유효하며 적확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나중으로 미루겠다. 그것을 판단하기엔 내 지적 수준도 모자랄뿐더러 정세를 판단하기 위한 능력도 많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이거 하나는 분명히 해두고 싶다. 그것은 각자의 정치적 이유로 통합을 부르짖든 독자를 주장하든 간에 진보를 지향하는 우리 정치적 좌파가 마음속에 항상 담아두어야 할 신조이다. 더불어 그것은 사민주의를 지향하든 사회주의를 지향하든 공산주의를 지향하든 우리 모두가 바라고 있는 정치적 이상향이 무엇이든 간에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노동자 정당의 설립". 그 어떤 순간도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우리는 진보정당 운동을 하면서 늘 잊고 지내는 것만 같다.


Posted by meta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