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졸업 때문에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바쁘다. 문제는 연구뿐만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기 때문에 더욱 시간이 나질 않는다는 것인데, 이런 상황일수록 연구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전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책을 읽고자 하는 욕구만 점점 커져만 가는 것 같다 (아, 연구할 시간도 빠듯한데 일에 매진하지 않고 엉뚱한 것(?)에만 전념하고 있으니, 이번 생은 망한 것임이 틀림없다).

큰마음 먹고 책 세 권을 모 온라인 서점에서 샀다. 그것도(!) 3개월 무이자 할부로 말이다 (돈 없다고 투덜대면서 돈 안 되는 데에는 펑펑 잘만 쓰지요). 내 전공―분자세포생물학―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지만, 내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한가운데에 마르크스주의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만큼 마르크스의 사상을 향유하는 것과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정치·사회의 현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내 꿈은 (아랫글에서 언급한 데이비드 하비의 예처럼) 생물학―특히 진화생물학―과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해 두 이론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줄 아는 냉철한 생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인데 그리될 가능성은 요원하기만 하니 이번 생은 정말 망한 것 같다.

구매한 책은 다음과 같다. 성공회대 석좌교수인 김수행 선생과 민주당 수석전문위원이자 경원대학교 경제학과 겸임교수인 김진엽 씨가 공동번역한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의 <금융자본론(Das Finanzkapital)>,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인 (가끔 실없는 소리도 마구마구 늘어놓으시는) 강신준 선생이 번역한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의 <맑스 「자본」 강의(A Companion to Marx's Capital)> 그리고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 연구교수이자 부소장인 조현연 씨가 저술한 <한국 진보 정당 운동사>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공부하거나 정치적 입장이 (나처럼) 마르크스주의인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사회(bourgeois society)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경제를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마르크스가 살았던 1800년대 중반과 후반은 산업 자본주의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던 시기로 애덤 스미스(Adam Smith)로 시작해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hardo)에서 정점에 다다른 고전파 자본주의 경제학이 시대의 주류를 차지하는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있었다. 주류 경제학이 주장하듯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이기적인 개인'의 상호작용과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 산업과 사회 전체의 부는 놀라우리만치 증가했다. 하지만 사회의 부가 증가하면 할수록 무산자의 수는 그에 비례해 늘고 있었다. 결국, 증가한 사회의 부는 개인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일부 계층―즉 부르주아 계급―으로만 집중하고 있었다.

인류역사의 흐름 속에서 '필연적 실체'로 자리매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봉건사회의 귀족을 대신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했고, 부르주아는 자본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속박했다. '자본을 연구하자'. 마르크스의 이러한 신념은 유물론(materialism), 상부구조(superstructure)와 하부구조(substructure), 계급이론(class theory)과 계급투쟁(class struggle)에 관한 연구를 통해 확립된 것으로, 이를 위해 그는 최초에는 자본(capital), 토지재산(landed property), 임금노동(wage-labor), 국가(the State), 대외거래(foreign transactions), 세계경제(the world economy)라는 여섯 권의 책을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 여섯 권의 책을 모두 쓸 시간을 갖지 못해 자본·토지재산·임금노동에 관한 연구 중 자본의 '일반적 성격'에 관한 부분을 <자본론> 세 권에 남겼다. 그 <자본론> 세 권 중에서도 마르크스가 직접 저술한 것은 제1권이고 나머지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가 남긴 자료를 토대로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마르크스가 죽은 뒤 정리해 발간한 것이다. 이것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엥겔스도 곧 죽음을 맞이했고, 제4권은 훗날 '마르크스주의 교황(좀 네거티브한 의미가 담겨 있다)'이라 일컬어졌던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가 <잉여가치학설사(Theories of surplus-value)>란 제목으로 따로 정리해 출판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적인 구조(structure)와 동학(dynamics)을 '이상적 평균(ideal average)'에서 해명하기 위해 자본, 임금노동 그리고 토지재산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거대한 세 계급이 자본가 계급, 노동자 계급 그리고 토지소유자 계급이라는 것에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구체적인 형태의 자본(예: 독점자본)이나 임금노동자 계급의 투쟁(예: 노동조합) 그리고 자본주의적 토지소유 이외의 역사적 형태(예: 소농)에 관해서는 깊이 서술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론>은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자본주의의 속성을 자세히 분석한 순수 연구 학술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이런 목적으로 저술했다고 해서 그의 투쟁성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정치적 투쟁은 그의 다른 저술(예를 들어, <공산당 선언>, <고타강령 초안 비판>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다만 <자본론>은 마르크스의 학자적 면모가 유달리 두드러진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아쉬운 점이라면 마르크스가 생전에 국가, 대외거래, 세계경제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를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인데―물론 현재 마르크스-엥겔스의 메모 등을 포함한 모든 문헌을 총정리해 재평가하는 MEGA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으니 마르크스가 이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연구했는지는 훗날 밝혀지리라―힐퍼딩의 <금융자본론>은 마르크스가 완수하지 못한 부분―국가와 세계경제―을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해 연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출판사 서평대로 이 책이 <자본론> 제4권에 해당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특히 <자본론> 제4권에 해당하는 내용은 이미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의 연구를 정리해서 출판했으니―굳이 <자본론> 제4권이라는 별칭을 붙이지 않더라도 그 의미가 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힐퍼딩의 이론은 레닌(Vladimir Lenin)이 '제국주의 이론'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많은 이바지를 했다고 하니, 그의 <제국주의(Imperialism)>도 반드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읽어야 할 책이 자꾸만 늘어나니 너무 슬프다).

  

데이비드 하비는 지리학자로서 마르크스의 자본 비판을 도시로 확장시킨 마르크스주의자이며, 구소련과 중국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사실 이들 사회주의 국가가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일단은 유사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자―를 참조하며 사상을 공부했던 (일반적인)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지리학적 사유 속에서 마르크스의 분석을 재평가한 학자라고 한다(데이비드 하비에 대한 소개는 다음의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데이비드 하비 : 공간의 정치경제학]).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연구하는 지리학자라는 이력이 매우 흥미로운데―따지고 보면 힐퍼딩도 소아과 의사였음에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연구했으니, 원래 이 바닥이 이런가 보다―그가 1970년대 초부터 시작해서 약 40여 년간 공부해온 <자본론> 강독과 2007년도부터 시작한 강의 녹취록(데이비드 하비의 인터넷 웹 사이트 http://www.davidharvey.org에서 강의을 볼 수 있다)을 바탕으로 <맑스 자본 강의>라는 책을 내놓았다고 한다. 세간의 평이 좋기도 하고(적어도 데이비드 하비 본인에 대한 평은 꽤 우호적인 것 같다), 그동안 공부한 마크그스주의를 정리할 겸해서 한 번 읽어보고자 마음먹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세 권 중 오직 제1권에 해당하는 내용만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뭐 문제 될 것은 없다. <자본론> 제1권만이라도 다시 읽어보는 게 다행이지. 여담이지만 <자본론>은 정말 어렵다. 어렵다는 게 말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읽을 때는 '아하, 그렇구나!'란 생각이 드는데, 뒤돌아서면 '어, 그러니까 그게 뭐였지?' 때문에 어렵다는 거다 (따지고 보면 내가 멍청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보면 내가 가장 읽고 싶었던 책 중의 하나인) <한국 진보 정당 운동사>는 그토록 출간되길 기다렸음에도 막상 책이 출간된 2009년에는 읽어볼 생각도 안 하다가, 인제야 읽고자 마음먹은 책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런 책은 인생에서도 그리고 정치적 입장에서도 제일 힘든 시기에만 꼭 생각난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아니, 필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
이 책은 진보 정당 운동의 역사적 궤적을 통해 한국 현대 정치를 조망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하고 있다. 나아가 현대 정치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진보 정당 운동이 추구해 온 목표는 무엇이었고 그들은 어떤 이념과 가치 체계를 발전시키고자 했는지, 그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은 어떠했고 그에 대해 대중은 어떤 판단과 선택을 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해방 이후 한국 진보 정당 운동이 왜 실패했는지를 말 그대로 개인적 차원에서 조망하고 싶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역사적 기간은 해방 이후부터 시작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당사태까지지만, 그때의 문제의식이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우리는 과거 '진보 정당 운동'이 가지고 있었던 본원적 문제―운동권 혹은 좌파 운동 내부의 이데올로기 부재와 사회주의 운동의 실종, 그리고 대중 일반과의 유리―를 아직도 끌어안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인식은 내가 가진 지극히 개인적 판단이지만,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진보 정당 운동의 문제점이라는 것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그리고 통합연대가 삼당합당(과거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삼당합당을 빗대어 비꼬는 이들도 있다)을 결정하기로 한만큼 이들이 세운 정당이 과연 진보 정당의 길을 갈지,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의 첨병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더불어 홍세화 선생을 새로운 대표로 맞이한 진보신당의 앞날도 더 두고 볼 일이고. 물론 현실이 암울한 만큼 다가올 미래도 불투명하긴 마찬가지다. 이럴수록 과거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절실히 드는데, 그런 의미에서 <한국 진보 정당 운동사>를 읽는다는 건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연구는 연구고 정치는 정치니 어서 빨리 읽어보자. 이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책을 읽자,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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