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글로벌 시장경제에서 금융이 무너질 확률은 매우 과소평가되고 있다. 은행 손실은 한없이 악화될 수 있다. 은행 자체가 파산하는 것은 약과이다. 다른 은행에 대한 부채에 대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손실은 한 금융기관에서 다른 금융기관으로 퍼질 것이다. 규제 당국이 가장 상태가 나쁜 금융기관 주위에 방화벽을 쳐야만 위기가 더 이상 학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쁜 일은 연달아 발생하는 법이라서 한 번은 위기를 넘기더라도 두 번째, 세 번째 위기는 넘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 대부분의 경제이론가들은 잘못하고 있다. 경제 모델들이 실패해도 버리는 법이 별로 없다. 대신 틀린 경제 모델들을 '고친다'. 즉, 수정하고 한정시키고 상세화하고 확장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나쁜 씨앗에서 자라 튼튼하지 않은 나무를 풀, 못, 나사, 지지대 등으로 서서히 키워낸다. 기존 경제학은 금융시스템이 선형으로 움직이고 지속적이며 합리적이라고 가정하며, 세계의 은행들이 많이 사용하는 리스크 모델에는 이런 잘못된 가정이 반영되어 있다.
― <자본주의 4.0>, 239쪽


만델브로트(Benoit Mandelbrot)와 허드슨(Richard Hudson)이 <프랙털 이론과 금융시장(The (Mis)behavior of Market: A Fractal View of Risk, Ruin and Reward)>에서 언급한 내용을 칼레츠키가 자신의 책에서 인용했다.

여기서 만델브로트는 금융 위기에 대한 예를 들고 있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을 몇 줄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본다. "기존의 경제 모델들은 불확실성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 현실은 경제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반증함에도, 경제학자들은 억지로 현상을 경제 모델에 맞추려고 한다. 경제학자들은 합리적인 인간은 합리적인 경제활동을 한다는 순환오류에 빠져 있다. 세계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경제 모델도 타당하지 않으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똑같은 말을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불확실성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친 자본주의적이든 반 자본주의적이든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단지 둘 사이의 차이는 친 자본주의 이론가는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반 자본주의적인 이론가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필연적 모순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붕괴를 불러올 것이라고 보는 비관론적인 경향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다 큰 차이가 있다) .

자본가와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경제 이론가는 자본주의가 가장 최선이며, 가장 민주적이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도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의 심연에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가 최상이다'라는 명제가 무의식에 각인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이외 것은 최선도 아니고, 비민주적이며,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이라도 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솔직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 시스템에 치명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자본가와 자본주의 이론가도 수두룩하니 말이다. 이런 냉소적 시선에 대해 뭐라 하지 말라. 그냥 잡설은 잡설로 대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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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자본주의 4.0”이 화두다. 특히, 조선일보는 위기의 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라면서 연신 “자본주의 4.0”을 떠들어대고 있다. 도대체 “자본주의 4.0”이 무엇인가? 조선일보의 말을 빌리자면 “자본주의 4.0은 따뜻한 자본주의다". 그리고 그 따뜻한 자본주의는 기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4.0”은 기부로 철철 넘쳐나는 아름다운 자본주의 세상이다. 얼핏 들으면 정말 그럴싸해 보인다. 그런데 과연 사실일까?

[기자수첩] 386세대 기부는 생활의 일부… '자본주의 4.0'의 희망을 보다
[자본주의 4.0] 나눔으로 세상을 바꾸다, 한국의 부자 49人

아름다운 자본주의라는 것은 실재하는가? 자본주의가 정말 아름답고―인간이 만든 시스템이니 어느 정도 그 안에 내재한 모순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훌륭한 것이었다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의 본질이 물질―즉, 잉여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의 발화로 나타난 것임을 상기한다면 인간 노동까지도 상품이 되어버리는 자본주의는 전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노동이 어떠한 취급을 받는가? 모든 것은 자본으로 환원되고 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없는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쓸모가 없어진다. 사회의 모든 것은 발전과 진보라는 미명 하에 철저히 자본화되어 간다. 그리고 인간성은 점점 더 말살되고, 자본은 인간의 위에 서서 군림한다.

기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어불성설이다. 고래로부터 기부는 끊임없이 행해져 왔다. 고대 로마, 중세, 근대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그것을 기부라 부르거나 혹은 기부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기부는 많은 부자가 선심 쓰듯 가난한 자를 위해 시행된 일종의 사적 구휼책이었다. 서양뿐만이 아니다. 비슷한 경우는 동양에서도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기부가 과연 세상을 바꿨을까? 가까운 예를 들자면,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 등의 초대형 자본가의 아낌없는 기부가 진정 세상을 바꿨다고 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물어보자. 부자의 기부가 미국 사회에 만연한 가난을 궁극적으로 해결했는가?

물론, 부자의 기부가 가난한 자에게는 힘이 될 수 있다. 더불어 사회 시스템의 불완전성을 어느 정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기부는 일종의 사적 안전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스템의 본질적인 모순 때문에 가난한 자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면, 그리고 그것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극으로 치닫는다면 기부가 할 수 있는 별로 없다. 기부를 많이 하고 또한 장려하는 것은 분명히 미덕이지만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데 있어 최선책은 아니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모순을 심층부에서부터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본질 자체가 변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부는 절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가 저술한 <자본주의 4.0 –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Capitalism 4.0 – The Birth of a New Economy)>이란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자본주의 4.0”은 애당초 "기부가 철철 넘쳐나는 아름다운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와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칼레츠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4.0”의 핵심은 정부와 시장이 서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완하는 관계로 가야지만,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부란 개념을 찾은 조선일보의 능력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멍청한 것인지 알길이 없지만, 개인적인 추측으로 미루어 보건대 실상은 후자―조선일보 필진 혹은 경영진의 난독증을 동반한 멍청함―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국사회에 만연한 자본주의 모순을 "서민을 착취해 자기 배를 채운 부자가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가난한 자를 향해 기부라는 아름다운 손길을 내민다"는 형용모순으로 감추기 위해 "자본주의 4.0"이라는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먼 말을 쓴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다음은 <자본주의 4.0>이란 책에 나오는 머리말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꽤 길지만, 아나톨 칼레츠키의 의도가 충분히 드러나 있다.




마침내 <자본주의 4.0>을 다 읽었다. 솔직히 다 읽지는 않았다. 책의 뒤편에 나와 있는 "자본주의 4.0의 미래에 대한 예측"은 대충 훑어만 봤는데, 진부한 내용에 그가 말하는 것도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이 책에 그리도 관심을 두고 열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나톨 칼레츠키의 주장은 여태껏 케인즈주의자를 위시한 비주류 경제학자가 줄기차게 주장한 내용의 짬뽕이나 마찬가지다. 더불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역사관도 어느 정도 차용하긴 했는데, 그것 이외에 쓸만한 내용은 없다.

서평이라 할 것도 없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자본주의 4.0'은 너무나 뻔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시장과 정부가 서로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상호 보완 및 협력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표면적으로는 시장과 정부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적어도 1920년대의 대공황 이후에는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해왔다. 그것은 1980년대와 2000년대를 관통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정치가와 자본주의 경제학자는 작은 정부를 통한 시장의 우위를 주장했지만, 뒤에서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했다.

더불어 시장은 언제나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실상 뻔한 얘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가 얘기하는 것은 거의 케인즈주의에서 말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강력하면서도 작은 정부는 거의 말장난에 가깝다. 역시나 진부하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자본주의 시스템은 유능하고 적극적인 정부가 있어야만 시장경제가 유지될 수 있다 (2) 정부와 중앙은행이 적극적으로 경제 수요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 즉 케인즈식 총수요 관리를 해야 한다 (3) 시장과 정부는 모두 불완전하며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케인즈가 했던 얘기를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새로운 자본주의는 이전과 다를 것이라고 예상한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기조와는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본질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조가 다를 뿐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다. 거의 말장난에 가깝다.

더 이상 잡설은 늘어놓지 않겠다. 이 책에 대한 신랄한 서평이 궁금하다면 프레시안의 기사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자본주의 4.0'?…<조선>, 말장난을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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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ure에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연구자가 그랜트 확보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연구할 시간이 없다. 다들 이게 문제인 줄은 알지만, 뾰족이 해결할만한 방도가 없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해결하면 안 될까?"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 나가려면 돈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뭘 하든 (심지어 자는 것까지도) 돈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연구하기 위해서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많은 돈이 필요하다. microarray라도 하나 할라치면 한 번 할 때마다 몇백만 원 쓰는 것은 예사일 뿐더러, antibody 같은 것은 거의 소모품 수준이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제작하지 않는 한, 대부분 상당히 비싼 비용으로 구입해야만 한다.

잘 모르는 사람은 그런 것 정도는 직접 만들어서 쓰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직접 만드는 거 정말 어렵다. 어떤 경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때도 있다. 특히, antibody 만드는 것은 하늘에서 점지해주지 않는 한 제작에 성공할 확률도 그리 높지 않다. 또한, antibody를 성공적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불어, 이런 것들을 제작하는 데도 또한 돈이 들고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그래서 돈이 필요하다. 특히, 요즘처럼 연구자 간의 경쟁이 (한국의 대학 입시만큼이나) 심한 때는 자본력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오히려 아이디어는 부차적일 경우가 많다. Cell, Nature 그리고 Science―연구자들이 흔히 CNS(앞의 세 논문을 central nerve system에 빗댄 표현)라 부르는 과학잡지에 게재된 논문을 한 번 보라. 정확히 산출할 수는 없어도, 그 논문을 위해 엄청난 액수의 돈이 들어갔는지 눈에 선할 정도다. 가끔은 Figure 하나하나에 돈 냄새가 풍기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렇다면,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가?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든지, 이윤에 눈이 먼 기업의 후원을 받든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혹시라도 있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털거나 어디 마음씨 좋은 키다리 아저씨라도 한 명 섭외해서 돈을 마련해야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윤이 발생할지도 불투명한 연구 따위에 선뜻 돈을 내어줄 부자는 배포가 큰 없다. 따라서, 내 연구는 이윤이 발생한다고, 당신의 탐욕을 채워줄 수 있다고 끊임없이 선전해야만 한다.

그렇게 연구계획서를 쓰는데 시간을 소진하고 나면, 과학자에게 연구할 시간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연구는 엉망진창이고 내가 왜 연구를 하는지 소명의식도 희미해진다.

돈 걱정 없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그날이 과연 올 것인가?



사진출처: NATURE (The image from the Nature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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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는 기사가 온갖 포털사이트를 뒤덮고 있다 (관련 대표 기사:평창의 63표, 역대 올림픽 최다 득표 "경쟁은 없었다"). 지금까지 국가가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진행해온 서울 올림픽, 아시안 게임, 한일 월드컵 등과 같은 국제경기와는 다르게 평창(혹은 강원도)이라는 특정 지방자치단체가 주도적으로 올림픽 유치를 위한 로비를 진행해왔다고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이 역시도 이전과 비슷하게 국가주도의 국제경기 유치와 별반 차이는 없을 것이다. 저 가카께서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어눌한 영어를 써가며 발 벗고 나서지 않았는가?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의 성공도 강원도라는 지방자치단체가 성사시켰다기보다는 늘 그래 왔듯, 국가적 유치로비의 한 성공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일단 빙상인의 시각에서 살펴보자. 오랫동안 한국 내 빙상스포츠의 활성화를 꿈꿔왔던 빙상인에게 평창의 동계올림픽 유치는 빙상스포츠 저변의 확대, 즉 빙상시설 인프라 구축과 빙상스포츠를 즐기는 인구의 확대를 유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반갑고 행복한 소식일 수도 있다. 어찌저찌 하다 보면 프로축구, 프로야구, 프로농구, 프로배구처럼 빙상분야에서도 미국의 NHL 등의 상업화된 빙상스포츠처럼 한국 빙상스포츠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업화된 스포츠, 즉 프로리그(그게 무엇일지는 불확실하지만)를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이후, 언론에서 보도하는 올림픽 개최에 대한 초미의 관심사는 동계올림픽 개최가 가져다줄 엄청난 경제적 파급효과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가 지난 2008년 산업연구원에 의뢰해 만든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최 타당성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을 개최할 경우, 서울 올림픽의 네 배, 한일 월드컵의 두 배를 뛰어넘는 약 20조 원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경제적 파급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현대경제연구원도 이와 비슷한 수치를 내놓고 있다. 또한, 그들은 여기에서 창출되는 부가가치액도 만만치 않으리라고 전망하고 있다(관련기사: <평창2018> 동계올림픽 개최의 경제효과는). 더불어 아시아경제신문과 같은 곳에서는 이번 올림픽대회 유치가 65조 이상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가진다는 그 근거도 불확실한 장밋빛 전망에 대한 기사를 내놓기도 했다(관련기사:[동계올림픽 유치]'64조원+α' 경제효과 따냈다).

정도야 어떻든 간에, 많은 이들이 아직 개최하지도 않은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개최 당사자인 강원도민으로서는 삼수 끝에 개최유치에 성공한 것이니만큼 기쁨도 클 것이고, 불확실한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10년이 넘게 엄청난 금액을 투자했으니, 강원도 입장에서 이번 동계올림픽 유치 성공은 강원도의 엄청난 재정적자를 한 번에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정치권으로서도 이번 동계올림픽 유치 성공은 자신들이 관여 여부를 떠나 그동안 보여줬던 여러 가지 정치적 실책을 올림픽이라는 거창한 국제적 이벤트 유치 성공으로 단번에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올림픽만큼 세간의 시선을 돌릴만한 화젯거리가 어디 있겠는가? 기업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이 손해 볼 일은 없고 어떤 경로로든 돈을 벌 수 있을 테니 대회개최를 거부할 리는 없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두팔 벌려 올림픽 개최를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올림픽 유치가 그렇게 기뻐할 만한 일일까? 올림픽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효과에 대한 엄청난 선전을 보면서 과거의 일이 하나 생각났다. 바로 G20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진실이다.

그 당시 G20의 한국개최가 가져다주는 경제적 파급효과는 최대 450조 원이었다. G20 개최가 단기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을 줄 수는 있다. 어쨌든, G20을 개최하려면 회의장 청소하는 용역이라도 필요할 테니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G20이 단기적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G20의 '성공적인 개최'가 한국의 국가경제에 도움이 된 것은 아직까지 없어 보인다. 오히려 G20 개최와는 무관하게 그동안 한국경제의 내적 상황은 계속 악화 일로를 달리고 있다. 이건 수출증대 등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G20의 성공적 개최로 수출시장은 좋아졌을 수도 있지만,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노동자의 현실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많은 이가 회사의 이익향상을 위한 구조조정이란 명목으로 해고되고 있으며, 새로운 일자리는 언제 해고돼도 이상하지 않은 비정규직으로 세상에 태어나고 있으며, 이마저도 구하지 못해 오늘 내일 굶주리며 고통받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G20은 자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뿐, 노동자를 위해 존재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부자들의 잔치였고 그 잔치에서 거렁뱅이에게라고 떨어지는 떡고물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G20의 현실이었다.

G20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G20이 한국경제의 질적 측면, 특히 노동자의 삶에 도움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본다. 사실, 모든 국제적 대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G20 및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치러져 온 국제대회가 한국 및 한국기업의 브랜드 이미지에 어떤 좋은 점을 부여하여 이것 때문에 수출이 증대될 수는 있어도, 그 이익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부는 오직 자본에게 향한다. 가치가 노동자에게 가지 않고 오직 자본가에게만 흘러들어 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그 어느 것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국제대회의 개최로 파이는 커질 수 있겠지만, 파이 조각의 수가 더 늘어나진 않는다. 지금과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는 파이 조각의 크기뿐만 아니라 그 수도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올림픽 개최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장밋빛 희망을 줄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가까운 예를 보더라도 아시안 게임 개최를 위해 엄청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인천을 보라. 세계적 자동차 경주대회를 개최하려다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는 전남을 보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사례는 장밋빛 꽃다발을 우리 가슴에 안겨주는 대신, 다 시들고 썩어버려 들고 있기조차 어려운 지푸라기만 보여줄 뿐이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은 분명하다. 현재 강원도의 재정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만큼,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유치를 위해 국가에서는 올림픽 인프라 구축이라는 명목으로 막대한 예산을 강원도에 쏟아부을 것이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올림픽 유치가 가져다주는 경제적 파급효과 20조 원이라는 것의 정체가 향후 국가가 강원도에 투입해야 할 최소한의 예산총액일 것이고, 4대강공사 예에서 보듯 20조 원이란 예산은 스스로 번식하여 그 주인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질 것이고, 결국 길러준 주인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잡아먹는 어마어마한 식인괴물로 변해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와 강원도는 20조 원이란 예산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 재원마련을 위해 새로운 세금을 신설하게 된다면 그 주체가 누구이든 간에 엄청난 조세저항에 직면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므로, 직접세의 성격이 강한 세금은 신설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조세저항이 덜한 간접세 항목을 신설을 통해 재원을 확보함으로써 올림픽 개최를 위한 지원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며, 한편으로는 기존 예산(특히, 복지 및 교육관련)을 대폭 삭감함으로써 올림픽 개최를 위한 재정적 지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래저래 피를 보는 것은 노동자를 위시한 일반 국민이다. 모든 돈은 노동자의 주머니에서 국가로, 그리고 자본가의 탐욕스러운 입안으로 흘러들어 갈 것이다.

올림픽 유치는 분명히 국가적 행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자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국민 다수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올림픽은 우리에게 민족의 승리라는 대리만족을 줄 수 있을 지언정, 우리의 주린 배를 채워주진 않을 것이며, 억압 받는 우리의 현실도 바꿔주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다.

2011/07/07 15:28 이글루스에서 작성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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