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이 책의 요지는 글로벌 자본주의는 다름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2007~2009년의 충격적인 사건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끌어온 야망, 기업정신, 개인주의나 경쟁심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없애버리거나 약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이러한 인간의 타고난 본능들을 바탕으로 전보다 더 성공적이고 생산적인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가 창조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재탄생 과정을 밝히고,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의 몇 가지 핵심적인 특징을 밝히려고 한다. 이러한 전환이 완료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리겠지만 일부 결과는 이미 체감할 수 있다. 일 년 전만 돌아보더라도 금융위기가 정점에 달했을 무렵 양 극단의 정치인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당시 좌파의 반(反)자본주의 논객들은 몇 주 동안의 금융위기 때문에 지난 이백 년 동안 혁명과 불황,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 체제가 와해되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파에서는 열성적인 자유경제주의 신봉자들이 정부의 개입 때문에 민간기업 활동이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의 개입은 시스템을 구하기 위해 분명히 필요한 것이었다. 이들은 여전히 금융기관들이 파산하도록 정부가 내버려두었더라면 금융위기가 더 잘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균형 잡힌 관점에서 금융위기를 분석하려면 좌파의 히스테리와 우파의 오만한 자기 과신이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탐욕스러운 은행가·무능한 규제당국·순진한 주택보유자나 멍청한 중국 관료들 탓으로 돌리는 대신, 이 책에서는 역사적이고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그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분석한다. 이 책은 18세기 후반부터 가장 최근으로는 1979~1989년의 대처-레이건 혁명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성격을 끊임없이 바꾸어온 경제개혁과 지정학적 대변동의 맥락에서 금융위기를 재해석한다. 요컨대 자본주의는 정해진 규칙을 따르거나 민간부문과 정부 사이에 영구적으로 역할 구분이 이루어진 고정된 시스템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현대 경제이론의 주장과는 달리 자본주의 경제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좌우하는 완벽한 법칙 따위는 없다. 그 대신 자본주의는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여 변화하고 진화하는 적응력 있는 사회 시스템이다. 체제 전체에 대한 어떤 위기가 발생해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경우에는 변화하는 환경에 더 적합한 새로운 버전이 등장하여 이전의 형태를 대체한다.
자본주의가 고정된 제도들의 집합이 아니라 위기를 통해 재탄생되고 재건되며 진화하는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2007~2009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은 1803~1815년의 나폴레옹 전쟁·1930년대의 경제위기·1970년대의 경제위기에서 비롯된 전환에 이어, 자본주의의 네 번째 시스템 전환의 촉매제이다. 이 책의 제목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미국·프랑스의 정치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사회적·경제적 대격동의 시기인 첫 번째의 대전환으로 현대 자본주의 시대가 처음 시작되었고, 이 단계는 대략 영국이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거든 181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체제 속에서 경제적 번영으로 누렸던 이 시대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그리고 미국의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 전대미문의 정치적·경제적 충격으로 19세기의 전통적인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파괴되었다. 그대신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velt) 대통령의 뉴딜(New Deal),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영국과 유럽의 복지국가 개념을 포괄하는 새로운 버전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탄생했다. 그 다음으로 대공황이 발생한 지 40년이 지난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글로벌 인플레이션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경제위기가 발생해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와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자유시장 혁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이전의 두 자본주의 모델과는 명백히 다른 세 번째 버전의 자본주의가 탄생했다. 1960년대 말의 심각한 인플레이션에서 40년이 지난 2007~2009년에 세계 경제는 다시 한 번 구조적 위기의 충격을 받았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이번 위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스템의 네 번째 버전이 탄생할 것이며, 이 새로운 모델은 레이건과 대처 시대의 모델이 뉴딜 시대와 달랐듯이 이전 시대와는 새로운 경제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를 ‘새로운 경제의 탄생’이라고 붙였다.
자본주의가 경제규칙과 정치제도가 크게 바뀔 수 있는 진화하는 시스템이라는 인식은 금융위기 이전의 관점에서 보면 논란의 여지가 많으며 불온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1980년대 초의 대처-레이건 혁명은 진정한 자본주의의 재발견이라고 널리 칭송 받았다. 그리고 아직도 대다수의 보수 정치인들과 비즈니스 리더들은 이런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폭넓게 보면, 1980년부터 2009년까지 자유시장 근본주의가 우세했던 기간은 18세기 후반 이후 현대 자본주의 발전의 긴 역사를 놓고 볼 때 겨우 30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역사적 관점에서 최근의 경제 사건들을 살펴보면 금융위기와 그 결과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시장 권력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자유시장 시스템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과 비즈니스 리더들이 많다. 이들은 사회주의 세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원칙상 모든 정부 개입에 반대한다. 레이건과 대처 이전의 자본주의의 오랜 역사를 놓고 보면 이는 지나치게 편협한 생각이다. 정부와 민간기업, 정치와 경제 세력 간의 관계는 변화하며 이것이 자본주의 진화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었다. 그리고 진화가 일어날 때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전보다 더 강해졌다. 금융위기에서 비롯된 새로운 정치-경제 모델을 이해하려면 자본주의의 이전 세 단계에서 정부와 시장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초엽부터 1930년까지 세계를 지배했던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 자본주의에서 정치와 경제는 본질적으로 전혀 별개의 영역이었다. 정부와 시장의 상호작용은 대체로 강력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세금을 징수하고 전쟁 비용을 조달하고 관세 장벽을 세우는 데 한정되었다. 그러다 1931년부터 뉴딜과 유럽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자본주의의 두 번째 버전은 러시아 혁명과 대공황에 대응하여 전지전능하고 자애로운 정부에 대한 거의 낭만적인 믿음과 시장, 특히 금융시장에 대한 본능적인 불신을 그 특징으로 했다. 1970~1980년 대처-레이건의 정치혁명으로 탄생한 자본주의의 세 번째 버전은 그 반대였다. 이 버전은 시장을 이상화하고 정부를 불신했다. 이 버전의 마지막 단계, 이 책에서 자본주의 3.3이라고 부르는 금융 주도의 시장근본주의에 이르자 이런 경향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자본주의 3.3은 정부를 불신하지만 한 것이 아니라, 정부를 악마처럼 여기고 규제를 조롱하고 정부 행정을 드러내놓고 업신여겼다. 정치와 이론경제학의 이런 극단적인 반정부 이데올로기가 2007~2009년의 금융위기를 가져왔다. 마르크스(Marx)의 예언처럼 자본주의 3은 자신의 반정부 이데올로기 모순 때문에 무너졌다.
자본주의 3.3의 자기 파괴 때문에 정치-경제 진화의 다음 단계가 열렸다. 바로 자본주의 4의 시대이다. 1930년대와 1970년대처럼 이런 전환을 통해 정치와 경제, 정부와 시장의 관계가 다시 정의될 것이다. 1980년대부터 2007~2009년 금융위기까지 지배적이었던 이데올로기에서는 언제나 시장이 옳고 정부는 잘못되었다고 여겨졌다.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자본주의 단계에서는 언제나 정부가 옳고 시장은 잘못되었다고 여겨졌다. 새로운 자본주의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정부와 시장 모두 잘못될 수 있고, 때로는 이런 오류가 거의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있다.
언뜻 보기에는 이렇게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 무기력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더 큰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정치와 비즈니스의 모든 영역에서 이전 자본주의 버전에서는 받아들이기 꺼렸던 개념들인 리더십·창조력·실험정신을 발휘할 여지가 생긴다. 정부와 시장이 모두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가 자본주의 3의 시대처럼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협력하는 관계임을 뜻한다. 자본주의 4의 태동기에 기술과 세계화, 사회변화 덕분에 놀라운 기회가 생기고 있다. 만약 다음 세대의 미국과 유럽의 정치인들과 비즈니스 리더들이 일을 잘 처리한다면 새로운 경제 모델은 이전 모델보다 훨씬 더 성공적일 것이다. 언젠가는 오바마노믹스(Obamanomics)라고 표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앞으로 정치-경제는 서구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중국이나 다른 권위주의적 신(新)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지배될지도 모른다.
서구가 이런 도전에 잘 대처하려면, 2007년~2009년 위기와 그 전후의 상황들을 자본주의 진화의 동적 과정의 한 단계로 보아야 한다. (후략) / <자본주의 4.0> 머리말 14~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