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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21 르네상스부터 파스퇴르까지 생명의 기원에 관한 생각



비잔틴 제국의 멸망 후 많은 그리스 출신 학자가 이탈리아 등지로 대거 망명하면서, 14세기 무렵부터 시작한 르네상스(Renaissance)는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신을 앞세운 교회의 아성은 여전히 유럽을 지배했지만, 한동안 잊혀진 고대 그리스 문화를 발판으로 한 유럽의 지성은 교회 이외의 것을 자신 안에 꽃피우기 시작했다. 천문학에서는 천 년 이상 유럽의 세계관을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대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중세의 우주론을 대체하기 시작했다면, 중세 유럽의 사고를 지배한 또 하나의 이론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발생설도 천동설과 마찬가지 길을 걷게 되었다.


자연발생설의 쇠락과 종결: 레디부터 파스퇴르까지



그림 1. 프란체스코 레디 [출처: Wikipedia].



이탈리아 출신의 의사이자 박물학자며 시인인 프란체스코 레디(Francesco Redi, 1626~1697년)는 1668년에 출판된 『Esperienze Intorno alla Generazione degl'Insetti (Experiments on the Generation of Insects)』란 저술에서 자연발생설을 확인하기 위한 일련의 몇 가지 실험을 소개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구더기는 썩은 고기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믿음에 도전했다 [1, 2] [그림 1].


자연발생설의 실재(實在)를 확인하기 위해 레디는 두 개가 한 묶음으로 이루어진 여섯 개의 항아리를 준비했다. 첫 번째 묶음에는 [현대적 의미에서 일종의 대조군(control experiment)으로] 썩지 않는 물체를 담았고, 두 번째 묶음에는 죽은 물고기를 한 마리씩 담았으며, 세 번째 묶음에는 익히지 않은 쇠고기를 한 덩이씩 담았다. 그는 각 묶음의 첫 번째 항아리를 오직 공기만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도록 부드러운 천 조각으로 덮었으며, 나머지는 입구를 열어 놓는 채로 방치했다. 며칠 뒤에 그는 물고기와 날고기가 담긴 밀봉되지 않은 항아리 안에서 구더기가 출현한 것을 관찰했으며, 천 조각으로 입구를 밀봉한 항아리의 내부에는 구더기가 없는 대신에 천 조각 위에 구더기가 몇 마리 존재하는 것을 관찰했다. 당연히, 썩지 않는 물체가 담긴 항아리에서는 [입구의 밀봉 여부에 관계없이] 그 어떤 구더기도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 이 정도로 만으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구더기의 자연발생은 기각됨이 마땅하지만, 이로선 만족할 수 없었던 레디는 두 번째 실험을 계획했다. 항아리 세 동이를 준비한 레디는 각각에 날고기를 한 덩이씩 집어넣고, 그 중 하나는 입구를 열어놓은 채로 방치했으며, 하나는 공기가 통할 수 있도록 천 조각으로 덮었으며, 다른 하나는 천 조각보다는 공기 투과가 덜 자유로운 코르크 마개로 입구를 막았다. 그리고 첫 번째 실험처럼 항아리를 며칠 간 방치했다. 결과는 다들 예상했겠지만, 당연히 입구가 뻥하니 열려 있는 항아리 안에서는 구더기가 발생했고, 천 조각으로 밀봉된 항아리는 천 조각 위에서만 구더기가 발생했으며, 코르크 마개로 입구를 막은 항아리는 안이든 마개 위든 그 어떤 곳에서도 구더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제 결론은 확실하다. [적어도] 구더기만큼은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레디의 결론이다. 다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단순히 썩은 고기가 있고, 흙이 있고, 태양 빛이 있고, 물이 있다고 해서, 구더기의 존재가 항아리 안에서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하는 마법사의 주문처럼 “얏!”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저 안에 썩은 고기가 있으니, 구더기여 네가 있을 곳을 그곳이니라!”하며 썩은 고기로 구더기를 빚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항아리 안에서 구더기를 만들까?


레디는 구더기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세 번째 실험을 계획했다. 레디는 날고기가 담긴 항아리 안에 구더기를 넣었다. 이때 구더기는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을 항아리에 각각 따로 담았다. 그리고 또 다른 항아리에 파리도 넣어뒀다. 파리도 마찬가지로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을 따로 담았다. 결과야 뻔하다. “살아 있는 구더기가 살아 있는 파리로 변하고 그 파리에서 구더기가 나오며, 살아 있는 파리에서 살아 이는 구더기가 나오고 그 구더기가 다시 파리가 되더라.” 생명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오로지, 기원이 될 수 있는 어떤 살아 있는 존재가 있어야만 거기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아주 다른 형태의 생명이 출현하는 것도 아니다. 새로 태어나는 생명체는 언제나 부모를 닮는다 [1, 2].



그림 2. 피에르 안토니오 미켈리 [출처: Wikipedia].



생명체는 부모를 닮는다”란 레디의 관찰은 이탈리아 출신의 식물학자이자 가톨릭 신부인 피에르 안토니오 미켈리(Pier Antonio Micheli, 1679~1737년)에 의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1, 3] [그림 2]. 미켈리는 1729년에 『Nova plantarum genera』란 책을 통해 곰팡이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남겼고, 오늘날 유전학과 발생학 등에서 모델 생명체로 자주 쓰이는 Aspergillus을 발견했으며, 버섯의 포자(spore, 胞子)를 처음 발견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그가 이룩한 업적은 무엇보다도 “자연발생설”을 부정한 실험을 수행한 것이다. 레디는 “자연발생설”을 검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실험을 계획했다. “곰팡이의 포자를 멜론 위에 올려놓는다. 며칠 뒤 멜론에서는 실험에 사용한 종류와 똑같은 곰팡이가 피어났다. 어떤 곰팡이를 사용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곰팡이는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으며, 오로지 기원이 되는 곰팡이의 포자를 통해서만 발생한다.” [1, 3]


자연발생설을 부정하는 확실한 실험 결과가 있더라도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해 온 이론이 쉽사리 무너지지는 않는다.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있으면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도 있는 법. 자연발생설을 부정하는 증거가 끊임없이 나오는 가운데 자연발생설을 지지하는 실험이 소개되었다. 바로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로마 기독교의 신부인 존 니덤(John Turberville Needham, 1713~1781년)이 수행한 1745년의 실험이다 [1, 4] [그림 3].



그림 3. 존 니덤 [출처: Wikipedia].



모든 생명체는 고온에서 살 수 없다. 이건 바이러스건 세균이건 식물이건 우리 몸 안의 세포건 예외가 없다. 아, 물론 예외가 하나 있긴 하다. 온천 등의 극한 환경에서 사는 극한성 생물(extremophiles)은 적정 수준의 고온에서는 잘 산다. 그럼에도, 생명체 대부분은 고온에서는 자신의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온갖 영양분이 가득한 수프를 멸균하면 그 안에 있을 지도 모를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체는 죽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식을 바탕으로 니덤은 수프가 담긴 항아리를 펄펄 끓인 뒤에 상온에서 어느 정도 식힌 다음, 이 항아리의 입구를 천 조각으로 밀봉해 방치했다. 며칠 뒤 항아리 안의 수프는 뿌옇게 변했는데, 이것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상식, 즉 “생명체는 고온에서 살 수 없다”는 것에 위배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안에서 생명체가 발생할 수 있는가? 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한 가지, 바로 “끓인 수프 안에서 생명체가 자연적으로 발생했다”였다 [1, 4].


니덤은 그가 원하던 [또는 간절히 또 간절히 바라던] 결과를 얻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실험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몇 가지 있다. (1) 멸균이 제대로 안 되었을 가능성, (2) [어떻게 보면 가장 결정적일 수 있는 문제인] 식히는 과정에서 수프가 담긴 항아리 안으로 세균이 유입되었을 가능성, (3) [이것도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실험 과정에서 제대로 멸균된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 등이다. 특히, (2)번은 매우 개연성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식히는 과정에서 수프가 담긴 항아리의 입구를 그 어떤 것으로도 막지 않았다. 어쨌든, 니덤의 실험 결과는 자연발생론을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으며, 어찌 보면 자연발생설을 찬성하는 측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림 4. 라자로 스팔란자니 [출처: Wikipedia].



이런 논쟁의 한 가운데서 이탈리아 출신의 가톨릭 신부이자, 생물학자이며, 생리학자인 라자로 스팔란자니(Lazzaro Spallanzani, 1729~1799년)은 니덤의 실험이 잘못되었으며, 자연발생설은 일어날 수 없음을 밝힌 결정적인 실험을 수행했다 [1, 5] [그림 4]. 그는 니덤의 실험 과정에 어떤 문제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니덤의 실험을 약간 수정해 그의 실험을 재현했다. 스팔란자니는 수프를 니덤보다 더 오래 끓이고, 끓이거나 식히는 순간에도 항아리 입구에 천 조각을 대는 방식으로 외부에서 어떤 보이지 않는 생명체가 항아리 안으로 유입하는 것을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수프 안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니덤의 실험에서는 수프가 뿌옇게 변했고, 스팔란자니의 실험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을까? 스팔란자니는 공기 안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자신의 실험에서는 열기로 죽었고, 니덤의 실험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림 5. (왼쪽) 루이 파스퇴르. (오른쪽) 파스퇴르가 사용한 자연발생설을 부정하는 데 사용했던 실험 도구 [출처: Wikipedia].



역시나 최후의 결정타는 후대인의 몫이다. 거기엔 프랑스 출신의 화학자이자 미생물학자인 끝판왕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년)가 있었다 [1, 6] [그림 5]. 파스퇴르의 업적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다 알 것이라 믿는다. 특히, 미생물학자로서의 그의 입지는 과학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게다가, 자연발생설의 결정적 임종에는 1859년에 수행한 그의 실험의 힘이 컸다. 그는 거위처럼 아래로 휘어진 기다란 목을 가진 플라스크 안에 담긴 고기 수프를 펄펄 끓였다. 그리고 상온에서 천천히 식히면서 오랫동안 방치했다. 플라스크가 식으면서 그림 5의 오른쪽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아래로 휘어진 부분에는 증류수가 고이게 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플라스크 안에서는 그 어떤 세균도 자라지 않았다. 단지, 플라스크를 기울여 끓인 고기 수프가 외부 공기와 접촉했을 때만 그 안에서 세균이 자라기 시작했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자연발생이란 애당초 있지도 않았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한 생명의 자연발생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루이 파스퇴르의 실험에는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실험은 당시 수준에서는 수행하기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파스퇴르가 이랬다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배우지만, 실제 저 실험은 정말로 어려웠고 어느 정도의 [당시 수준에서는]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세상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주 성공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끓인 고기 수프에서 세균이 자라는 경우가 꽤 많았다. [반대로, 세균이 창궐하지 않았던 실험도 분명히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그것은 바로 잔존 세균의 문제다. 니덤과 스팔란자니의 예에서도 봤겠지만, 아무리 오래 끓이더라도 용기나 고기 수프 안에 미량의 세균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안에서 세균이 자랄 확률은 매우 높다. 더군다나, “멸균”에 관한 개념이 없었던 당시로써는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따라서 실험에 사용하는 모든 재료를 [수프를 포함해] 멸균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위 실험은 당시로써는 [개념적 측면에서] 정말로 어려운 실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연발생설을 부정하는 일련의 실험 과정을 통해 시행착오를 반복한 파스퇴르와 그의 동료이자 스승인 존 틴달(John Tyndall)은 “생명체는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다”를 증명함과 동시에 의학과 과학의 혁신이라 할 수 있는 멸균법(autoclaving)법을 발견함으로써 과학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중세부터 파스퇴르까지 생명의 기원에 관한 여러 가지 가설에 대해 살펴봤다. 비록 파스퇴르에 이르러 자연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은 그 운명을 다했지만, 다윈의 진화론을 전후하여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새로운 “자연발생설”(abiogenesis)이 인간의 지성 안에서 태동했다. 포괄적인 측면에서 두 용어가 의미하는 바는 비슷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spontaneous generation과 진화생물학의 abiogenesis가 의미하는 점은 분명히 다르다. 다시 말하면, spontaneous generation은 생명체가 어떤 조건에서 무작위적으로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발생할 수 있다는 비과학적 추론이자 믿음이지만, abiogenesis는 오늘날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46억 년 전 지구 탄생 이후에서 약 30억 년 전 최초의 원시적 단세포 생명체의 출현 사이에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생명체가 자발적으로 출현해야 함을 뜻한다 [1]. 물론, “자발적”이라고 해서 흙에서 지렁이가 출현하고 썩은 고기에서 구더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머나먼 화학적∙물리적 여정일 뿐이다. 다음번에는 파스퇴르 이후 생명과학에서 다루는 생명의 기원에 관한 여러 가설에 대해 살피도록 하자.


참고 문헌


[1] Spontaneous generation. Wikipedia. [링크]
[2] Francesco Redi. Wikipedia. [링크]
[3] Pier Antonio Micheli. Wikipedia. [링크]
[4] John Needham. Wikipedia. [링크]
[5] Lazzaro Spallanzani. Wikipedia. [링크]
[6] Louis Pasteur. Wikipedia. [링크]






Posted by meta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