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고릴라(학명: Gorilla gorilla) 유전체(genome, 遺傳體) 연구 결과가 「고릴라 유전체 서열을 통한 인류 진화에 대한 통찰(Insight into hominid evolution from the gorilla genome sequence)」이라는 제목으로 『네이쳐(Nature)』에 게재되었다(앞으로 이 논문을 「Scally, et al.」이라 부르겠다) [5]. 따라서 2001년에 발표된 현생 인류(학명: Homo sapiens)의 유전체 [1, 2], 2005년에 발표된 침팬지(학명: Pan troglodytes) 유전체 [3], 2011년에 보고된 수마트라 오랑우탄(학명: Pongo abelii)의 유전체 [4], 그리고 최근에 분석된 보노보 원숭이(학명: Pan paniscus)의 유전체를 포함해 [6] 웬만한 유인원의 유전체는 거의 분석이 이루어진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1, 그림 2]. 능력이 된다면 이 모든 유전체 연구 결과를 전반에 걸쳐 살피고 싶어도 필자의 능력이 이 모든 것을 여유롭게 소화해내기에는 매우 미약하므로, 이 글에서는 고릴라 유전체 연구 결과에서 밝혀진 유인원 진화의 신비로움(?)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 글에 나와 있는 내용 대부분은 필자의 창의적인 생각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 필자보다도 훨씬 능력이 뛰어난 연구자들이 밝힌 사실과 가설의 기계적 종합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림 1. 현존하는 유인원(great ape, 類人猿)의 분류 체계. 사람 과 또는 유인원 과(family Hominidae)는 크게 사람 속(genus Homo), 판 속(genus Pan), 고릴라 속(genus Gorilla), 그리고 퐁고 속(genus Pongo)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각 속에 속하는 종은 그림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다 [5] [출처: Nature].



    

그림 2. 왼쪽부터 순서대로 아프리카 서부 저지대 고릴라(학명: Gorilla gorilla gorilla) [출처: Wikipedia], 동부 저지대 고릴라(학명: Gorilla beringei graueri) [출처: Wikipedia], 침팬지(학명: Pan troglodytes) [출처: Wikipedia], 보노보 원숭이(학명: Pan paniscus) [출처: Wikipedia], 보르네오에서 사는 오랑우탄(학명: Pongo pygmaeus)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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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해부학적∙생리학적으로 유인원과 유사하다. 물론 외양(外樣)만 놓고 본다면 “인간과 유인원의 유사성”에 당연히 이의(異議)를 제기하겠지만, 오직 생물학적 특징만을 고려한다면 이 말은 과학적으로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과학자에겐 그렇다. 안 그렇다면 뭐 할 말은 없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유사점이 있는 만큼 차이도 크다. 어떤 면에서 그런 차이점(들)은 인간과 유인원을 구분 짓는 결정적 요인(要因)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DNA가 있다.


오늘날에야 유전자의 구성적 본질(本質)인 DNA의 염기 서열을 아주 손쉽게(?) 분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진짜 쉽지는 않으며 유전체를 분석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돈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DNA 서열 분석이 가능하지도 않았다.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충분한 양의 DNA가 확보된 상태에서 화학적 방법으로 몇십에서 몇백 개의 염기 서열을 겨우 화학적 방법으로 겨우 확인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분자생물학의 발전은 유전체 연구에게 확실한 기폭제(起爆劑)였다. 따지고 보면 분자생물학이 있었기 때문에 유전체학(genomics, 遺傳體學)의 태동도 가능했다. 따라서 분자생물학 연구법이 미약했던 과거에는 염기 서열의 분석∙비교로 생명체 사이의 진화적 관계를 파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그림 3. 아프리카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진화적 관계를 규명하려 한 접근법(왼쪽)과 그 결론(오른쪽). 2008년 당시만 해도 고릴라 유전체 분석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10] [출처: Journal of Anatomy].



초기 현대 생물학에서 주요 연구 대상은 단백질이었다. 특히, 진화적 관계를 유추하는 데 있어 항원-항체 면역 반응과 전기영동(electrophoresis, 電氣泳動) 같은 생화학적∙면역학적 접근법은 그 자체로 많은 한계가 있었음에도 당시에는 매우 유용한 연구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화학적∙면역학적 접근법으로 인간과 침팬지의 알부민(albumin) 그리고 미오글로빈(myoglobin) 단백질이 고릴라, 오랑우탄, 긴팔원숭이 등과 확연(擴延)한 차이가 있음이 밝혀졌다 [7]. 더불어 단백질과 DNA의 서열도 (일부이기는 하지만) 비교했다. 오늘날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생어 시퀀싱법(Sanger sequencing method)으로 DNA 서열을 분석하거나 에드만 분석법(Edman degradation method) 등으로 단백질 서열을 밝힘으로써 생화학적∙면역학적 방법으로 확인한 진화적 관계가 유전자 수준에서도 반영됨을 확인했다 [7, 8, 9]. 하지만 결론이 명확하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분석 방법에 따라 결론 사이에 모순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 침팬지, 고릴라 등의 유인원 진화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0] [그림 3].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Scally, et al.」는 과거 여러 연구에서 드러난 불완전함과 모호함을 좀 더 분명하게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4. 고릴라 유전체 프로젝트(Gorilla genome project)의 유전체 분석 대상인 카밀라(Kamilah)[출처: Nature].



「Scally, et al.」에서 연구팀은 아프리카 서부 저지대에서 사는 카밀라(Kamilah)란 이름의 암컷 고릴라(western lowland gorilla, 학명: Gorilla gorilla gorilla)의 유전체를 주로 분석했다 [그림 4] [5]. 더불어 이들 연구팀은 카밀라의 동족(同族)인 수컷 고릴라 콴자(Kwanza)의 유전체를 Y 염색체 염기 서열 확보를 위해 분석했으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릴라의 성염색체도 수컷은 XY 그리고 암컷은 XX 형태를 보이고 있다), 같은 서부 저지대에서 사는 암컷 고릴라인 EB(JC)와 동부 저지대의 수컷 고릴라인 무키시(Mukisi)의 유전체도 고릴라 집단 사이의 유전적 다양성(genetic diversity, 遺傳的多樣性) 및 차이를 조사하기 위해―카밀라의 유전체만큼 본격적이지는 않았지만―마찬가지로 분석했다 [그림 2, 왼쪽 첫 번째 그림과 두 번째 그림].


유인원의 종 분화 시기


「Scally, et al.」에서는 서부 저지대의 암컷 고릴라인 카밀라의 유전체 서열을 CoalHMM이라는 융합 추정(coalescent inference, 融合推定) 방법으로 [11] 이미 공개된 인간, 침팬지, 오랑우탄 그리고 짧은꼬리원숭이(macaque, 학명: Macaca mulatta)의 유전체와 비교했는데, 이때 오랑우탄 유전체를 외군(outgroup, 外群)으로 둬서 유인원의 종 분화 시기를 추정했다 [5]. 이들 연구팀은 CoalHMM 분석으로 얻은 결과를 해석하는 데 두 가지 사안(issue, 事案)을 고려했다. (1) 융합 추정으로 얻은 결과 자체는 시간이 아닌 상대적인 염기 분기(sequence divergence, 塩基分岐) 정도를 나타내므로 시간 단위로 환산해야 한다. (2) 고릴라 집단의 실제적인 지리적 분포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인간-짧은꼬리원숭이 염기 분기(sequence divergence, 塩基分岐)를 화석 증거로 보정해 얻은 돌연변이 비율1 × 10-9/bp∙year로 상대적 염기 분기 정도를 시간으로 환산했을 때, 인간-침팬지 그리고 인간-침팬지-고릴라의 종 분화 시기는 각각 3백7십만 년 전5백9십5만 년 전으로 나타났다 [5]. 이 결과는 염기 서열의 돌연변이 빈도를 비교∙분석해 종 분화 시기를 파악하는 분자 추정법(molecular estimate)을 이용한 최근 논문의 주장과 일치하지만 [10, 12], 한편으로는 화석 증거 등으로 추정한 전통적인 주장과 모순된다. 그런데 질병 유발 돌연변이(disease-causing mutation)의 발생 빈도 또는 부모-자식 간 염기 서열 차이를 분석한 최근 연구를 바탕으로 (한 세대를 20~25년이라고 가정했을 때) 현대 인류 집단에서의 세대당 돌연변이 비율 0.5~0.6 × 10-9/bp∙year라고 가정하면 [13, 14, 15], 인간-침팬지 그리고 인간-침팬지-고릴라 종 분화가 각각 6백만 년 전과 1천만 년 전에 발생했다고 나타나며, 이것은 화석의 연도 측정을 바탕으로 기존 주장과 일치한다 [5]. 다시 말하면, 염기 서열의 돌연변이 비율을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느냐에 따라 이들 유인원의 종 분화 시기에 상당한 차이가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연구팀은 이 문제를 시기에 따라 돌연변이 비율이 달라진다고 가정함으로써 해결했다. 예를 들어, “모든 유인원의 공통 조상에서는 1 × 10-9/bp∙year이라는 돌연변이 비율이 나타나지만, 현존하는 모든 유인원에서는 돌연변이 비율이 이것보다 더 낮다”란 식으로 다르게 적용하는 것이다 [5]. 실제로 같은 종에 속하는 각 개체의 유전체에서도 돌연변이 정도가 세대에 따라 달리 나타나기 때문에 이러한 가정이 근거 없는 것도 아니다.


더불어 연구팀은 조상인 집단의 인구 변동이 유인원의 종 분화 시기 결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고려했다. 즉, 조상 집단의 크기가 일정한 상태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유전적으로 차이가 있는 어떤 집단으로부터 조상 집단으로 개체(들)가 유입되거나 조상 집단에서 일부 또는 많은 개체가 외부로 빠져나갈 때, 이러한 변화는 조상 집단의 돌연변이 비율과 전체적인 진화의 방향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소위 유전자 확산(gene flow, 遺傳子擴散)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5]. 마찬가지로 집단의 세대 간 시간 간격도 종 분화 시기 결정에 중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인간-침팬지와 인간-침팬지-고릴라 종 분화 시기를 추정하면 각각 5백5십만~7백만 년 전8백5십만~1천2백만 년 전이란 결론이 나온다 [5]. 모든 진화 연구가 그렇듯, 「Scally, et al.」에서 나타난 종 분화 시기도 어떤 모델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편차가 꽤 큰 편이지만, 전반적으로 이 결과는 화석으로 보정한 기존의 종 분화 시기와 상당히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인간, 침팬지 그리고 고릴라 사이의 진화적 관계


앞에서 언급한 종 분화 시기는 인간, 침팬지 그리고 고릴라가 과거 어느 시기에 서로 다른 종으로 나뉘기 시작했는지를 말할 뿐이며, 이들 종 사이에 어떤 유전적 흐름이 있었는지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 종 사이에 완전한 유전적 격리가 있었는지 아니면 종 분화가 시작된 후 일정 기간 유전적 교환이 있었는지 파악하는 것은 인간, 침팬지 그리고 고릴라 사이의 진화적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진화적 관계를 파악하는 방법인 분자 계통 발생(molecular phylogenetics, 分子系統發生) 분석에서는 종 사이의 진화적 관계를 밝히기 위해 주로 DNA 서열을 비교 분석(comparative analysis)한다. 그런데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면 (사람은 2001년 이후로 많은 개체를 대상으로 유전체 분석이 이루어졌다) 각각의 종을 대표하는 단일 개체에서 DNA를 추출하고 서열을 확인함으로써 종 사이의 유전체 서열을 비교∙분석한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단일 개체에서 얻은 DNA 서열이 각각의 종의 유전체를 대표한다고 가정하면 분석 과정에서 종 내 개체 사이의 유전적 다양성(genetic diversity, 遺傳的多樣性)이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과소평가(過小評價)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 분화가 이루어지는 시간 간격이 상대적으로 길다고 했을 때, 서로 다른 두 종이 공통 조상에서 분지된 이후 축적되는 종 사이의 유전적 차이(between-species genetic difference)는 종 내의 유전적 변이(within-species genetic variation)보다 더욱 두드러질 개연성(蓋然性)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둘 또는 그 이상의 진화적 분기가 매우 근접한 시기에 발생한다면 (즉, 하나의 단일 계통에서 첫 분지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분리된 계통 가운데 적어도 하나에서 또 진화적 분지가 발생한다면), 유전자에 대한 자연 선택이 거의 일어나지 않은 채 마지막 공통 조상이 갖고 있던 유전적 변이가 자손 계통에 무작위로 유전될 가능성이 있다. 결과적으로 어떤 유전체의 서로 다른 부분은 서로 다른 계통적 유연관계(類緣關係)를 나타낼 수 있는데, 서로 다른 유전자에 대한 서로 상충하는 진화적 계통 관계를 이끄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불완전 계통 정렬(incomplete lineage sorting 또는 ILS)이라고 부른다 [16].



그림 5. (왼쪽) 불완전 계통 정렬의 예. (오른쪽) 유전자 확산의 예 [16] [출처: Nature].



예를 들어보자. 과거 어느 시기에 AB 유전자형을 가진 가장 먼 조상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림 5, 왼쪽 그림의 검은 선]. 자기 서식지에서 평화롭게 잘살고 있던 이 조상은 어떤 (지리적 또는 환경적) 변화 때문에 AA 유전자형과 AB 유전자형을 갖는 두 자손 계통으로 갈라졌다 [그림 5, 왼쪽 그림의 녹색 선과 붉은색 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AB 유전자형을 가진 자손 계통이 AA 유전자형과 BB 유전자형을 가진 가장 최근 계통으로 각각 분리되어 서로 다른 진화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림 5, 왼쪽 그림의 주황색 선과 붉은색 선]. 그리고 현재 이 지역에는 녹색 선으로 대표되는 AA 유전자형을 가진 종, 주황색 선으로 대표되는 BB 유전자형을 가진 종, 붉은색 선의 AA 유전자형을 가진 종 이렇게 세 가지 종이 분포하고 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녹색 선으로 대표되는 AA 유전자형을 가진 종은 주황색 선의 BB 유전자형을 가진 종과 붉은색 선의 AA 유전자형을 가진 종의 공통 조상과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진화적으로 서로 분기했는데,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전자형만 놓고 따져본다면 오히려 녹색 선으로 대표되는 종과 붉은색 선으로 대표되는 종이 AA 유전자형을 갖기 때문에, 주황색 선으로 대표되는 종보다 진화적으로 더 가깝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유전자 공유 현상이 바로 불완전 계통 정렬이다 [16].


「Scally, et al.」의 분석에서는 실제로 이런 양상이 나타난다. 인간, 침팬지 그리고 고릴라의 유전체 가운데 70%는 고릴라보다도 인간과 침팬지가 상대적으로 더욱 비슷한데, 이것은 인간과 침팬지가 고릴라보다 더 최근에 진화적으로 갈라졌다는 일반적인 시각과 일치한다 [5].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의 유전체 가운데 나머지 30%에서는 인간-고릴라 또는 침팬지-고릴라의 DNA 서열 유사성(similarity, 類似性)이 오히려 인간-침팬지 유사성보다 높다는 점이다 [5]. 즉, 우리 유전자 가운데 침팬지와 유사하지 않은 부분에 오히려 고릴라와 더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첫 번째 가능성으로 앞 단락에서 언급한 불완전 계통 정렬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침팬지-고릴라의 분지가 시기적으로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졌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유전자 확산으로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그림 5, 오른쪽 그림]. 실제로도 유전자 확산으로 서로 다른 두 종 사이에 유전적 유사성이 나타날 수 있다. 대표적으로 현생 인류, 네안데르탈인(Neandertal) 그리고 데니소바인(Denisovan) 사이에서 유전자 확산으로 나타난 염기 서열의 유사성을 들 수 있다 [17, 18] [여기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고대 인류 데니소바인의 정체가 드러나다」를 참조하라].


하지만 유전자 확산보다는 불완전 계통 정렬 때문에 인간과 고릴라 사이의 DNA 서열 유사성이 높게 나타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왜냐하면, 이 정도로 높은 비율의 서열 유사성이 유전자 확산 때문에 나타나려면 꽤 가까운 시기에 인간의 조상과 고릴라의 조상 사이에 유전적 혼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 유전체 가운데 1~4% 정도를 네안데르탈인에게서 받았다고 알려진 오늘날 유럽인에서 유전적 혼합이 이루어진 시점이 약 8만 6천~3만 7천 년 전 사이임을 감안(勘案)한다면 [17, 18], 인간과 고릴라 사이의 DNA 유사성이 거의 15%에 가깝게 나타나는 이유가 단지 유전자 확산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다. 물론, 인간 계통의 조상과 고릴라 계통의 조상 사이에 유전자 확산이 전혀 없었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유전자 확산이 인간과 고릴라 사이의 유전적 유사성에 크게 이바지를 했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있다. 어쨌든, 「Scally, et al.」의 결과는 인간-침팬지-고릴라의 종 분화와 진화적 차이와 유전적 유사성에 대해 많은 시사하는 바가 큰데, 특히 이들 연구팀의 결과는 “영장류 종의 다양성은 한 종이 재빨리 그리고 비가역적으로 유전적으로 고립된 두 종의 분지로 증가한다”는 전통적인 학설에 반(反)하는 실체적 근거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5, 16]. 비록 필자의 개인적 견해가 인간과 고릴라 사이의 유전자 확산 가능성에 회의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과 고릴라의 차이


유인원 진화 연구의 주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이들이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독특한 형태적∙행동적 특징을 갖추게 되었느냐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종이 가진 상동 유전자(homologous gene, 相同遺傳子) 사이의 직접적 비교가 필요하다. 「Scally, et al.」은 이를 위해 인간, 침팬지, 고릴라 사이에 유전자의 변화, 소실(消失) 또는 획득(獲得)이 진화 과정 중에 발생했는지 분석했다. 그 결과, 인간의 유전자 가운데 663개, 침팬지 유전자 중 562개 그리고 고릴라 전체 유전자 가운데 535개가 어떤 진화적 변화를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5].


진화적 변화를 겪은 유전자 가운데 듣기 및 뇌 발달 등 감각 인지(sensory perception) 기능과 관련된 것이 포함되어 있다 [5]. 특히, 침팬지보다는 고릴라에서 뇌 기능과 관련된 유전자의 변이가 인간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5], 이는 뇌에서 발현되거나 뇌 발달에 관련된 유전자가 영장류에서는 양성 선택(positive selection, 陽性選擇) 대상이 아니라는 통상적 인식과 비교해서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몇몇 경우에 인간의 유전 질환과 관련된 변이가 고릴라에서는 정상으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치매(dementia, 癡呆)와 관련된 성장 호르몬 PGRN 유전자와 비후형 심장근육병증(hypertrophic cardiomyopathy, 肥厚形心筋病症) 관련 유전자인 TCAP에서 자주 보이는 유전 질환 관련 변이가 고릴라에서는 정상으로 확인되었다 [5]. 사실, 이런 변이는 침팬지와 짧은꼬리원숭이에서도 정상으로 확인된 유전형인데, 이 변이가 왜 인간에서는 문제가 되고 인간이 아닌 유인원에서는 문제가 없는지 확인할 방법은 현재로서 전무(全無)하지만, 여기에는 아마도 다른 유전자와의 상호 작용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환경적인 어떤 요인도 작용하는 게 아니냐는 매우 모호한 추측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고릴라의 유전적 다양성


고릴라 속(genus Gorilla)은 크게 서부 고릴라(Gorilla gorilla)와 동부 고릴라(Gorilla beringei) 두 종으로 나뉘며, 각각은 두 아종(subspecies, 亞種)으로 분류된다 [그림 1; 그림 6, 왼쪽 그림]. 그림에서 나타나듯이 이런 식의 분류는 지리적 분포에 따라 편의상 이루어졌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이런 식으로 분류된 고릴라 사이에는 무시 못할 정도의 유전적 차이가 있다. 하지만 서로 별개의 종으로 나눌 정도로 지나치게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며, 어떤 연구자는 오히려 서부 고릴라와 동부 고릴라 사이에 유전자 확산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9].



그림 6. (왼쪽) 아프리카 내 고릴라 분포 지도. 기니(Guinea), 나이지리아(Nigeria), 가봉(Gabon), 콩고(Congo) 지역에 분포하는 서쪽 고릴라 집단은 크게 서부 저지대 고릴라(western lowland gorilla, 학명: Gorilla gorilla gorilla)와 크로스 리버 고릴라(Cross River gorilla, 학명: Gorilla gorilla diehli)라는 두 가지 아종(subspecies, 亞種)로 나뉠 수 있으며, 콩고 민주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Congo) 동부 지역에 서식하는 동쪽 고릴라 집단은 동부 저지대 고릴라(eastern lowland gorilla, 학명: Gorilla beringei graueri)와 마운틴 고릴라(mountain gorilla, 학명: Gorilla beringei graueri)의 두 가지 아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오른쪽) 서부-동부 고릴라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고립-이주 모델(isolation-migration model). NA, NW 그리고 NE는 각각 선조, 서부, 동부 고릴라의 유효 집단 크기(effective population size, )를 뜻하며, m은 이주 비율을 나타낸다 [5] [출처: Nature].



「Scally, et al.」에서는 이들 고릴라 사이의 유전적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암컷 서부 고릴라인 카밀라와 EB(JC) 그리고 수컷 동부 고릴라인 무키시의 유전체 서열을 비교해 염기 서열의 다양성을 조사했다 [5]. 결과적으로 카밀라와 EB(JC)는 유전적으로 서부 고릴라 집단에 속하며 무키시는 서부 고릴라 집단과 확연히 구분되는 동부 고릴라 집단임이 확인되었다. 여기까지는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무시키의 이형접합성(heterozygosity, 異型接合性)이 다른 두 고릴라와 비교해서 상당히 낮았는데, 이것은 동부 고릴라 집단의 크기가 유전적 다양성을 폭넓게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상대적으로 작음을 뜻한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현재 서부 고릴라 개체 수는 약 20만 정도지만 동부 고릴라 개체 수는 서부 고릴라의 10분의 1도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 [5].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유전자 다양성 분석에서 확인된 동부 고릴라 집단 크기의 축소 경향이 단순히 인간 활동 때문에 나타난 현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에 동부 고릴라 집단이 오래전부터 서부 고릴라 집단에 비견할 수 있는 정도로 규모가 유지되는 상태에서 인간의 무분별(無分別)한 개입 때문에 최근에 개체 수가 감소했다면, 유전체에서 드러나는 동부 고릴라의 다양성은 확실히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집단의 규모가 과거 어느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속해서 줄어들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고 동부 고릴라 개체 수 감소에 인간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 때문에 나타난 동부 고릴라 개체 수 감소와는 별개로 이 유전적 집단이 전체적으로 쇠락(衰落)의 과정에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이 연구팀의 결과를 근거로 했을 때) 분명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연구팀은 두 고릴라 집단이 유전적으로 분지한 시점을 약 1백7십5만 년 전으로 추정했다 [5].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두 고릴라 집단의 이형성이 (분명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렇게 큰 차이가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에, 초창기 염기 서열의 분기가 일어난 후에 발생할 수 있는 유전자 교환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종 자체가 나뉘는 시기는 대략 50만 년 전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고 연구팀은 결론을 내렸다 [5] [그림 6, 오른쪽 그림].


후기 ― 더 많은 유전체 연구 결과가 필요하다


사람도 아닌 고릴라, 침팬지, 보노보 원숭이, 오랑우탄 등과 같은 유인원의 유전체를 왜 분석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솔직히 이런 연구가 인류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백 퍼센트 거짓말이며 거의 사기 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이들 유인원의 유전체 분석이 중요한 이유는 “인류를 포함한 유인원의 진화”를 전반에 걸쳐 이해하는 데 매우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 같은 D급 과학 잉여에게는 이런 연구가 암 정복이나 생명 연장 따위보다도 더욱 중요하다. 그렇다고 실용적인 연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관심을 안 둘 뿐이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고릴라 유전체 분석으로 유인원의 진화를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를 확보했지만,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특히 각각의 종마다 거의 한 개체만 이루어진 완전한 유전체 분석을 같은 종의 다른 개체(들)로 확대하는 것이 필요한데, 언젠가는 오늘날 다양한 사람의 유전체를 분석하는 것처럼 다른 종류의 유인원도 개체마다 일일이 유전체를 분석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참고 문헌
[1] International Human Genome Sequencing Consortium. 2001. Initial sequencing and analysis of the human genome. Nature. 409: 860-921. [링크] : 유전체 연구에 관한 기념비적 논문이다. 국제적 협력으로 진행된 이 연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보노보 등과 유인원의 유전체 분석뿐만 아니라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같은 고대 인류의 유전체 분석 사업은 애당초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2] Venter JC, et al. 2001. The sequence of the human genome. Science. 291: 1304-1351. [링크] : 과학적 지식을 공공이 아니라 사적 이익을 위해 특허를 걸으려 한 크레이크 벤터의 논문이다. 크레이크 벤터는 자신의 전매특허(專賣特許)인 샷건(shot-gun) 분석만으로 인간 유전체를 분석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발표한 인간 유전체 결과가 실제로는 많은 부분에서 국제 인간 유전체 분석 컨소시엄(International Human Genome Sequencing Consortium)의 분석 결과를 참조했다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어쨌든, 크레이크 벤터가 똑똑한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한 개인이 사적 이익을 위해 유전자 정보를 독점하려 했을 때 어떤 결과가 있을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반면교사(反面敎師)라고 할 수 있다.
[3] Chimpanzee Sequencing and Analysis Consortium. 2005. Initial sequence of the chimpanzee genome and comparison with the human genome. Nature. 437: 69-97. [링크] : 침팬지 유전체를 분석한 연구 결과로 유인원 유전체 가운데 인간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DNA 서열이 분석된 종이다.
[4] Locke DP, et al. 2011. Comparative and demographic analysis of orang-utan genomes. Nature. 469: 529-533. [링크] : 오랑우탄 유전체 분석 연구다. 분석 대상은 주로 수마트라 오랑우탄(학명: Pongo abelii)이며, 보르네오 오랑우탄(학명: Pongo pygmaeus)의 유전체도 일부 분석했다.
[5] Scally A, et al. 2012. Insights into hominid evolution from the gorilla genome sequence. Nature. 483: 169-175. [링크] : 이 글에서 주로 인용하며 분석하는 핵심 논문이다.
[6] Prüfer K, et al. 2012. The bonobo genome compared with the chimpanzee and human genomes. Nature. 486: 527-531. [링크] : 고릴라 유전체 분석 결과가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보노보 원숭이의 유전체 분석 결과가 곧바로 발표되었다. 고릴라 유전체 분석과 관련해서 읽어보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필자도 조금밖에 읽지 않았다).
[7] King MC, and Wilson AC. 1975. Evolution at two levels in humans and chimpanzees. Science. 188: 107-116. [링크]
[8] DNA sequencing. Wikipedia. [링크] : DNA 서열 분석법을 소개한 위키피디아 글이다. 이 글은 생어 시퀀싱법(Sanger sequence analysis)도 설명하고 있다. 영어가 된다면 한 번 읽어보는 게 좋다.
[9] Edman degradation. Wikipedia. [링크] : 단백질 서열 분석법 가운데 하나인 에드만 분석법을 설명하는 위키피디아 글이다.
[10] Bradley BJ. 2008. Reconstructing phylogenies and phenotypes: a molecular view of human evolution. J Anal. 212: 337-353. [링크] : 2008년도에 발표된 유인원 진화에 관한 소개 글이다. 유인원 진화에 관한 전반적인 흐름을 정리하는 측면에서 읽어보길 추천하지만, 이 글에서 내리는 결론은 필자가 소개하는 논문의 주장과 다소 차이가 있다.
[11] Coalescent theory. Wikipedia. [링크] : 이 글에서 언급하는 통계 분석법인 CoalHMM이라는 융합 추정의 기본 이론을 소개하는 위키피디아 글이다.
[12] Burgess R, and Yang Z. 2008. Estimation of hominoid ancestral population sizes under bayesian coalescent models incorporating mutation rate variation and sequencing errors. Mol Biol Evol. 25: 1979-1974. [링크]
[13] 1000 Genomes Project Consortium. 2010. A map of human genome variation from population-scale sequencing. Nature. 467: 1061-1073. [링크] : 부모-자손 사이의 유전적 차이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재미있는 논문이다. 필자도 아직 다 안 읽어봤지만, 꽤 중요한 생물학적 현상을 담고 있다. 어쨌거나 이 논문의 결론은 “부모의 유전자 절반이 각각 자손에게 전해진다 하더라도, 부모와 자손의 염기 서열은 다소 차이가 있다”이다.
[14] Roach JC, et al. 2010. Analysis of genetic inheritance in a family quartet by whole-genome sequencing. Science. 328: 636-639. [링크] : 참고 문헌 [13]과 거의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15] Lynch M. 2010. Rate, molecular spectrum, and consequences of human mutation. Proc Natl Acad Sci USA. 107: 961-968. [링크]
[16] Gibbs RA, and Rogers J. 2012. Genomics: Gorilla Gorilla Gorilla. Nature. 483: 164-165. [링크] : 고릴라 유전체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글이다. 필자도 이 글을 많이 참조했다. 논문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 글을 읽어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
[17] Green RE, et al. 2010. A draft sequence of the Neandertal genome. Science. 328: 710-722. [링크] : 이미 필자의 블로그에서 많이 소개한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연구 논문이다.
[18] Meyer M, et al. 2012. A High-Coverage Genome Sequence from an Archaic Denisovan Individual. Science. Published online 30 August 2012 [DOI:10.1126/science.1224344] [링크] : 얼마전에 필자가 다룬 데니소바인 유전체 연구 논문이다.

[19] Thalmann O, et al. 2007. The complex evolutionary history of gorillas: insights from genomic data. Mol Biol Evol. 24: 146-158.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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