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은 노동절(勞動節)이다. 정부와 자본가는 "근로자의 날"이라 부르며 노동절의 의미를 퇴색(退色)하려 하지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본연(本然)의 의미는 역사의 시련을 거치면서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절은 무엇을 위한 날인가? 그것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노동자가 하나 된 목소리와 단결된 연대(連帶)로 자본주의 체제의 온갖 부조리함과 억압에 저항(抵抗)하는 투쟁의 날이며,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숭고(崇高)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희생한 선배 노동자의 투쟁을 기념하는 날이다. [1] 이런 의미에서 노동절이 드러내는 상징성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노동절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오늘날 모습을 드러냈는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전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가 흔히 노동절을 부를 때 사용하는 메이데이(May Day)란 말은 원래 고대 켈트(Celt)의 벨테인(Beltane) 축제와 고대 게르만(German) 지역의 발푸르가의 밤(Walpurgis's Night)이라는 축제에서 유래한 고대 북반구에서 5월 1일에 전통적으로 치러진 봄 축제(spring festival)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2] 영국에서는 꽃과 리본 등으로 장식한 메이폴(Maypole) 주변에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메이퀸(May Queen, 5월의 여왕)'으로 뽑았고, 아일랜드에서는 모닥불을 피워 여름이 오고 긴 겨울밤이 물러나길 기원했으며, 독일 등지에서도 영국과 아일랜드와 비슷한 형식으로 봄의 도래(到來)를 축하했다. 그러나 역사의 우연인지 혹은 처음으로 메이데이를 제안한 자의 의도인지는 지금에 와서 파악할 수 없지만, 역사의 진보(進步)는 '5월 1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으니 그것은 바로 "숭고한 희생과 단결된 저항"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며, 노동자계급에 새로운 세상이 오길 기원하는 잔칫날이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절의 탄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산업혁명 그리고 노동자의 탄생

산업혁명이 한창인 18~19세기 무렵.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인류의 생산방식은 1만 년 전의 수렵, 채취 사회를 농경 사회로 전환한 장기간의 농업혁명에 맞먹는 혹은 그 이상의 파급력(波及力)을 보인 최대규모의 역사적 변화의 원동력이었다. 이런 변화는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 저지대(低地帶), 벨기에 일부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지만, 머지않아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3] 여기에는 상호연관된 일련의 기술적 진보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는 생산력의 엄청난 증대 및 인간과 상품의 이동시간 단축이라는 혁신(革新)을 낳았다. 겉으로 보기에 세상은 좋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사회적 비극도 만연(蔓延)했다. 특히 산업혁명 전에 일어난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은 영국 농촌을 급속히 해체했으며, 이 때문에 농경지를 잃은 농부 다수는 생존을 위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이 지배하는 냉혹한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헐값으로 팔기 시작했다. [그림 1] [4, 5]

 

그림 1. 산업혁명 시절 공장(왼쪽)과 노동자의 모습(오른쪽) [출처: Patrick's Topics Blog (왼쪽), Writings on History & Media (오른쪽)]


수많은 사람의 삶이 근본부터 바뀌기 시작했으며, 특히 농촌의 붕괴는 도시의 급격한 성장을 불러왔다. 생존을 위해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게 되었지만,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저임금에 기반을 두는 소규모 산업—특히 섬유산업과 광업—에서 과도한 노동착취는 다반사(茶飯事)였으며, 심지어 여성과 어린이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족의 생계를 벌기 위해, 그리고 성인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임금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작업장에 투입되어 혹사당했다. [그림 2] [6, 7] 순전히 생존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시장"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 노동자의 삶은 더욱 자본가에 종속되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노동을 팔지 못한 사람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자본가의 노동착취 또한 가혹했다. 자본에 의한 인간통제(人間統制)가 심화하면서 자본가는 노동자가 작업장에서 조직적으로 일하도록 할 규율(規律)을 만들었고, 엄격한 규율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속에서 노동자는 영혼을 잃어버린 생체기계(生體機械)가 되어가고 있었다. [8] 노동자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의 삶은 매우 비참했으며, 18~19세기까지 도시에서는 언제나 농촌보다 훨씬 높은 빈도로 각종 전염병이 유행했고, 거주 환경은 매우 열악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사망률이 출생률을 웃돌기도 했다. [그림 3] [9]

 

그림 2. 산업혁명 당시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어린이들 [출처: The Industrial Revolution]


 

그림 3. 산업혁명 당시 주거환경 모습 [사진출처: FROGBLOG (왼쪽), History Cookbook (오른쪽)]


마침내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봉건시대의 제도적인 계급차이는 자본에 의한 물질적 계급차이로 치환(置換)됐다. 봉건영주와 귀족 그리고 농노라는 계급은 완전히 소멸하거나 혹은 있더라도 유명무실(有名無實)했지만,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부르주아(bourgeois)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가지의 큰 범주로 나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계 안에서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자본이 지배하는 국가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비록 초기에는 조직적이지 못 했지만, 지배계급의 무자비한 탄압은 노동자의 조직화한 단결을 형성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저항의 구호는 다양했다. 저임금, 열악한 노동환경, 과도한 노동강도 그리고 지나친 노동시간 등 노동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철폐(撤廢)의 대상이었다. 이것 가운데 '노동절' 탄생의 산파(産婆) 역할을 한 것은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대대적인 투쟁이었다. [10] 초기에는 임금인상을 위한 투쟁이 많았다. 그러나 노동착취가 극심해지면서 노동시간 단축은 임금인상보다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으로 급부상했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 초기에 노동자 일반의 노동시간은 최고 18시간에 달했으며, 영국 맨체스터(Manchester) 부근 한 공장의 방적공은 물 마시러 가는 것조차 금지당한 채 고온의 작업장에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받기도 했다. [11] 이렇게 하루 14~18시간이라는 장시간 노동을 줄이기 위한 노동자의 투쟁은 더디긴 하지만 조금씩 결실을 보고 있었으며, "8시간 노동 운동(Eight-Hour Movement)"에 다다랐을 때 "메이데이"의 역사적 순간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날: 1886년 미국의 노동자 대투쟁과 제2인터내셔널

첫 시작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였다. "하루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프롤레타리아의 휴일 기념식(proletarian holiday celebration)"이란 아이디어가 나왔고, 1856년 4월 21일에 총파업과 더불어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사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자 지도부는 이 행사를 단 한 번만 치르기로 계획했었다. 그러나 "노동자를 위한 날"은 오스트레일리아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큰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휴일 기념식"을 매년 정기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12]

미국에서도 "하루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한 대대적인 선동의 물결이 일었고 철강, 철도, 광산 부문 등에서 공장점거와 파업 등의 격렬한 투쟁이 발생했다. [13] 원래 프랑스계 미국인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시위는 정부와 자본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5월 1일에는 단순한 시위를 넘어선 총파업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14] 하워드 진(Howard Zinn)의 글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15]

1886년 봄에 이르면 8시간 노동을 위한 운동은 이미 성장해 있었다. 5월 1일, 이제 5년째로 접어든 미국노동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은 8시간 노동을 거부하는 모든 공장에서 전국적인 파업을 벌일 것을 호소했다.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 단장 테런스 파우덜리(Terence Powderly)는 우선 고용주와 피고용인을 상대로 8시간 노동에 대해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파업에 반대했지만, 노동기사단의 모임들은 파업 계획을 세웠다. 기관사 노동조합(Brotherhood of Engineers)의 위원장은 "두 시간 덜 일하면 두 시간 더 빈둥빈둥 돌아다니고 두 시간 더 술을 마시게 된다"고 말하며 8시간 노동에 반대했지만, 철도 노동자들은 위원장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8시간 노동제 운동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전국 1만 1,562개 공장에서 35만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디트로이트(Detroit)에서는 1만 1,000명의 노동자가 8시간 노동제 행진을 벌였다. 뉴욕에서는 2만 5,000명이 브로드웨이(Broadway)를 따라 횃불 행진을 벌였는데 제빵공 노동조합(Baker's Union)의 3,400명이 행렬의 선두에 섰다. 시카고에서는 4만 명이 파업을 벌였고, 4만 5,000명이 파업 예방조치로 노동시간 단축을 얻어냈다. 시카고의 모든 철도가 운행을 멈췄고 산업 대부분이 마비됐다. 가축수용소 역시 문을 닫았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노동자 투쟁은 매우 격렬했으며 규모 또한 상당했다. 그렇지만 자본가의 반격(反擊)도 만만치 않았다. 노동자의 연대를 분쇄하기 위해 주 민병대와 경찰에게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했으며, 친(親)자본가적인 신문에서는 연일 노동자 투쟁을 비난하며 사회안정을 위해 국가와 주 정부가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5월 3일,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졌다. 맥코믹 수확기 공장(McCormick Harvester Works) 앞에서 파업파괴자 세력과 맞서 싸우고 있던 노동자와 그 동조자가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다수가 부상을 입고 4명이 죽었다. [15]

1886년 5월 4일, 맥코믹 사건에 대한 규탄(糾彈)과 8시간 노동제를 촉구하기 위한 집회가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Haymarket Square)에서 열렸다. [16] 이곳에 180명가량의 경찰이 시위진압을 위해 파견되었고 곧 '군중해산'을 명령했다. 그렇게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하는 와중에 정체불명의 괴한이 경찰을 향해 폭탄을 던져 순식간에 경관 66명이 다치고 그 중 7명이 죽었으며, 경찰이 군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한 총격으로 시민 몇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그림 4] [15, 16]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 아무런 증거도 없었음에도 경찰은 시카고 대투쟁을 이끌었던 무정부주의 지도자 8명을 체포했고, 일리노이(Illinois) 주 판사는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항소는 기각(棄却)됐다. 헤이마켓 광장의 폭탄 테러와는 아무 관련도 없었던 그들은 사상이 불순(不純)하다는 이유로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더군다나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연설을 위해 집회에 참석했던 새뮤얼 필든(Samuel Fielden) 혼자뿐이었다. [15, 16]

그림 4. 헤이마켓 사건 당시를 묘사한 삽화 [출처: World Warrior of So Cal]


이 사건은 국제적인 관심과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미국과 일리노이 주 정부를 비난하며 8명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재판이 있은 지 1년 뒤에 일리노이 주 정부는 엘버트 파슨즈(Albert Parsons), 오거스트 스파이즈(August Spies), 아돌프 피셔(Adolph Fischer), 조지 엥겔(George Engel) 등 4명을 교수형에 처했으며, 루이스 링(LouisLingg)은 감방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입에 문 채 터뜨려 자살했다. [15, 16] 사행 집행은 전 국민을 분노케 했고, 시카고에서는 수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행렬이 이어졌다. 미국 전역에서 아직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자들의 석방을 위한 대대적인 서명운동이 벌어졌으며, 결국 신임 일리노이 주지사 존 피터 올트겔드(John Peter Altgeld)의 지시로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져 남은 3명—새뮤얼 필든(Samuel Fielden), 오스카 니비(Oscar Nebee), 마이클 슈와브(Michael Schwab)—은 무사히 석방되었다. [15, 16]

헤이마켓 사건이 발생한 후 수년 간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과 법률대응으로 미국의 노동자 투쟁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1888년에 미국노동연맹은 1886년 당시의 투쟁분위기를 다시 살리기 위해 1890년 5월 1일에 대규모 투쟁을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Bastille) 함락 100주년인 1889년 7월 14일에 파리에서 열린 제2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회의(International Worker's Congress)에서 마르크스(Karl Marx)를 포함한 많은 사회주의자는 1884~1886년의 기간 동안 진행된 미국의 노동자 대투쟁에 대한 소식을 보고받았으며, 그때의 투쟁을 재개(再開)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미국 노동자의 투쟁에 고무(鼓舞)되었고, 파리 회의(Paris Congress)는 "5월 1일"을 "국제적인 대투쟁의 날(great international demonstration)"로 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미국에서 계획하고 있던 1890년 5월 1일의 8시간 노동 쟁취에 대한 적극적 지지라는 형식을 띠고 있었다. [10, 14] 그 결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작해 미국에서 결실을 본 메이데이의 전통은 12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노동자의 단결을 과시하는 역사적인 날"로 기념되고 있다. [17]

초기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개략

지금까지 노동절의 기원에 대해 살펴봤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국제적인 노동자 대투쟁의 날"로 "5월 1일"이 결정된 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시카고 총파업이 원인이었지만, 그 파급은 미국과 유럽 지역에 국한(局限)되지 않았고 노동자가 있는 곳이라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노동자 단결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의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는 급격히 무너지고 일본을 필두로 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이 본격화됐으며, 여러 제국주의 열강과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어야만 했다. [그림 5] [18] 문제는 이러한 침략과 수탈의 대상이 고스란히 조선 민중(民衆)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 탓에 땅과 생계수단을 잃어버린 농민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야만 했는데, 일부는 농촌에 남아 소작농이 되거나 지주에게 고용되어 각종 농업노동을 담당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많은 경우 터전을 떠나 도시, 개항장, 광산, 공장, 철도 건설 공사장 등으로 흘러가 본격적인 임금노동자의 삶을 살아갔다. 하지만 일본 자본가가 운영하는 작업장 대다수에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매우 심했으며 온갖 이유를 들먹이며 자주 임금을 깎아내렸다. [19, 20]

그림 5. 강화도 조약을 묘사한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조선의 노동자도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조직을 만들고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투쟁에 나선 것은 광산노동자였고, [21] 이후 여러 곳에서 산발적인 투쟁이 일어났다. 개항 5개월째인 1898년 2월 전남 목포에서는 부두노동자들이 자본가의 수탈에 저항에 파업을 벌였으며, 1901년 2월에는 경인철도회사, 1909년 7월에는 경성전기회사 등 다양한 작업장에서 노동자는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등을 내걸며 투쟁을 벌였다. [22] 파업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의 내면에는 자신을 노동자라 여기는 주체성에 대한 의식이 싹텄으며, 전술적으로도 효과적인 투쟁 전개를 위해 좀 더 조직된 저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22]

일제의 지배가 본격화할 무렵, 1920년대 만해도 대략 80여 군데의 노동단체가 조직되었으며, 1930년대까지는 그 수가 560여 개에 이르게 되었다. 초창기 노동단체 대부분은 선진적인 지식인이나 노동운동가가 주도한 지역 중심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역량이 점차 쌓여가면서 노동운동은 지식인이나 엘리트 중심이 아닌 노동자 다수에 의한 운동으로 변모(變貌)했다. [23] 1920년, 마침내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와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라는 전국 단위의 노동자 조직이 결성되었다. [24, 25] 그러나 이들 전국 조직은 총독부의 탄압이라는 외적 요인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내적 요인으로 갖가지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다가 분열하기 시작했고,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쳐서, 1922년에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農聯盟會)'를, 1924년에는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을 각각 설립했다. [26, 27]

특히 조선노동연맹회는 3.1운동 이후 산발적으로 치러졌던 노동절 행사를 1923년에 처음으로 전국적인 차원의 운동으로 추진했다.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을 주장하며 각지에서 휴업 등의 투쟁을 벌였고, 시위, 강연회, 간담회, 연설회, 전단 살포, 야유회, 산놀이, 운동경기 등을 펼쳤다. 이렇게 계급적 관점을 고수하는 전국조직으로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활발히 활동했지만, 파벌주의와 분파투쟁에 휩쓸려 투쟁역량의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26, 28] 그러나 조선노동연맹회의 맥(脈)을 잇는 전국적인 노동단체는 이후로도 계속 설립되었고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투쟁역량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노동자 투쟁은 1929년 발생한 원산 총파업(元山總罷業)에서 절정에 달했으며, 그 지속성, 강인성, 격렬성, 조직성에 있어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노동운동사에서도 보기 드문 노동쟁의였고 우리나라 노동자계급의 성장을 잘 나타낸 투쟁이었다. [31, 32] 비록 원산 총파업을 마지막으로 해방 전까지 노동자 투쟁은 당분간 침체(沈滯)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원산에서 보여준 투쟁력은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발전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그림 6]


그림 6. 원산 총파업 당시의 모습을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 [출처: 사노련]


해방 이후 노동운동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고, 한반도는 억압적인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 전 지역은 생산위축, 물가상승, 노동자 실질임금 하락, 실업자 증가 등 사회•경제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다. 특히 공업생산력은 1939년 남한 만의 생산액이 5억 2793만 5천 엔(원)이었던 데 비해, 1946년에는 1억 5219만 2천 원으로 떨어져서 감소율이 71.2%나 되었고, 심한 생산위축 속에서 물가지수(物價指數)는 해방 전과 비교했을 때 엄청나게 급등했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으로 말미암은 전시(戰時) 통제경제의 해제, 투기활동의 성행, 패전 당시 일본의 조선은행권(朝鮮銀行券) 남발과 식량수집자금 방출, 미군정의 통화 남발, 생산활동의 일시적 정지 그리고 북한지역민의 월남과 재외동포의 귀환으로 인한 인구증가 등의 원인이 더해져 1943년과 1947년을 비교할 때 사업장 수는 1만 65개소에서 4,500개소로 55.3% 감소했고, 노동자 수도 같은 기간에 25만여 명에서 13만여 명으로 무려 47.5% 줄었다. 그 결과로 1946년 남한의 실업자 총수는 110만여 명이 되었으며 물가상승과 실업률 증가는 자연히 노동자의 실질임금을 떨어뜨렸다. [33]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인 자본가가 소유했던 회사와 공장을 접수해 노동자의 손으로 직접 운영한다는 '자주관리(自主管理)'를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바탕이 되었던 것은 지금까지 일본인 아래서 땀 흘려 일해 온 공장이 자신의 것이라는 노동자의 의식이었다. 게다가 해방 후 생필품 부족으로 말미암은 전국적인 생활고(生活苦) 해결을 위해서도 이러한 노력은 필요했다. 그래서 독립과 함께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와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도 공장노동자가 공장을 접수하여 자주적으로 관리하도록 추진했다. [34] 그리고 미군정이 들어선 후, 대중적 조직기반의 중요성을 인식한 좌익세력은 노동조합을 적극 조직했고, 1945년 11월 5~6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해방 후 첫 전국적 노동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이하 전평)이 결성되었다. [35] 그러나 미군정과 전평 사이의 대립은 여러 부분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의 결렬과 "정판사 위폐사건(精版社僞幣事件)"을 계기로 급속도로 악화하였다. [36, 37]

전평이 결성되고 사회주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우익진영에서도 1946년 3월 10일에 대한독립촉성노동총동맹(大韓獨立促成全國勞動總同盟, 이하 대한노총)을 결성했으며, 이후 대한노총은 미군정의 절대적인 지원과 우익세력의 비호 아래 조직을 늘리면서 전평의 투쟁과 활동을 분쇄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섰다. [36, 38] 이에 맞서 전평은 1946년 9월 제1차 총파업, 1947년 3월 제2차 총파업 그리고 1948년 2월 제3차 총파업으로 미군정과 우익세력에 대항했으나 미군정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붕괴 직전까지 몰렸고, 1948년 5월 남조선 단선단정 반대투쟁 총파업위원회를 구성하여 마지막 저항을 했으나 경찰, 청년단체, 대한노총의 기민한 진압작전으로 완전히 분쇄되었다. [39]

일련의 노동운동 패배와 해방 이후 민중의 참혹함 가운데서도 지주와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미국과 유엔 등을 통해서 원조받은 물자를 대중 일반에게 배분하거나 침체된 한반도의 경제상황을 일으키는데 사용하기는커녕 대부분 위정자(爲政者)의 잇속을 채우는 데만 이용했으며, 일본인의 재산으로 한국에 남아 있던 '귀속재산(歸屬財産)' 또한 거의 헐값으로 권력과 가까운 자, 식민지시대부터 연고를 가진 상공인, 식민관료 등 친일인사와 자본가계급에 넘겨줬다. 설령 "유상매수 유상분배" 원칙에 따라, 운 좋게 농민이 귀속재산이었던 농지를 분배받았다 하더라도, 여러 경제적 어려움으로 또다시 소작인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40, 41]

노동절 행사도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에 의해 탄압받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후 전평은 1946년 20만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노동절 기념식을 치렀지만, [26] 1947년 3월 제2차 총파업 이후 개최한 노동절 행사는 미군정의 좌익세력 불법화와 이승만 정권의 반공 국시로 말미암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42] 게다가 제3차 총파업이 실패로 끝나고 극심한 탄압으로 좌익진영이 와해되어 지하로 숨어든 이후, 좌익진영이 주최하는 노동절 행사는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하지만 우익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대한노총의 노동절 기념행사는 독재정권을 찬양하는 충성대회로 변질되고 말았다.

노동절 수난사 (1): 대한노총의 생일이 된 노동자의 날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엄청난 물적·인적 손실을 낳은 참혹한 전쟁으로 진보적 노동운동 세력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의 총아(寵兒)를 이끌 중심이 아닌, 이승만 정권의 들러리이자 충실한 나팔수로서 대한노총(大韓勞總)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렇지만 전쟁의 와중에 그나마 그들이 이끌 수 있는 노동자 수는 예전보다 상당히 줄어있었다. 결국 할 일 없는 어용 노총이 관심을 쏟아 부은 것은 이승만 정권에 대해 충성을 다하는 '정치꾼' 놀이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공금횡령은 예삿일이나 마찬가지였고, 파벌싸움은 끊이질 않았다. 말 그대로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연속이었다.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에도 이들의 행태는 변함없었고, 전쟁과 전쟁 중에도 여전했던 정부와 자본가의 수탈에도 대한노총은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며, 결국 (비록 어용일지언정) 그나마 남아 있던 대한노총에 대한 노동자의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43] 수난(受難)을 겪은 것은 노동절 역시 마찬가지였다.

1957년 5월 1일 노동절 기념식이 끝난 후였다. 이 날 치른 메이데이 행사는 "노동자를 위한 날"이 아니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한노총의 이승만에 대한 충성대회였지만, 상황은 한 편의 촌극(寸劇)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같은 해 5월 22일, 이승만은 "메이데이는 공산괴뢰도당들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는 날이니 반공하는 우리 대한의 노동자들은 메이데이와 구별되는 참된 명절을 제정하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상식적인 노조였다면 이승만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결사적으로 반대했을 것이다. 설령 어용이라도 대외적인 이미지를 고려한다면 표면적으로나마 "이승만의 궤변"에 유감(遺憾) 정도의 입장은 표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노총의 행동은 일사분란(一絲不亂)했다. 이승만에 대한 충성에 목 말랐던 대한노총 지도부는 곧바로 대의원대회의 결의를 열어 노동절을 대한노총의 창립일인(1946년 3월 10일)인 3월 10일로 변경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보사부(保社部)의 인준을 거쳐 1959년 3월 10일부터 (이승만 정권의 '국시(國是)'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제1회 노동절 기념행사가 열리게 됐다. [44, 45, 46] 노동절의 수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름으로라도 명맥을 지키고 있었던 노동절은 박정희 개발독재로 그 정체성마저 부정당했다.

노동절 수난사 (2): 창씨개명 당한 노동절 

박정희 독재체제에서 노동절은 1963년에 "근로자의 날"로 바뀌었다. 노동자의 날에서 더는 노동자의 주체성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근로자의 날"로 철저히 왜곡된 정치 선전에는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온 몸바치는 산업전사만이 홀로 존재했다. [47] 왜 박정희 정권은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바꿨을까? 그 이유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우선 한국의 노동자 문화가 어떤 역사적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좀 길기는 하지만 구해근의 논의(論議)를 요약해보도록 하자.

많은 학자가 지적하듯이 유럽에서는 길드(Guild)와 장인문화 전통이 산업변화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대응과 의식발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한반도에는 (적어도 조선 시대에는)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 개항 전까지 노동자의 의식발달에 영향 줄 만한 제대로 된 장인문화적 유산이 없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47] 19세기까지 한국에서 장인계층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48] 조선 시대에 장인 다수는 지배층이 필요로 하는 물품—필묵, 특수의복, 사치품 등—의 생산을 위해 고용됐다. 게다가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적 신분체계에서 장인과 상인은 농민보다 낮은 층에 속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상공업 활동이 활발해졌을 때, 장인은 상인보다 훨씬 더 세상의 변화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응했다. 예를 들어, 보부상과 이름 있는 상단은 전국적인 연결망을 갖추어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장인계층은 이 시기의 상인계층에 견줄만한 유의미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49] 그리고 일제 치하 한반도에서 다양한 형태의 임금노동자가 출현했지만, 전국적인 현상은 아니었으며 근대적 의미에서 노동자에 부합(符合)하는 집단의 출현은 일부 공업지역에 국한해 있었다.

이런 역사적·사회적 배경 속에서 개항 이후 한국의 노동자 1세대는 처음으로 근대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를 경험했다. 유럽과 같은 "노동자계급이라는 자부심" 대신 이들은 공돌이·공순이라는 명칭이 반영하는 부정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산업화 초기에 공장노동자는 노동자, 공장노동자, 공원, 근로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산업화가 계속 진행되고 공장노동자 수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정부와 자본은 산업노동자를 지칭하기 위한 공식용어로 '근로자'를 전국에 보급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부르게 했다. 그런데 근로자라는 말은 육체노동자, 비(非)육체노동자, 기술자 등 모든 종류의 피고용자를 가리키는 대단히 폭넓은 용어였다. [49, 50] 반대로 노동자는 (근대적 의미에서) 구체적으로 공장노동자 혹은 육체노동자 일반을 뜻하며, 이 안에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장인에 대한 부정적 함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1970년대 말 노동자계급의 정체성이 발달하기 시작할 때까지도 한국의 공장노동자는 자신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정의할 적절한 용어를 갖지 못했다. [51]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개발 독재정권은 이제 막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려는 노동자계급에 정체성을 각인시킬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그 이름은 '근로자'란 말로 일반화되었지만, 그것을 꾸미는 미화하는 수사(搜査)는 실로 다양했다. 1960년대 말부터 산업전사, 산업의 역군, 수출의 역군, 수출의 기수와 같은 새로운 단어들이 등장했다.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성장주의 그리고 군대식 수사가 절묘하게 결합한 이 새로운 명칭은 수출증대를 국가의 제1목표로 하는 개발독재 국가에 있어 '근로자'로 탈바꿈한 노동자를 국방을 위해 싸우는 군인과 동일시하는 메타포(metaphor)나 다름없었고, 그에 걸맞게 수출촉진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는 애국자라 칭송받았다. [51] 이렇게 남한에서 노동절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날짜를 빼앗기고,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는 이름마저 바뀌는 두 번의 치욕(恥辱)을 겪었지만, 북한에서도 노동절 처지는 김일성·김정일 세습 독재체제의 선전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남한과 마찬가지다.

다시 찾은 노동절: 미완의 승리

박정희가 죽음으로 새로운 세상이 도래(到來)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두환과 노태우를 핵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은 12·12사태를 일으켜 정권을 움켜잡고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난 광주민중항쟁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짓밟음으로써 한국사회는 또 한 번의 살벌한 겨울을 맞이하게 됐다. [52] 하지만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봄도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광주민중항쟁이 군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된 이후 민주화운동은 한동안 침체했다. 그러나 1970년대를 통해 급성장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은 여러 시행착오 끝에 하나의 통일된 전선운동으로 발전하여 전두환 정권의 1987년 공표된 4·13호헌조치를 분쇄하고 대통령직선제를 관철했다. 특히 이 시기에 일어난 여러 가지 굵직한 사건들—예를 들어,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사건,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치사사건—은 역사적인 6·10 민주화운동이라는 반정부·반독재 투쟁을 급격히 고양(高揚)했다. 이러한 민중의 대대적인 투쟁은 결국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의 6·29선언을 이끌어냈고, 수십 년에 걸친 군사독재의 어두운 그림자는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53]

민중 일반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도 저항의 물결에 동참했다. 노동운동의 불모지로 일컬어지던 거대재벌의 사업장—울산 현대중전기, 현대자동차, 현대엔진, 창원 대우중공업, 옥포 대우조선—에서 자본과 독재에 대항하기 위한 집단행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대기업에 일하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 중소기업에서 일하던 노동자 또한 마찬가지로 이러한 저항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54] 이때 노동자는 1987년 6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 총 3,311건의 노동쟁의를 일으켰고, 그 가운데 97.7%인 3,235건은 파업이었다. 여기에 참가한 총인원은 약 122만 5,830명이었다. 훗날 '노동자대투쟁'이라 불리는 거대한 투쟁의 시작은 7월 5일 울산 현대엔진 노동자의 노조결성과 파업투쟁이었으며, 동남지역의 거대 공업단지인 울산을 기점으로 마산, 창원, 부산, 광주, 대구, 대전을 거쳐 경인지역으로 빠르게 확산했다. [55] 전두환 정부 말기에 경찰력을 동원한 극심한 탄압이 있었지만, 노동자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발적인 대중투쟁을 지속하여 종래 국가와 자본이 구축한 억압적 통제체제를 깨뜨리고 운동 영역을 확장했다. [56]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국의 작업장에서 기존의 친(親)자본가적인 한국노총(韓國勞總)과 구분되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노조 설립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노동자대투쟁과 민주화운동 전후로 해서 새로 설립된 노조는 민주적이고 노동자의 주체성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전국노조 설립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노동자의 날"을 되찾기 위한 대규모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89년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전국 5천여 명의 노동자가 연세대학교에 모였다. 이 곳에서 노동자는 1886년 시카고 대투쟁 이후 제2인터내셔널의 발의로 시작된 제100주년 노동절 행사를 거행했고, 노동절의 날짜와 이름을 독재정권에게 유린당한 지 실로 수십 년 만에 노동자는 이승만 정권에 빼앗겼던 5월 1일을 되찾았다. 노동절을 되찾고자 하는 노동자의 염원(念願)과 열광적인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90년에는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서울대학교에서 3천여 명의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했으며, 전국 각지의 노조에서 노동절 기념식이 열렸고, 1991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3만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의 노동절 대회와 함께 전국 14개 지역에서 10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세계노동절대회가 개최되었다. [1]

1994년 김영삼 정부는 마침내 "노동자의 날"을 대한노총 설립일인 3월 10일이 아니라 제2인터내셔널이 "노동자 대투쟁의 날"로 선언한 5월 1일로 변경할 것을 골자로 하는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통해 유급휴일로서 5월 1일에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1, 57] 진정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진영이 정부의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얻어낸 결과였다. 이리하여 노동자는 해방 후 국가와 자본가에 의해 유린당한 노동절을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았다. 바로 우리의 이름을 되찾는 것—근로자와 근로자의 날로 불리는 노동자와 노동자의 원래 이름을 되찾는 것—이다.



참고문헌
[1] 금속노조 교육원. 2010년. 노동절의 유래 및 120주년 노동절 기념대회. [링크]
[2] May Day. 위키피디아 영어판. [링크]
[3]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Chris Harman)/천경록 옮김. 책갈피. 2005년. 412~413쪽.
[4] 같은 책. 280쪽, 308쪽, 413쪽.
[5]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Leo Huberman)/장상환 옮김. 책벌레. 134~139쪽, 206~209쪽. : 인클로저 운동은 영국에서 두 번 일어났다. 16세기에 일어난 첫 번째 인클로저 운동은 촌락(村落) 인구의 감소로 조세수입(租稅收入)이 줄어들 것을 걱정해서 1489년에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18세기에서 19세기 초반에 일어난 두 번째 인클로저 운동은 합법으로 인정되어 농민에게 치명타를 안겨주었다.
[6] 『민중의 세계사』. 414쪽.
[7]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144쪽, 149~150쪽, 224~226쪽.
[8] 『맑스주의 역사 강의』. 한형식. 그린비. 27~28쪽.
[9] 『맑스사전』. 마토바 아키히로 외 3인 엮음/오석철, 이신철 옮김. 도서출판 b. 43~44쪽. : 산업화로 인한 도시로의 과잉 인구유입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농촌보다도 극심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도시 정비로 인해 사망률은 훗날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10] Alexander Trachtenberg. 1932. The History of May Day. Marxists Internet Archive. [링크]
[11]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223쪽.
[12] Rosa Luxemburg. 1894. What Are the Origins of May Day? Marxists Internet Archive. :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노동자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처음 시작되었다고 언급한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유일하다. 다른 문헌은 (전부 다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시작한 "노동자의 날"만을 언급했다. [링크]
[13] 『민중의 세계사』. 511쪽.
[14] 『세계 노동운동사 I』. W. Z. 포스터(William Z. Foster)/정동철 옮김. 백산서당. 1986년. 151~152쪽.
[15] 『미국 민중사 1』. 하워드 진(Howard Zinn)/유강은 옮김. 이후. 2008년. 462~467쪽.
[16] Haymarket affair. 위키피디아 영어판. [링크]
[17] 『맑스주의 역사 강의』. 132쪽.
[18]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교수의 현대사 강의』. 강만길. 1999년. 15쪽. :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룬 일본에서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하야한 후 들어선 민씨 정권을 상대로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켜 강압적으로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했다. 그 결과 일본은 부산, 인천, 원산을 개항시키고 자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쌀과 면직물 교환 중심의 무역을 전개함으로써 한반도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19]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36~37쪽.
[20]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조선 출신의 자본가나 다른 나라 출신의 자본가도 일본인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임금노동자를 수탈했다.
[2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39쪽. : 문헌상 기록된 최초의 노동자 투쟁은 1888년 함경도 초산(楚山)에서 일어났다. 가혹한 세금과 핍박에 분노한 광산노동자들이 관청을 습격하고 관리들을 징치(懲治)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 폭동은 정부에서 안핵사(按覈使)를 보내서야 비로소 진정되었다. [안핵사: 조선 시대, 지방에 어떤 일이 터졌을 때에 그 일을 조사하려고 보내던 임시 벼슬]
[22] 같은 책. 41쪽.
[23] 같은 책. 65~66쪽. : 이원보가 밝혔듯이 이것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이원보는 "조선총독부가 의도적으로 노동운동을 폄하하거나 축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라며 당시 노동조합의 수는 이것보다 더 많았으리라고 추측한다. 나도 실제 노동조합의 수가 더 많았으리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은 조선총독부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이유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자료수집과정에서 발생한 단순한 집계 상의 누락 때문이 아닐까라도 생각하는데, 총독부는 그 나름대로 본국에 사실관계를 제대로 알릴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본다면 의도적 축소도 배제할 수는 없다.
[24]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 파란 사전. [링크]
[25]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네이버 백과사전. [링크]
[26]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67~73쪽.
[27]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링크]
[28] 금속노조교육원의 자료와 [1] 2001년 MAY-DAY 행사자료에는 [29] 조선노동총연맹이 1923년에 한반도에서 전국적인 노동절 행사를 처음 개최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시기상으로 봤을 때 조선노동총연맹은 1924년에 결성되었으므로 이원보와 하종강이 언급한대로 [26, 30] 조선노동연맹회가 처음으로 전국적인 노동절 행사를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9] 한국 노동절의 역사. 2001 May-Day [링크]
[30] 하종강. 2007년. '노동절'과 '근로자의 날'. 미디어 오늘. [링크]
[3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77~84쪽.
[32] 원산 총파업(元山總罷業). 파란 사전. [링크]
[33] 『고쳐 쓴 한국현대사』. 강만길. 창비. 2006년 2판. 475~476쪽.
[34]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112쪽.
[35]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링크]
[36]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117~118쪽.
[37] 정판사 위폐사건(精版社僞幣事件).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링크]
[38]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大韓獨立促成全國勞動總同盟).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링크]
[39]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123~130쪽.
[40] 『고쳐 쓴 한국현대사』. 397~398쪽.
[4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137~141쪽.
[42]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2쪽.
[43] 『우리나라 노동운동사』. 노민영. 현장문학사. 1990년. 110쪽.
[44] 같은 책. 112쪽.
[45] 『세계 노동운동사 I』. 152쪽. : 미국도 보수적인 미국노동총연맹(AFL)이 5월 1일 대신 9월의 첫째 월요일을 노동자의 날로 결정했다. 자세한 것은 위키피디아의 "Labor Day"를 참조하라. [링크]
[46] 1955년 2월 7일 개정된 정부조직법(법률 제354호) 제13조 및 제23조에 따르면 "보건사회부 장관은 의무·방역·보건·위생·약무·구호·원호·부녀문제와 노동에 관한 사무를 장리한다"라고 되어 있다. [링크]
[47]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신광영 옮김. 창작과비평사. 2002년. 205~206쪽. : 구해근의 설명에 따르면 "유럽에서 장인 집단의 특정 상황에 대한 반응은 경제적이기보다는 사회적·도덕적이었다. 그들은 협소한 경제문제보다 장인직업의 독립성, 장인정신에 입각한 노동, 그리고 도덕적으로 규제되는 직업관계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것은 유럽 장인들의 노동이 단체규칙과 규율에 따라 규제되고 사회적 관계의 친밀한 네트워크와 공동체적 정서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직업공동체로부터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화에 집단으로 강력하게 대응하기 위한 물질적 사회적 인적 자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라고 한다.
[48] 그들이 조선 시대 경제 성장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도 경제활동에서 상인·농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중요한 축을 이뤘다.
[49]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206쪽.
[50] 노동(勞動)은 "몸을 움직여 일하거나 혹은 육체와 정신을 써서 일하다"를 뜻하고, 근로(勤勞)는 "힘을 들여 부지런히 일함"을 뜻한다. 이와 연관해서 노동자(勞動者)는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임금을 받아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을 말하지만, 근로자(勤勞者)는 단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뜻할 뿐이다. 그럼에도, 사전 대부분에서는 국가가 정한 의미 그대로 근로자의 뜻을 노동자의 그것과 비슷하게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의 대가로 받는 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51]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206~207쪽.
[52] 『고쳐 쓴 한국현대사』. 364~369쪽.
[53] 같은 책. 369~376쪽.
[54]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318~320쪽.
[55] 같은 책. 331~333쪽.
[56] 같은 책. 334쪽.
[57] 근로자의 날 제정. 국가기록원.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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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11년 즈음 안철수 교수(이하 안 교수)와 박경철 씨는 여러 곳에서 청춘콘서트를 진행했다. 콘서트의 주 대상은 한국사회의 청년이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연령층이 이 시대의 귀감(龜鑑)인 안 교수에게 지혜(智慧)와 조언(助言)을 얻기 위해 참석했다. 본인이 서식(?)하고 있는 포항공대에서도 2011년 4월 26일 <기업가 정신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안 교수의 강연회가 열렸는데, 강연에 참석한 지인(知人)의 말을 빌리자면 “기업가 정신에 관한 내용은 별로 없었고, 주로 안 교수 자신이 겪어온 의사로서의 인생,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와 안철수 연구소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얻은 CEO로서의 경험, 그리고 KAIST 등지에서 얻은 교육자로서의 느낌 혹은 배운 점 등을 자신만의 진솔(眞率)한 방식으로 풀어나갔다”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지인의 주관적인 판단이므로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듣고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안 교수는 청춘콘서트 및 이와 유사한 형태의 다양한 강연을 통해 “대한민국의 위대한 멘토(mentor)”라는 칭호(稱號)에 걸맞은 교양과 친근함이 가득한 화법(話法)으로 많은 사람에게 주옥(珠玉)같은 화두를 던졌다.

그런데, 최근 안 교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불거지고 있다. 그 중 일부는 그의 반대파가 안 교수의 명성(名聲)에 흠집내려는 의도가 있지만, 어떤 것은 그의 최근 발언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대한 것도 있는고, 이것과는 별개로 안 교수 자신의 처신(處身) 혹은 안이한 대응(對應)이 원인이 되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무엇이 문제인지 본격적으로 파헤쳐보자.

때는 2011년. 장소는 가톨릭 상지대학교. 이곳에서 안 교수는 (분위기는 시골의사이지만 사실은 대한민국 모든 쁘띠 부르주아[petit bourgeois]의 로망인) 주식박사(株式博士) 박경철 씨와 함께 <세계적인 석학 안철수 교수와 시골의사 박경철과 함께하는 청년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콘서트를 개최했다 [1] [2].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는 별로 관심 없다. 그렇지만 그 강연에서 유달리 나의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안 교수와 박경철 씨 바로 뒤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문구(文句)로 강연의 제목이기도 한 “세계적인 석학 안철수 교수”라는 표현이다 [그림 1]. 안 교수에게 ‘세계적인 석학’이란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온당한지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그림 1. 가톨릭 상지대에서 열린 안 교수와 박경철 씨의 대담. [사진출처: 하리와 솔뫼 블로그]



여기서 ‘석학’의 뜻을 살펴보자. 석학(碩學)은 "학식이 높고 학문적 업적이 뛰어난 학자"를 일컫는 말이다 [3]. 그러니까 ‘석학’ 정도의 직함(職銜)은 해당 분야에서 오랫동안 몸담았고 일련의 연구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인정할만한 두드러진 업적을 이룩한 ‘위대한 학자’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학문적 명예(名譽)라고 할 수 있다. 연구소, 회사 혹은 관공서 등 공식적 기관에 단순히 적(籍)을 뒀다고 해서, 혹은 아무리 세상에 이로운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석학’이란 칭호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해서 내가 그들을 폄하(貶下)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분야에서 나름의 명예로운 호칭이 존재할 것이다) 남들(특히 동종학문 종사자)이 인정할만한 학문적인 업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뛰어나고 현명한 자라 할지라도 ‘석학’이란 칭호를 거머쥘 수 없다. ‘세계적인’과 같은 수식어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의 동료 학자가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역시 ‘세계적인 석학’이란 명예로운 직함은 마음대로 갖다 붙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노엄 촘스키(Avram Noam Chomsky)를 세계적인 석학이라고 부르지만, 단순히 그가 사회적 발언을 많이 했기 때문에 혹은 여러 분야에서 주옥같은 책을 많이 썼기 때문에 그리 부르진 않는다. 사람들이 그를 ‘석학’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가 언어학(言語學, philology)에서 학문적으로 지대한 공헌(貢獻)을 했기 때문이며 실제로 그의 언어학 연구는 많은 동료학자에게 수없이 인용된다 [4].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며, 2008년 서울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한 이후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김수행 선생은 박영호, 정운영 교수와 함께 대한민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1세대로 한국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이 설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현재도 왕성한 연구 및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5]. 최장집 선생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의 진보적 정치학자인 최장집 선생은 의회주의 정치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고 그의 학문적 논의를 확장하기 위해 최근에는 막스 베버(Marx Weber)를 연구하는 왕성함을 보이고 있다 [6]. 마지막으로 김빛내리 교수의 예를 살펴보자. 그도 앞의 두 노(老)학자와 마찬가지로 micoRNA라는 생물학의 한 분과(分科)에서 자신의 학문 분야에서 놀랄만한 성과를 이루어냈으며, 최근에는 그의 연구성과는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져 ‘석학’이라는 칭호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학문적 업적을 세우고 있다 [7]. 이처럼 ‘석학’으로 인정받는 인물은 한결같이 자신의 분야에서 학문의 진보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그림 2].


그림 2. 석학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노엄 촘스키, 김수행 선생, 김빛내리 교수, 최장집 선생. 이와 같은 사람들이 진정한 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서울대, 경향신문]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안 교수에게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칭호는 과연 온당한 것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안 교수가 과연 자신의 분야에 어떤 이바지를 했는지 확인해본다면 바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안 교수의 학문적 업적은 어느 정도일까? 현재까지 확인한 바로는 안 교수가 참여해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논문은 단 세 편뿐인 것으로 알려졌다(안 교수를 흠집 내기 위해 열과 성의를 다하는 수꼴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89]. 물론 “학문적인 공헌이 있어야만 꼭 세계적인 석학이란 칭호가 붙는 것은 아니다”라며 반박할 수도 있다 [10]. “안 교수 덕분에 한국의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발전이 있었는데 세계적인 석학이란 칭호를 붙이는 것이 뭐가 문제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안 교수가 설립한 안철수 연구소는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연구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것도 최근에는 말이 많다 [11]. 조금 더 비약해서 예를 든다면 안 교수를 존경하는 어떤 인물은 이런 식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안철수 같은 존경 받는 사람이 무려 서울대에서 교수도 재직 중인데, 그런 훌륭한 사람을 석학이라 부르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굴 석학이라 불러야 하느냐?” 물론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진짜 존재한다면 이건 완전한 억지 그 자체다.

그러나 애석한 일이지만, 그 어디에서도 학문적 성과 없이 단지 명망(名望)이 있거나, 많은 이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또는 사회적 공헌이 크다 해서 특정인에게 ‘석학’이란 칭호를 아무렇지 않게 붙이진 않는다. 안 교수가 한국에서 초창기 백신 프로그램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안 교수에게 ‘석학’이란 칭호를 붙이게 할만한 정당성을 부여해주지는 않는다.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이유를 억지로 갖다 붙인다면 우리는 빌 게이츠(Bill Gates)나 스티브 잡스(Steve Jobs) 같은 사람에게도 마땅히 ‘석학’이란 칭호를 붙여야 하며, 심지어는 이건희 같은 악덕 자본가에게도 ‘석학’이란 칭호를 붙여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물론 이건희를 언급한 것은 개그나 다름없다. 아니면 악몽이거나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 강연에서는 안 교수에게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칭호를 붙였을까? 그리고 안 교수는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명예’를 과감히 거절하지 않았을까? 우선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대단한 직함이 안 교수 본인의 의사(意思)와는 상관없이 주최 측이 더 많은 청중(聽衆)을 끌어들이려는 방편으로 안 교수와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안 교수 본인도 “좋은 게 좋은 거다”라든지 혹은 “마음에 안 들지만 주최 측의 체면을 구기는 짓은 할 수 없다”란 생각으로 잠자코 입 다물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부적절한 직함의 사용이 상지대에서만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청중을 끌어들이기 위함이라고 해도 부적절한 직함의 사용은 결국 청중을 기만하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는 사기행위(詐欺行爲)와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안 교수 본인이 양심적인 지식인이라면 이러한 눈 가리고 아웅 식의 기만(欺瞞)은 한사코 막았어야 했다 [12]. 그리고 이런 일이 이번 한 번뿐만은 아니었다. 2010년 3월 16일 오후 3시 조선대학교 자연과학대학 4층에서 열린 청춘콘서트를 포함한 몇 차례의 강연에서도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 [13] [그림 3].



그림 3. 조선대에서 개최된 안 교수와 박경철 씨의 대담 중 한 장면. [사진 출처: 서울포스트]



더 큰 문제는 안 교수에 대한 이런 기만에 대해 소위 진보언론이라 일컫는 쪽에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4]. 사실상 무관심이나 외면에 가깝다. 오로지 안 교수의 명성(名聲)을 흠집 내기에 바쁜 극우보수(내지 수꼴)만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진실로 이런 일이 잘못된 판단과 근거 없는 맹목적 믿음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면 누군가 (특히 진보진영에서) 나서서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현실에서 안 교수의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기만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수꼴 뿐이다. 욕을 먹는 것이 두려운 것인가? 아니면 안철수라는 보수층에 대한 강력한 대항마(對抗馬)를 잃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가?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안 교수에게 어떤 판타지를 품고 있는 것인가? 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오직 내가 지금 상황에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논란의 중심에서 적극 해명해야 할 당사자(즉 안 교수)는 함구(緘口)하고 있을 뿐이고 [15], 친 안 교수 성향을 보이는 진보언론은 이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진보매체라는 곳에서 ‘세계적인 석학’이란 손발이 오그라드는 직함을 아무렇지 않게 안 교수에게 붙이고 있는 실정이다.

안 교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나를 이런 식으로 비난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 “이런 수꼴이나 하는 패악질을 소위 좌파라는 당신이 왜 들쑤셔서 분란(紛亂)을 일으키느냐” 혹은 “이런 식의 당치도 않은 흠집 내기는 안 교수의 명성과 도덕성을 깎아내리는 행동이며, 종국엔 수꼴 좋은 일만 해주는 격이다. 그러니 좋은 말할 때 그만둬라”라는 파쇼적 발언으로 나에게 협박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는 것, 마치 팔이 안으로 굽듯이 우리 편 일이라면 그릇된 진영논리(陣營論理)는 당장은 훈훈한 미담(美談)인 양 인구에 회자(膾炙)하겠지만, 혹은 그런 식으로 논의를 회피하거나 그냥 모른 체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언젠간 피할 수 없는 반작용으로 우리(혹은 안 교수에게 열광하는 진영)에게 돌아올 것이다. 

어쨌거나 2012년 들어서 안 교수와 관련된 촌극(寸劇)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지만, 안 교수에게서 어떠한 해명도 나오지 않는 지금 강용석을 비롯한 소아병적인 수꼴의 난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안 교수 본인이 모든 사람이 인정하듯 진정한 양심인 혹은 지식인으로 자신을 내세우고 싶다면 말로만 그럴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명예스러운 직함의 분별없는 사용이라는, 어찌 보면 정말 사소한 것에서조차도 상식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석학’이란 소리 한 번 듣기 위해 돈도 안 되는 보잘것없는 연구에 자신의 일생을 갖다 바치는 한국의 수많은 '연구 덕후'를 위해서라도 그런 어처구니 없는 행동은 가급적 자제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내 이야기는 절대로 전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리고 이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걱정(?)에 내 마음은 공허함만 가득하다.

추신 #1:
그러고 보니 나는 오늘도 쓸데없는 일에 피 같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아, 안철수.
추신 #2:
앞에서도 계속 얘기했지만, 진보진영은 자기편 일이라고 숨기거나 외면하지 말고 제발 비판할 것은 비판해라. 내가 언급한 이런 일이 가당치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이 하나 둘 쌓이다보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추신 #3:
글 말미에 '연구 덕후'에 관해 언급했는데, 연구 덕후들은 돈도 안 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그중에는 안 교수가 거의 거저 먹기식으로 획득한 "세계적인 석학"이란 명예를 획득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안철수 그가 정말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런 식으로 저 대단한 직함을 순전히 날로 먹는다면 한국의 연구 덕후들은 정말로 절망과 상실감에 슬퍼할지도 모른다. (농담이다).
추신 #4:
이런 글을 썼다고 나를 수구꼴통으로 오해할 사람이 있을 것 같기에 노파심에서 한 마디 하겠다. 나는 정치적으로 좌파, 즉 사회주의자다. 물론 이렇게 내 정체성을 밝힌다고 믿어줄 사람은 없을 것 같지만 (-_-;;).



참고
[1] 세계적인 석학 안철수 교수와 시골의사 박경철과 함께하는 청년의 미래 특별대담. 하리와 솔뫼 블로그. [링크]
[2] 강용석, '찰스의 거짓말' 시리즈로 안철수 '공격'. 머니투데이. [링크] : 머니투데이에서 송고하고 야후코리아(Yahoo! Korea)에 올라온 이 기사는 요새 (조소적 의미에서) 개그맨보다도 더 웃긴 이제는 끈이 떨어지다 못해 더는 정치적으로도 재기 불가능한 강용석의 안 교수 씹기를 다루고 있다. 아무리 개연성 있는 이야기도 개망나니가 설치면 건설적인 비판이 될 수도 있는 이슈도 온갖 악의(惡意)가 넘쳐나는 시기 어린 질투(嫉妬)로 변하고 만다.
[3] ‘석학’을 영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a man of great learning”, “an erudite scholar”, 혹은 “a great scholar” 석학이 누구에게 주어지는 칭호인지 감이 오는가?
[4] 노엄 촘스키.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링크] : 영어가 좀 된다면 위키피디아 영어판도 좋다. [링크]
[5] 김수행.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링크] 김수행 선생의 <자본론>은 강신준 교수의 <자본>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마르크스 저술의 번역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 제대로 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내는 몇 안 되는 노(老)학자이다.
[6] 최장집.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링크]
[7] 김빛내리 교수 초청 제 62회 한림석학강연 개최. 한림원. [링크] 김빛내리 교수의 연구는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해당분야에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링크]
[8] 확인한 바로는 안 교수가 참여한 논문은 다음과 같다. <1> Kim KH, Ahn CS, Kim WG. Relationship of Plasma Potassium and Hydrogen Ion Concentrations in Acidosis-Induced Hyperkalemia and Hyperkalemia-induced Acidosis. The Seoul Journal of Medicine, Vol 34 No 2, June 1993. <2> Han J, Leem C, Ahn C, So I, Kim E, Ho W, Earm YE. Effect of Cyclic GMP on the Calcium Current in Rabbit Ventricular Myocytes. The Korean Journal of Physiology, Vol 27 No 2, Dec 1993. <3> 안철수. 의료인의 컴퓨터 활용범위. Journal of the Korean Medical Association (대한의학협회지), Vol 36 No 12, Dec 1993.” 이 정보는 불행히도 강용석의 블로그에서 퍼왔다. [링크]
[9] 안 교수가 재직 중인 디지털융합정보학과의 홈페이지를 살펴봐도 안 교수의 연구업적을 가늠할 수 있는 논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게재되어 있지 않고, 오직 그가 저술한 책에 대한 정보만 가득할 뿐이다. [링크]
[10] 이와 비슷한 의미에서 “학문적 업적이 있어야만 꼭 교수가 되고 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는가”라는 반문도 할 수 있다. 나도 꼭 학문적 업적이 있어야지만 교수가 되고 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학문 외적인 부분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사람만이 드러낼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 분명 존재하며 그런 면이 대학교육에 반영되었을 때 또 다른 시너지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러나 내가 논의하고 있는 부분은 그것이 아니다. 이 글은 “안철수 개인이 교수가 되는 것에 대해 반박하는 것이 아닌, 그에게는 과분한 칭호를 아무런 맥락 없이 갖다 붙이는 행위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한다.
[11] 세계 백신업계의 2류, 안철수 연구소의 현주소. SkepticalLeft. [링크] : 개인적으로 스렙에서 논의되는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불행히도 (그것이 사실이든 혹은 거짓이든 간에) 이런 논의와 의혹에 대해 소위 진보언론이란 곳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듯하다. 아마 안철수 개인에 대한 무한한 믿음 때문인 것 같은데, 그 이외에 다른 이유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요새 안철수를 띄우는 것을 보면 막연히 ‘황우석’이 떠오를 뿐이다. 이 기사는 <미디어 워치>같은 황색언론에서도 다루어졌는데, <미디어 워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면 ‘변희재가 발행인으로 등록된 언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된다.
[12] 안철수, 공익 앞장서는 상식·참여·실천주의자. 파이낸셜 뉴스. [링크] : 잘 알려있듯이 안 교수는 여러 매체 및 강연을 통해서 "보수와 진보가 아닌 상식과 비상식으로 나눠야 한다"고 언급해왔다.
[13] 세계적인 석학 안철수 교수와 시골의사 박경철의 리더십 대담. [링크]
[14] 몇 번을 검색해봤지만, 진보매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비판도 하지 않는다. 사실 진보매체에서 나오는 안 교수에 대한 평은 ‘호평(好評)’ 일색이다. 혹시라도 안 교수를 비판한 진보매체 혹은 기사가 있다면 나에게 알려주시길 바란다.
[15] 애석하게도 이런 논란에 대해 안 교수는 아직도 잠잠하다. 언제 해명하려는지?






Posted by 메타스 metas 트랙백 0 : 댓글 4
요새 졸업 때문에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바쁘다. 문제는 연구뿐만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기 때문에 더욱 시간이 나질 않는다는 것인데, 이런 상황일수록 연구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전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책을 읽고자 하는 욕구만 점점 커져만 가는 것 같다 (아, 연구할 시간도 빠듯한데 일에 매진하지 않고 엉뚱한 것(?)에만 전념하고 있으니, 이번 생은 망한 것임이 틀림없다).

큰마음 먹고 책 세 권을 모 온라인 서점에서 샀다. 그것도(!) 3개월 무이자 할부로 말이다 (돈 없다고 투덜대면서 돈 안 되는 데에는 펑펑 잘만 쓰지요). 내 전공―분자세포생물학―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지만, 내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한가운데에 마르크스주의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만큼 마르크스의 사상을 향유하는 것과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정치·사회의 현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내 꿈은 (아랫글에서 언급한 데이비드 하비의 예처럼) 생물학―특히 진화생물학―과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해 두 이론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줄 아는 냉철한 생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인데 그리될 가능성은 요원하기만 하니 이번 생은 정말 망한 것 같다.

구매한 책은 다음과 같다. 성공회대 석좌교수인 김수행 선생과 민주당 수석전문위원이자 경원대학교 경제학과 겸임교수인 김진엽 씨가 공동번역한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의 <금융자본론(Das Finanzkapital)>,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인 (가끔 실없는 소리도 마구마구 늘어놓으시는) 강신준 선생이 번역한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의 <맑스 「자본」 강의(A Companion to Marx's Capital)> 그리고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 연구교수이자 부소장인 조현연 씨가 저술한 <한국 진보 정당 운동사>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공부하거나 정치적 입장이 (나처럼) 마르크스주의인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사회(bourgeois society)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경제를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마르크스가 살았던 1800년대 중반과 후반은 산업 자본주의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던 시기로 애덤 스미스(Adam Smith)로 시작해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hardo)에서 정점에 다다른 고전파 자본주의 경제학이 시대의 주류를 차지하는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있었다. 주류 경제학이 주장하듯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이기적인 개인'의 상호작용과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 산업과 사회 전체의 부는 놀라우리만치 증가했다. 하지만 사회의 부가 증가하면 할수록 무산자의 수는 그에 비례해 늘고 있었다. 결국, 증가한 사회의 부는 개인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일부 계층―즉 부르주아 계급―으로만 집중하고 있었다.

인류역사의 흐름 속에서 '필연적 실체'로 자리매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봉건사회의 귀족을 대신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했고, 부르주아는 자본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속박했다. '자본을 연구하자'. 마르크스의 이러한 신념은 유물론(materialism), 상부구조(superstructure)와 하부구조(substructure), 계급이론(class theory)과 계급투쟁(class struggle)에 관한 연구를 통해 확립된 것으로, 이를 위해 그는 최초에는 자본(capital), 토지재산(landed property), 임금노동(wage-labor), 국가(the State), 대외거래(foreign transactions), 세계경제(the world economy)라는 여섯 권의 책을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 여섯 권의 책을 모두 쓸 시간을 갖지 못해 자본·토지재산·임금노동에 관한 연구 중 자본의 '일반적 성격'에 관한 부분을 <자본론> 세 권에 남겼다. 그 <자본론> 세 권 중에서도 마르크스가 직접 저술한 것은 제1권이고 나머지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가 남긴 자료를 토대로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마르크스가 죽은 뒤 정리해 발간한 것이다. 이것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엥겔스도 곧 죽음을 맞이했고, 제4권은 훗날 '마르크스주의 교황(좀 네거티브한 의미가 담겨 있다)'이라 일컬어졌던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가 <잉여가치학설사(Theories of surplus-value)>란 제목으로 따로 정리해 출판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적인 구조(structure)와 동학(dynamics)을 '이상적 평균(ideal average)'에서 해명하기 위해 자본, 임금노동 그리고 토지재산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거대한 세 계급이 자본가 계급, 노동자 계급 그리고 토지소유자 계급이라는 것에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구체적인 형태의 자본(예: 독점자본)이나 임금노동자 계급의 투쟁(예: 노동조합) 그리고 자본주의적 토지소유 이외의 역사적 형태(예: 소농)에 관해서는 깊이 서술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론>은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자본주의의 속성을 자세히 분석한 순수 연구 학술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이런 목적으로 저술했다고 해서 그의 투쟁성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정치적 투쟁은 그의 다른 저술(예를 들어, <공산당 선언>, <고타강령 초안 비판>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다만 <자본론>은 마르크스의 학자적 면모가 유달리 두드러진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아쉬운 점이라면 마르크스가 생전에 국가, 대외거래, 세계경제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를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인데―물론 현재 마르크스-엥겔스의 메모 등을 포함한 모든 문헌을 총정리해 재평가하는 MEGA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으니 마르크스가 이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연구했는지는 훗날 밝혀지리라―힐퍼딩의 <금융자본론>은 마르크스가 완수하지 못한 부분―국가와 세계경제―을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해 연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출판사 서평대로 이 책이 <자본론> 제4권에 해당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특히 <자본론> 제4권에 해당하는 내용은 이미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의 연구를 정리해서 출판했으니―굳이 <자본론> 제4권이라는 별칭을 붙이지 않더라도 그 의미가 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힐퍼딩의 이론은 레닌(Vladimir Lenin)이 '제국주의 이론'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많은 이바지를 했다고 하니, 그의 <제국주의(Imperialism)>도 반드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읽어야 할 책이 자꾸만 늘어나니 너무 슬프다).

  

데이비드 하비는 지리학자로서 마르크스의 자본 비판을 도시로 확장시킨 마르크스주의자이며, 구소련과 중국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사실 이들 사회주의 국가가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일단은 유사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자―를 참조하며 사상을 공부했던 (일반적인)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지리학적 사유 속에서 마르크스의 분석을 재평가한 학자라고 한다(데이비드 하비에 대한 소개는 다음의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데이비드 하비 : 공간의 정치경제학]).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연구하는 지리학자라는 이력이 매우 흥미로운데―따지고 보면 힐퍼딩도 소아과 의사였음에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연구했으니, 원래 이 바닥이 이런가 보다―그가 1970년대 초부터 시작해서 약 40여 년간 공부해온 <자본론> 강독과 2007년도부터 시작한 강의 녹취록(데이비드 하비의 인터넷 웹 사이트 http://www.davidharvey.org에서 강의을 볼 수 있다)을 바탕으로 <맑스 자본 강의>라는 책을 내놓았다고 한다. 세간의 평이 좋기도 하고(적어도 데이비드 하비 본인에 대한 평은 꽤 우호적인 것 같다), 그동안 공부한 마크그스주의를 정리할 겸해서 한 번 읽어보고자 마음먹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세 권 중 오직 제1권에 해당하는 내용만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뭐 문제 될 것은 없다. <자본론> 제1권만이라도 다시 읽어보는 게 다행이지. 여담이지만 <자본론>은 정말 어렵다. 어렵다는 게 말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읽을 때는 '아하, 그렇구나!'란 생각이 드는데, 뒤돌아서면 '어, 그러니까 그게 뭐였지?' 때문에 어렵다는 거다 (따지고 보면 내가 멍청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보면 내가 가장 읽고 싶었던 책 중의 하나인) <한국 진보 정당 운동사>는 그토록 출간되길 기다렸음에도 막상 책이 출간된 2009년에는 읽어볼 생각도 안 하다가, 인제야 읽고자 마음먹은 책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런 책은 인생에서도 그리고 정치적 입장에서도 제일 힘든 시기에만 꼭 생각난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아니, 필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
이 책은 진보 정당 운동의 역사적 궤적을 통해 한국 현대 정치를 조망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하고 있다. 나아가 현대 정치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진보 정당 운동이 추구해 온 목표는 무엇이었고 그들은 어떤 이념과 가치 체계를 발전시키고자 했는지, 그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은 어떠했고 그에 대해 대중은 어떤 판단과 선택을 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해방 이후 한국 진보 정당 운동이 왜 실패했는지를 말 그대로 개인적 차원에서 조망하고 싶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역사적 기간은 해방 이후부터 시작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당사태까지지만, 그때의 문제의식이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우리는 과거 '진보 정당 운동'이 가지고 있었던 본원적 문제―운동권 혹은 좌파 운동 내부의 이데올로기 부재와 사회주의 운동의 실종, 그리고 대중 일반과의 유리―를 아직도 끌어안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인식은 내가 가진 지극히 개인적 판단이지만,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진보 정당 운동의 문제점이라는 것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그리고 통합연대가 삼당합당(과거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삼당합당을 빗대어 비꼬는 이들도 있다)을 결정하기로 한만큼 이들이 세운 정당이 과연 진보 정당의 길을 갈지,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의 첨병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더불어 홍세화 선생을 새로운 대표로 맞이한 진보신당의 앞날도 더 두고 볼 일이고. 물론 현실이 암울한 만큼 다가올 미래도 불투명하긴 마찬가지다. 이럴수록 과거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절실히 드는데, 그런 의미에서 <한국 진보 정당 운동사>를 읽는다는 건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연구는 연구고 정치는 정치니 어서 빨리 읽어보자. 이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책을 읽자,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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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민중의 소리

지난 9월 4일 서울 송파구 삼전동 송파구민회관 대강당에서 '진보대통합 안'을 논의하기 위한 '진보신당 3차 임시 당 대회'가 열렸다. 전국에서 대의원을 포함한 당원 동지들이 송파구민회관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정족수가 채워지자 안건에 대한 발언과 토의가 활발히 오고 갔다. 분위기는 매우 격앙됐다. 통합 지지와 반대를 오고 가는 토론은 시간이 갈수록 격해졌다. '진보대통합'이라는 화두로 시작해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이어져 온 우리끼리의 대립은 곧 종지부를 찍을 듯 보였지만, 당의 앞날을 결정하기 위해 열린 '임시 당 대회'의 최종 결론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다. 당 대회 진행과정을 지켜보던 많은 당원 동지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며 표결의 순간을 만감이 교차한 가운데 진지한 눈빛으로 유심히 지켜봤다.

결과는 '진보대통합'에 대한 안건의 전면 부결이었다. 원안인 <5·31 연석회의 최종 합의문>과 <8·28 (잠정)합의문>이라는 두 개의 '진보대통합 안' 모두 모두 재석 410명 중 3분의 2인 274명을 넘기지 못한 222명에 그쳐 부결됐다. 이에 앞서 국민참여당의 합류를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문구가 포함된 <수정동의안>도 재석 408명 중 찬성 231명으로 부결됐다. '진보대통합'은 진보신당에서 시작되어 진보신당에 의해 부결됐다.

애당초 패권주의와 종북주의에 반대해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해 만든 진보신당이었다. 민주노동당에서 시작된 노동자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노동자 정당을 기반으로 이전보다 진일보한 새로운 진보정치를 하겠다는 의지로 설립한 진보신당이었다. 그럼에도, 2008년 창당 후 3년밖에 안 된 시점에서 단지 지방 선거에서 연속 패했다는 이유만으로, 과거 분당의 원인이 하나도 해소되지 않았음에도 민주노동당과의 재통합은 일종의 자기 부정이나 다름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민주노동당과의 재통합'은 진보신당 당원 대다수의 공감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진보신당이 왜 민주노동당에서 분리해 나왔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당내 명망가와 일부 활동가들의 일방적인 통합 강행은 당 운영의 민주주의에 반하는 패권주의적 발상이었다.


사진 출처: 뉴시스

당 대회에서 '통합안'이 부결된 이후, 진보신당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이미 곪을 대로 곪은 통합파와 독자파 간의 첨예한 대립은 통합파의 대거 탈당이라는 예견된 파국을 낳았다. '통합연대'의 주축인 노회찬과 심상정 전 상임고문의 탈당을 시작으로 통합파 동지들의 탈당은 본격화되었고, 조승수 전 대표를 포함한 전국 시도당 위원장의 동반 탈당으로 이러한 움직임은 최고조에 달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통합파 동지들이 대거 탈당하더라도, 남아 있는 독자파 동지들이라도 힘을 한데 모아 위기를 헤쳐나간다면 현재 위기 상황은 어떻게든 극복하겠지만, 조승수 전 대표가 당 대표직을 사퇴하고 김은주 부대표가 권한대행직을 맡으면서 진보신당의 위기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출처: 참세상

강경 독자파인 김은주 권한대행의 독단적이며 비민주적인 당 운영―특히 당직자를 포함한 비대위 위원을 자기 쪽 사람으로 채우려는 독선적인 행태―은 통합파 동지뿐만 아니라 독자파 동지들에게도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중앙당의 밀어붙이기식 통합 방식에서 보인 비민주적이며 패권주의적인 방식을 김은주 권한대행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그것도 진보신당을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이 때문에 강상구 전 대변인을 포함한 다수의 진보신당 동지들은 김 권한대행의 즉각 사퇴 및 조속한 비상대책위원회 설치를 촉구한 바 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김혜경 전 민주노동당 대표를 위원장으로 하는 비대위가 구성되었으며, 김은주 권한대행은 새로운 대표가 선출될 때까지만 직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어제(10월 26일) 홍세화 선생이 진보신당 당 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홍세화 선생은 당 대표 출마를 선언하면서 자신의 심경을 <당 대표 출마의 변>이라는 한 편의 장문으로 진보신당 당 게시판에 남겼다.


사진 출처: 한겨레

홍세화 선생은 1979년 '남민전(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 때문에 공안 당국의 수배를 받았고 프랑스로 망명해 20여 년간을 객지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오다가 2002년 한국으로 귀국한 바 있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온갖 고초를 겪은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남민전 사건'이 공안 당국에 의해 조작되었음이 최근에 밝혀져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탄압받은 29명이 2006년 3월, 전부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된 일도 있었다.

홍세화 선생의 당 대표 출마에 대한 진보신당 내 동지들―독자파든 통합파든―의 의견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홍세화 선생의 당 대표 취임은 어수선한 당내 분위기를 추스르는 것과 그동안 불거진 상호 불신을 불식하는 데도 어느 정도 일조할 듯 하다. 그럼에도, 이것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솔직히 홍세화 선생이 당 대표에 새로이 취임한다 해도 그에게 진보신당을 위한 명확한 비전―민주노동당과 차별되는 대중적인 좌파정당으로서 생존을 모색할 방안―이 없다면 그의 당 대표 취임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고, 우리가 우려했듯이 진보신당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홍세화 선생에게는 진보신당의 미래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있는가?

"
저는 <진보신당>의 위기가 통합이냐 독자생존이냐를 결정하는 데 실패한 것에서 온 것이라 믿지 않습니다. 단언컨대 오늘 진보정치의 위기는 우리가 누구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고, 그리하여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데서 온 것입니다."

홍세화 선생의 말마따나 그동안 우리는 '진보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한 방법론―통합이냐 독자생존이냐―에만 매달렸을 뿐,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잊고 지냈다. 내부에서 우리끼리 투쟁하느라 모든 힘을 소진해버리는데,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는다고 상황이 달라지는가?

오직 '우리만 음미할 수 있는 대의명분'이 있어봤자 대중 일반이 알아주지 않는 한 아무 소용없다. 우리가 언제 우리의 대의명분을 제대로 알린 적이 있는지 반문해보자. 내 기억엔 없다. 내가 기억하는 진보신당의 모습은 '대의명분'만 있고, 노선 투쟁만 죽어라 하는 새로운 진보정치를 추구하는 정당이다. 상황이 이러니 진보신당의 지지율 하락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진중권에게 '좌파 동아리'란 비아냥을 들어도 할 말 없다.

"
우리는 잃어버린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되찾아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재벌국가를 우리 모두의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합니다. … 우리 당의 능력 있는 젊은 일꾼들과 함께 지역별로 또는 과제별로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 그것을 하루속히 조직화하는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정치공학적인 생존전략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통해 대중의 신뢰를 얻고, 당의 외연을 확대해 갈 것입니다. …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도 바뀌어야 합니다. 진보적 가치는 우리 당 속에서 가장 먼저 실현되고 증명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진보정치를 다짐하며 민주노동당을 박차고 나왔지만,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작 선거 몇 번 한 것이 전부다. 따지고 보면 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한 것도 당연하다. 민주노동당 혹은 진보신당에 몸담은 당원이거나 혹은 정치에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민중 대부분은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진보신당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는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엇을 위한 정당'인지도 잘 모르는데 누가 지지의 손길을 보내겠는가? 그나마 노회찬, 심상정 그리고 조승수 같은 명망가가 있었으니 대중에게 어필이라도 했지, 이마저도 없었으면 대중 일반에게 진보신당은 사실상 '듣보잡'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한 대중 일반의 선택은 당연히 인지도가 있는 민주노동당이다. 단순히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아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정도는 굳이 정당을 설립하지 않더라도 할 수 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지역사회에 진보신당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꾸준한 정치적 활동이다. 지역사회에도 알려지지 않은 신생 정당을 대중 일반이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거란 순진한 착각은 버려야 한다. 더불어 주류 정당이 만들어내는 사회적·정치적인 이슈만을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이슈를 만들어서 선점해야 한다. 사회적 이슈 앞에 언제나 진보신당이 앞장서야지만, 대중은 '진보신당' 이름 넉 자라도 기억해준다. 이런 노력은 전무한 채로, 우리의 "정체성"만 맨날 찾다가 맞이하는 것은 오로지 '진보신당의 예정된 멸망'뿐이다.

홍세화 선생이 <당 대표 출마의 변>이라는 아주 감동적인 글로 자신의 소회를 밝히긴 했지만,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벅찬 감동이 아니라, 냉철한 자기성찰과 대중 속으로 파고들기 위한 전략과 전술이다. 눈물로 뒤범벅된 벅찬 감동은 진보신당이 살아남은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내가 정말로 홍세화 선생의 글에서 아쉬운 점은 정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냉철함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한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반성문이 아니라 진보신당을 살릴 수 있는 현실에 대한 냉혹한 판단이다.

물론 홍세화 선생이 당 대표로 취임한 뒤에 진보신당의 생존을 위한 계책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출마의 변'은 그냥 '출마의 변'일 뿐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홍세화 선생이 새로운 당 대표가 된다면 다 죽어가는 진보신당은 다시 기사회생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잘 모르겠다"이다. 아직도, 진보신당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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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
 - 진보신당 당대표 출마의 변

홍세화(서울마포당협 당원)

사랑하고 존경하는 당원동지 여러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지금과 같은 순간이 올 것이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갈 수 없는 나라’로 남아 있었던 땅에 다시 돌아온 뒤로, 저는 이 척박한 불모의 땅에 뿌려진 진보정당의 씨가 마침내 개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벅찬 감회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소망했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쓴 글을 읽거나 저를 알고 지내온 사람이라면 제가 버릇처럼 되뇌던 말 하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의 소망은 하나였습니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는 것, 이것이 귀국 이후 10년 동안 제가 품어온 유일한 꿈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제가 나이 먹기를 거부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는 이를 두고 가당찮은 나르시시즘이라 이름 붙일지 모르지만, 제 꿈은 ‘사병’으로 남는 것이었습니다. 장교는 나이를 먹으면서 진급합니다. 사병은 나이를 먹어봤자 사병으로 남습니다. 실제 전투는 주로 사병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병으로 남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나는 끝까지 사병으로 남겠어!’ “평당원 홍세화!”― 이처럼 자랑스런 호명이 없을 것이고, 이 이름을 남기고 사라지고 싶다는 것! 지독히도 척박한 이 땅에서 힘겨운 진보정당의 발걸음 앞에 놓이는 작은 거름이 되는 것, 그 긴 행렬의 끄트머리를 지키며 사랑하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싸우다 사라지는 것, 이것은 단지 소망을 넘어 제 삶의 원칙이자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둑이 흔들리고 금이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진보신당>의 벽에 균열이 생기고, 당의 보루라 믿어왔던 원칙들이 하루아침에 버림받는 것을 목격하면서 저와 같은 평당원들의 꿈들 역시 황망한 처지에 놓였을 것을 생각하면서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힘겨웠습니다. 그냥 달아나버리고 싶을 때는 마포강변을 걸었습니다. 나의 빈 주먹질을 묵묵히 지켜보던 쎄느강처럼, 과거 홍수가 나면 주변을 초토화시키곤 했던 그 한강을 바라보기 위해 말입니다. 달아날 것인가, 아니면 무너져가는 둑을 향해 달려갈 것인가? 언제나처럼, 대답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믿음이 살아나는 당을 위해 이 무대에 오르겠습니다

저는 이제 허공을 향해 퍼부었던 탄식과 누군가를 향한 원망을 모두 접습니다. 주저와 망설임 끝에 저는 오는 11월 진보신당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기로 하였습니다. ‘보다 나은 삶’과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 정치는 존재하며, 그러므로 ‘정치는 고귀한 것’이라 주장해왔지만 결코 저 자신이 오르고 싶지는 않았던 무대, 그 무대에 오르며 당원 동지 여러분께 제 두려운 결심을 알리고, 숱한 번민과 그동안 느꼈던 마음의 고통과,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진보신당의 미래에 대한 저의 희망을 간략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3년 전 ‘새로운 진보’의 깃발을 내걸고 창당된 뒤, 우리 당은 새로운 진보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지금에 와서 이 모든 노력들이 헛된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오늘 <진보신당>의 초라한 모습 앞에서 자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관성과 관습을 넘어선 우리의 새로움은 과연 어디에 있었던 것입니까? 새로움은 어디서 긴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까? 진보정치의 새로움은 잠자는 권리와 저항의식을 일깨워 불의한 세상의 질서에 맞서 싸우게 하는 것이고 그 최전선에서 눈 부릅뜨고 미래의 세계를 향해 손을 뻗는데서 찾아야 하는 것인데 정작 우리는 어디에서 나태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진보신당>의 위기가 통합이냐 독자생존이냐를 결정하는 데 실패한 것에서 온 것이라 믿지 않습니다. 단언컨대 오늘 진보정치의 위기는 우리가 누구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고, 그리하여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데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자신이 알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우리를 인정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 이 자가당착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상황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가운데서도 가장 치명적인 것은 믿음을 잃은 것입니다. 당 바깥의 대중은 진보신당의 의지와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고 우리 당의 당원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반목하게 되었습니다. 불신과 반목은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 피어나는 가시꽃입니다. 하나의 질문만이 남았습니다. 지리멸렬을 지속하다 자멸의 시간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이 황량한 가시밭을 다시 일구어 ‘빵과 장미’를 가져오는 당의 새로운 시작을 피와 땀을 흘려 만들어낼 것인가? 만일 우리가 실낱같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가장 먼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또한 서로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아직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니라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위해 저는 이제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 위로 오릅니다.

우리가 누구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되새깁시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지 여러분!

동지 여러분과 제가 떠올려야 할 한 가지 질문이 더 남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진보신당>에 남으려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왜 다른 이가 내던지고 간 이 막막한 짐을 계속 지려 하는 것입니까? 그 까닭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그것은, <진보신당>이 아니면 어떤 정당도 해결할 수 없는 근본 문제가 지금 우리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군부 독재가 종말을 고한 뒤에 민중은 지금 자본의 독재 아래 신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지금 전 세계에서 요동치는 반反금융자본 투쟁 하나만을 보아도 충분한 것이 아닙니까? 아직도 35미터 상공의 영도조선소 크레인 위에서 내려오지 못한 채 찬바람을 맞고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투쟁만 보아도 명확해지는 사실 아닙니까? 우리가 만일 <진보신당>의 당원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양심적인 시민일 뿐이라면 우리는 이 땅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약자들의 투쟁의 뒷자리에 서있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것만으로는 당과 당원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보신당>은 자본의 거대한 힘과 싸울 뿐 아니라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 너머의 내일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정당이기 때문입니다. 자본권력에 맞서 싸워야 할 진보세력이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포기하고 급속히 ‘우경화’되는 사태를 막아야 할 책임이 있는 정당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되찾아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재벌국가를 우리 모두의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말이 아니라 먼저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당의 정체성은 어떤 경우에도 선언이 아니라 실천적 활동 속에서 실현됩니다. 비정규직 없는 평등국가, 핵과 자연 수탈이 없는 생태국가, 전쟁 없는 평화국가, 모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존중받는 연대국가를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말보다 실천입니다. <진보신당>은 싸우는 시늉만 하는 정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민생은 ‘투어’로 자족해도 좋을 만큼 여유롭지도 녹록치도 않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저는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약속드리겠습니다. <진보신당>을 ‘싸우는 정당’으로 만드는 것, 진보정당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거대 지배 권력과 싸우고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것, 그리하여 약자가 끝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진보신당>밖에 없다고 느끼게 하는 것, 그것입니다. 저는 그것만이 공허한 논쟁으로 분열되고 상처 입은 우리의 마음을 올바르게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여기가 로두스Rhodus다. 여기서 뛰어보라!” 만일 우리에게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힘이 남아 있다면 다친 무릎을 일으켜 세워 있는 힘을 다해 절벽과 절벽 사이를 다시 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 당의 능력 있는 젊은 일꾼들과 함께 지역별로 또는 과제별로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 그것을 하루속히 조직화하는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정치공학적인 생존전략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통해 대중의 신뢰를 얻고, 당의 외연을 확대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일에만 몰두하여 ‘지혜’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주어진 조건이 열악할수록 지혜는 선택과 집중 속에서 잘 발휘될 것입니다. <진보신당>처럼 단 하나의 의석도 없는 작은 정당일수록 한국 사회에 새롭고 핵심적인 의제를 던지면서 진보정치를 주체적으로 견인해야 합니다. 저는 <진보신당>의 가장 큰 자산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도자를 추종하는 당원이 아니라 이 시대의 진보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따지는 지혜로운 당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 시대의 핵심적인 과제들이 무엇인지 상당 부분 알고 있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노동자 경영권을 요구해 주주자본주의를 흔들어야 하며, 상비군 폐지를 공론화시켜 병영국가의 성벽에 균열을 내야 합니다. 서울대는 없애고, 대학은 평준화하며, 각종 국가고시는 지역별로 할당하라고 요구함으로써 학벌사회를 전복시켜야 합니다. 지배 담론에 길들여져 허락된 것만 말하는 진보정당은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금지된 것을 욕망하고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불온함 속에 세상을 바꾸는 우리의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도 바뀌어야 합니다. 진보적 가치는 우리 당 속에서 가장 먼저 실현되고 증명되어야 합니다. 우리 당의 문화가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호혜적이지 않다면, 보수정당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것들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비난하는 극우 사익추구집단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작은 차이로 끝없이 반목을 거듭한다면, 누구에게 참된 만남과 고양高揚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제가 오늘 이 결심을 하고자 했을 때 저를 아는 이들은 하나같이 극구 만류하고 나섰습니다. 그분들이 제게 한 말 중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상처받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선의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저를 아직 온전히 이해하진 못하셨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는 상처가 두려워 평당원으로 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였던가요, 두려운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의미 없는 고통’이라고 말했던 이는. 당원 동지 여러분. 저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설령 만신창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 척박한 땅에 참된 진보정당의 뿌리를 내리는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젊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얻은, 그것 아니었다면 쎄느강변에서 소멸했을 허명에 값하는 의미로서 이미 충분합니다. 동지 여러분이 <진보신당>의 당원임을 자랑할 수 있는 날을 반드시 오게 하기 위해 오늘과 내일 받을 상처 때문에 뒷걸음질 치지 않겠습니다. <진보신당>은 지나간 역사와 희생당한 투사들에게 빚지고 있는 정당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듯이, 제게도 제가 부재한 땅에서 어둠과 싸우다 앞서간 동지들에 대한 부채감이 있습니다. 이제 저는 <진보신당>의 새출발을 위한 거름이 되는 것으로 이 빚들을 갚으려고 합니다. 부디 저를 딛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 인사글의 제목은 체코의 저명한 작가이자 정치가인 바츨라프 하벨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며 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시작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바츨라프 하벨

일단 내가 시작해야 하리, 해보아야 하리.
여기서 지금,
바로 내가 있는 곳에서,
다른 어디서라면
일이 더 쉬웠을 거라고
자신에게 핑계 대지 않으면서,
장황한 연설이나
과장된 몸짓 없이,
다만 보다 더 지속적으로
나 자신의 내면에서 알고 있는
존재의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어 살고자 한다면.
시작하자마자
나는 홀연히 알게 되리
놀랍게도
내가 유일한 사람도
첫 사람도
혹은 가장 중요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떠난 사람 가운데에서
모두가 정말로 길을 잃을지 아닐지는
전적으로
내가 길을 잃을지 아닐지에 달렸다는 것을.

2011년 10월 26일 홍세화 드림

출처: 진보신당 당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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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자본주의 4.0”이 화두다. 특히, 조선일보는 위기의 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라면서 연신 “자본주의 4.0”을 떠들어대고 있다. 도대체 “자본주의 4.0”이 무엇인가? 조선일보의 말을 빌리자면 “자본주의 4.0은 따뜻한 자본주의다". 그리고 그 따뜻한 자본주의는 기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4.0”은 기부로 철철 넘쳐나는 아름다운 자본주의 세상이다. 얼핏 들으면 정말 그럴싸해 보인다. 그런데 과연 사실일까?

[기자수첩] 386세대 기부는 생활의 일부… '자본주의 4.0'의 희망을 보다
[자본주의 4.0] 나눔으로 세상을 바꾸다, 한국의 부자 49人

아름다운 자본주의라는 것은 실재하는가? 자본주의가 정말 아름답고―인간이 만든 시스템이니 어느 정도 그 안에 내재한 모순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훌륭한 것이었다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의 본질이 물질―즉, 잉여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의 발화로 나타난 것임을 상기한다면 인간 노동까지도 상품이 되어버리는 자본주의는 전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노동이 어떠한 취급을 받는가? 모든 것은 자본으로 환원되고 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없는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쓸모가 없어진다. 사회의 모든 것은 발전과 진보라는 미명 하에 철저히 자본화되어 간다. 그리고 인간성은 점점 더 말살되고, 자본은 인간의 위에 서서 군림한다.

기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어불성설이다. 고래로부터 기부는 끊임없이 행해져 왔다. 고대 로마, 중세, 근대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그것을 기부라 부르거나 혹은 기부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기부는 많은 부자가 선심 쓰듯 가난한 자를 위해 시행된 일종의 사적 구휼책이었다. 서양뿐만이 아니다. 비슷한 경우는 동양에서도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기부가 과연 세상을 바꿨을까? 가까운 예를 들자면,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 등의 초대형 자본가의 아낌없는 기부가 진정 세상을 바꿨다고 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물어보자. 부자의 기부가 미국 사회에 만연한 가난을 궁극적으로 해결했는가?

물론, 부자의 기부가 가난한 자에게는 힘이 될 수 있다. 더불어 사회 시스템의 불완전성을 어느 정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기부는 일종의 사적 안전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스템의 본질적인 모순 때문에 가난한 자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면, 그리고 그것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극으로 치닫는다면 기부가 할 수 있는 별로 없다. 기부를 많이 하고 또한 장려하는 것은 분명히 미덕이지만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데 있어 최선책은 아니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모순을 심층부에서부터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본질 자체가 변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부는 절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가 저술한 <자본주의 4.0 –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Capitalism 4.0 – The Birth of a New Economy)>이란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자본주의 4.0”은 애당초 "기부가 철철 넘쳐나는 아름다운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와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칼레츠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4.0”의 핵심은 정부와 시장이 서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완하는 관계로 가야지만,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부란 개념을 찾은 조선일보의 능력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멍청한 것인지 알길이 없지만, 개인적인 추측으로 미루어 보건대 실상은 후자―조선일보 필진 혹은 경영진의 난독증을 동반한 멍청함―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국사회에 만연한 자본주의 모순을 "서민을 착취해 자기 배를 채운 부자가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가난한 자를 향해 기부라는 아름다운 손길을 내민다"는 형용모순으로 감추기 위해 "자본주의 4.0"이라는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먼 말을 쓴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다음은 <자본주의 4.0>이란 책에 나오는 머리말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꽤 길지만, 아나톨 칼레츠키의 의도가 충분히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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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자본주의 4.0>을 다 읽었다. 솔직히 다 읽지는 않았다. 책의 뒤편에 나와 있는 "자본주의 4.0의 미래에 대한 예측"은 대충 훑어만 봤는데, 진부한 내용에 그가 말하는 것도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이 책에 그리도 관심을 두고 열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나톨 칼레츠키의 주장은 여태껏 케인즈주의자를 위시한 비주류 경제학자가 줄기차게 주장한 내용의 짬뽕이나 마찬가지다. 더불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역사관도 어느 정도 차용하긴 했는데, 그것 이외에 쓸만한 내용은 없다.

서평이라 할 것도 없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자본주의 4.0'은 너무나 뻔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시장과 정부가 서로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상호 보완 및 협력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표면적으로는 시장과 정부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적어도 1920년대의 대공황 이후에는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해왔다. 그것은 1980년대와 2000년대를 관통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정치가와 자본주의 경제학자는 작은 정부를 통한 시장의 우위를 주장했지만, 뒤에서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했다.

더불어 시장은 언제나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실상 뻔한 얘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가 얘기하는 것은 거의 케인즈주의에서 말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강력하면서도 작은 정부는 거의 말장난에 가깝다. 역시나 진부하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자본주의 시스템은 유능하고 적극적인 정부가 있어야만 시장경제가 유지될 수 있다 (2) 정부와 중앙은행이 적극적으로 경제 수요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 즉 케인즈식 총수요 관리를 해야 한다 (3) 시장과 정부는 모두 불완전하며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케인즈가 했던 얘기를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새로운 자본주의는 이전과 다를 것이라고 예상한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기조와는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본질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조가 다를 뿐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다. 거의 말장난에 가깝다.

더 이상 잡설은 늘어놓지 않겠다. 이 책에 대한 신랄한 서평이 궁금하다면 프레시안의 기사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자본주의 4.0'?…<조선>, 말장난을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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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는 기사가 온갖 포털사이트를 뒤덮고 있다 (관련 대표 기사:평창의 63표, 역대 올림픽 최다 득표 "경쟁은 없었다"). 지금까지 국가가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진행해온 서울 올림픽, 아시안 게임, 한일 월드컵 등과 같은 국제경기와는 다르게 평창(혹은 강원도)이라는 특정 지방자치단체가 주도적으로 올림픽 유치를 위한 로비를 진행해왔다고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이 역시도 이전과 비슷하게 국가주도의 국제경기 유치와 별반 차이는 없을 것이다. 저 가카께서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어눌한 영어를 써가며 발 벗고 나서지 않았는가?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의 성공도 강원도라는 지방자치단체가 성사시켰다기보다는 늘 그래 왔듯, 국가적 유치로비의 한 성공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일단 빙상인의 시각에서 살펴보자. 오랫동안 한국 내 빙상스포츠의 활성화를 꿈꿔왔던 빙상인에게 평창의 동계올림픽 유치는 빙상스포츠 저변의 확대, 즉 빙상시설 인프라 구축과 빙상스포츠를 즐기는 인구의 확대를 유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반갑고 행복한 소식일 수도 있다. 어찌저찌 하다 보면 프로축구, 프로야구, 프로농구, 프로배구처럼 빙상분야에서도 미국의 NHL 등의 상업화된 빙상스포츠처럼 한국 빙상스포츠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업화된 스포츠, 즉 프로리그(그게 무엇일지는 불확실하지만)를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이후, 언론에서 보도하는 올림픽 개최에 대한 초미의 관심사는 동계올림픽 개최가 가져다줄 엄청난 경제적 파급효과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가 지난 2008년 산업연구원에 의뢰해 만든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최 타당성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을 개최할 경우, 서울 올림픽의 네 배, 한일 월드컵의 두 배를 뛰어넘는 약 20조 원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경제적 파급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현대경제연구원도 이와 비슷한 수치를 내놓고 있다. 또한, 그들은 여기에서 창출되는 부가가치액도 만만치 않으리라고 전망하고 있다(관련기사: <평창2018> 동계올림픽 개최의 경제효과는). 더불어 아시아경제신문과 같은 곳에서는 이번 올림픽대회 유치가 65조 이상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가진다는 그 근거도 불확실한 장밋빛 전망에 대한 기사를 내놓기도 했다(관련기사:[동계올림픽 유치]'64조원+α' 경제효과 따냈다).

정도야 어떻든 간에, 많은 이들이 아직 개최하지도 않은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개최 당사자인 강원도민으로서는 삼수 끝에 개최유치에 성공한 것이니만큼 기쁨도 클 것이고, 불확실한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10년이 넘게 엄청난 금액을 투자했으니, 강원도 입장에서 이번 동계올림픽 유치 성공은 강원도의 엄청난 재정적자를 한 번에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정치권으로서도 이번 동계올림픽 유치 성공은 자신들이 관여 여부를 떠나 그동안 보여줬던 여러 가지 정치적 실책을 올림픽이라는 거창한 국제적 이벤트 유치 성공으로 단번에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올림픽만큼 세간의 시선을 돌릴만한 화젯거리가 어디 있겠는가? 기업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이 손해 볼 일은 없고 어떤 경로로든 돈을 벌 수 있을 테니 대회개최를 거부할 리는 없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두팔 벌려 올림픽 개최를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올림픽 유치가 그렇게 기뻐할 만한 일일까? 올림픽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효과에 대한 엄청난 선전을 보면서 과거의 일이 하나 생각났다. 바로 G20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진실이다.

그 당시 G20의 한국개최가 가져다주는 경제적 파급효과는 최대 450조 원이었다. G20 개최가 단기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을 줄 수는 있다. 어쨌든, G20을 개최하려면 회의장 청소하는 용역이라도 필요할 테니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G20이 단기적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G20의 '성공적인 개최'가 한국의 국가경제에 도움이 된 것은 아직까지 없어 보인다. 오히려 G20 개최와는 무관하게 그동안 한국경제의 내적 상황은 계속 악화 일로를 달리고 있다. 이건 수출증대 등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G20의 성공적 개최로 수출시장은 좋아졌을 수도 있지만,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노동자의 현실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많은 이가 회사의 이익향상을 위한 구조조정이란 명목으로 해고되고 있으며, 새로운 일자리는 언제 해고돼도 이상하지 않은 비정규직으로 세상에 태어나고 있으며, 이마저도 구하지 못해 오늘 내일 굶주리며 고통받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G20은 자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뿐, 노동자를 위해 존재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부자들의 잔치였고 그 잔치에서 거렁뱅이에게라고 떨어지는 떡고물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G20의 현실이었다.

G20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G20이 한국경제의 질적 측면, 특히 노동자의 삶에 도움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본다. 사실, 모든 국제적 대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G20 및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치러져 온 국제대회가 한국 및 한국기업의 브랜드 이미지에 어떤 좋은 점을 부여하여 이것 때문에 수출이 증대될 수는 있어도, 그 이익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부는 오직 자본에게 향한다. 가치가 노동자에게 가지 않고 오직 자본가에게만 흘러들어 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그 어느 것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국제대회의 개최로 파이는 커질 수 있겠지만, 파이 조각의 수가 더 늘어나진 않는다. 지금과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는 파이 조각의 크기뿐만 아니라 그 수도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올림픽 개최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장밋빛 희망을 줄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가까운 예를 보더라도 아시안 게임 개최를 위해 엄청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인천을 보라. 세계적 자동차 경주대회를 개최하려다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는 전남을 보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사례는 장밋빛 꽃다발을 우리 가슴에 안겨주는 대신, 다 시들고 썩어버려 들고 있기조차 어려운 지푸라기만 보여줄 뿐이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은 분명하다. 현재 강원도의 재정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만큼,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유치를 위해 국가에서는 올림픽 인프라 구축이라는 명목으로 막대한 예산을 강원도에 쏟아부을 것이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올림픽 유치가 가져다주는 경제적 파급효과 20조 원이라는 것의 정체가 향후 국가가 강원도에 투입해야 할 최소한의 예산총액일 것이고, 4대강공사 예에서 보듯 20조 원이란 예산은 스스로 번식하여 그 주인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질 것이고, 결국 길러준 주인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잡아먹는 어마어마한 식인괴물로 변해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와 강원도는 20조 원이란 예산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 재원마련을 위해 새로운 세금을 신설하게 된다면 그 주체가 누구이든 간에 엄청난 조세저항에 직면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므로, 직접세의 성격이 강한 세금은 신설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조세저항이 덜한 간접세 항목을 신설을 통해 재원을 확보함으로써 올림픽 개최를 위한 지원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며, 한편으로는 기존 예산(특히, 복지 및 교육관련)을 대폭 삭감함으로써 올림픽 개최를 위한 재정적 지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래저래 피를 보는 것은 노동자를 위시한 일반 국민이다. 모든 돈은 노동자의 주머니에서 국가로, 그리고 자본가의 탐욕스러운 입안으로 흘러들어 갈 것이다.

올림픽 유치는 분명히 국가적 행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자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국민 다수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올림픽은 우리에게 민족의 승리라는 대리만족을 줄 수 있을 지언정, 우리의 주린 배를 채워주진 않을 것이며, 억압 받는 우리의 현실도 바꿔주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다.

2011/07/07 15:28 이글루스에서 작성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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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GA(Marx-Engels-Gesamtausgabe)란 무엇인가?
진보평론 제7호: 2003-03-21
김만수(보쿰(Bochum)대학교 객원교수/ 한국학과)


마르크스-엥겔스전집의 의의와 지평
로쟈 [알라딘 블로그]: 201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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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마르크스의 사유 발전과정을 아는 것을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MEGA의 진행과정에 대한 정보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가져다준다. 그런데 저 많은 것을 언제 보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특히 생물학 전공이라 MEGA를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저것을 안 보자니 왠지 아쉬울 것이란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독일어를 전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기회에 중도에 포기했던 독일어 공부나 다시 해봐야겠단 생각이 문득 든다. 물론 작심삼일로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에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늘 부족한 편이니까.


2011/06/16 14:44 이글루스에서 작성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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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날씨도 궂은데 공부하느라 연구하느라 업무 보시느라 많이 힘드시죠. 저는 생명과 대학원에 재학 중인 XXX입니다. 포비스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글의 화두가 복지회 직원의 불친절함에서 시작된 서비스이다 보니, 저도 분위기 전환 및 자유게시판의 긴장완화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뜬금없긴 하지만 간단하게라도 제 글의 첫 시작은 친절함과 정이 듬뿍 담긴 인사말로 시작해봤습니다. 그러니 너그러이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선 OOO 학생의 글을 읽고 구성원 다수가 작성하신 답글을 보니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단 많은 분이 OOO 학생이 작성한 글에는 수긍하시는 듯해도 글쓴이의 의도를 달리 이끄시는 것 같아 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 안쓰러움을 달래보고자 OOO 학생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궁극적으로 이런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유추해봤습니다.

교내게시판에 복지회 서비스 불친절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최근 복지회 쪽과 관련해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다수의 복지회 직원이 최저임금 수준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고 열악한 환경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을 알았다..... 서비스제공 측면에서 본다면 친절함은 소비자에게 제공돼야 하는 당연하지만 그분들이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섣불리 비난만은 못하겠다..... 그래서 복지회 직원의 열악한 노동여건을 개선할 방법은 없을까..... 우리가 이 일을 함께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원글을 쓰신 분의 글에 의도치 않게 감정적인 면이 많이 두드러져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본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우리가 그분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요구할 수는 없다."라는 식으로만 한정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글을 작성한 OOO 학생의 뜻을 생각해본다면 너무 저평가되는 게 아닌가도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글에 담긴 감정을 걸러내고 글 안에 담긴 진정한 의도를 면밀히 살펴본다면 글쓴이가 말하고자 한 바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쨌든, 전 이번 일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해당 재화 혹은 사용가치에 대해 돈을 지불하는 구매자의 측면에서 본다면 정말 중요합니다. 이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에 터전을 잡고 있는 포항공대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학교의 구성원이기 이전에 포항공대라는 배움의 터에서 교육서비스를 제공받고 있습니다. 더불어 포항공대 복지회는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생활과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등록금 혹은 기타 소비행위 등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일정하게 지불하고 있고, 그러한 측면에서 미루어본다면 우리가 포항공대 및 복지회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포항공대 구성원이란 사실을 떠나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구매자의 측면에서 봤을 땐 타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에 합당한 서비스를 받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이치니까요.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학교에서 서비스 구매자로서 우리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학생식당과 매점 등에서 일하고 있는 다수의 복지회 직원이 단순한 서비스 제공자가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포항공대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는 구성원이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낮은 임금으로 저평가된 값싼 노동을 통해 우리에게 생활과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도 더불어 알았으면 합니다. 굳이 한국사회의 낮은 최저임금 및 노동에 대한 저평가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여러 사회문제를 이번 일과 관련해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럼에도, 학교의 일부 구성원이 낮은 임금으로 저평가된 노동으로 우리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서비스는 서비스고 임금과 처우의 문제는 별개다라구요. 맞습니다.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구매자로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소비자로서 우리는 그에 걸맞은 서비스를 요구할 수 있고, 복지회 직원의 임금 문제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순전히 복지회가 해결해야 할 사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별개의 문제라고 치부하고 또는 우리가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단정 짓기 전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수의 복지회 직원은 포항공대의 한 구성원이라고 생각한다면 - 우리가 당연히 그렇게 여기고 있다면 그분들의 저평가된 노동과 열악한 처우는 우리가 그분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요구하기 이전에 혹은 양질의 서비스 제공 문제와는 별개로 다룬다고 할지라도 포항공대 구성원 모두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최초에 문제를 제기하신 분이 언급했던 복지회 직원이 이번 일로 큰 불이익을 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분이 항상 불친절했다면 제가 달리 할 말은 없지만, 한 번쯤은 "그분도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랬겠지."라고 우리가 그분을 이해의 눈길로 봐줄 수만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또, 복지회 직원의 처우 문제가 한 분의 불친절로 말미암아 우연히 거론됐지만 이 일이 내 문제가 아니라고 가볍게 여기시지 마시고 많은 구성원께서 진지하게 마음속에 담아주시길 진정 부탁합니다.

2011/05/04 19:46 이글루스에서 작성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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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7시경 경찰과 국정원 소속 수사관들이 서울, 제주, 광주, 대전 등에서 ‘6.15공동선언실천 청년학생연대’ (이하 6.15청학연대) 회원 12명의 집을 압수수색했고 이 중 4명은 홍제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 합니다. [관련기사: 경찰 '6.15청학연대' 국보법 위반 수사]

일단 혐의는 516청학연대의 활동과 북한 방문 등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것인데, 이 사건은 2008년의 '사노련 사건(그동안 계속기각되었다가 최근에 집행유예로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혐의없음으로 판결이 난 근래의 '자본주의연구회 사건'과 더불어 또 하나의 굵직한 '공안 사건'이 될 것으로 보이며, 현 정부 들어서 자주 발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공안사건 흐름을 봤을 때 이번 일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 사건의 진실이 어떻든 간에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헌법에 명시된 바대로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 정부의 생각은 다른 것 같습니다. 일례로 일련의 다양한 공안 사건에서 보듯이 다양한 시민단체가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압수수색의 대상이 되고 있고 그 구성원이 체포 및 구금되며 '종북세력'이라는 칭호가 붙으며, 작년의 'G20 쥐벽서 사건'의 예에서 보듯이 두 명의 예술가(저는 적어도 그렇게 부르고 싶습니다.)가 국가의 격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구속됐으며 현재 검찰에게 징역 8개월과 10개월을 구형받았고 현재 판결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그들이 진짜 '종북세력'이며 진정 국가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그런 단체를 만들었을까요? 혹은 '국격'이란 것을 심각하게 훼손할 목적으로 그런 행위를 한 걸까요?

특정 사상이 위정자의 입장에서 보면 위험하고 불순할 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비판은 체재의 모순 및 부조리를 향해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들의 비판을 귀담아듣고 사회구조의 모순을 해결하지는 못할지언정 단지 거슬리단 이유만으로 '종북'과 '반역' 그리고 '체제위협'이라는 명목으로 공권력의 잣대를 들이대어 그들에게 '국가에 대한 죄인'이란 주홍글씨를 새기려고 하는 것은 사회에서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한 개인의 인권에 대한 거리낌 없는 탄압이자 민주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한국사회의 가치와 배치되는 초헌법 폭력으로 필히 사라져야 할 악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데 사회는 70-80년대로 회귀하려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종류의 사상과 표현의 억압을 위한 공안 사건이 발생할지 모르겠지만, 부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한 점 억압 없이 보장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 그것이 비록 위험해 보인다 할지라도―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합리적이며 생산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2011/05/04 17:57 이글루스에서 작성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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