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에 해당되는 글 25건

  1. 2017.06.08 오랜만의 번역, 그리고 뻘소리
  2. 2013.02.28 인생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1)
  3. 2012.11.01 유전자 변형 작물(Genetically modified crops)에 관한 단상(斷想)
  4. 2012.10.11 [서평]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를 읽고
  5. 2012.10.11 작은 과학 그리고 큰 과학
  6. 2012.09.24 유전자 변형 작물이 정말로 암을 유발하는가? ― 세랄리니 박사 연구팀의 결과에 대한 전문가들의 시각
  7. 2012.09.18 라마르크를 위한 변론 ― 페이 플램의 기고문 요약
  8. 2012.09.16 황금 거위, 과학, 경제성 그리고 한국의 과학 (1)
  9. 2012.01.15 다시 쓰는 창세기?
  10. 2011.12.02 실험하기 귀찮다. 연구하기 귀찮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하지만 ...
  11. 2011.11.23 망했다 (6)
  12. 2011.11.17 [교내 게시판에 게시한 글] 대학원생 대표자의 해명 및 사과를 요구합니다 (3)
  13. 2011.11.16 [교내 게시판에 올린 글] “의료공제 폐지”를 반대하며 고합니다.
  14. 2011.11.14 [교내 게시판에 올린 글] OOO대 학생 중 진보 정당 및 단체에 가입하신 분 혹은 지지자께 여쭙습니다 (2)
  15. 2011.11.07 죽은 새 증후군
  16. 2011.10.20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의 저작들
  17. 2011.10.20 불확실성 그리고 만델브로트 혹은 자본주의
  18. 2011.10.18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이데올로기
  19. 2011.10.06 진보신당에 미래는 있는가?
  20. 2011.10.05 동성애에 대한 단상
  21. 2011.09.29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의 저서
  22. 2011.09.29 연구할 시간이 없는 과학자
  23. 2011.09.29 "[최장집칼럼]‘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감춰진 상처"에 대한 소고
  24. 2011.09.29 왕가리 마타이(Wangari Maatthai) 그리고 환경운동
  25. 2011.09.29 도킨스 시리즈


요새 너무 바빠서 글 쓸 시간도 없다. 그래도 틈틈히 시간을 내서 책이나 논문은 읽는 편인데, 최근 발표된 리뷰 논문 가운데 관심이 가는 게 있어서 번역을 했다. 원 제목은 〈Tracing the peopling of the world through genomics〉으로 2017년 <Nature>에 게재된 진화인류학 (또는 진화유전체학) 동향을 소개한 글이다. 원 제목을 어떻게 번역할까 고민하다가 <유전체학으로 전 세계 인류 정착의 발자취를 따라가다>로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그리 마음에 들진 않는데, 능력 부족이니 별 수 없다.


너무 오랜만에 한 번역이라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고 일단 이대로 놔두자.


원글의 링크로 같이 표시했으니 관심 있는 사람은 직접 읽어보시길. 엇 ... 그런데 Open Access가 아니네 ... 마음 같아선 원본도 같이 첨부하고 싶지만 ... 저작권 문제 때문에 마음에 걸린다. 뭐, 원글의 이미지 파일을 번역본에 무단 삽입했으니 이런 말따위 할 처지는 아니지만.


http://www.nature.com/nature/journal/v541/n7637/full/nature213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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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뜻하지 않게 동문 두 명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한 명은 92학번 선배로 미국 텍사스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하는 중이었고, 다른 한 명은 97학번 후배로 학부를 졸업한 후 가톨릭 의대로 편입했었다. 그렇게 한 몇 년을 소식도 없이 지내다가, 오늘 다른 후배한테서 선배는 며칠전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했고, 후배는 폐암으로 작년에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92학번 선배는 나보다도 덩치도 좋고 [적어도 나의 기억 속에서는] 평소 운동도 열심히 했던 것으로 아는데, 뇌출혈 때문에 죽었다니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폐암으로 죽은 후배 녀석은 담배도 안 피우고 제 건강을 끔찍이 챙기던 아이였는데,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을 떠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말이 무엇일까? 무엇으로 이 기분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인생은 정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어."


질병 그리고 죽음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그들, 나와 찬란한 20대를 함께 했던 그 사람들이 병마로 말미암아 세상을 떠났다니 마음이 정말 착잡했다. 그리곤 나 자신을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내 건강은?" "나도 저렇게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죽고 싶지 않은데." 그들의 불행한 소식을 접하고 난 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동안 우울해졌다.


사실 나는 최근의 급격히 안 좋아진 건강 때문에 술도 거의 안 마시고 담배도 끊으려고 노력 중이다. 물론, 지난번 회식 때 [너무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 정말(!) 많이 마시긴 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마시는 횟수가 급격히 줄었다. 담배도 완전 골초 수준에서 하루에 5개비 미만까지 줄여놓은 상태였다. 금연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서도 의지가 약한 나로서는 한심한 노릇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 까지라도 줄였으니 대단한 일이다. 어쨌거나, 내가 이러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역류성 식도염으로 비롯된 가슴 통증의 악화를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서 그렇다.


몇 년 전, 강렬한 가슴 통증 때문에 "나도 혹시 폐 질환이 있는 게 아닌가?"라는 걱정이 들어서, 말도 안 되는 온갖 상상을 머릿속에 가득 담은 채 병원에 내원한 적이 있었는데, "당신의 폐는 건강하다"란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적이 있었다. [가슴 통증과 호흡 곤란은 역류성 식도염의 대표적 증상 가운데 하나다.] 사실, 지금도 평상시에는 숨쉬기가 무척 힘든데, 운동이나 달리기할 때는 신기하게도 호흡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고 가슴도 전혀 아프지 않다. 덕분에, 운동하는 데 별 무리는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다만 운동하고 나서는 여기저기 관절이 쑤신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어쨌거나 이런 문제 때문에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던 와중에, 두 동문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나니 "그것이 이젠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란 불안감이 갑자기 내 머릿속에서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20대, 아니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죽음"이란 두 글자는 나에게 무척 생소했다. 솔직히, "죽음"은 천수를 누리거나,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살만큼은 산 이들에게 주어진 인생의 마지막 관문이라고 생각했다. 불의의 사고로 죽은 이도 있었지만, 내겐 이것이 "죽음"의 일반적인 느낌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했음에도, 그들 대부분이 사고나 노환으로 죽었기 때문에 "죽음"은 나에게 당면한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간혹, 저 멀리 어딘가에서 "아무개가 어떤 병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 죽었어"란 소식이 들려와도 그건 나와 상관없었다. 하지만 두 동문의 뜻하지 않은 부고로 상황은 달라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사고로 죽은 사람도 아니었으며, 내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건강했고, 각각 40대 초반과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병으로 죽다니!


이제 내 나이 30대 후반. 이미 40을 훌쩍 넘긴 선배도 계시는 마당에 이런 말을 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긴 하지만, 개인의 성공보다도 명예보다도 사실은 건강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요즘이다. 그래서일까? 류승환 감독의 영화인 <짝패>의 대사 하나가 오늘따라 유달리 내 마음속에 강렬하게 울려 퍼진다.


"강한 놈이 이기는 게 아니라, 오래 살아남은 놈이 이기는 거야!"


그때는 저 대사가 그냥 멋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저게 현실일지도 모르겠다!"라고 느낀다. 진실로, 오래 살아야, 그리고 건강해야 내가 하는 "과학"도 "연구"도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내 주변 사람을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특히 나 자신을 위해서도 내 몸을 돌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내 연구가 아무리 값지고 멋진 일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갑작스럽게 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것도 다 부질없는 인생이다. 오히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아무리 보잘것없는 연구라 할지라도,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천수를 누리며 오랫동안 연구하다 보면 적어도 스스로 대견하지 않을까?


아무리 몸을 아끼고, 다듬어도 죽음을 피하기란 어렵지만,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이렇게 한 번 되뇌어본다.


자신의 몸 상태를 돌아보며,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삽시다! 내일의 인생은, 정말로 모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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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몬산토(Monsanto)의 제초제 라운드업(Roundup)에 대한 저항성이 있는 유전자 변형 작물(Genetically modified crop) 옥수수를 실험용 쥐에게 먹였을 때, 이들에서 유방암 등의 발병률이 높아졌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어 논란이 되었으며, 이 연구는 유전자 변형 작물에 호의적인 일부 과학자에게 호된 비판을 받았다 [1, 2, 3, 4]. 그리고 2012년 11월 7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모든 제품에 유전자 변형 작물 사용 여부를 의무적으로 명시하는 법안(Proposition 37)에 관한 투표가 실행될 예정이며 [5], 최근에는 미국 과학진흥협회(the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AAAS)가 이 법안이 유전자 변형 작물에 대해 과도한 공포를 조장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5, 6]. 이처럼 유전자 변형 생명체에 관한 논란은 점점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치닫고 있으며, 그 양상 또한 매우 격해지고 있다.



유전자 변형 콩을 키우는 농장 [출처: Daily Mail Online]



필자는 유전자 변형 작물에 대한 과학적 문제 제기는 어떤 식으로든 타당하다고 믿으며,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일은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한 비판, 방어 그리고 유전자 변형 작물에 대한 옹호도 과학적 방식으로만 철저하게 이루어진다면 그 또한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 두 진영의 인식에 있는데, 한쪽은 철저하게 은닉하거나 외면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은 철저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두 진영 모두 유전자 변형 작물의 과학성만 주구장창 바라볼 뿐이지 되려 문제의 본질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유전자 변형 작물을 연구하는 과학자 가운데 상당수는 유전자 작물 연구의 최대 지원자인 다국적 농업 기업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밥줄에 날 선 비판을 섣불리 갖다 대기 어렵다. 반대 진영 또한 이들 작물의 유해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길만이 몬산토 같은 다국적 기업의 악행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그것만이 이 세상을 지키는 일이라고 굳게 믿는 듯 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과학 자체에는 선악(善惡)이 없다. 문제는 그 과학에 올라탄 존재인 인간에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어떤 의도로 과학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과학의 유용성 여부는 극과 극으로 갈릴 수 있으며, 역사가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다. 과학자 다수는 어떤 주제를 연구할 때 순수한 의미에서든 속물적 계기든 어떤 의도를 가슴 속에 품으며, 이것은 비단 과학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전형적 행동 방식이다. 하지만 무엇을 보고 싶으냐에 따라서 그것이 유익하든 유해하든 상관없이 같은 결과를 얻더라도 매우 다른 해석을 내릴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전자 변형 작물의 유용성/유해성이라는 과학 논쟁은 두 진영 사이의 대립에 숨겨진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의도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끝없는 소모적 논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킴과 동시에 본질을 더욱 은폐하는 방향으로 사건을 이끌 것이며, 말 그대로 “죄 없는 허수아비를 때리는 짓”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찬성자나 반대자 모두 과학을 중심에 놓고 자신의 당위성이 제일이라며 서로 설전(舌戰)을 주고받기에 바쁘다. 예를 들어, 다국적 농작물 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찬성 측에서는 유전자 변형 작물이 다가올 전지구적 식량 위기 해결과 기근에 시달리는 저개발 지역 주민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반대 진영에서는 이 작물이 인류의 건강과 지구 환경을 해치며 우리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믿음이 팽배하다. 물론, 이들의 주장이 틀리지는 않다. 그렇다고 백 퍼센트 옳다고 보기도 어렵다. 득(得)이 있으면 실(失)이 있기 마련. 유전자 변형 작물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의 본질인가? 그것은 바로 20세기 이후 이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이다. 우리는 이윤 추구를 최고의 미덕(美德)으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초기 산업 자본주의 시대와 비교하면 그래도 나아졌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이윤 추구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악행이나 편법도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용납되는 것은 과거와 다를 바 없으며 어떻게 보면 더욱 정교해졌다고 할 수 있다. 몬산토 같은 다국적 거대 농작물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들이라고 특별히 다를 것도 없다. 단지, 이들은 자신의 이윤에 대한 무한한 갈망(渴望)을 “과학”이라는 울타리 뒤에 숨긴 채 문제의 본질을 은폐하고 있다는 점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당연한 듯이 “인류의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범지구적 인류애”라는 눈물 나는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치장되어 있다. 그리곤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일은 이윤 추구가 아니다! 우리의 노력은 인류를 위한 것이다!”


과학은 “악”이 아니다. 단지 사용하는 자가 그 운명을 결정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과학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바로 다국적 기업의 손에 넘어간 유전자 변형 작물 연구를 다시 우리에게 돌리는 일이다. 다국적 기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섣부른 공포심을 조장하거나 말도 안 되는 헛된 꿈만 가득한 과장과 숨김없이 유전자 변형 작물에 관한 과학적 진실을 대중 일반에게 설명해줘야 한다. 이 유기체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이점이 있고 어떤 위해(危害)가 있으며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냉철하게 대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국적 기업에 대한 연구 의존도”를 줄이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공적 자금으로 이들의 연구를 지원해야 한다. 이래야만 하고 싶은 말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법이다. 만일 이러한 시도가 어렵다면 과학자 스스로 최소한 자신의 양심을 걸고 스스로 문제를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키워야 한다. 이런 행동을 위한 결단이 어렵다는 것쯤은 잘 안다. 과학자도 사람인데 특별히 다를 게 뭐 있을까? 하지만 이런 일은 우리 과학자 말고는 제대로 할 사람이 없다. 솔직히 과학에 무지한 열정적 활동가, 정치가, 관료, 기자, 자본가 아니면 이런저런 필부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단언컨대, 과학자 이외엔 아무도 없다.


참고 문헌

[1] Séralini GE, et al. 2012. Long term toxicity of a Roundup herbicide and a Roundup-tolerant genetically modified maize. Food Chem Toxicol. 50: 4221-4231. [링크]
[2] MacKenzie D. 19 Sep 2012. Study linking GM crops and cancer questioned. New Scientist. [링크]
[3] 이성규. 2012년 10월 9일. 「GM 작물 안전성, 다시 도마 위에….」 사이언스타임즈. [링크]
[4] 「유전자 변형 작물이 정말로 암을 유발하는가? ― 세랄리니 박사 연구팀의 결과에 대한 전문가들의 시각」 [링크]
[5] Grant B. 30 Oct 2012. AAAS: Don't Label GM Foods. The Scientist. [링크]
[6] AAAS. 20 Oct 2012. Statement by the AAAS Board of Directors On Labeling of Genetically Modified Foods.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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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라는 과학철학자가 저술한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이라 불리는 비과학의 함정(Nonsense on Slits: How to Tell Science from Bunk)』이란 책을 발견했다. 책일 빌릴까 잠깐 고민하다가, 도서 대여가 돈 드는 일도 아니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대출 신청을 했다. 사실, 이 책이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을 곧바로 접하지 않은 이유는 이 책을 “그저 흔하디흔한 과학철학서”나 “시중에 많이 나도는 사이비 과학 폭로서” 정도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의 판단이 근거라곤 전혀 없는 개인적 편견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정말로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한 작품이었다.



[출처: 알라딘]



이 책은 연성 과학(soft science, 軟性科學)과 경성 과학(hard science, 硬性科學)의 특징을 살피면서 카를 포퍼(Karl Popper)라는 고집스러운 과학철학자 할아범이 오래전에 제기한 과학의 경계 문제(the Problem of demarcation, 境界問題)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늘날 과학으로 인정되거나 스스로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다양한 과학에 관해 고찰하면서, 이들을 진짜 과학(real science), 거의 과학(almost science) 그리고 사이비 과학(pseudo-science)으로 분류했다. 영광스런 무대 위에 오른 후보는 다음과 같다.


(1) 철학보다 더욱 철학적이 되어버린 현대 물리학의 다채로운 우주론(cosmology, 宇宙論), (2) 진화생물학 이론을 받아들였지만 진정한 과학인지는 진실로 의심되는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 進化心理學), (3) 한때 미국을 풍미했던 외계 지적 생명체에 관한 대대적 탐사 프로젝트인 세티(SETI,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4) 진정한 과학인 진화생물학과 사이비과학의 전형(典型)인 너무나도 끈질기고 병적으로 집요한 창조론(creationism, 創造論)과 그 적자(嫡子)인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 知的設計論), (5) 과학이 아니라고 오래전에 판명되었지만 아직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점성술(astrology, 占星術) 등등. 진화심리학에 관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저자는 진화심리학을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신, (인간을 다루지 않는) 사회생물학은 엄연한 (거의) 과학이라고 판단한다.


저자는 언론에 의해 조장되거나 왜곡된 과거와 오늘날 과학의 현주소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살피면서, 비과학적 주제가 언론을 통해서 어떻게 과학적으로 포장되는지, 과학적 사실이 어떻게 해서 과학적 사실이 아닌 것처럼 인식되어버리는지, 그리고 불순한 의도를 가진 세력이 과학을 어떤 식으로 교묘하게 왜곡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더불어, 저자는 유명한 과학자나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니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그리고 과거와 오늘날의 지식인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씽크 탱크(Think Tank)가 불리는 집단의 사례를 분석해 이들이 어떤 식으로 과학을 왜곡하는 데 앞장서는지 보였다.


과학 진영과 비과학 진영의 충돌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이 책에서 다루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지적 사기(intellectual impostures, 知的詐欺)라 불리는 물리학자 앨런 소칼(Alan Sokal)의 짓궂은 장난(?)으로 시작된 과학 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봄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과학을 오해하는지 설명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파울 파이어벤트(Paul Feyerabend)라는 괴팍하면서도 걸출한 철학자의 과학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오해의 실체를 파헤쳤다. 이와 함께, 저자는 과학을 교조적 선언으로 받드는 과학주의(scientism, 科學主義)도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피글리우치는 과학이 발전하는 원리에 관해서도 고찰했다. 실제로, 그는 책에서 토마스 쿤(Thomas Kuhn)의 유명한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일이 과학 발전 과정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인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물리학에서는 그런 측면이 있지만, 생물학 같은 분야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진실로, 이 책은 정말 잘 쓰인 책이다. 과학철학자이면서도 식물학과 유전학을 전공한 저자의 경험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 책의 내용은 실험 생물학을 전공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크게 와 닿는다. 덧붙여, 이 책은 그 어떤 대중적 과학철학/과학사회학 도서보다도 재미있다.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숨넘어갈 정도로 낄낄거리며 웃은 적도 있다. 그만큼 이 책의 문장 하나하나가 촌철살인(寸鐵殺人) 그 이상의 의미와 유머로 가득하다. 과학이 무엇인가, 과학철학이 무엇인가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을 읽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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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을 비롯한 과학 대부분은 연구자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이나 관찰로 얻은 결과를 바탕으로 그 타당성을 검증하는 전통적인 가설 기반 연구(hypothesis-driven research, 假設基盤硏究)를 중심으로 지식 체계를 구축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 대부분은 연구자 개인이나 수 명 내외로 조직된 소규모 실험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연구를 편의상 (연구 주제의 중요도가 아니라 연구 규모가 작음을 뜻하는) 작은 과학(small science)이라 부르도록 하자. 물론, 과거에도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실험실 사이의 상호 협력 체계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연구는 규모는 (마치 가내 수공업을 연상케 하는) 작은 과학에 머물러 있었다. 소규모로 진행되는 연구를 “가내 수공업”에 비교했다 해서 기분 상하지 않길 바란다. 사실, 나도 이런 식의 “가내 수공업” 연구에 종사하는 일개 연구 노동자다. 게다가 이렇게 멋지고 성공적인 가내 수공업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인 연구 방식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바로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때문이다. 전 세계적인 대규모 협력 연구인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의 시작은 “인간의 DNA 염기서열을 전부 파악하면 생명 현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란 물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단위 연구는 존 설스턴(John Sulston)과 로버트 워터스톤(Robert Waterstone)의 꼬마선충(C. elegans) 유전체 지도 작성이라는 선도적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 인간 유전체 지도의 완결로 생명 현상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마음속에만 담아두기로 하자. 어쨌든, 반대자와 회의론자의 거센 압박을 견뎌낸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는 과거에 성공했으며 오늘날에도 성공적이니까 말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실패했다면 생명 과학의 역사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의 파급 효과는 과학 전체로 봤을 때 실로 엄청났다. 이것은 단지 지식 체계의 확장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즉, 새로운 학문의 출현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실제로,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의 성공은 오믹스(Omics)의 출현을 이끌었으며, 기존의 생명과학 연구 영역도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생명과학 연구의 흐름 자체도 많이 달라졌다. 바야흐로 (절대로 연구 주제의 중요도를 따지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연구의 규모가 큼을 의미하는) 큰 과학(big science)이 과거와 비교했을 때 흔하디흔한 연구 방식이 되었다. 진심으로 바라 건데, “큰 과학”이나 “작은 과학”이란 표현에 기분 상하지 않길 바란다. 계속 강조했지만, 이것은 연구의 경중(輕重)을 따지는 게 아닌, 단지 연구 규모를 빗댄 표현이니까 말이다.


확실히,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의 성공 덕분에 큰 과학이라 불리는 대규모 연구의 발족(發足)이 증가했다. 그리고 최근 이런 종류의 연구가 『셀(Cell)』, 『네이쳐(Nature)』 그리고 『사이언스(Science)』와 같은 유명 학술지나 대중 과학지에 게재되는 빈도 또한 높아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생명과학 연구의 트렌트(trend)가 전통적인 방식에서 탈피하고 있음을 방증(傍證)하고 있다. 더불어, 단일 연구에 투입되는 돈의 규모 또한 과거에 비해 급속히 커졌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대해 많은 과학자는 한결같은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즉, 작은 과학에 대한 재정 지원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 때부터 시작된) 비관론 말이다.


자신의 존재와 천지창조의 원리가 과학적으로 밝혀지길 기다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해 연구비에 목말라 하는 과학자의 염원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이보다도 더 기쁜 일은 없으리라. 하지만 자연의 원리를 밝히는데 초자연적인 방법을 거부하는 과학자 다수가 초자연적인 신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도 한 편으로 웃긴 일이며, 더불어 그런 식의 제한 없는 재정 지원이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 사회의 일원으로서 썩 달갑지만은 않다. 따라서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전체 연구비는 늘 제한적이기 마련이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을까?”는 과학자, 특히 자기 실험실을 운영하는 연구 책임자라면 누구나 갖는 고민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이렇게 한정된 연구비 내에서 나날이 늘고 있는 큰 과학에 대한 재정 지원 비율이 높아진다면, 작은 과학에 돌아갈 연구비는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작은 과학에 종사하는 과학자가 큰 과학의 승승장구(乘勝長驅)를 바라보며 한숨짓는 이유다.


사실, 대부분의 기초 과학 연구는 돈벌이와는 전혀 상관없다. 그러므로 이윤 추구가 최고의 미덕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벌이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기초 과학 연구에 재정 지원을 해줄 정도로 머리가 돈 사적 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아니, 아예 관심조차 없다고나 할까? 물론, 돈벌이와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기초 과학 연구가 아주 가끔 잭팟을 터뜨릴 때가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거위가 황금알을 낳는 것보다도 매우 어려운 일이니 기대를 품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초 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에게 정부 지원 연구비에 대한 절실함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이마저도 과학자의 간절함을 풀어주기에는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가뭄 중에 가끔 내리는 쥐똥만큼의 빗방울이라도 갈증을 해결할 수 있으니 이 정도라도 어디냐며 만족해야 하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런데, 큰 과학에 대한 연구비 지원이 점차 증가한다면 작은 과학의 연구비 수혜는 그에 반비례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큰 과학이 어떤 식으로든 성공적으로 끝나거나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포장된다면 그 비율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작은 과학에 몸담은 과학자 사이의 연구비 획득을 위한 치열한 경쟁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데, 심지어 어떤 과학자는 이런 상황을 빗대어 “이러다 전통적 접근법을 고수하는 연구는 절멸하는 게 아니냐”는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늘어놓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일리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학자 다수가 품고 있는 이런 비관론은 정말로 실현될 가능성이 있을까? 진정, 작은 과학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구태(舊態)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런 상황이 일어나기 전에 어떤 조처(措處)를 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지식 생태계 문제이며 과학의 지식 체계 구축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느냐에 관한 위기의식이다. 물론,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에서 보인 것처럼 큰 과학도 중요하다. 그런 큰 과학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과학적 지식의 폭과 생명 현상의 본질에 관한 물음은 더욱 다양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큰 과학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큰 과학은 나름의 방식대로 생명 현상의 전반적 네트워크를 이해하는 데 큰 이바지를 할 수 있지만, 이러한 네트워크도 유전자 하나하나의 기능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헛발질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오늘날 큰 과학이 승승장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전통적인 방식의 작은 과학의 분전(奮戰) 덕분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과거에도 성공적이었던 작은 과학은 오늘날에도 그 존재가 퇴색하기는커녕 중요성은 더욱 커져만 간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작은 과학의 중요성을 설파(說破)하는 기고문 하나가 올라왔다. 생물학 전공자라면 한 번 정도 들어본 적이 있는 유명한 세포생물학 교과서인 『세포의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 of the Cell) 』의 저자이자 『사이언스』의 편집자인 부르스 앨버츠(Bruce Alberts)가 「“작은 과학”의 종말?(The End of “Small Science”?)」이란 제목으로 『사이언스』에 게재한 글이다 [2].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규모 연구의 양적 확장이 있다고 해서 전통적인 작은 과학이 사라질 일은 없으며, 오히려 이런 연구가 더 많이 진행되어야만 생명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생명과학의 연구 분야는 놀라우리만치 확장했으며, 많은 새로운 연구 분야가 탄생했다. 더불어, 인간 유전체 지도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생명 현상에 대한 다양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마치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그보다 몇 배의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는 꼴이라고나 할까? 이런 이유 때문에 앨버츠는 그의 기고문에서 큰 과학의 확장으로 작은 과학이 절멸하는 일이 절대로 발생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작은 과학이 이전보다도 더 활성화되어야만 과학, 즉 생명과학이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지를 펼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잊지 않았다. “Ensuring a successful future for the biological sciences will require restraint in the growth of large centers and -omics–like projects, so as to provide more financial support for the critical work of innovative small laboratories striving to understand the wonderful complexity of living systems.” 즉, “생명과학의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를 위해 작은 과학에 대한 더 많은 (정부의) 재정 지원을 위해서라도, 큰 과학이라 불리는 대규모 연구에 대한 재정 지원은 어느 정도 제한할 필요가 있다.”


브루스 앨버츠의 글은 무료로 열람할 수 있으므로 꼭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참고 자료
[1]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유전자 시대의 적들(The Common Thread)』 존 설스턴(John Sulston), 조지나 페리(Georgina Ferry) 지음 / 유은실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년.”을 참고하길 바란다.
[2] Alberts B. 2012. The End of "Small Science"? Science. 337: 1583.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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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변형 작물(Genetically modified crop 또는 GM crop)은 오늘날 많은 사람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특히,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유전자 변형 작물이 직∙간접적으로 우리 밥상 위에 올라오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그 관심을 더욱 커져만 간다. 이 때문에 그러한 관심 대부분은 “이들 작물이 우리 건강에 정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가”에 쏠려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까지, 이들 유전자 변형 작물이 우리 건강에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학자 대부분은 어느 정도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합의에 반기를 든 연구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질레스 에릭 세랄리니(Gilles-Eric Séralini) 박사 주도로 진행된 연구로, 「라운드업 제초제와 라운드업 제초제에 내성을 갖는 유전적으로 조작된 옥수수의 장기적 독성(Long term toxicity of a Roundup herbicide and a Roundup-tolerant genetically modified maize)」이란 제목으로 『식품과 화학 독성학(Food and Chemical Toxicology)』이란 학술지에 게재되었다 [1].


이 연구는 라운드업(Roundup) 제초제에 내성을 가진 유전자 변형 옥수수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한 것으로, 라운드업 제초제를 처리하거나 처리하지 않은 제초제 내성 옥수수 또는 0.1 ppb(parts-per-billion, 또는 10억분의 1)로 물에 희석한 라운드업 제초제를 쥐에게 2년간 먹힌 후 상태 변화를 주기적으로 측정했다 [1]. 그 결과, 연구팀은 GM 작물 또는 제초제를 먹인 쥐가 유전자를 조작하지 않은 옥수수를 먹인 쥐인 대조군과 비교해서 호르몬 불균형을 더 많이 겪었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이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방암이라든지 간 이상의 빈도 또한 대단히 높았는데, 요약하자면 “GM 작물은 건강에 매우 좋지 않다”가 이들의 주장이다 [1]. 그런데 실제로 이들의 주장이 정말 타당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일단의 비판적 전문가―아마도 다국적 농작물 회사를 위해 일하는 연구자―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2].


이 연구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전문가의 의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 전문은 『뉴사이언티스트(New Scientist)』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이 발견이 신뢰할만한가? : 그렇지 않다. 이들이 실험에 사용한 쥐는 유방암에 걸리기 쉬운 실험용 생명체다. 따라서 먹이를 무제한 공급하거나 호르몬 불균형을 일으킬 수 있는 곰팡이로 오염된 옥수수를 먹여도 암이 잘 발생한다. 그리고 이 쥐는 오래 살아도 암이 잘 발생한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대로 “GM 작물 섭취가 암 발생 빈도를 높인다”라고 주장하려면 이런 가능성을 배제해야 하는데, 이들은 이를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GM 옥수수 섭취가 암 발생의 원인인지는 이들의 주장처럼 확신할 수 없다.


(2) 하지만 GM 옥수수를 먹인 쥐가 그렇지 않은 쥐보다 더 아프지 않았는가? : 일부가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20마리의 대조군 쥐 가운데 25 퍼센트에 해당하는 5마리 쥐도 마찬가지로 암에 걸려 죽었다. 그리고 GM 옥수수를 섭취한 실험군 쥐 가운데 일부는 오히려 대조군보다 더 건강했다. 따라서 그들이 주장이 신뢰성을 얻으려면 엄밀한 통계 분석을 거쳐야 하는데, 그들은 (특히 수명 관련 자료 분석에서) 그 흔하디흔한 표준 편차 분석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 연구팀은 복잡하면서도 일반적이지 않은 통계 분석(complicated and unconventional analysis)으로 연구 결과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이것은 “통계를 이용한 낚시질(statistical fishing trip)일 뿐이다.” 더불어, 실험군 수와 비교했을 때 대조군 수가 너무 적다.


(3) 통계 분석 말고도 다른 문제는 없는가? : 이 연구팀은 자신들의 연구가 동물 전체 수명을 통틀어 GM 작물의 유해성을 파악한 첫 사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전에도 더욱 철저하게 계획된 연구가 있었으며, 이 연구에서는 건강에 유의미한 영향이 없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성 연구는 2년 동안 진행된다. 그리고 이 연구도 2년 동안 진행되었다. 결과적으로 연구 방법에서도 특별한 점이 없다. 더욱이, 연구팀은 라운드업을 먹었을 때와 GM 옥수수를 먹였을 때 똑 같은 독성 효과가 관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GM 옥수수는 제초제를 처리하지도 않았다. 제초제와 그 제초제를 분해하는 효소를 발현하는 작물이 동일한 병리학적 증상을 나타낸다는 게 과연 말이 되는 일인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4)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이 일이 실제로 근거 없는가? : 꼭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문제는 이 연구 결과에서 쥐가 얼마만큼의 작물 또는 제초제를 먹든 간에 동일한 암 발생 효과를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어떤 물질이 병리학적 원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처리량이 증가함에 따라 그 발생 빈도 또한 커져야만 한다. 그런데 이들 연구는 전혀 그렇지 않다.


(5) 왜 과학자가 이런 일을 하며 이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단체는 누구인가? : 이 연구팀은 오래전부터 GM 작물을 반대해 왔고, 2010년에도 GM 작물에 독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동료 독성학자들은 이 결과에 매우 회의적인 편이다. 더불어, 이 연구는 파리에 거점을 둔 Committee for Research and Independent Information on Genetic Engineering 또는 CRIIGEN라 불리는 기관의 후원을 받는다. 그리고 이 기관의 과학 자문 팀장이 바로 이 논문의 교신 저자인 세랄리니 박사다.


난 개인적으로 유전자 변형 작물에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그것이 세랄리니 박사 연구팀의 주장처럼 “임상적·의학적 안정성" 자체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유전자 변형 작물도 초창기에는 몇 가지 (어떻게 보면 매우 심각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많은 개선이 이루어져 안정성 측면에서 과거에 비해 많은 향상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비판적 입장에 서 있는 자들의 비판 또한 백 퍼센트 타당하며 순수하게 과학적이며 학술적이라고도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연구 대상이 바로 유전자 변형 생명체이므로 세랄리니 박사와 같은 격렬한 반대자가 자신의 밥줄에 엄청나게 초를 치는 행위도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며, 더불어 유전자 변형 생명체를 직접 연구하는 과학자 다수는 어떤 식으로든 다국적 농작물 회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로써도 "유전자 변형 작물 연구 자체를 부정한다고도 여겨질 수 있는" 세랄리니 박사의 주장은 매우 심각한 위협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과는 별개로, 필자를 포함한 일부 과학자는 유전자 변형 작물이 환경에 장기적으로 어떤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점에서 내가 우려하고 비판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1) 생태학적 문제, 즉 이들 유전자 변형 작물이 생태계를 교란시킬 가능성, 그리고 (2) 유전자 변형 작물이 본래 의도(사실은 이것도 정말 진정한 대의라는 게 있었느냐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와는 다르게 더욱 자본주의 사회의 정교한 상품이 되어간다는 현실이다. (1)번 문제는 단기적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현재로서는 어떤 결론도 명확히 내리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2)번 문제의 경우엔, 분석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명확하다. 최근 미국에서도 몬산토 같은 거대 기업에 대한 식물 종자 의존도가 커지고 있으니까 말 다했다. 이들 연구팀이 비판적으로 연구한 "라운드업 제초제 내성 유전자 변형 옥수수"와 "라운드업 제초제"도 하나의 완전한 자본주의적 패키지 상품으로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사실, 이런 패키지 상품은 이것 하나만도 아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리라.


상황이 이런데도, 일부 과학자는 거대 다국적 농산물 기업의 횡포는 외면한 채 유전자 변형 작물의 대의만 줄기차게 주장하는데, 이건 뭐 눈 가리고 아웅도 아닌, 일종의 현실 도피나 마찬가지다. 유전자 변형 작물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까지는 좋다. 과학에 선악이 어디 있는가? 다만, 과학도 인간 활동의 산물이니만큼 자기 연구 결과를 누가 어떤 식으로 사용하고 앞으로 어떤 사회적·환경적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결과를 가져올지 확실히 인지해야 하는데, 이것은 과학자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러한 비판과 문제의식이 유전자 변형 작물 연구자 사이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모양새니 상황이 좀 암울하긴 하다. 어쨌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어떻게 보면 정치성이 지나치게 짙게 드리워진) 이 소모적 논쟁은 앞으로도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참고 문헌
[1] Séralini GE, et al. 2012. Long term toxicity of a Roundup herbicide and a Roundup-tolerant genetically modified maize. Food Chem Toxicol. 50: 4221-4231. [링크]
[2] MacKenzie D. 19 Sep 2012. Study linking GM crops and cancer questioned. New Scientist. [링크]
[3] [특집] GMO 안전성 과연 문제없나 ― 하정철 박사. 한겨레. [링크] : 한겨레 사이언스온에 올라온 기사인데, 한 번 읽어보시길. 판단은 여러분에게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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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저술가인 페이 플램(Faye Flam)이 쓴 「프랑스인 무신론자 라마르크에 대한 몇 가지 변론(Some Vindication for "French Atheist" Lamarck)」에 나와 있는 라마르크 관련 에세이. 아직도 많은 이들은 라마르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품고 있다. 그는 진정 똑똑한 사람이었다. 다만, 글을 너무 재미없고 어렵게 썼을 뿐이다. 핵심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많은 이에게 라마르크 진화로 알려진 “후천적으로 획득한 형질은 자손에게 유전 가능하다”는 사실 라마르크(Jean Baptiste Lamarck, 1744~1829)가 주장하지 않았다. [시카고 대학 역사학자인 로버트 리차드스(Robert Richards)에 따르면, 라마르크의 진화론은 1859년에 출간된 다윈의 진화론보다 수십 년 먼저 발간된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2) 라마르크가 살던 당시에는 “후천적으로 얻은 형질의 유전”이란 잘못된 상식은 일종의 통념이었다. 라마르크의 실책이라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정도다. 하지만 다윈도 마찬가지였음에도, 다윈의 추종자들은 그것을 부각시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 특히, 라마르크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은 진화론자든 창조론자든 관계 없이 그의 적대자가 행한 악의적인 조작과 누명 덕분이었다.

(3) 라마르크의 업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은 “생명체는 진화하며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어떤 종이 다른 종으로 바뀔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4) 그럼에도, 라마르크식 유전 현상은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이며, 오늘날 과학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4번 항목 같은 경우엔 암이라든지, 유전병 관련해서 최근 많이 주목받고 있다. 시간이 된다면 위 기사를 직접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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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연구는 일반인이 봤을 때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개미, 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모양, 초파리의 섹스, 화석, 원숭이에게 셈법을 가르치기, 별의 탄생 등등. 경제적 가치를 최고의 미덕이라 믿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 창출” 및 “효용성”과는 거리가 먼 과학자의 덕질은 한량(閑良)의 유희(遊戱)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밑 빠진 독에 물 붇기 식으로 연구에 투입되는 그 돈이 실제로는 나의 피와 땀이 어린 세금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면 대부분 사람은 분노로 피가 거꾸로 치솟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연구가 정말로 쓸모없을까?


쓸모없는 과학 쓸모있는 과학


역사적으로 봤을 때 오늘날 인간 사회의 변혁과 과학기술 혁신 대부분은 ‘멍청하거나 쓸모없는’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그런 ‘무의미한’ 연구 대부분은 많은 사람의 주머니에서 십시일반(十匙一飯) 거둬들인 세금으로 진행되는 ‘공적 연구(公的硏究)’였다. 사실, 단기간에 사적 이익을 창출해야 하는 기업이 ‘쓸데’없는 연구에 재정적 지원을 하기란 어렵다. 즉, 신약 및 신기술 개발처럼 어떤 경제적 이익을 기대할 수 없다면 대부분의 기초 과학 연구는 기업에게 관심조차 받기 어렵다. 하지만 기업이 그토록 원하는 고부가가치 창출도 기초 과학의 발전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더불어, 과학사를 통틀어 어떤 특수한 사회∙경제적 이익을 염두에 둔 연구가 ‘과학과 사회의 진보’를 이끈 경우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있다손 치더라도 첫 단추는 ‘가치 창출’과는 거리가 먼 사소한 과학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으며, 그러한 연구 대부분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물론, 과학혁명의 시기라 일컫는 17~19세기 상황은 오늘날과는 좀 다르다. 훗날 프랑스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던 프랑스 왕립 과학 아카데미(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는 예외로 하더라도 당대(當代)의 과학 연구는 주로 부유한 자산가의 후원을 받거나 부유한 과학자(또는 자연철학자)가 자신의 사비를 털어 진행되었다. 어떤 식으로 연구비를 충당하든 그들은 처음부터 어떤 사회∙경제적 이익을 바라고 시작하지는 않았다. 무엇인가 바라는 게 있었다면, 그것은 지적 욕구의 충족이나 사회적 명성의 획득이 전부였다. 물론 훗날 럼포드 백작(Count Rumford)이라 불린 벤저민 톰프슨 경(Sir Benjamin Thompson, 1753~1814)과 같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1].


기초 과학 연구에 대한 오해 ― 프록스마이어와 황금 양모 상


실상(實相)이 이런데도 많은 이들은 과학 발전의 역사적 맥락은 고려하지 않고 ‘쓸데없는’ 기초 과학 연구가 이익을 창출하지 않는다며 말 그대로 ‘까기에’ 바빴으며, 지금도 바쁘다. 그리고 이것은 개개인의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과학이 움직이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서 드러나는 전형적 양상이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사례가 있다. 윌리엄 프록스마이어(William Proxmire) 민주당 상원 의원은 “황금 양모 상(Golden Fleece Award, 黃金羊毛賞)을 제정해 1975~1987년까지 무려 13년 동안 “미국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은 쓸모없는 연구”를 진행한 과학자(또는 과학자 집단)에게 조롱과 비아냥의 의미로 이 상을 수여해왔다 [2, 3]. 말이 ‘상(賞)’이지 이것은 과학에 일방적으로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놀라운 것은 그의 조롱 대상 가운데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 프로그램(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또는 SETI)을 진행한 미 항공 우주국(the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또는 NASA)과 인간관계에 관한 연구에 재정적 지원을 한 미국 국가 과학 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 또는 NSF)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2]. 비록 프록스마이어 의원 본인은 미국 국민의 세금이 유용한 곳에 쓰이도록 하겠다는 숭고한 대의를 갖고 시작했겠지만, 이 같은 기초 과학 연구를 향한 적대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2].


과학, 스스로를 변호하다 ― 황금 거위 상


최근에 프록스마이어의 악의적인 ‘황금 양모 상’과 그 적자(嫡子)를 조롱함과 동시에 그동안 과학에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내려는 의미 있는 행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황금 거위 상(Golden Goose Award)’이다 [4, 5]. “황금알을 낳는 거위”란 고전 동화에서 따온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 상의 목적은 “일반인이 보기에 효용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이상한 과학 연구가 훗날 과학기술의 진보와 사회 변혁을 이끈 다양한 사례를 조명(照明)함으로써 기초 과학 연구에 대한 정부 지원의 대의”를 확보하는 것이다 [4]. 실제로 이 상은 지난 60여 년 동안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은 연구 가운데 과학 및 사회적으로 중요한 발견과 진보를 이끈 경우에만 수상 자격을 주며, 매년 미국 과학 진흥회(the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와 미국 대학 협회(the Association of American Universities)를 포함한 미국 내 다양한 과학∙대학 단체가 협의하여 수상자를 선정할 계획이라고 한다 [4].


그러한 심사 과정을 거쳐 올해에는 (당시엔 말도 안 되는) 방사선 파장 증폭 연구로 레이저 기술 발전에 기여한 물리학자 찰스 타운스(Charles Townes)와, (의학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열대 산호초의 해부학 구조 연구로 뼈 이식 등의 의학 분야 발전에 결정적 이바지를 한 유진 화이트(Eugene White), 로드니 화이트(Rodney White), 델라 로이(Della Roy) 그리고 고인(故人)이 된 존 웨버(Jon Weber), 그리고 (당시에는 파급력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조차 못했던) 해파리의 신경계 연구 과정에서 녹색 형광 단백질(Green Fluorescent Protein 또는 GFP)을 발견하고 이를 생명 과학 연구에 적용한 오사무 시노무라(Osamu Shinomura), 마틴 찰피(Martin Chalfie)와 로져 치엔(Roger Tsien) 등 총 8명이 영광스러운 “황금 거위 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4, 5]. 이 가운데 레이저 기술과 GFP 연구는 1964년과 2008년에 각각 노벨상을 받았다 [4, 5].


한국 과학의 고민


미국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과학에 요구하는 사명감은 매우 크다. 정치인, 정부 관계자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은 “대한민국의 과학적 위상(位相)을 국제적으로 드높여야 한다”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한다. 그러면서 “한국은 자원이 없으니까 과학기술의 개발을 통해 국가의 부(富)를 창출함으로써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야 한다”는 70~80년대의 낡은 슬로건을 대의(大義)로 외치면서 한국 과학에 “경제적 가치” 창출을 강요한다. 그러나 모든 과학 연구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경제적 이익이라는 자본주의적 미덕(美德)이 과학을 이끄는 원동력도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과학과 사회의 진보는 이익 창출과는 거리가 먼 다양한 기초 과학 연구가 보장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상황 아래에서 기업이 좋아하는 ‘이윤 창출’의 기회도 많아질 수 있다. 즉,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생태계에서 얻는 게 많듯이 연구 다양성이 풍부해야 ‘똥’이든 ‘된장’이든 건질 것도 많아진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가 과학에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닥치고’ 국가의 경제적 이익을 증대시키는 일이다.


그 결과, 한국의 과학은 생태계 자체가 많이 왜곡되어 있다. 진정으로 한국의 과학 현실은 참담하다. 박정희 개발 독재 때부터 시작한 “엘리트 중심의 연구”와 “세계 최초∙최고”라는 헛된 수사(修辭)는 “황우석 사태”라는 희대의 사기극을 연출했고, 과학 강국을 건설하겠다는 불굴의 일념(一念)은 이들을 흡수할 사회적 인프라는 고려하지 않은 채 과학기술인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동반 양산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연출했다. 더불어, 정치인은 앞뒤 생각 없이 선거에서 승리할 목적으로 실현 가능성도 불확실한 단기적 공약만 연신 남발한다. 그리고 정부가 계획한 연구 지원의 수혜자는 연구비 경쟁에서 이미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과학자로 국한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과학자는 안정적 연구비 확보를 위해 정부가 원하는 분야의 연구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한국의 기초 과학은 고사(枯死) 직전이다.


맺음말


도대체, 한국의 과학이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별거 없다. 당장 돈이 안 되는 기초 과학 연구일지라도, 정말 쓸모없는 ‘잉여로움’ 가득한 연구일지라도 학문적 타당성만 명확하다면 정부는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아낌없이 지원해야 한다. 연구자가 자기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편안히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이미 기득권을 확보한 과학자보다는 신진 과학자에게 다 많은 재정적∙환경적 지원을 함으로써 기초 과학 연구의 풀(pool)을 확충해야 한다. 더불어 앞으로 과학을 이끌어나갈 미래의 예비 과학자에게 한국 사회에서도 안정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한국 과학이라는 생태계 안에서 연구 다양성이 보장되어야만, 이 사회가 진정으로 원하는 “과학을 통한 가치 창출”의 기회도 폭넓게 확보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별생각 없이 씨앗을 뿌리고 키운 쭉정이가 내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거듭날지 누가 알 수 있으랴? 한국 과학이 발전하려면 당장의 이익을 좇는 필부(匹夫)의 편협함이 아니라 100년 200년 또는 그 이상을 내다보는 현자(賢者)의 혜안(慧眼)이 필요하다.


참고 문헌
[1] Benjamin Thompson. Wikipedia. [링크]
[2] Golden Fleece Award. Wikipedia. [링크]
[3] Golden Fleece. Wikipedia. [링크] : “황금 양모(Golden Fleece, 黃金羊毛)“는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된 말로 “희생을 통해 신에게 바쳐진 성스러운 제물”을 뜻한다고 한다. 정확히 어떤 의미로 프록스마이어 의원이 이 말을 썼는지 잘 모르겠지만, 맥락으로 판단했을 때 “과학자의 쓸모없는 호기심을 위해 희생된 정부의 세금”을 빗대 사용했으리라 추측한다.
[4] The Golden Goose Award [링크]
[5] Boyle A. 13 Sep 2012. Science oddities win Golden Goose. NBC News.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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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창세기?

2012.01.15 14:31 from 잡글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가 쓴 『왜 다윈이 중요한가』(Why Darwin Matters)라는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었다. 마이클 셔머, 그는 누구인가? 내가 일일이 찾아서 쓰긴 귀찮고 하니 알라딘의 작가소개를 인용하기로 하자.

리처드 도킨스, 故 스티븐 제이 굴드 등과 함께 과학의 최전선에서 사이비 과학, 창조론, 미신에 맞서 싸워온 인물이다. 1954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페퍼다인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에서 실험심리학 석사, 클레어몬트대학원대학교에서 과학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20년 동안 교수로 있으면서 옥시덴탈대학,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글렌데일대학에서 심리학과 진화론, 과학사를 강의했다.
1992년 과학저널 『스켑틱(Skeptic)』을 창간해 현재까지 발행인을 맡고 있으며, 1997년 과학주의 운동의 본거지로 회의론자 학회(Skeptics Society)를 설립해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이다. 또한 『사이언티픽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에 고정 칼럼을 기고하고 있고, 클레어몬트대학원대학교 경제학 부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물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회의론을 전파하고자 강연 및 저술, 대중 매체 활동을 벌이면서, 대중을 현혹하는 심령술사와 창조론자, 사이비 역사학자와 컬트 집단을 고발하는 데 앞장서왔다. 과학과 이성, 나아가 인류를 위협하는 세력들에 정면으로 맞서며 대중을 선도해온 과학계의 전사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故 스티븐 제이 굴드는 그를 일컬어 “이성의 힘으로 인간의 품위를 지켜내는 행동가이자, 대중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저술활동도 활발히 하는 그는 이미 여러 권의 저작을 선보였는데, ‘믿음의 3부작’이라 불리는 대표작 가운데 ‘사이비 과학과 미신, 그 밖에 우리를 미혹케 하는 것들’에 관한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Why People Believe Weird Things)》를 필두로, ‘종교의 기원과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를 주제로 한 《우리는 어떤 식으로 믿는가(How We Believe)》, ‘도덕성의 진화적 기원’을 다룬 《선악의 과학(The Science of Good and Evil)》이 있으며, 이 외에도 ‘어떻게 마음이 작동하고 우리의 사고가 오류를 범하는지’ 파헤친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 ‘과학과 사이비 과학 사이의 애매모호한 공간’을 말하는 《과학의 변경 지대(The Borderlands of Science)》, ‘찰스 다윈과 자연선택 이론을 공동으로 발견한 앨프레드 월리스’의 평전 《다윈의 그늘에서(In Darwin's Shadow)》, ‘과학과 종교의 공존’을 제시한 《왜 다윈이 중요한가(Why Darwin Matters)》 등이 있다.


『왜 다윈의 중요한가』란 책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창조론과 지적설계론은 서로 다른 것인가? 아니면 같은 것인가? 그들은 왜 과학이 아닌가? 그렇다면 종교는 진화론과 양립할 수 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인(!) 어투로 독자에게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면서 마지막에 그는 "성경의 창세기를 현대 과학의 언어로 재해석해 쓴다면 이런 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며 글을 마쳤다. 그 글이 상당히 재미있는데, 번역판이 재미있으니 원문으로 보면 더욱 재미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태초에 구체적으로 말해서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정오에 하느님께서 양자 거품의 요동으로부터 빅뱅을 창조하셨으며, 우주 인플레이션과 팽창하는 우주가 뒤를 이었다. 깊은 위에는 어둠이 있었다. 하느님께서 쿼크들을 창조하셨고, 쿼크들로 수소 원자들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수소 원자들이 융합하여 헬륨 원자가 되라고, 융합 과정에서 빛의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하라고 명령하셨다. 빛을 내는 그것을 태양이라 부르셨고, 그 과정을 행융합이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는 빛을 흐뭇하게 보였다. 왜냐하면 이제 당신쎄서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지구를 창조하셨다. 이렇게 저녁이 가고 아침이 되어 첫째 날이 지나갔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융합으로 빛을 내는 것들이 하늘에 많이 있으라 하셨다. 융합으로 빛을 내는 것들 중 일부를 무리지어 은하계라고 부르셨는데, 지구에서 보기에 이 은하계들이 수백만 광년, 심지어 수십억 광년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이냐면, 기원전 4004년에 일어난 첫 창조보다 은하계들이 먼저 창조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이것이 혼란스러워서, 하느님께서는 힘 잃은 빛을 창조하셨다. 그렇게 해서 창조 이야기는 보존되었다. 그리고 적색 거성, 백색 왜성, 퀘이사, 펄사, 초신성, 웜홀, 심지어 아무것도 빠져나갈 수 없는 블랙홀 같은 진기하고 다채로운 것들을 많이 창조하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엇에도 구속될 수 없기 때문에, 블랙홀에서 정보가 탈출할 수 있는 호킹 복사를 창조하셨다. 이것을 만드시느라 하느님께서는 힘 잃은 빛보다 더 녹초가 되셨다. 이렇게 저녁이 가고 아침이 되어 둘째 날이 지나갔다. … (후략)


이후에도 셋째 날에서 일곱 째 날까지 현대 과학의 언어로 창세기에서 지구 탄생에 대한 그 순간을 재해석했는데, 정말 재미있다. 직접 책을 읽어보시거나 아니면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보시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여유가 된다면 원문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이클 셔머가 도킨스나 굴드 만큼이나 글을 상당히 잘 쓴다는 소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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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끔찍하다. 실험을 안 하면 졸업을 못해요. 졸업을 못하면 먹고 살 수 없어요.




미치고 환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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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했다

2011.11.23 18:16 from 잡글
이곳은 과학 블로그를 지향하지만, 점점 정치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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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의료공제회 이사회의 일방적인 "의료공제회 폐지" 결정 사태로 인해 구성원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총학생회장께서는 직접 PosB와 POVIS에 사과문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사태의 책임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해명을 하셨는데 그건 그것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문제는 이 급박한 상황을 어떻게 학생의 권익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돌이키느냐니까요. 따라서 앞으로 총학생회(이하 총학)의 행보는 계속 주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한 가지 상당히 아쉬운 점은 사태에 대한 사과 및 해명이 오직 '총학'에게서만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총학이 포항공대 학생 구성원을 대표한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총학이 대의할 수 있는 계층은 주로 학부생일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대학원 총학생회(이하 원총)을 설립하여 총학이 신경쓰지 못하는―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배려하기에는 한계가 있는―대학원생 계층을 대의하고자 하는 시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몇 분께서 아직 원총 결성이 안 되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바로잡습니다). 의료공제회 이사회에 총학, 여총, 학과협, 기자회 뿐만 아니라 대학원생 대표자가 참여하여 의결권을 행사하게 된 것도 "의료공제"에 관한 회의에 대학원생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총학에서 사과문을 통해 입장을 표명한 만큼 대학원생 대표자도-공식적으로 원총은 설립되어 있지 않지만-일단은 대학원생을 대표해 회의에 참석한 만큼 결과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해야하지 않을까요? 대학원생 대표자께서도 총학 회장처럼 자신이 어떤 연유로 그러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 공식적으로 명확한 입장 표명 및 사과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실지 대답도 하시구요.

대학원생 대표자께서는 PosB 혹은 POVIS를 하지 않으신다구요? 그럼 오프라인에 대자보라도 붙여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대표자분들께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구하느라 바쁘시다구요? 포항공대 학생 중에 안 바쁜 사람 누가 있습니까? 저도 제 연구뿐만 아니라, 학교 다니는 아내의 학비, 아이 육아비, 생활비 및 집세 등을 마련하느라 죽을 맛입니다. 그래도 해야할 것은 합니다.

대학원생 대표자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명확한 입장표명 및 공식적인 사과를 하고, 사후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분명히 하는 것이 진정 해야할 일 아닐까요?

대학원생 대표자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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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OO과 박사과정 OOO입니다.

요새 여러 가지 일로 학교가 시끄럽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다사다난하고 시끌벅적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제(2011년 11월 15일) 접한 소식은 어떻게 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25대 총학생회장이 전교 학생에게 공지한 "학생의료공제회(이하 의료공제)가 2012학년도부터 폐지될 예정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더불어 그러한 결정이 오늘에서야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된 "OOO 의료공제회 이사회"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구구절절한 설명 다 빼고 핵심만 간추려서 말해보겠습니다. 왜 학교는 '의료공제' 폐지를 주장하는가? 학교 측에서 내놓은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다양한 의료 관련 보험이 존재하므로 '의료공제'의 운영의미가 미미하다. (2) '의료공제' 운영이 편향적이다. 즉, 모든 학생이 의료공제비를 내지만 오직 일부만이 그 혜택을 본다. (3) '의료공제' 운영비가 현재 적자인데, 의료공제 회비 인상 시 학생의 저항(혹은 불만)이 있을 것이다.

'의료공제'는 OOO대 학부생과 대학원생에게 적용되는 일종의 안전망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인간은 ‘오늘’을 살아가지 ‘내일’을 살지는 않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만 적확하게 직시할 수 있을 뿐,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미래라는 불확실성을 안고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불확실성’을 개인의 건강과 결부한다면, 오늘은 별 탈 없이 살아도 내일은 질병이나 육체적 손상으로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경험적 진리로 귀결할 수 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기치 못한 일로 '의료 서비스'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개인이 받아야만 하는 '의료 서비스'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비용이 소요됩니다. 그리고 ‘의료 서비스’의 그 수준과 내용에 따라서 환자 개인이 지급해야 하는 비용은 천차만별입니다. 그런데 소득 원천이 없거나 혹은 매우 미미한 학생에게 ‘의료 서비스’ 구매 시 지출하는 비용은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어떤 식으로든 금전적 부담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의료공제’는 ‘의료 서비스’ 구매 시 짊어지는 학생 개인의 금전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완충’ 혹은 ‘해소’의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의료공제'의 최초 시행 이유가 "지역의료보험 및 국민건강보험 전국민 의무가입 시행 이전에 미가입 학생들의 의료비 부담을 경감하는 것"이라는 학교 측 설명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2011년도 제1차 의료공제회 이사회 안건> 참조). 그런데 여기서 학교 측의 논리는 이상합니다. “대학과 학생 개인별 의료사고에 대비한 보험가입이 활발해짐에 따라 학생의료공제회 운영의미가 미미함"을 ‘의료공제’ 폐지의 근거로 내걸고 있습니다. 학교는 왜 이런 결론을 내린 걸까요? 과거와는 다르게 오늘날 다양한 의료보험이 대학 내외로 확충되었다고 해서 실제 학생 개인에게 돌아가는 의료비 부담이 과거에 비해 충분히 완화되었고, 이 때문에 실제로 짊어지는 ‘의료 서비스’에 대한 금전적 부담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현재 국민건강보험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확대 시행되었다 하더라도 실제 '의료 서비스'의 모든 부분이 건강보험의 적용대상이 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보험적용 대상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당연히 ‘의료 서비스’ 사용에 대한 비용 지출이 발생하며, 이러한 비용은 ‘의료 서비스’를 받는 환자 개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따라서, 소득 원천이 전무한 학생에게 ‘의료 서비스’에 대한 의료비 지출은 서비스의 종류를 떠나서 금전적 부담이 되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것이 단 돈 몇천 원이더라도 말이죠.

(2)번 사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011년도 제1차 의료공제회 이사회 안건>을 보면 '의료공제'가 편향적으로 운영된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학부생의 의료비 수혜비율이 22.55% 그리고 외국인 학생을 포함한 대학원생의 의료비 수혜비율이 77.45%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통계자료만 본다면 대학 측의 근거는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의료공제'라는 것은 '최소한의 안전망'에 해당하는 사항입니다. '의료공제'가 편향적으로 운영된다고 언급하는 것은 '의료공제'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 성격인 '최소한의 보편적 복지 시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출된 결론이라고 봅니다.

(3)번 사항도 들여다볼까요? '의료 서비스'라는 것이 획일화되어 있지 않고 저마다 겪을 수 있는 질병이 다르므로, 환자 개인이 받아야 하는 '서비스'의 종류 및 가짓수와 소요 비용의 정도 또한 다르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매 학기 등록금 납부와 동일한 시기에 일정하게 거둬들이는 '의료공제’ 회비로는 다양한 종류의 '의료 서비스'에 대한 지출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실제로도 대학은 <이사회 안건>에서 "2011학년도 의료공제 회비 수입 및 지출 현황"에서 수입 136,660천원 지출 146,294천원으로 전체 9,634천원, 다시 말하자면 약 천만 원 가량의 적자가 났음을 명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의료공제'를 폐지를 뒷받침하는 정당한 사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비용적 측면이 부담된다면 이를 보완해나갈 방법을 강구하면 될 것입니다. 또한 ‘의료공제’ 운영은 기본적으로 대학의 금전적인 지원이 없이 전액 학생들이 납부한 회비로 운영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대학이 제시한 '의료공제회비'의 지출현황에는 '전년도 미지급 이월지급'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의료공제 회비 인상 시 학생 개인의 부담 증가와 불만표출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폐지한다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학생 개인에게 의료공제’ 회비 인상이 부담되는지 물어봤습니까? 공청회라도 열었습니까? 아무런 의견 수렴의 노력이 없었는데도, 대학은 어떻게 해서 학생에게 불만이 표출될지 예상할 수 있습니까? 혹시 ‘학생은 학교의 결정 사안에 대해 불만을 품기 마련이다’라는 편견이 대학 측의 사고방식에 은연중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학교 입장에서는 사소한 사안이라 하더라도 학생에게는 절실한 것도 있습니다. 일례로 ‘의료공제’와 같은 사안입니다. 일방적 결정은 언제나 그에 비례하는 저항을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문제는—학교의 의견 수렴 없는 일방적 정책 결정 및 진행—어떻게 보면 이것이 많은 학생의 거센 반발을 불러오는 핵심적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의료공제 폐지'라는 'OOO대 구성원의 이해'와 밀접히 결부된 중요 사안이라면 의료공제회 이사회에서 결정하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구성원의 생각이 어떤지 알아보는 게 올바른 순서 아니었을까요? 특히 총학생회와 대학원생 대표는 이사회 의결 이전에 이를 전체 구성원에게 알리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판단합니다만, 저를 포함한 학내 구성원 다수는 이사회 의결 전까지, 즉 총학생회 회장이 교내 게시판을 통해 알리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절차상의 문제입니다. 학생의 선거를 통해 선출된 학생의 대표자 ‘총학생회’가 중차대한 의사결정 사항에 있어 학생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어이가 없는 것은 학생 대표자(들)이 내놓은 표결 결과였습니다. ‘의료공제 폐지안’에 대해 반대가 한 표고 나머지는 찬성 혹은 기권이었습니다. 대표자들의 결정은 학생의 의견을 반영한 것입니까? 아니면 개인의 의견입니까? 학생 대표자는 ‘의료 서비스’를 전혀 받을 필요 없는 ‘유령 학생’이라도 대변하는 겁니까?

'총학'이 선거라는 공적인 과정을 통해 구성되고 이 때문에 학생 전체를 대의한다는 공식적인 의미가 있다고 해서 학내 구성원의 의견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착각입니다. 학생은 '총학'에게 대변할 수 있는 권한을 선거를 통해 한시적으로 부여한 것이지, 중요 사안에 대한 '일방적 결정권'을 합법적으로 허락한 게 아닙니다. 위임이라는 것에는 대표자 개인의 의사가 투영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구성원 전체의 의견과 뜻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이 일은 총학생회장이 오늘(11월 16일) 낸 사과문으로 끝낼 일이 아닙니다. 명백히 현 총학생회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면, ‘의료공제’와 관련된 중대 사안은 2011년도 총학생회로 넘겨야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고민도 없이 중대 사안을 마음대로 결정했다는 것은 분명한 잘못입니다. 총학생회장은 모든 질책은 자신이 받겠다며 혼자 총대를 메는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이번 일은 총학생회장 본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집행부 전체의 문제입니다. ‘의료공제 폐지’에 대한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집행부끼리라도 사안의 중대성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습니까? 집행부는 총학생회장에게 이번 ‘의료공제’ 폐지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제기했습니까?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이건 총학생회장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집행부 전체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미 이사회에서 본인들의 손으로 직접 결정한 사항을 사후대책이랍시고 이제서야 학생의 의견을 수렴하는 게 정녕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이런 식의 정책 진행은 명백한 ‘소 읽고 외양간 고치기’식의 안이함 그 자체입니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여쭙겠습니다. 소득 원천이 없는 학생에게 ‘OOO 의료공제’가 정말 무의미하다고 보십니까? 최소한의 안전망적 성격이 강한 ‘의료공제’가 대학원생이 높은 비율로 수혜를 입는다고 해서 그것이 ‘편향적’이라 판단하십니까? 더불어 ‘의료공제’ 운영이 적자를 본다고 해서 다른 해결 방안은 찾지 않고 일방적으로 폐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십니까? 그게 최선입니까? 마지막으로 총학생회 및 대학원 대표를 포함한 학생 자치 기구에게 당부 드리겠습니다. 학내 구성원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은 십분 공감합니다. 학생의 의견을 대변하기 위해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반적 절차—즉 여론 수렴의 과정—를 거치지 않는 파행적인 의사결정은 총학생회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의구심이 들게 합니다.

비록 ‘2012년도 의료공제 폐지’가 이사회에서 결의되었다 하더라도, 이번 사안의 중대성과 파급력을 고려했을 때 이에 대한 제반 사항을 원점부터 다시 짚어 봐야 합니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의료보험 시행과 운영의 편향성 그리고 비용적 문제를 고려한다고 해도, ‘의료공제’가 내포하고 있는 실체적 의미를 일방적으로 폐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의료공제’에 관한 여러 사항이 2012년도 이후 총학에서 논의되어야 함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며, 공청회와 설문조사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OOO대의 학부생과 대학원생의 의견 다수가 충분히 수렴되고 논의되어 “의료공제”라는 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에 충분히 반영될 수 있기를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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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XX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OOO입니다.

혹시 OOO대의 학부생과 대학원생 중에 진보신당, 민주노동당, 사회당, 녹색당, 사노위 등의 여러 진보 정당(혹은 설립모임)에 가입해 있거나 혹은 지지하는 분이 계신지요? 또는 ‘전국 학생 행진’, ‘대학생 사람연대’, ‘자본주의 연구회’ 등 진보적 단체 등의 회원이거나 지지하는 분이 계신지요? (제가 모든 단체의 이름을 전부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각 정당 또는 단체 이름을 일일이 기재하지 못하는 것을 미리 양해드립니다.)

이렇게 [교내BBS]를 통해 여쭙는 이유는, 제가 OOO대의 구성원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진보신당 당적을 가진 당원으로서 OOO대 내에 있는 여러 진보적 정당 및 단체 회원 혹은 지지자와 함께 한국사회의 여러 가지 정치적인 주제(예를 들어 진보대통합 등)를 포괄하는 다양한 사안에 대해 진솔한 의견을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우리는 OOO대라는 학문의 터전에서 저마다 큰 꿈을 안고 매일 학업과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학생이자 예비 과학자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학문분야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이런 이유 때문에 사회의 여러 가지 정치적 이슈에 대해 무관심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적 단위체입니다. 외적으로는 사회 현안에 관심 없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자신만의 정치적 의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문제일 수 있고, 연구와 관련된 문제—과학 본연의 문제가 아닌 과학정책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혹은 인권과 노동 문제 등을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의 주체인 우리는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정기적/비정기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하고, 서명을 통해 사회적 단결을 도모하기도 하거나 언론을 통해 의사를 표현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집회/결사의 자유라는 헌법에서 보장된 수단을 통해 정부 혹은 특정 기관 및 단체에 대해 자신의 의사를 강력히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정당 및 단체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구체화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제가 가진 정치관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진보신당이라는 정당에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미미하기는 하지만, 저의 정치적 의사가 소속 정당을 통해 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진보신당 당원이기 때문에 다른 진보 정당과 단체의 회원 또는 지지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사안에 대해 토의하고 의견을 나누는 대상이 주로 진보신당에 소속한 당원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학교 내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현실적으로 다른 정당과 단체의 회원 또는 지지자와 의견을 나눌 기회가 적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제가 알고 있는 다른 진보 정당과 단체의 입장은 ‘공식 논평’ 혹은 이와 비슷한 것을 통해서 얻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진보대통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아직도 민주노동당, 통합연대 그리고 국민참여당 사이에도 논의되고 있는 ‘진보대통합’이라는 사안에 대해서도 저는 ‘진보신당’만의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며, 다른 진보 정당 및 단체의 회원 또는 지지자 개인의 생각과 의견은 사실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진보대통합’을 포함한 학내외 여러 사안에 대해 ‘정당’이나 ‘단체’의 공식 입장이 아닌 회원 또는 지지자의 의견을 듣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 위해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여러분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혹시라도 OOO대 내에 진보적 정당 또는 단체에 소속하거나 지지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리고 저를 포함한 다른 정당 및 단체에 소속된 당원과 학내외 여러 사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싶으시다면 주저하지 말고 제 이메일(XXX@XXX)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분의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두서 없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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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새 증후군

2011.11.07 13:20 from 잡글

"과학자들은 좋겠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요."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나는 애매한 웃음을 지으면서 "예, 뭐 그런 셈이지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건 아마 어떤 세계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에서 연구를 시작했을 때 연구실에서 내 위치는 박사후 과정(Post Doctor)이었다. 박사 연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자리는 교육 과정을 끝낸 연구원이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기간이다.
이과계 연구원들은 대학 4년 과정을 마치면 대학원으로 진학한다. 일본이든 미국이든 석사 2년, 박사 3년, 합계 5년이 표준이다. 이때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연구 프로젝트를 다루면서 여러 편의 논문을 쓰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소속된 연구실의 교수로부터 주제를 받는다. 그리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우리에게 박사 학위는 연구원으로서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한 운전면허증에 불과하다.
사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실험으로 밤이고 낮이고 고생하다가 겨우 박사 학위를 받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후의 인생이 그리 밝은 것은 아니다. 연구원으로서 취직할 수 있는 곳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운이 좋다면 대학의 조교 자리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 이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돈을 받는 건 맞지만 그 외의 겻들은 전혀 상상과 다르다.
조교로 채용된다는 것은 아카데미의 탑을 오르기 위한 사다리에 발을 얹어놓은 것임과 동시에 계급사회에 진입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카데미 밖에서는 보기에는 반짝이는 탑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어둡고 칙칙한 문어단지 속이다. 강좌제라 불리는 이 구조의 내부에는 전군대적인 계급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교수 이외의 모든 사람은 하인이나 다름 없다. 조교―강사―조교수. 자신의 인격은 팔아버리고, 나를 버리고 교수에게 빌붙어서는 그 사다리에서 혹시 발을 헛디디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걸레질, 가방 대신 들어주기, 온갖 잡무와 학대를 끝까지 견뎌낸 자만이 이 문어단지의 가장 안쪽에 마련된 방석 위에 앉을 수 있다. 오래된 대학의 교수실은 어느 곳이나 죽은 새 냄새가 난다.
죽은 새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새는 넓은 하늘을 유유히 날고 있다. 성공하여 이름을 날린 위대한 교수님. 우아한 날개는 기류를 세차게 박차고 더욱 높은 곳을 향한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죽은 새 증후군. 옛날부터 우리 연구원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일종의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의 이름이다.
우리는 빛나는 희망과 넘칠 듯한 자신감을 가지고 출발선에 선다. 보는 것, 듣는 것마다 날카롭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하나의 결과는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우리는 세상의 누구보다도 실험 결과를 빨리 알고 싶어하므로 기꺼이 몇 날 밤을 새기도 한다. 경험을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업무에 능숙해진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일이 더 잘 진행되는지를 알기 때문에 어디에 주력하면 되는지, 어떻게 우선 순위를 매기면 되는지 눈에 보인다. 그러면서 점점 더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된다. 무슨 일을 하든 실수 없이 해낼 수 있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렇지만 가장 노련해진 부분은, 내가 얼마나 일을 정력적으로 해내고 잇는지를 세상에 알리는 기술이다. 일은 원숙기를 맞이한다. 모두가 칭찬을 아까지 않는다. 새는 참으로 우아하게 날개를 펴고 항공을 날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때 새는 이미 죽은 것이다. 이제 그의 정렬은 모두 다 타버리고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후쿠오카 신이지, <생물과 무생물 사이>, 75~77쪽


후쿠오카 신이치라는 일본 출신 생리학자의 저서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신이치는 PCR을 발견한 (진정한 자유인이라 할 수 있었던) 캐리 멀리스(Kary B. Mullis)를 소개하기 위해 자신의 모국인 일본의 과학계의 현실에 대해 담담하게 서술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한국의 과학계에 몸을 담고 있거나 한때 몸담았던 적이 있었다면 후쿠오카 신이치가 묘사한 일본의 과학계가 한국과는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블루오션 혹은 잭팟이 터지길 바라며 아름다운 장밋빛 미래를 가슴에 품고 갖은 고생을 견디며 연구에 매진하지만, 학위 수여 후 돌아오는 것은 불안정한 연구원 생활이다. 사람들은 박사 학위가 세상의 온갖 부와 명예에 대한 보증수표라도 되는 양 떠들어대지만, 허울을 벗겨보면 그것은 대부분 거짓 혹은 과장에 가깝다. 혹시나 명예 정도는 있을지 몰라도―한국에서는 박사 학위를 소지한 사람은 뭔가 대단한 게 있는 것처럼 취급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그냥 그게 전부다.―명예가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다. 명예가 램프의 요정 '지니'는 아니다.

연구자가 안정적으로 연구를 계속하려면 교수 혹은 선임급 이상의 연구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직책을 얻으려면 뛰어난 능력을 증명해줄 수 있는 업적이 필요하다. 즉 셀(Cell), 사이언스(Science), 네이처(Nature)라는 '대단한' 저널에 자신의 연구 업적을 발표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저널에 발표하는 게 쉽지 않다. 일의 중요도가 선별 기준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이것만으로 '대단한' 저널에 자신의 연구를 발표할 기회를 잡지는 못한다. 바로 인지도 혹은 정치력이다.

백인이 선점한 과학계에서 비(非)서구권 출신의 비(非)백인이, 그것도 미국·유럽이 아닌 한국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조그만 나라에서 몇십 점 되는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의 영향력이 있는 좋은 저널에 논문을 내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만약 한국의 어떤 교수 혹은 연구원이 빅 저널(big journal)에 자신의 연구를 발표했다면 그 연구가 뛰어나거나, 연구의 책임자로 포함되어 있는 교수 혹은 연구원의 학계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함을 의미한다.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업적도 중요하지만, 한국에선 특히 연줄―학연, 지연 그리고 혈연―도 강하게 작용한다. 아무리 좋은 논문을 내도 연줄이 없으면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내 선배 중에도 연구 실적은 좋지만, 연줄이 없어서 한국에서 직장을 잡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이들은 낫다. 자신들이 원하면 미국 같은 곳에서 교수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미국에서 교수가 되어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쪽도 연구비를 따내기 위한 경쟁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은 소수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연구를 계속해 나갈 수 있다. 연구비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돈이 있고, 이런 여건이 충족되므로 자기가 먹고 사는 건 걱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머지는 어떤가? 교수도 되지 못하고 연구소의 연구원도 되지 못한 수많은 박사들… 후쿠오카 신이치는 죽은 새 증후군을 얘기했지만, 교수가 되지 못하고 안정된 연구원도 되지 못한 다수의 박사 학위 소지자들은 날지도 못한 채 둥지 밖에서 정처 없이 떠돌기만 한다. "넓은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꿈"을 꾸며 둥지 밖으로 나가지만,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끊임 없는 경쟁을 종용받으며 과학에 대한 꿈과 열정은 점점 더 사라진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삶을 두려워하며 삶에 대한 희망을 잃은 채 쓸쓸히 죽어간다. 후쿠오카 신이치가 언급한 것처럼 연구자의 일부는 죽은 새 증후군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성공한 자의 이야기다. 연구자 다수는 그냥 방치되어 두려움에 떨다가 이름도 모를 병으로 쓸쓸히 죽어 간다.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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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유럽의 시민들?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에티엔 발리바르 / 진태원역
출판 : 후마니타스 2010.05.31
상세보기

대중들의 공포 (양장)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에티엔발리바르 / 서관모,최원역
출판 : 도서출판b 2007.09.18
상세보기

정치체에 대한 권리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에티엔 발리바르 / 진태원역
출판 : 후마니타스 2011.10.17
상세보기

학교 도서관에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가 저술한 책 세권을 주문했다. 발리바르를 읽는 건 왠지 새로운 경험이 될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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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글로벌 시장경제에서 금융이 무너질 확률은 매우 과소평가되고 있다. 은행 손실은 한없이 악화될 수 있다. 은행 자체가 파산하는 것은 약과이다. 다른 은행에 대한 부채에 대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손실은 한 금융기관에서 다른 금융기관으로 퍼질 것이다. 규제 당국이 가장 상태가 나쁜 금융기관 주위에 방화벽을 쳐야만 위기가 더 이상 학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쁜 일은 연달아 발생하는 법이라서 한 번은 위기를 넘기더라도 두 번째, 세 번째 위기는 넘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 대부분의 경제이론가들은 잘못하고 있다. 경제 모델들이 실패해도 버리는 법이 별로 없다. 대신 틀린 경제 모델들을 '고친다'. 즉, 수정하고 한정시키고 상세화하고 확장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나쁜 씨앗에서 자라 튼튼하지 않은 나무를 풀, 못, 나사, 지지대 등으로 서서히 키워낸다. 기존 경제학은 금융시스템이 선형으로 움직이고 지속적이며 합리적이라고 가정하며, 세계의 은행들이 많이 사용하는 리스크 모델에는 이런 잘못된 가정이 반영되어 있다.
― <자본주의 4.0>, 239쪽


만델브로트(Benoit Mandelbrot)와 허드슨(Richard Hudson)이 <프랙털 이론과 금융시장(The (Mis)behavior of Market: A Fractal View of Risk, Ruin and Reward)>에서 언급한 내용을 칼레츠키가 자신의 책에서 인용했다.

여기서 만델브로트는 금융 위기에 대한 예를 들고 있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을 몇 줄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본다. "기존의 경제 모델들은 불확실성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 현실은 경제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반증함에도, 경제학자들은 억지로 현상을 경제 모델에 맞추려고 한다. 경제학자들은 합리적인 인간은 합리적인 경제활동을 한다는 순환오류에 빠져 있다. 세계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경제 모델도 타당하지 않으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똑같은 말을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불확실성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친 자본주의적이든 반 자본주의적이든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단지 둘 사이의 차이는 친 자본주의 이론가는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반 자본주의적인 이론가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필연적 모순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붕괴를 불러올 것이라고 보는 비관론적인 경향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다 큰 차이가 있다) .

자본가와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경제 이론가는 자본주의가 가장 최선이며, 가장 민주적이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도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의 심연에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가 최상이다'라는 명제가 무의식에 각인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이외 것은 최선도 아니고, 비민주적이며,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이라도 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솔직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 시스템에 치명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자본가와 자본주의 이론가도 수두룩하니 말이다. 이런 냉소적 시선에 대해 뭐라 하지 말라. 그냥 잡설은 잡설로 대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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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학내 진보신당 및 민주노총에서 활동하는 동지 몇 분과 저녁 식사를 하며 두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오랫동안 노동운동에 몸담으셔서 그런지 한국 진보정당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계셨다. 이미 알고 있는 얘기도 있었고, 처음 듣는 것도 있었다.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야사에 가까운 내용도 있었지만, 언급하기에는 껄끄러운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슨 내용이 오고 갔건 간에 무엇보다도 이 대화가 유익했던 점이 있었다. 그동안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명확하지 않았던 부분, 즉 이데올로기적 측면이나 진보정당 운동의 방향성에서 잘 정리되지 않았던 조각의 단편들이 이 ‘유익한’ 대화를 계기로 잘 짜 맞춰질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 정도일 것이다.

요새 진보진영 안팎으로 시끌벅적하다. 누구는 진보진영의 절멸을 언급하며 '진보대통합'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금은 상황이 어렵더라도 진보세력의 독자적 생존이 장기적 관점에서 중요하다고 설파한다. '진보대통합' 세력 중에서도 민주당을 포함하는 '범야권통합'을 주장하는 부류가 있고, '민주당'은 배제한 상태에서 '국민참여당'을 '진보대통합'의 범주로 보자는 세력도 있으며,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을 배제한 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통합파)를 중심으로 한 '진보대통합'의 구축을 통해 진보진영을 재정립하자는 정치적 입장을 가진 이도 있다. 전자를 제외하고는 후자 둘―국민참여당을 포함하느냐 하지 않느냐―이 현재 진보대통합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세력이 엇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진보진영의 독자생존을 주장하는 쪽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진보신당 내에서는 '사회당'과의 통합을 주장하는 이도 있고, 통합의 범위를 '사노위'까지 확대하자는 쪽도 있으며, '진보신당'의 독자적 노선을 계속 이끌어 나가자는 주장도 소수이긴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녹색좌파'를 주장하는 분파도 있으며, '노동자 전위 정당'만이 사회변혁을 위한 최선의 수단이라는 극좌파 세력도 당 안팎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통합파와 마찬가지로 독자 쪽도 정치적 의견을 수렴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서로 간의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통합파만큼이나 독자적 세력화를 주장하는 쪽도 피차일반인 것 같다.

어떤 이데올로기적 노선을 가지고 어떤 정치적 명분을 견지하든 간에 분명한 것은 민주노동당 주류와 비주류, 진보신당의 통합파 그리고 독자파, 사회당, 사노위 등을 포함한 모든 좌파세력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자신들이 처한 '좌파의 정치적 위기'라는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고, 어떤 식으로든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이 통합을 통한 좌파세력의 재구축이든 독자생존을 통한 고난의 행군이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동일하다.

누가 옳은 길이다 혹은 그릇된 길이라는 흑백논리에 대해 극명하게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한 시시비비는 진보대통합에 대한 이야기가 불거져 나오면서 진저리를 칠 정도로 거친 설왕설래를 통해 주고받았다. 애당초 그런 시시비비의 시작이 진보신당 내 통합파와 독자파 간의 정치적 논쟁에서부터 비롯한 것도 아니다. 멀게는 자주파가 득세하고 있던 민주노동당으로부터 평등파가 탈당해 진보신당을 만들 때부터 그러한 논쟁은 언제나 있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사회에서 노동자, 학생 그리고 서민 기층이 반독재 반민주 저항을 하던 그 시점에도 전술과 전략에 대한 논쟁은 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끌어온 ‘정치적’ 혹은 ‘사회적’ 논쟁은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살에 살을 붙여 왔으며, 그때 시작된 논쟁의 연장 선상에서 지루한 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때문에, 지금 그러한 것―통합이 맞느냐 독자가 맞느냐―을 따지는 것은 논쟁을 위한 논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어떻게 보면 지금 시점에서는 별로 중요해 보이진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왔다.

이유야 어쨌든, 그들이 선택한 결정의 근거는 자신의 정치적 노선 혹은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가 같다고 하더라도 개인이 내릴 수 있는 정치적 결정은 다양하며, 한 개인이 내리는 결정도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은 분명하다. 결국, 각자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자신의 선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그 어떤 결정도 (자본주의와의 타협이 아니라면 그리고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를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면) 좋다 나쁘다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들어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생각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하는 집착이 나를 괴롭혔는데, 어제 진보신당 및 민주노총 동지들과 대화를 하면서 명확해졌다. "우리가 가는 길이 과연 노동자를 위한 길인가? 우리가 가는 길이 과연 노동자를 위시한 한국사회의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길인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을 때 우리가 진보정당 운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노동자정당의 설립'이다. 민주화 이후 노조운동이 활발해지고, 복수노조법과 타임오프제를 저지하기 위한 노동자 저항운동을 하면서 많은 이들이 뼈저리게 느낀 것은 부르주아 정치판에서 노동자의 정치적 열망을 내세울 수 있는 세력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대변되는 영호남의 토호들과 사회 기득권 엘리트가 모여 만든 부르주아 정치세력은 입으로만 서민 정치를 부르짖을 뿐, 그 누구도 서민, 노동자,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민주화가 필요했던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를 갈망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민주주의를 한국사회에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노동자, 서민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를 추구했다면 양극화가 심화하지도 않았을뿐더러 한국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온갖 악법에 대해 저렇게 관망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서민은 자신들의 사회적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한 전략적인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진보정당 운동이다. 민중당으로 시작해 국민승리21을 거쳐 민주노동당을 통해 대약진했다. 진보정당을 설립하고 기반을 다지는 과정 중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때는 국회에서 많은 의석을 차지했고, 지방선거에서도 돌풍을 일으켰다. 진보정당 운동은 계속 성장하는 듯 보였고 한국사회의 앞날은 진보정당 운동을 통해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진보정당 운동은 위기에 치달았다. 진보정당 운동이 위기의 상황에 몰리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거기에 대해서 특별히 논하지는 않다. 이미 많은 사람이 원인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 원인 분석과 해결책이 정말로 유효하며 적확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나중으로 미루겠다. 그것을 판단하기엔 내 지적 수준도 모자랄뿐더러 정세를 판단하기 위한 능력도 많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이거 하나는 분명히 해두고 싶다. 그것은 각자의 정치적 이유로 통합을 부르짖든 독자를 주장하든 간에 진보를 지향하는 우리 정치적 좌파가 마음속에 항상 담아두어야 할 신조이다. 더불어 그것은 사민주의를 지향하든 사회주의를 지향하든 공산주의를 지향하든 우리 모두가 바라고 있는 정치적 이상향이 무엇이든 간에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노동자 정당의 설립". 그 어떤 순간도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우리는 진보정당 운동을 하면서 늘 잊고 지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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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조승수 전 대표가 탈당을 했다. 이와 함께 광주시당 윤난실 위원장, 유의선, 박창완, 신언직, 우병국 전 서울시당 위원장, 김병태, 이홍우 전 경기도당 위원장, 이은주 전 인천시당 위원장, 임성대 전 충남도당 위원장, 김병일, 박경열 전 경북도당 위원장, 조명래 전 대구시당 위원장 등 전현직 광역시도당 위원장도 동반 탈당했다.

지난 당대회 때 민노당과의 통합안이 부결된 이후, 진보신당 당원동지들이 지속적으로 탈당을 한 상태에서 노심조 중 노회찬과 심상정은 이미 탈당을 한 상태고 이때 꽤 많은 당원이 동반 탈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조 전 대표의 탈당. 그리고 당 내 핵심인물들의 대단위 엑소더스. 앞으로도 통합 진보정당 건설을 빌미로 한 통합파의 엑소더스는 계속 될 것이라 본다. (물론, 정당 정치에 환멸을 느낀 동지들도 꽤 탈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진보신당의 깃발이 남아 있는 한 이 당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그것도 경북도당 당원회의 때 직접 들은 말이었다)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 말도 지나간 일이라는 듯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겠지만 내가 이 당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며 돌이킬 수 없는 실언과 그에 따른 꼬리표는 제가 평생 안고 가야할 몫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란 장문만 남기고 조 전 대표는 그렇게 진보신당을 떠났다. 그리고는 향후, 통합연대 활동에 매진함으로써 통합진보정당 창당에 힘을 기울이겠다고 했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냥 '가서 열심히 하세요'란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는 듯하다.

어쨌거나, 지금과 같은 암울한 상황에서 진보신당의 미래는 없어 보인다. 머릿속에서 뭔가 억지로라도 끄집어내려고 해도 도통 떠오르는 것이 없다. 말 그대로 어두컴컴하다. 조승수 전 대표의 탈당으로 인한 진보신당의 원외정당화, 국회에서 철수, 국회 기자회견장 사용 제한, 국고지원의 감소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 전현직 시도당 위원장의 동반탈당 때문에 빚어지는 광역시도당 조직 결성 및 유지의 어려움 등. 그리고 세 번에 걸친 대 격돌로 인해 당내 분위기는 최악이고, 비대위가 설립되어 당 분위기를 추스린다고 해도 얼마나 잘 해나갈 수 있을지 솔직히 회의적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일반인들의 뇌리에서 진보신당의 이름은 명망가들의 대거 탈당으로 인해 잊혀질 수 있다는 것인데, 솔직히 원외정당으로 전락했다거나 돈이 별로 없다 이런 이유보다도 상황을 더 암울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진보신당에게 과연 미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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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한 단상

2011.10.05 17:09 from 잡글
사회적인 의미에서 동성애가 언제부터 공식적으로 금기되기 시작했을까? 우리의 도움되는 친구 위키피디아를 검색해봤다.

"로마 제국에서는 그리스나 고대 로마와 달리 소년과 성인 남성 사이의 동성애가 쉽게 수용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로마인은 이를 이질적인 '그리스 풍습'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상류 사회에서는 그리스적 동성애 문화가 일부분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에서도 313년 기독교 공인 전까지 동성애에 대해 특별한 탄압은 가해지지 않았다."

로마제국에서는 동성애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금기시까지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적어도 동성애를 장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유대의 신 여호와의 뜻이 곧 법으로 통하던 중세 유럽은 어땠을까?

"313년,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되면서부터 동성애는 교회법에 의해 죄악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동성애는 수음이나 피임처럼 하느님이 허용한 성교의 본래 목적인 종족 보존과는 무관한 탐욕적인 성행위라는 해석이 담긴 성경의 계율을 어긴 범죄로 본 것이다."

기독교 사상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동성애에 대한 시각이 극단적으로 변한 것은 적어도 유럽의 경우를 놓고 보자면 이때가 본격적이 아닌가 싶어 보인다. '동성간의 성행위는 종족보존과는 무관하다'는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로 금기시되었다고 하지만, 암암리에 동성애가 성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동성애가 과연 종족번식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일까? 보통 동성애 혐오론자들이 내세우는 논리가 이런 류인데, 과학적으로 본다면 동성애적 행동양상(homosexual behavior)을 보이는 동물군의 예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요는, 우리의 시각이 두 개의 성―즉, 남성이냐 여성이냐―에만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나중에 이에 대한 과학적 시각을 한 번 정리해서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하자.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이지, 차별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은, 피부색을 근거로 인종의 우열을 가름해 버리는 인종주의와 별반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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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생물학자로 메사추세츠 앰허스트대학교의 교수이다. 세포생물학과 미생물 진화에 대한 연구, 지구 시스템 과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미항공우주국(NASA) 우주과학국의 지구생물학과 화학진화에 관한 상임위원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NASA의 지구생물학에 관한 실험들을 지도하고 있다. 공생진화론과 같은 충격적인 가설로 생물학계를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지칠 줄 모르는 연구로 19개의 상을 수상했으며 수많은 국제학술 강연, 100종이 넘는 논문과 더불어 10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영국의 대기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에 공헌한 바가 크다. 아들인 도리언 세이건과 함께 책들을 펴냈으며, 《진핵세포로의 진화》《공생과 세포진화》등의 저술이 있다. ― 출처: 알라딘
 

      
      

이 아줌마의 책을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순서대로 「마이크로코스모스」, 「공생자 행성」, 「생명이란 무엇인가?」, 「섹스란 무엇인가?」. 다행이도 학교 도서관에 위의 책들이 구비되어 있는 것 같다. 돈 없는 사람은 자고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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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ure에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More time for research: Fund people not projects"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연구자가 그랜트 확보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연구할 시간이 없다. 다들 이게 문제인 줄은 알지만, 뾰족이 해결할만한 방도가 없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해결하면 안 될까?"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 나가려면 돈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뭘 하든 (심지어 자는 것까지도) 돈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연구하기 위해서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많은 돈이 필요하다. microarray라도 하나 할라치면 한 번 할 때마다 몇백만 원 쓰는 것은 예사일 뿐더러, antibody 같은 것은 거의 소모품 수준이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제작하지 않는 한, 대부분 상당히 비싼 비용으로 구입해야만 한다.

잘 모르는 사람은 그런 것 정도는 직접 만들어서 쓰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직접 만드는 거 정말 어렵다. 어떤 경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때도 있다. 특히, antibody 만드는 것은 하늘에서 점지해주지 않는 한 제작에 성공할 확률도 그리 높지 않다. 또한, antibody를 성공적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불어, 이런 것들을 제작하는 데도 또한 돈이 들고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그래서 돈이 필요하다. 특히, 요즘처럼 연구자 간의 경쟁이 (한국의 대학 입시만큼이나) 심한 때는 자본력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오히려 아이디어는 부차적일 경우가 많다. Cell, Nature 그리고 Science―연구자들이 흔히 CNS(앞의 세 논문을 central nerve system에 빗댄 표현)라 부르는 과학잡지에 게재된 논문을 한 번 보라. 정확히 산출할 수는 없어도, 그 논문을 위해 엄청난 액수의 돈이 들어갔는지 눈에 선할 정도다. 가끔은 Figure 하나하나에 돈 냄새가 풍기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렇다면,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가?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든지, 이윤에 눈이 먼 기업의 후원을 받든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혹시라도 있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털거나 어디 마음씨 좋은 키다리 아저씨라도 한 명 섭외해서 돈을 마련해야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윤이 발생할지도 불투명한 연구 따위에 선뜻 돈을 내어줄 부자는 배포가 큰 없다. 따라서, 내 연구는 이윤이 발생한다고, 당신의 탐욕을 채워줄 수 있다고 끊임없이 선전해야만 한다.

그렇게 연구계획서를 쓰는데 시간을 소진하고 나면, 과학자에게 연구할 시간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연구는 엉망진창이고 내가 왜 연구를 하는지 소명의식도 희미해진다.

돈 걱정 없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그날이 과연 올 것인가?



사진출처: NATURE (The image from the Nature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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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선생은 민주화 운동의 결과가 오늘날에 이르지 못하고 민주주의가 더욱 나빠진 이유는 정당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 근본적 원인 중 하나가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와 사회운동이 학생 운동 출신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된 것"에 있다고 봤다. 덧붙어, 그는 "현실 삶과 유리된 조건에서 의식화되면서 갖게 된 과잉 이념화된 사고방식과 도덕적 우월의식은 그것이 지속되는 시간에 비례해 부정적 효과를 더 크게 가질 수밖에 없다"면서, "공허한 담론과 추상적 이념의 언어가 지배하는 곳"으로 전락한 학생운동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 민주주의 없는 민주주의를 만들었다고 봤다.

그런데, 과거 학생운동에 이념적 실체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오히려, 그들에게 제대로 된 이념이 있었다면 그들이 저리도 쉽게 기득권 세력에 편입될 수 있었을까?

김문수, 이재오, 심재철, 유시민, 이명박... 이들은 과거 독재정권에 열렬히 저항했던 '운동권'에 포함된 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어떠한가? 서로 대척점에 두고 있지만, 이들은 신자유주의를 찬양하며 노동자를 외면하고 있다. 이들이 진정 과거에 제대로 된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날처럼 노동자를 외면하는 정치를 했을까? 뭐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은 과거에 자신이 그토록 저항했던 세력과 양손을 붙잡고 합심하여 오늘도 씩씩하게 노동자와 프롤레타리아 대중을 억압하는데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장집 선생이 다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실패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최장집 선생이 언급한 것처럼 학생운동에 내재된 이념의 과잉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 학생운동의 동력을 사회로 내 딪게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이념이 부재했기 때문이 아닐까?


◈ [최장집칼럼]‘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감춰진 상처 from 경향신문

사진출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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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의 사회활동가이자 환경운동가이며 아프리카 전역에 그린벨트 운동을 널리 전파하고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왕성하게 활동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왕가리 마타리(Wangari Matthai)가 암으로 투병하다가 향년 71세로 운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Wangari Maathai, Nobel peace prize winner, dies at 71 — Kenyan social activist and environmental crusader who founded the Green Belt Movement has died of cancer from the Guardian]


Wangari Maathai, Nobel peace laureate at the Hay festival in 2007.
Photograph: Martin Godwin for the Guardian
(The photograph from the Guardian UK web)

나는 솔직히 왕가리 마타이란 인물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사실 이름도 어제 가디언 기사를 읽고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그녀의 아프리카와 그녀의 조국 케냐를 위해 들인 엄청난 그리고 정력적인 노력에 대한 일화를 듣고 있자면, 입이 열 개 있어도 그녀를 칭송하기 모자랄 정도다.

세상은 이렇게 헌신적인 사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2011/09/27 14:50 이글루스에서 작성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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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 시리즈

2011.09.29 16:43 from 잡글
리차드 도킨스 (Clinton Richard Dawkins) 시리즈 다시 읽기

1.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3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지은이) | 홍영남(옮긴이) | 을유문화사 | 2006-11-25 | 472쪽 | 15,000원


2. 눈먼 시계공 (The Blind Watchmaker) (1986년판)
리처드 도킨스(지은이) | 이용철(옮긴이) | 사이언스북스 | 2004-08-09 | 558쪽 | 25,000원


3.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 (2006년판)
리처드 도킨스(지은이) | 이한음(옮긴이) | 김영사 | 2007-07-20 | 604쪽 | 25,000원


4. 지상 최대의 쇼 (The Greatest Show on Earth) (2009년판)
리처드 도킨스(지은이) | 김명남(옮긴이) | 김영사 | 2009-12-09 | 625쪽 | 25,000원


5. 확장된 표현형 (The Extended Phenotype) (1982년판)
리처드 도킨스(지은이) | 홍영남(옮긴이) | 을유문화사 | 2004-07-30 | 556쪽 | 19,000원


*            *            *            *            *

학부 때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난 후, 한동안 진화론에 대해 관심을 끊고 지내다가 근래 들어 도킨스의 모든 저작을 다시 읽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으며 그 이유라고 해도 특별한 것은 없을테니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생물학자인 내가 도킨스를 통해 진화론을 다시 음미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            *            *            *            *

현재 <이기적 유전자>와 <눈먼 시계공>은 다 읽은 상태이고 다음으로 <확장된 표현형>을 읽으려고 한다. 도킨스의 저작을 읽다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과거에 알고 있던 내 관념 속의 도킨스가 지금의 도킨스와는 다르다"란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변하기 마련이지만, 과거의 도킨스와 지금의 도킨스가 많이 달라졌을리는 없다. 물론, "생존기계" 도킨스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한, 그리고 그가 잘 정의된 물리학 법칙의 세계에서 현실을 초월하지 않은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면 - 표형형으로 나타난 과거의 도킨스와 지금의 도킨스는 분명 다를테니까 말이다. 달라진 것은 분명히 나다. 나의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s)가 대표하는 "생존기계" [나]가 아니라, 세계의 밈(meme) 속에 혼연일체가 되어 나타난, 다른 이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내가 달라진 것이다.

*            *            *            *            *

철 없던 시절에 읽어서라고나 할까? 그 시절 도킨스의 저작을 접했던 나는 이성적으로 사물이나 현상 등에 접근하기보다는 다분히 감정적으로 모든 것에 반응을 했고, 살아온 생활패턴과는 많이 다르게 관념적으로는 도덕적 우위를 최고의 선으로 둔 윤리적 환원주의 시각에서 세상을 판단했다. 때문에, '유전자'로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그당시 분명히 나는 도킨스가 유전자로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다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 도킨스를 "유전자 환원주의자"라 매도하며 폄하했다(심지어는, 스스로가 도덕론적 환원주의자였으면서 말이다).

*            *            *            *            *

관록이 붙어서일까, 아니면 생물학 공부를 오래 해서일까? 다시 읽어본 도킨스의 저작은 학부 때 알던 도킨스가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나 스스로가 도덕론적 환원주의에서 벗어나 공정한 시각으로 사물의 이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전자"는 "유전자"일 뿐이다. 도킨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세상(특히 생명체)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앞으로 생명체는 멸망을 맞이하지 않는한 어떤 식으로 변화할 것인가"란 물음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이다. 그 안엔 - 우리가 설령 어떤 도덕적이며 윤리적이고 초현실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것이 있다고 어리석은 오해를 하더라도 - 오로지 자연의 법칙에 관한 도킨스의 답변만 존재할 뿐이다.

자연에 도덕이란 없다. 도덕이란 오로지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비자연적이며 오로지 100%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유전자'의 입장에서, 다 나아가서는 '생명체'의 입장에서 자신의 존재를 오랜 시간동안 지속하고자 하는 본능만 존재할 뿐이다. 본능에는 목적의식이 없다. 있다고 한다면 그건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일 뿐이다. 그 욕구가 동력이 되어 세상은 우연히도 지금까지 오게되어 필연적으로 다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            *            *            *            *

아직 도킨스의 저작(들)을 읽고 있는 중이지만, 한 가지 크게 깨달은 바가 있다. 절대 자연을 도덕과 윤리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에 도덕과 윤리가 파고드는 그 순간 그건 과학이 아니다. 바로 그 순간, 그건 인간적인 철학이라 불리우며 때로는 망상으로 가득찬 종교로 불리우기도 한다.

2011/09/22 14:31 이글루스에서 작성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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