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민중의 소리

지난 9월 4일 서울 송파구 삼전동 송파구민회관 대강당에서 '진보대통합 안'을 논의하기 위한 '진보신당 3차 임시 당 대회'가 열렸다. 전국에서 대의원을 포함한 당원 동지들이 송파구민회관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정족수가 채워지자 안건에 대한 발언과 토의가 활발히 오고 갔다. 분위기는 매우 격앙됐다. 통합 지지와 반대를 오고 가는 토론은 시간이 갈수록 격해졌다. '진보대통합'이라는 화두로 시작해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이어져 온 우리끼리의 대립은 곧 종지부를 찍을 듯 보였지만, 당의 앞날을 결정하기 위해 열린 '임시 당 대회'의 최종 결론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다. 당 대회 진행과정을 지켜보던 많은 당원 동지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며 표결의 순간을 만감이 교차한 가운데 진지한 눈빛으로 유심히 지켜봤다.

결과는 '진보대통합'에 대한 안건의 전면 부결이었다. 원안인 <5·31 연석회의 최종 합의문>과 <8·28 (잠정)합의문>이라는 두 개의 '진보대통합 안' 모두 모두 재석 410명 중 3분의 2인 274명을 넘기지 못한 222명에 그쳐 부결됐다. 이에 앞서 국민참여당의 합류를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문구가 포함된 <수정동의안>도 재석 408명 중 찬성 231명으로 부결됐다. '진보대통합'은 진보신당에서 시작되어 진보신당에 의해 부결됐다.

애당초 패권주의와 종북주의에 반대해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해 만든 진보신당이었다. 민주노동당에서 시작된 노동자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노동자 정당을 기반으로 이전보다 진일보한 새로운 진보정치를 하겠다는 의지로 설립한 진보신당이었다. 그럼에도, 2008년 창당 후 3년밖에 안 된 시점에서 단지 지방 선거에서 연속 패했다는 이유만으로, 과거 분당의 원인이 하나도 해소되지 않았음에도 민주노동당과의 재통합은 일종의 자기 부정이나 다름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민주노동당과의 재통합'은 진보신당 당원 대다수의 공감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진보신당이 왜 민주노동당에서 분리해 나왔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당내 명망가와 일부 활동가들의 일방적인 통합 강행은 당 운영의 민주주의에 반하는 패권주의적 발상이었다.


사진 출처: 뉴시스

당 대회에서 '통합안'이 부결된 이후, 진보신당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이미 곪을 대로 곪은 통합파와 독자파 간의 첨예한 대립은 통합파의 대거 탈당이라는 예견된 파국을 낳았다. '통합연대'의 주축인 노회찬과 심상정 전 상임고문의 탈당을 시작으로 통합파 동지들의 탈당은 본격화되었고, 조승수 전 대표를 포함한 전국 시도당 위원장의 동반 탈당으로 이러한 움직임은 최고조에 달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통합파 동지들이 대거 탈당하더라도, 남아 있는 독자파 동지들이라도 힘을 한데 모아 위기를 헤쳐나간다면 현재 위기 상황은 어떻게든 극복하겠지만, 조승수 전 대표가 당 대표직을 사퇴하고 김은주 부대표가 권한대행직을 맡으면서 진보신당의 위기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출처: 참세상

강경 독자파인 김은주 권한대행의 독단적이며 비민주적인 당 운영―특히 당직자를 포함한 비대위 위원을 자기 쪽 사람으로 채우려는 독선적인 행태―은 통합파 동지뿐만 아니라 독자파 동지들에게도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중앙당의 밀어붙이기식 통합 방식에서 보인 비민주적이며 패권주의적인 방식을 김은주 권한대행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그것도 진보신당을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이 때문에 강상구 전 대변인을 포함한 다수의 진보신당 동지들은 김 권한대행의 즉각 사퇴 및 조속한 비상대책위원회 설치를 촉구한 바 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김혜경 전 민주노동당 대표를 위원장으로 하는 비대위가 구성되었으며, 김은주 권한대행은 새로운 대표가 선출될 때까지만 직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어제(10월 26일) 홍세화 선생이 진보신당 당 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홍세화 선생은 당 대표 출마를 선언하면서 자신의 심경을 <당 대표 출마의 변>이라는 한 편의 장문으로 진보신당 당 게시판에 남겼다.


사진 출처: 한겨레

홍세화 선생은 1979년 '남민전(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 때문에 공안 당국의 수배를 받았고 프랑스로 망명해 20여 년간을 객지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오다가 2002년 한국으로 귀국한 바 있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온갖 고초를 겪은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남민전 사건'이 공안 당국에 의해 조작되었음이 최근에 밝혀져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탄압받은 29명이 2006년 3월, 전부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된 일도 있었다.

홍세화 선생의 당 대표 출마에 대한 진보신당 내 동지들―독자파든 통합파든―의 의견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홍세화 선생의 당 대표 취임은 어수선한 당내 분위기를 추스르는 것과 그동안 불거진 상호 불신을 불식하는 데도 어느 정도 일조할 듯 하다. 그럼에도, 이것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솔직히 홍세화 선생이 당 대표에 새로이 취임한다 해도 그에게 진보신당을 위한 명확한 비전―민주노동당과 차별되는 대중적인 좌파정당으로서 생존을 모색할 방안―이 없다면 그의 당 대표 취임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고, 우리가 우려했듯이 진보신당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홍세화 선생에게는 진보신당의 미래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있는가?

"
저는 <진보신당>의 위기가 통합이냐 독자생존이냐를 결정하는 데 실패한 것에서 온 것이라 믿지 않습니다. 단언컨대 오늘 진보정치의 위기는 우리가 누구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고, 그리하여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데서 온 것입니다."

홍세화 선생의 말마따나 그동안 우리는 '진보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한 방법론―통합이냐 독자생존이냐―에만 매달렸을 뿐,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잊고 지냈다. 내부에서 우리끼리 투쟁하느라 모든 힘을 소진해버리는데,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는다고 상황이 달라지는가?

오직 '우리만 음미할 수 있는 대의명분'이 있어봤자 대중 일반이 알아주지 않는 한 아무 소용없다. 우리가 언제 우리의 대의명분을 제대로 알린 적이 있는지 반문해보자. 내 기억엔 없다. 내가 기억하는 진보신당의 모습은 '대의명분'만 있고, 노선 투쟁만 죽어라 하는 새로운 진보정치를 추구하는 정당이다. 상황이 이러니 진보신당의 지지율 하락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진중권에게 '좌파 동아리'란 비아냥을 들어도 할 말 없다.

"
우리는 잃어버린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되찾아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재벌국가를 우리 모두의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합니다. … 우리 당의 능력 있는 젊은 일꾼들과 함께 지역별로 또는 과제별로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 그것을 하루속히 조직화하는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정치공학적인 생존전략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통해 대중의 신뢰를 얻고, 당의 외연을 확대해 갈 것입니다. …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도 바뀌어야 합니다. 진보적 가치는 우리 당 속에서 가장 먼저 실현되고 증명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진보정치를 다짐하며 민주노동당을 박차고 나왔지만,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작 선거 몇 번 한 것이 전부다. 따지고 보면 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한 것도 당연하다. 민주노동당 혹은 진보신당에 몸담은 당원이거나 혹은 정치에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민중 대부분은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진보신당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는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엇을 위한 정당'인지도 잘 모르는데 누가 지지의 손길을 보내겠는가? 그나마 노회찬, 심상정 그리고 조승수 같은 명망가가 있었으니 대중에게 어필이라도 했지, 이마저도 없었으면 대중 일반에게 진보신당은 사실상 '듣보잡'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한 대중 일반의 선택은 당연히 인지도가 있는 민주노동당이다. 단순히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아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정도는 굳이 정당을 설립하지 않더라도 할 수 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지역사회에 진보신당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꾸준한 정치적 활동이다. 지역사회에도 알려지지 않은 신생 정당을 대중 일반이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거란 순진한 착각은 버려야 한다. 더불어 주류 정당이 만들어내는 사회적·정치적인 이슈만을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이슈를 만들어서 선점해야 한다. 사회적 이슈 앞에 언제나 진보신당이 앞장서야지만, 대중은 '진보신당' 이름 넉 자라도 기억해준다. 이런 노력은 전무한 채로, 우리의 "정체성"만 맨날 찾다가 맞이하는 것은 오로지 '진보신당의 예정된 멸망'뿐이다.

홍세화 선생이 <당 대표 출마의 변>이라는 아주 감동적인 글로 자신의 소회를 밝히긴 했지만,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벅찬 감동이 아니라, 냉철한 자기성찰과 대중 속으로 파고들기 위한 전략과 전술이다. 눈물로 뒤범벅된 벅찬 감동은 진보신당이 살아남은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내가 정말로 홍세화 선생의 글에서 아쉬운 점은 정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냉철함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한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반성문이 아니라 진보신당을 살릴 수 있는 현실에 대한 냉혹한 판단이다.

물론 홍세화 선생이 당 대표로 취임한 뒤에 진보신당의 생존을 위한 계책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출마의 변'은 그냥 '출마의 변'일 뿐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홍세화 선생이 새로운 당 대표가 된다면 다 죽어가는 진보신당은 다시 기사회생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잘 모르겠다"이다. 아직도, 진보신당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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